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9일 (토) 촬영.
신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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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비었다.
눈꽃마을을 조성하여 잠시 동안 사람들이 넘처나긴 했지만.
고민없이 형식적으로 만든 시설로는 떠난 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으기란 쉽지 않다는 걸 알았을 뿐이다.
옛 추억을 더듬으며 신포시장으로 향했다.
시장에서 남루해져버린 튀김우동 집에서 우동 한 그릇을 비우고 거리를 헤메었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던 고려말 삼은 중의 한 사람인 길재의 시조가 생각날만큼.
40년 가까운 세월을 살았던 곳 임에도 낮설었다. 본듯한 얼굴은 없었다. 이방인같은 그림자가 외로워보였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찾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선광문화재단 미술관에서 박진이 작가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동양화임에도 동양화같지 않은 작품들도 있다. 작가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행복했다.
선광문화재단 미술관 전경.
분칠한 할머니같은 건물이 애잔해 보인다.
등대경양식.
쓸쓸하다.
그래도 이곳에 있어줘서 고맙다.
인천문화재단이라는 곳이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대한건축사협회 인천광역시 건축사회.
인천우체국 /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8호.
근대식 우편제도는 1884년 도입되었으나
실질적으로 시행된 것은 갑오개혁 이후 전국 각지에 우체사를 설치하면서였다.
인천우체사는 1895년 중구 경동에 있던 이운사 건물 안에 있다가 1898년 내동으로 이전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에 의해 통감부가 설치되자 일본 측 인천우편국에 흡수되었으며,
강제 병합된 후 조선총독부 소관이었다가 광복 후 인천우체국이 되었다. 1923년 완공된 건물은 당시에
유행하던 서양식과 일본식을 혼합한 절충주의 양식으로 화강암을 거칠게 다듬는 방식으로 처리하여
기단처럼 보이게 하고 그 위에 벽돌을 쌓아 올린 2층 건축물이다. 입구 양쪽에 큰 기둥을 세우고
주 출입구를 사거리에 면한 모서리에 두고 돌출시켰으며 직선형으로 처리하였다.
6,25 전쟁 당시 지붕의 일부가 파괴되어 부분 개수하였고, 현재 중동우체국으로 사용하고 있다. -안내문-
국일관이 있던 곳.
인천 제1부두 앞 철로.
인천세관 구 창고와 부속동.
이 건물은 인천항에서 관세 업무를 했던 인천해관의 부속 시설로 일제강점기에 지어졌다.
1911년에 지어진 붉은 벽돌 건물이며,
최근 수인선 공사를 하면서 본래의 자리에서 항구방향으로 40m 뒤쪽으로 떨어진 곳으로 옯겨 복원하였다.
창고를 옮긴 장소에는 1918년 경에 지어진 선박에 대한 관리 업무를 보던 구 선거계 사무실과 화물에 대한
관리업무를 보던 구 화물계 사무실이 같이 있다.
1883년 인천 개항으로 등장한 근대 관세 행정의 역사를 보여 주는 항만유산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 해관 - 조선 말기 개항 후에 창설된 관세 행정 기관으로서 오늘날의 세관에 해당함. -안내문내용-
화물계사무실.
김구선생이 이 곳 1부두 건설 시 노역을 했었다고 한다.
인천지하철 신포역사.
신포역사는 인천세관 구 창고의 모습처럼 지었다.
승강기.
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