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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세 신진 세력의 이동과 낙랑군 평양설의 문제점>
한나라 시절 수도인 장안 즉 서안을 중심으로 한 중공대륙 국내를 내군으로 주변과 변방을 변군의 개념하에 이중적 지배구조로서 파악하고 현 서북한 일대를 한나라의 낙랑군 관할 구역으로 보면서 간접적 지배 방식하에 420여년간의 존속 기간의 정당정으로 이해하려는 움직임이 현재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앞서 여러 차례 말한 서북한 일대 고분의 유적과 유물 및 행정치소 토성등에서 그 당시 상당한 고조선계의 토착 재지세력의 색채가 농후한 일련의 연구 성과와 맞물려 좀 더 설득력있는 개념의 정당성으로 인정받고자 현재 자주 언급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럼 과연 간접적 지배방식이란 무엇이며 신진세력의 유입이 특히 외세적 세력의 유입이 과연 그 당시의 고대 도시 모습(성곽)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그것이 오늘날 어떤 자연스러운 실체적 흔적을 남겨야 하는지 거의 동시대에 간접적 지배 방식의 탁월한 속주지배방식으로 유럽과 주변지역을 아우르는 제국으로 성장한 로마와 우리 국내에서의 세력 확장등에서도 연계해서 좀더 실체적인 접근에서 고찰해보고자 합니다.
한나라 변군의 개념에 대해 부족의 장이나 현지 유력자들을 포섭하여 구슬리는 식의 간접지배가 바로 변군의 지배방식이며. 씨족, 부족을 몇개 묶어 특정 현이나 군에서 그 부족장들을 관할, 통제하는 형식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간접 지배 방식은 그리 특별한 형태가 아닙니다. 고금을 통해 제국화 되는 나라에게는 이런 간접적지배방식은 거의 일반적인 수순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일정한 왕국으로 성장하면서 주변 도시국가나 소국을 정복한 나라들이 이후 점차 주변 지역으로 세력을 넓혀 나가면서 공간적 거리의 확장에 따른 시간적 소요가 증대하는등, 점차 제국화 되는 과정에서 주변 세력들을 자신의 왕국처럼 맨투맨적인 직접적 지배의 방식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후 자연스럽게 자리잡는 방식으로 그리 특별한 개념이 아닙니다. 거의 동시대 지중해를 석권하며 왕국으로 성장한 로마가 점차 거대화 되면서 소수의 인원으로 다수의 현지인들을 지배하며 제국화 되듯이 그리고 원나라나 , 근대의 대영제국 ,현대의 미국 역시도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며 팍스 아메리카적 질서는 이런 간접 지배방식의 현대적 연장선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물론 일제가 35년간 조선을 식민 지배하는 방식 역시도 조선의 2천만에 달하는 인구를 일제 2천만이 직접 와서 다스린 형태가 전혀 아님은 상식이지요. 일제는 조선의 고종을 허수아비로 이완용같은 매국 친일 세력을 선두로 포섭하여 조정을 장악하고 이후 조선황제를 폐위시키고 매국세력들을 중요 행정, 경제,문학, 교육(역사)등 다방면에 꼭두각시로 내세우고 그들에 동조하는 세력하에 매국 조선인에 의한 조선인들을 통제하는 간접 지배방식을 구사했습니다.
물론 이런 간접 지배방식의 행정효율이 직접 지배방식처럼 불투명한 형태는 결코 아니지요. 도리어 각 지역의 유력세력들이 만들어 놓은 기존 행정, 지휘 인프라를 통해 시간과 인력을 단축할수 있는 상당히 효율적인 방식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런 간접지배방식은 그냥 이루어 지는게 결코 아닙니다.>
국내에서도 왕정의 폭압이나 부패에 따라 얼마든지 내부에서 반란이나 변란등이 일어나면서 왕조가 교체되는 상황이 발생하는데 외세 신진 세력들이 아무리 현지유력 인사를 잘 포섭한다고 해도 대화에는 한계가 분명 존재하는 것입니다. 특히 문화적 , 언어적 동질성이 떨어지고 주둔하는 시각 자체가 이미 다른 상황에서 차별과 가치관의 차이는 35년의 근대 일제 식민지 지배하의 짧은 기간에서도 수많은 사건이 일어나는 것과 같은 다변적 동태적 변수를 결코 고려하지 않을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간접지배 방식에는 그런 현지 세력을 포섭하는 포섭력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실질적인 무력 즉 군사력이 기반해야 -물론 이에 따른 경제,문화적 측면도 함께 따라옴- 하는 것은 과거나 근현대의 대영제국이나 현대의 미국를 봐도 충분히 이해될수 있는 내용입니다> 현재 G7에 속하는 러시아 역시 경제적 상황은 선진국 대열에 들지 못하지만 미국과 유일하게 맞먹는 군사력의 기반하에 현재 러시아 영토와 주변 지역을 견제 세력권화 하고 있는 점이나 러시아가 군사력 만큼은 어느 것보다 중요시 하는 이유 또한 그런 연유일 것입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로마의 제국화와 이에 따른 주변 지역의 도시모습의 변화에 대한 실체적 역사로 들어가 봅니다.
로마는 동지중해에서 세력을 넓혀 나가면서 꼭 필요 한 곳에만 식민시를 건설하고 나머지 지역은 자치시와 동맹시로 대리 통치를 하였습니다. 동맹시는 조약을 통해 로마와 관계를 맺은 도시국 가로서, 군사강국인 로마의 세력권 안에 포함되어 있었기에, 그들의 운명이 로마에 의해 좌우됐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서지중해의 카르타고와 전쟁을 치르면서 로마는 예상치못했던 새로운 상황에 직 면하게 된다. 본토 밖의 첫 정복지인 시칠리아는 그리스 식민도시들 과 카르타고 편 도시들이 어울려 있는 곳이라 문화와 전통이 본토 국가들과 다른 접근이 필요하게 됩니다.
동맹시 정책이 통하지 않으니 로마는 속주체제를 활용하게됩니다. 멀리 떨어진 속주를 다스리기 위해 군대 지휘권을 지닌 정무관을 총독으로 파견했고, 총독은 속주 내의 군대 지휘권과 재정 감독권, 로마시민이 관련된 재판사건 처리 외에 속주 공동체들 사이의 분쟁 중재권을 행사하게 됩니다. - 이건 마치 한나라가 낙랑군에 태수를 보내는 방식과 유사하며 변방일수로 태수의 권한이나 독단에 따른 다양한 양상이 전개 될수 있음도 짐작-
로마는 영토 확대에 따라 유럽의 중심에 섰고 로마를 둘러싼 이탈리아, 그리고 속주들로 나뉘는 구조가 자연스럽게 시대적 흐름에 따라 이루어지게 됩니다.
로마에서 가장 최변방중 하나는 현재 영국섬입니다- 당시 로마가 호칭한 브리타니아-
기원전 55년과 54년 두 차례에 걸쳐 로마 장군 시저로 불리는 카이사르의 공략을 받았으나, 당시에는 현재 프랑스지역인 갈리아의 켈트인을 브리턴인들이 지원해주자 갈리아의 지배를 공공히 하기 위해 방어적 성격의 일시적인 침공에 그치게 됩니다.
그 후 기원후 43년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 중남부 지역이 다시 로마군의 침공을 받아 로마의 속주가 되고, 1세기 말에는 스코틀랜드와 서부 지역이 로마에 정복되어 이 지역에 대한 로마의 지배권이 강력해지며 하드리아누스황제는 스코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100여키로에 이르는 거대한 성벽을 구축하였고 그 이후로는 더 이상 북쪽에 대한 정복을 시도하지는 않았으며 410년 로마군이 철수함으로써 이 지역은 앵글로와 색슨족의 무대가 됩니다.
A.D. 4세기 전반기에 들어서면서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제국의 변방을 지키는 주둔군들을 주로 현지의 지방민으로 대체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러한 조치가 그의 사후에 외곽 지역들을 약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여 결국 중앙정부의 잉글랜드에 대한 지배력이 약화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테오도시우스(Flavius Theodosius) 황제 이후 잉글랜드에 대한 로마의 통치도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집중적으로 로마가 영국에 남긴 오늘날 흔적들을 살펴보는게 지금 중요한 이야기 일 것입니다.
카이사르때는 갈리아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한 견제 차원으로 브리튼섬의 템스강 일부를 점령하고 이후 우호적 세력을 심는 정도 였습니다. 이후 43년경 로마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침략이 본격화 되면서 템스강에 인접한 지리적 요충지인 현재의 센트럴 런던에 자리잡은 로마인들은 적으로부터 도시를 완벽하게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성벽(Roman Wall)과 길(Roman Road)을 새롭게 만들어냅니다.. -남쪽의 템스강을 중심으로 요새를 구축하며 이는 런던뿐만이 아니라 로마인들인 점령했던 유럽 대부분의 도시들에서 동일하게 확인됩니다. 이게 론디니움’(Londinium)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으며 오늘날 런던으로 영국의 중심지가 됩니다..
<론디니움의 면적은 1.3㎢이며 > 실제 건물이 지어진 것은 그 중에서 일부에 불과합니다. 이곳의 고전적인 인구 추산은 무려 6만명입니다.
서북한 보다 문명수준이 극히 낮았고, 인구도 매우 작았던 변방의 영국에서 저런 규모의 성곽을 로마제국은 실제 쌓았습니다. 그리고 로마제국의 저 성벽 면적은 근대 초기까지도 런던의 도시 면적의 대부분을 차지했을 정도로 영국에서는 매우 큰 성곽입니다.- 고대 도시에서 동양과 서양은 인프라의 규모부터 다른 세계입니다. 로마라는 대도시는 이미 중공에서는 상나라와 춘추전국시대를 가며 비슷한 크기나 그 이상의 크기들이 패웅들의 도시에는 기본적으로 한개 이상씩 존재했을 만큼 중공 대륙의 도시축조의 인프라 역량은 서구와는 다른 차원에 있습니다.-
근대 초기의 영국과 로마제국 이전 영국의 문화수준은 엄청난 차이입니다. 중공보다 더 작은 규모의 도시성곽의 역량을 가진 로마가 서북한 보다 더 뒤떨어진 인구규모와 문명수준의 최변방지역의 영국 섬나라에서도 서북한 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성곽을 만들어 냅니다.
- 낙랑토성이라 불리는 평양 토성동 토성은 0.12㎢입니다. 그리고 한나라식의 장방형도 아니며 평지성도 아닌 평산성입니다. 구릉지대가 있기 때문에 지도상으론 0.31km가 맞지만 원추형의 입체로 실제 가용면적은 0.1㎢미만으로 최대치가 1500명 정도의 수용 공간입니다.이것도 북한 일대에 발견되는 한사군 시절의 당시 토성들 중에서 가장 큰 규모에 해당하는 것이 이정도 크기입니다.-
서기 60년 부디카라 불리는 이케니족 여왕의 공격으로 론디니움이 불에 타고 약탈되자 로마군은 그 뒤 150m 길이의 바실리카(고대 로마에서 재판정이나 예배장소로 쓰던 회당)까지 갖춘 도시로 더 크고 화려하게 재건됩니다.. 이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로마는 크리플게이트 요새를 건설하며. 이런 번영은 2세기 중반까지 계속되며. 서기 150년 로마군은 수공업 공방들과 주거지를 철거했으며, 200년에는 방어 목적을 위해 육지쪽을 향해 방벽까지 세웁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맨체스터의 체스터는 로마 군단 즉 병영지를 나타내는 라틴어의 성곽, 이른바 Castra에서 유래한 로마 군대의 준둔지를 이르는 말입니다.. 당연히 이런 곳에는 로마의 성곽과 도로등이 발견됩니다. 영국에는 랭커스터(Lancaster) ·맨체스터(Manchester) ·윈체스터(Winchester) ·체스터(Chester) ·레스터(Leicester) ·글로스터(Gloucester) ·우스터(Worcester) 등
체스터가 붙어진 지명들이 상당합니다.
체스터의 로마유적
http://blog.daum.net/_blog/BlogView.do?blogid=0PwLE&articleno=82&categoryId=
이곳 체스터에는 지금도 전체 둘레 3KM의 도시의 로마성벽이 아직도 건재히 남아 있으며 4개의 주요도로가 직각으로 교차하며 뻗어 있는 중앙지역의 도로계획은 로마 시대의 것입니다.
맨체스터 요크 성벽
'로마시대에 방어를 위해 처음 세워졌으며 당시에는 2km 길이의 정사각형 로마 성벽이 남아 있습니다.
http://www.encyber.com/travelworld/theme.php?codestr=10040206_2_8_3_0_1
하여튼 이후 이번에 발견된 낙랑군 목간 기록에서 기원전 45년 낙랑군 내 25개 현의 현별 호구와 인구, 전체 인구 28만여 명으로 목간통계를 보면, 낙랑군의 핵심부인 조선현의 호구 수가 근 1만 호에 이르는 등 직할지 11개 현의 인구가 17만9천여 명, 남부도위 대방현 이하 7개 현이 5만1167명 등, 모두 4만5956호에 28만여 명이 낙랑군에 살았던 것으로 파악되며 또 목간은 전체 인구의 14%인 4만 명을 한족, 86%는 토착민으로 분류해 꽤 많은 한나라사람들이 거주하며 한나라인과 토착인들이 구분된 상태임을 알수 있습니다.
현재 낙랑군이 위만 조선을 멸한 기원전 108년 부터 기원후 313년간 420여년간을 한나라의 엄연한 행정 군으로 지배한 낙랑군의 행정치소라고 주장하는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고대 도시(토성)의 흔적을 살펴 보겠습니다.
평남 온천군 성현리 토성, 황해도 은율군 운성리 토성(너비 8미터 깊이 1.4미터 해자), 신천군 청산리 토성(황해도 신천군동서490미터 남북200미터 ), 봉산군 지탑리 토성- 낙랑군 토성과 비슷한 크기로 대방군 치소로 추정 동서 700미터 남북600미터 -, 함남 금야군 소라리 토성(함남 영흥군 동서290미터 남북 170미터) 등이 군이나 현의 치소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낙랑군의 치소로 생각되는 평양의 토성동 토성은 동서 700미터 남북 600미터의 평산성에 장방형의 한나라식 토성이 아니며 실제 가용면적은 0.1㎢미만으로 최대치가 1500명 정도의 수용 공간입니다.이것도 여러 토성중에서 제일 큰 규모의 토성크기입니다.
앞서도 몇번 언급했지만 평양이라는 도시의 중요성 때문에 북한은 발굴 연구 인프라가 부족하면서도 일제시대 일제의 70여기에 비해 3000천여기의 고분 발굴등 상당한 데이타를 축적했습니다.
<만약 한나라식 토성이 존재했다면 서북한 일대에는 우리나라의 산성이나 지리적 특성을 이용한 성곽형태에 비해 인위적형태에 성격적인 차이가 나는 한나라식 토성은 쉽게 발견될수 있는 구조입니다.>
여기에 평양 일대는 한나라의 변방이며 변군적 지배하에 있기에 토착 세력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기존의 고조선계 토성을 이용하여 현들을 중심으로 현재 낙랑군 목간 관련 4만명의 한나라인들 -전병력이나 혹은 병력및 한인 백성들-분산 배치되었다는 식의 가설의 목소리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상당한 문제점이 존재합니다.>
초기 고조선의 토착 토성들을 최대한 활용했다는 것은 나름 수긍이 갈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기원전 108년 부터 기원후 313년동의 420여년간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닙니다. 외지 지역에서의 외세세력이 수십년동안에도 상당한 변수에 아무리 현지 유력 세력을 무마하고 포섭을 했다고 해도 엄연히 이곳은 한나라의 태수를 관리로 보내어 유력인들을 감찰 견제하며 현재토착인과 한나라인 간에 지배 구분과 차별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후한시기에 오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광무제가 기원후 30년경에 군대를 파견하는 사건도 나옵니다. 물론 이것은 기원전 108년 멸망이후 광무제의 반란 소식 기간의 문헌상의 기록이외에도 상당히 많은 사건들이 존재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이후 고구려와 백제의 성장이라는 것입니다.
우선 삼국지에 근거하여 기존 남부의 3세기 까지도 소국의 난립정도로 보았고 백제는 이후 고이왕(: 234년~286년) 시절인 3세기에 가서야 왕국으로 기반을 다져 마한을 통합하며 경기도 일대를 막벗어 났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풍납토성등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의 신빙성이 높아지면서 삼국사기를 보면 백제는 이미 초기 온조왕시기에 마한을 정복하고 대두산성까지 쌓아 버림으로서 경기도 일대를 정벌하며 크게 세력이 확장됩니다.
<온조 27년(기원후 8년) 여름 4월, 원산과 금현 두 성이 항복하였다. 그곳의 백성들을 한산 북쪽으로 이주시켰다. 마한이 마침내 멸망하였다. 가을 7월, 대두산성을 쌓았다.>
이미 앞서 온조 8년 낙랑 영역으로 백제가 마수성을 쌓고 병산에 목책을 쌓으면서 파고 들어오자 불쾌감을 느끼며 낙랑과 백제 사이에 우호가 단절되어 버리는 상황이 발생하며서 충돌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삼국사기 북으로 말갈 동으로 낙랑이라 위치 기록
그리고 고구려는 대무신왕 시기 이미 기존의 강자였던 부여를 (유리왕 14년 11월 부여 대소가 5만의 병력을 동원해서 고구려를 치려하다 큰눈의 기상악화로 돌아감) 위협하며 부여를 정벌하러 출정까지 갈 정도로 세력이 크지고 나아가 기원후 22년 부여를 공격하여 대소를 죽여버리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후 대무신왕 20년 기원후 37년 최리의 낙랑국을 멸망시켜 버립니다.
<고구려 아래 최리의 낙랑국이 존재했음은 사실로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사군 평양설의 지지자들은 이 최리는 낙랑군의 한 현이며- 이로 인해 낙랑군의 동부도위 즉 함흥 강원도 일대가 고구려 수중에 들어가 폐지 혹은 약화- 변군적 간접 지배에는 이런 이원적 토착 세력의 왕을 인정하는 방식도 존재할수 있기에 가능하다는 설명으로 이야기 합니다>
이 가설을 십분 따른다고 해도 도시 성곽에서는 중요한 문제점을 인식할수 있어야 합니다.
성곽이라 무엇입니까? 왜 인류사에 도시라는 문명적 개념이 생겨나면서 성곽이 등장하고 근대 이전까지 왜 발달해 왔을까요? 동서양의 성곽의 축조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한가지 사실은 분명합니다. 바로 인간의 생존본능이라는 가장 기초적이며 매우 중요한 욕구에서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농경등 정착 위주의 생활인들에게 이 성곽은 가장 직접적이고 효율적인 방어 수단입니다.
앞서 로마의 경우에서도 그러하듯 영국의 론디니움이라는 전초 기지를 서북한 보다 부족한 인력과 문명수준에서 상당한 크기를 만들어 내고 이후 60년 부디카라 불리는 이케니족 여왕의 공격으로 론디니움이 불에 타버리자 다시 더욱 강화 확장됩니다. 그리고 스코트족을 정복하려 북진하다 병력이 감소하면서 그들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100킬로 이상이 되는 거대한 성벽을 만들어 냅니다.
한서 지리지의 40만6749명 이던 낙랑군 인구가 후한서 군국지에서 25만7050명로 후한시기에 오면 인구가 감소하는 모습이 현격하게 나오는데 이는 동부도위나 남부도위의 현에서 있던 고조선계 세력들이 떨어져 나갔다는 식의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비단 아 많이 약화되었구나 정도로 생각하는 수준을 넘어 결국
낙랑목간처럼 기원전 45년경의 통계치에서 4만에 달하는 한나라 인구와 낙랑군을 통솔하던 낙랑태수는 낙랑군의 제법 세력이 컸던 동부도위의 최리 낙랑국- 자명고등 일련의 고구려가 사전 작업을 볼때 낙랑국은 도시형 소국은 아닐것으로 보임-의 멸망이나 백제가 온조왕 초기부터 마찰을 보이고 마한을 통합하며 경기도 일대를 넘어서려는 모습을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요?
당연히 이런 주변의 상황에서 그리고 평양이라는 지리적 핸디캡에서- 요동에서도 강성해진 고구려로 쉽게 올수도 산둥을 통해 수륙으로 오는 것도 그렇게 쉬운 일들이 아님- 마냥 넋놓고 보고만 있을까요??
<당연히 기존 고조선계 소규모 토성에 대해 더 큰 성곽의 필요성은 매우 자연스러운 결과로 이어질것입니다.이것은 인간의 당연한 생존 본능의 위기 의식이며 어느 정도의 규모의 성곽을 만들어 힘을 결집시킴으로서 이후 본토의 원군이 올때까지 기다릴수 있는 시간적 여력도 함께 얻을수 있을 것입니다.>- 660년 백제가 멸망한 직후 당나라 , 신라의 공격에 대한 위협때문에 바다 건너 왜에서는 조선식산성이 열심히 축조되었습니다.바다 건너에서도 위협을 느끼고 방어하려는게 인간의 생존본능입니다.
<고구려에서처럼 둘레만 16㎞에 달하며 10만이 거주할수 있는 오골성등의 등장처럼 -요동반도 동남부의 교통 중심지로 서쪽으로는 낭낭산성를 비롯한 수암의 여러 성을 거쳐 안시성에 이르고, 서북쪽으로는 백암성을 지나 요동성과 접하고 있다. 동쪽은 압록강 물길을 따라 ‘박작성’을 지나 중 상류에 있는 고구려의 내지로 직통할 수 있는 요충지이다- 주변 소규모 현들을 지원할수 있는 더 큰 규모의 성곽이나 주변의 소규모 현성들이 그 이상의 규모의 대군들이 쳐들어왔을 경우 각개 격파되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주변 현성들의 병력들이 집결하여 효율적으로 싸울수 있는 중, 대성 성곽들이 필요할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흐름일 것입니다.>
북한에서 막쌓기공법이라고 불리는데 후대의 판축공법과 대비되는 것으로
초기 형태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는 토성이 팽이형토기시대(무문토기)에 존재했습니다.
또 하나, 이들 토성이 있는 청동기시대 전기의 평양은 또 다른 특이사항이 있는데
취락밀집지역이라는 것입니다. 평양 주변의 대동성 유적은 이런 토성 이외에도 1만4000여기의 고인돌을 비롯해서 30개가 넘는 취락 유적들이 분포되어 있습니다.
이들 취락 유적 중에서 표대 유적의 경우 60만제곱미터의 크기가 존재합니다.
<로마가 서북한에 비해 문명이나 인구수에서도 낮은 영국섬나라에서 400여년간을 지배할수 있었던 배경에는 현대에 그만한 타당한 근거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도리어 서북한 보다 더 크고 더 많은 도시와 성곽을 만들어 내며 스코트족의 남하를 막기 위해 100키로 이상의 하드리아누스성벽을 축조합니다.
서북한은 한나라의 위만 조선 정벌이전부터 영국섬나라보다 청동기시대 이미 상당한 인구밀집과 여러 소규모 토성등 문명적 정치적 수준이 높았던 곳입니다. 그리고 이후 고구려와 백제은 기원전후로 급격한 성장을 하며 고구려는 현재 한사군 평양설의 지지자들이 말하는 동부도위를 멸망시켜 버리고 백제는 마한을 복속하며 이전부터 낙랑 일대로 파고 들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가장 크다는 규모의 1500명 수준의 토성등을 기존 토성으로 초기부터 이후까지 계속해서 사용하면서 420여년간을 한나라의 엄연한 군으로 태수가 파견되고 현지 유력 인사들을 간접지배했다는 식의 논리는 인류의 고대 도시라는 역사가 생겨나고 이런 모순된 실제와 견해가 혼재하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4만명의 한나라 세력이 마냥 다수가 병력이라며 그들이 주변의 압박에 대해 더욱 역량과 힘을 결집시킬수 있는 더 큰 규모의 요새가 필요하거나 아니면 일반 한나라 백성이라면 낙랑군 행정치소의 일정 부락에 밀집해서 살기에 한나라식 성곽- 평지에 행정치소와 주거민이 함께 하는 도시성곽형태- 역시 필요합니다.
평양 일대의 문명수준이나 인구수로서 10만명 수용의 한나라식 도시성곽이 420년 사이에 출연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현상이 아닌 매우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그외 중,대형 형태의 전략 방어적 성곽들이- 풍납토성은 이미 기원전후로 1만명이상을 수용할수 있는 크기. 백제의 길성리 토성은 기원후 1-3세기 사이의 초기 토성으로 추정 낙랑토성의 2배에 이름- 다수 존재하는 것도 결코 이상하지 않습니다.
<왜 앞서도 말한 평양일대에 낙랑치소로 말하는 토성들의 규모가 너무도 왜소하며 왜 이런 크기가 유물이나 기타 보다 더욱 중요한 이유인지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낙랑군 평양설의 주장하에 간접지배이던 무엇이던 엄연히 한나라의 낙랑태수가 파견되고 이들은 기존의 재지왕과 유력세력들을 그들의 아래에서 통제하고자 했던 역사입니다.그리고 기원전에 이미 4만명의 한나라인들이 거주했습니다.
신진 외세 세력이 이동하여 수백년을 거주했다면 당연히 그들식 성곽이라는 분명한 흔적이 오늘날까지 존재해야 합니다.그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가 길어지니 2편으로 나누어 2편에서는 왕검성의 위치와 오늘날 왕검성과 낙랑군으로 분리해서 볼때에 짚어봐야 할 점과 군과 왕국이 혼재하는 이중적 지배구조에서 살펴보아야 할 점 및 더불어 평양 일대를 중계무역소로 보는 견해등에 대해 다시 짚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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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도 이 의견에 찬성합니다 만약 최리가 낙랑국왕이 아니라 태수였으면 왜 호동이 혼인하려 했겠습니까?
어차피 임기가 끝나면 갈텐데....
사기에서는 항복한 4명에게 후를 봉했다고 하는데 그사람들이 후가 되었던 장소가 조선이라 봅니다만...
한사군 문제에 대해 아는 바가 적은 관계로 이 문제엔 그다지 참견(?)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해동성국님에게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글을 읽을 때에는 사람들이 어떤 주장을 하는지 읽은 뒤 이에 대해 코멘트를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동쪽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서쪽 이야기를 한다면 황당하지 않을까요? '최리가 낙랑국왕이 아닌 태수였으면 왜 호동이 혼인하려 했겠는가? 어짜피 임기가 끝나갈 텐데' 라는 말이 이 상황에서 적절한 질문일까요?
지금 위글에서 역사님이나 역사님과 견해를 달리하는 자들 모두 '최리가 낙랑국왕이 아니라 태수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역사님 글에는 '낙랑군 재평양설에서 최리의 낙랑국을 낙랑의 한 현으로 본다' 라고 하고 있으니 글을 정확히 읽으셨다면 재평양설에서는 최리를 (태수가 아니라) 현령으로 인식한다고 말씀하셔야 맞겠지요?) 역사님의 요지는 최리의 낙랑국에 대한 재평양설의 견해가 옳든 그르든 도시 성곽의 문제점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부연하자면, 낙랑군과 같은 변군체제에서는 태수, 현령 등을 매번 중앙정부에서 임명하기가 어려우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그 직위를 세습하는 예가 가끔 있습니다. 재평양설은 이런 부분을 지적한 것이고, 역사님도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라고 하고선 다음 논의로 넘어간 것인데 해동성국님이 갑자기 '역사님 의견에 찬동한다. 낙랑국과 같은 변군에서도 태수 등을 매번 중앙정부가 일일이 임명했음이 틀림없다' 라고 하시니 뭔가 맞지가 않지요.
사기에서는 항복한 4명에게 후를 봉했다고 하는데 그 사람들이 후가 되었던 장소가 조선이라 봅니다만... > 후로 봉하는 지역이 반드시 조선이라는 인식은 자제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위만 세력이 제거되고도 조선계 세력의 저항이 계속되다 결국 분란으로 왕검성이 함락 되는데 이들을 후로 봉하고 연고성이나 세력을 키울수 없는 타지역에 배치하여 결과적으로 이들 고조선계 세력을 단절 시킨 결과로 이어졌다는 주장은 수긍할수 있는 내용이니 주의할 점입니다
<제 글의 가장 큰 요점은 420여년이라는 동태적 시간에서 낙랑군 평양설 하에서 낙랑군은 한사군의 중심지였으며 이런 서북한 일대는 이미 청동기시대부터 상당한 인구수와 문명 수준에서도 불구하고 초기 고조선계 토성을 이용한다고 해도-십분 이해해도- 이후의 주변 세력이 성장 압박해 오는 다변적 상황에서도 당연히 따라야 하는 그들의 발전적 방어시설의 변화가 존재하지 않는 실체속에서 한사군 평양설이 가지는 견해는 인류사에서 도시 역사가 출현한 이후로 외세 세력이동에 따른 자연스러운 도시변화에서 상당한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또 실수했네요 죄송합니다.
님이 죄송하실거야.. 고대사 자체가 가설의 연속인데요.. 물론 일정 부분을 근거로 하지만. 특히 낙랑군 평양설처럼 연대상의 태반히 부족한 기록 상황에서 일제 이후 성립된 여러 선입견과 맞물려 말에서 말이 끊임없이 생산되는 상황이니.. 그래서 귀동냥 하나 더 하고 한번 더 보고 더 관심 가지는 양상의 차이일뿐.. <이런 것은 좀더 실체적인 접근과 전체그림으로 이해할수 있는 도시문명의 관점에서 접근이 그래서 더욱 필요하다고 보이군요>.삼국지와 삼국사기중 백제 초기기록이 어느 것이 신빙성 있느냐 일제 이후
성립되어 펴진 통설에서 정북동 토성이나 길성리 토성등이 나와도 설왕 설래 말들이 많았지만 풍납토성같은 도시유적이 발굴 연구가 가시화되면서 기존의 통설들에서 오류를 보게 되는 것이고요.. 도리어 님이 지적한 지역에서 실제 조선 관련 도시 유적들이 발굴된다면 님의 가설에 힘을 받겠죠.
그랬으면 좋겠네요...
하여튼 감사합니다^^
글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