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692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3 : 경상도 영남 제일의 경치 진주
『세종실록지리지』에 “습속이 시서(詩書)를 숭상하고, 부유하고 화려함을 숭상한다”라고 하였고, 이인로는 『파한집』에서 “진양의 시내와 산의 훌륭한 경치가 영남에서 제일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진양을 평하기를 “진양은 동방의 육해(陸海)다. 수산과 토산으로서 해마다 나라에 공을 바치는 것이 영남 여러 주의 반이다”라고 하였을 만큼 물산이 풍부하였다.
하륜은 그가 지은 『봉명루기(鳳鳴樓記)』에서 “비봉산이 북쪽에서 멈췄고 망진산이 남쪽에서 읍한다. 긴 강이 그 사이에 흐르는데 동쪽과 서쪽 여러 산이 구불구불 사방을 둘렀다”라고 하였다. 진주의 진산인 비봉산은 진주시 상봉동과 계동에 걸쳐 있는 산으로 해발 130미터다.
진주의 진주성은 촉석성(矗石城)이라고도 불리며, 그 성에 촉석루가 있다. 촉석루의 이름을 두고 담암(淡菴) 백문보는 “강 가운데 뾰족뾰족한 돌이 있기 때문에 누각 이름을 촉석루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여지도서』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촉석루촉석루는 남원 광한루, 밀양 영남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알려져 있다. 촉석루는 진주성의 남장대(南將臺) 또는 장원루(壯元樓)라고도 불린다.
촉석루는 촉석성 안에 있다. 아래로 긴 강이 흐르고 강 위에 큰 바위가 말뚝을 포갠 듯이 우뚝 솟아 있는데, 그 위에 누각을 지었으므로 ‘촉석루’라고 하였다. 큰 평야가 멀리까지 펼쳐지고 강물은 잡아당기듯 띠를 두르고 흐르며 뭇 산봉우리들이 두 손을 마주잡고 절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깎아지른 듯한 암벽이 서남쪽을 두 동강 내고, 언덕의 대나무와 물가의 난초가 좌우로 그늘을 드리우며, 물새는 날갯짓하며 울고, 돛단배가 드나드니 참으로 으뜸가는 아름다운 경치다.
남원 광한루, 밀양 영남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알려진 촉석루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큰 규모이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 놓인 화반의 무늬가 아름답다. 촉석루에서 바라보는 남강의 운치도 빼어나지만 촉석루 건너에서 바라다보는 경치가 일품인 이 누각은 고려의 32대 임금인 우왕 3년에 쌓았고 일곱 차례의 중수를 거쳤는데, 현재 건물은 한국전쟁 당시 완전히 파괴되었던 것을 1959년에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한 것이다. 진주성의 남장대(南將臺) 또는 장원루(壯元樓)라고도 부르는 촉석루는 여러 형태로 쓰였던 누각이다. 전쟁 시에는 지휘 본부로 활용되었고, 평화로울 때는 과거 시험장으로도 쓰였다. 조위는 촉석루 아래를 흐르는 남강을 두고 「촉석강」이라는 시를 지었다.
진주성 © 유철상진주의 진주성은 촉석성(矗石城)이라고도 불리며, 그 성에 촉석루가 있다. 아래는 진주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촉석성문.
누각 아래에는 백 길의 맑은 강 거울 같은 물결 위 가로지르는 고운 배.
햇살은 모든 집에 드리운 발 그림자 흔들고 바람 따라 피리 소리가 십 리 밖을 들려오네.
절벽엔 아른아른 산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물결이 일렁거려 높다란 성을 움직이네.
가까운 속세의 길에 머리를 돌리나니, 가벼이 뜬 한 마리 갈매기 부러워라.
촉석루는 임진왜란 당시 3대 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성싸움의 현장이기도 하다. 진주성 1차 전투는 1592년 10월 5일부터 11일까지 7일에 걸쳐 전개되었다. 왜군은 진주성을 함락하고 전라도로 들어가기 위해 진주성을 공격해왔다. 경상우도 순찰사였던 김성일은 각지서 원군을 요청하였고, 진주목사 김시민은 진주성에서 적의 침입을 기다렸다. 곽재우, 정기룡 등을 비롯한 영남 의병들이 지원에 나섰고, 최경회 등이 거느린 전라도 의병 2천여 명도 합세한 이 싸움에서 김시민은 적탄에 맞아 장렬하게 산화하였으며, 곤양군수 이광악이 대신 작전을 지휘하여 수많은 적을 살상하고 무찔렀다.
진주성 2차 전투는 1593년 6월 20일부터 29일까지 10일에 걸쳐 계속되었다. 왜군은 지난번 패배를 설욕하고 명나라와의 강화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진주를 다시 공격해왔다. 도원수 김명원과 권율 등이 조정의 명령을 받아 의령에 도착하였으나 적의 기세에 눌려 후퇴하였다.
창의사(倡義使) 김천일과 경상우병사 최경회 그리고 충청병사 황진, 의병장 고종후, 사천현감 장윤 등이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성으로 들어갔다. 그때 군사는 수천 명에 지나지 않았고 일반 성민은 6만에서 7만 명에 이르렀다. 6월 19일 왜군이 진주성을 공격해왔다. 공방이 계속되던 중 6월 28일 큰비가 내리면서 성이 허물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때 황진이 적의 총에 맞아 전사하고, 남은 장수들이 성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중과부적이었다. 결국 김천일, 고종후, 최경회 등은 촉석루에서 남강의 푸른 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