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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고조선,부여,발해 등 고대사토론방 < 외세 신진 세력의 이동과 낙랑군 평양설의 문제점>
역사님 추천 0 조회 343 09.11.29 21:28 댓글 1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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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12.02 20:46

    첫댓글 저도 이 의견에 찬성합니다 만약 최리가 낙랑국왕이 아니라 태수였으면 왜 호동이 혼인하려 했겠습니까?
    어차피 임기가 끝나면 갈텐데....
    사기에서는 항복한 4명에게 후를 봉했다고 하는데 그사람들이 후가 되었던 장소가 조선이라 봅니다만...

  • 09.12.03 09:22

    한사군 문제에 대해 아는 바가 적은 관계로 이 문제엔 그다지 참견(?)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해동성국님에게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글을 읽을 때에는 사람들이 어떤 주장을 하는지 읽은 뒤 이에 대해 코멘트를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동쪽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서쪽 이야기를 한다면 황당하지 않을까요? '최리가 낙랑국왕이 아닌 태수였으면 왜 호동이 혼인하려 했겠는가? 어짜피 임기가 끝나갈 텐데' 라는 말이 이 상황에서 적절한 질문일까요?

  • 09.12.03 09:32

    지금 위글에서 역사님이나 역사님과 견해를 달리하는 자들 모두 '최리가 낙랑국왕이 아니라 태수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역사님 글에는 '낙랑군 재평양설에서 최리의 낙랑국을 낙랑의 한 현으로 본다' 라고 하고 있으니 글을 정확히 읽으셨다면 재평양설에서는 최리를 (태수가 아니라) 현령으로 인식한다고 말씀하셔야 맞겠지요?) 역사님의 요지는 최리의 낙랑국에 대한 재평양설의 견해가 옳든 그르든 도시 성곽의 문제점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 09.12.03 09:32

    부연하자면, 낙랑군과 같은 변군체제에서는 태수, 현령 등을 매번 중앙정부에서 임명하기가 어려우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그 직위를 세습하는 예가 가끔 있습니다. 재평양설은 이런 부분을 지적한 것이고, 역사님도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라고 하고선 다음 논의로 넘어간 것인데 해동성국님이 갑자기 '역사님 의견에 찬동한다. 낙랑국과 같은 변군에서도 태수 등을 매번 중앙정부가 일일이 임명했음이 틀림없다' 라고 하시니 뭔가 맞지가 않지요.

  • 작성자 09.12.03 22:45

    사기에서는 항복한 4명에게 후를 봉했다고 하는데 그 사람들이 후가 되었던 장소가 조선이라 봅니다만... > 후로 봉하는 지역이 반드시 조선이라는 인식은 자제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위만 세력이 제거되고도 조선계 세력의 저항이 계속되다 결국 분란으로 왕검성이 함락 되는데 이들을 후로 봉하고 연고성이나 세력을 키울수 없는 타지역에 배치하여 결과적으로 이들 고조선계 세력을 단절 시킨 결과로 이어졌다는 주장은 수긍할수 있는 내용이니 주의할 점입니다

  • 작성자 09.12.03 18:58

    <제 글의 가장 큰 요점은 420여년이라는 동태적 시간에서 낙랑군 평양설 하에서 낙랑군은 한사군의 중심지였으며 이런 서북한 일대는 이미 청동기시대부터 상당한 인구수와 문명 수준에서도 불구하고 초기 고조선계 토성을 이용한다고 해도-십분 이해해도- 이후의 주변 세력이 성장 압박해 오는 다변적 상황에서도 당연히 따라야 하는 그들의 발전적 방어시설의 변화가 존재하지 않는 실체속에서 한사군 평양설이 가지는 견해는 인류사에서 도시 역사가 출현한 이후로 외세 세력이동에 따른 자연스러운 도시변화에서 상당한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09.12.03 20:31

    제가 또 실수했네요 죄송합니다.

  • 작성자 09.12.03 23:26

    님이 죄송하실거야.. 고대사 자체가 가설의 연속인데요.. 물론 일정 부분을 근거로 하지만. 특히 낙랑군 평양설처럼 연대상의 태반히 부족한 기록 상황에서 일제 이후 성립된 여러 선입견과 맞물려 말에서 말이 끊임없이 생산되는 상황이니.. 그래서 귀동냥 하나 더 하고 한번 더 보고 더 관심 가지는 양상의 차이일뿐.. <이런 것은 좀더 실체적인 접근과 전체그림으로 이해할수 있는 도시문명의 관점에서 접근이 그래서 더욱 필요하다고 보이군요>.삼국지와 삼국사기중 백제 초기기록이 어느 것이 신빙성 있느냐 일제 이후

  • 작성자 09.12.03 23:14

    성립되어 펴진 통설에서 정북동 토성이나 길성리 토성등이 나와도 설왕 설래 말들이 많았지만 풍납토성같은 도시유적이 발굴 연구가 가시화되면서 기존의 통설들에서 오류를 보게 되는 것이고요.. 도리어 님이 지적한 지역에서 실제 조선 관련 도시 유적들이 발굴된다면 님의 가설에 힘을 받겠죠.

  • 09.12.06 16:23

    그랬으면 좋겠네요...
    하여튼 감사합니다^^
    글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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