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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암셋에서 르비딤까지
민 33:1-15
1 모세와 아론의 인도로 대오를 갖추어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자손들의 노정은 이러하니라
2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 노정을 따라 그들이 행진한 것을 기록하였으니 그들이 행진한 대로의 노정은 이러하니라
3 그들이 첫째 달 열다섯째 날에 라암셋을 떠났으니 곧 유월절 다음 날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모든 사람의 목전에서 큰 권능으로 나왔으니
4 애굽인은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 치신 그 모든 장자를 장사하는 때라 여호와께서 그들의 신들에게도 벌을 주셨더라
5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 숙곳에 진을 치고
6 숙곳을 떠나 광야 끝 에담에 진을 치고
7 에담을 떠나 바알스본 앞 비하히롯으로 돌아가서 믹돌 앞에 진을 치고
8 하히롯 앞을 떠나 광야를 바라보고 바다 가운데를 지나 에담 광야로 사흘 길을 가서 마라에 진을 치고
9 마라를 떠나 엘림에 이르니 엘림에는 샘물 열둘과 종려 칠십 그루가 있으므로 거기에 진을 치고
10 엘림을 떠나 홍해 가에 진을 치고
11 홍해 가를 떠나 신 광야에 진을 치고
12 신 광야를 떠나
13 돕가에 진을 치고 돕가를 떠나 알루스에 진을 치고
14 알루스를 떠나 르비딤에 진을 쳤는데 거기는 백성이 마실 물이 없었더라
15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진을 치고
민 33:1-15 / [애굽에서 모압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아론의 지휘를 받아 애굽에서 나와 각 부대를 편성하여 움직이면서 진을 쳤던 곳은 다음과 같다. 2) 모세는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이 진영을 쳤던 곳을 일일이 기록해 두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각 부대별로 진을 쳤다가 다시 거두어 떠났던 곳은 이러하다. 3)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난 것은 유월절 다음날인 정월 열닷샛날이었다. 이날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 사람들 앞에서 당당한 모습으로 라암셋을 떠났다. 4) 애굽 사람들은 그때 맏아들을 장사하고 있었다. 여호와께서는 애굽 사람들의 맏아들을 모두 죽이심으로써 애굽의 모든 신을 벌하신 것이다. 5) 이스라엘 백성은 라암셋을 출발하여 숙곳에 진을 쳤다. 6) 숙곳을 떠나 광야의 가장자리에 있는 에담에 진을 쳤다. 7) 에담을 출발하여 바알스본을 미주 바라보고 서 있는 비하히롯까지 되돌아가서 믹돌 근처에 진을 쳤다. 8) 하히롯을 출발하여 바다 한가운데를 지나 에담 광야까지 행군하였다. 그리고 에담 광야로 들어가 사흘 길쯤 가로질러 마라에 이르러 그곳에 진을 쳤다. 9) 마라를 출발하여 엘림에 이르렀다. 엘림에는 샘 열둘과 종려나무 70그루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곳에 진을 쳤다. 10) 엘림을 출발하여 홍해에 진을 쳤다. 11) 홍해를 출발하여 신 광야에 진을 쳤다. 12) 신 광야를 출발하여 13) 돕가에 진을 쳤다. 돕가를 출발하여 알루스에 진을 쳤다. 14) 알루스를 출발하여 르비딤에 진을 쳤다. 그런데 그곳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마실 물이 없었다. 15) 르비딤을 출발하여 시내 광야에 진쳤다.
본문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을 떠난 노정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는 노예에서 하나님의 군대로서 대오를 갖추어 출발하는 각별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모든 장자를 장사하는 때라(1-4) 하나님 군대의 행진입니다. 사백 년 가까이 노예 생활에 시달린 이스라엘이 명실공히 행군의 대오를 갖추고 애굽의 라암셋을 떠난 날은 바로 유월절 다음 날입니다. 애굽은 하나님께서 장자로부터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다 죽이셨으므로 그들이 큰 슬픔으로 장사지내는 와중에 있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큰 권능 아래 승리의 행진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특히 “여호와께서 그들의 신들에게도 벌을 주셨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애굽을 향한 재앙들은 바로 애굽인들이 섬기며 힘의 근원이었던 그들의 모든 신들과 바로에 대한 징벌이었음을 뜻합니다.
바다 가운데를 지나(5-8) 라암셋을 떠난 여정에서 숙곳, 에담, 그리고 바알스본 앞 비하히롯으로 돌아 믹돌 앞에 진을 쳤습니다. 그리고 “바다 가운데를 지나”라고 간단히 기록합니다. 잘 아는 사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을 보면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좌우로는 산이 가로막고 뒤로는 애굽의 모든 병거 군대가 추격해 올 때 이스라엘은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이했었습니다. 사방이 막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때에 모세는 잠잠히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보라 했습니다. 그리고 이전에도 없고 이후에 없을 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바다를 가르는 일, 그런 상태가 오래 유지되어서 장정만 육십만 명이 넘는 인구가 바다 가운데를 지나 행군했던 일이었습니다.
엘림에는 샘물 열둘과 종려 칠십 그루가 있으므로(9-15)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척박한 땅, 예측 불허의 땅, 물과 양식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쉽게 지날 수 없는 거대한 광야로 이끄셨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샘물 열둘과 종려 칠십 그루의 그늘이 있는 엘림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또다시 여호와 하나님은 광야쪽 홍해가, 신 광야, 돕가, 알루스, 르비딤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곳에서도 물이 없어 목마름에 죽음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역시 그들의 태도는 울부짖음과 원망을 반복했습니다.
적용: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과 출애굽이라는 구원과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는 기적 후에도 바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긴 광야의 여정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지 묵상하세요. 구원받은 당신의 인생 여정과도 비교해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잊을 수 없는 구원의 계획을 실행하셨습니다. 자신들을 억압하는 자로부터의 구원 그 구원을 이루기 위해 행하셨던 10가지의 재앙 가운데 사망의 사자로부터 건짐을 받은 사건은 계속해서 기억되어져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구원의 계획이 있었고 신앙인으로 살고 있는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음침한 골짜기에서 나를 건지시는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하신 일을 기억해야 합니다.
< 설 교 >
은혜를 회고함
민 33:1-56 / 이정원 목사(참사랑교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 온 과거를 돌이켜 볼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지난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우리가 받은 은혜를 새롭게 회상하며 감사하기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걸어 온 광야 40년의 노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은 불가사의입니다. 준비할 겨를도 없이 갑자기 애굽을 떠난 한 민족이 어떻게 40년의 광야 생활 끝에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요? 목적지는 차치하고라도 광야에서 40년 동안 살아남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입니다. 광야는 메마르고 거친 곳이며, 생활에 필요한 것을 전혀 얻을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백만 명 이상이나 되는 한 민족이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 40년 동안 살았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겠습니까? 이 문제에 대해서 그 누구도 해답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분석하고 계산해 봐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기에 대한 유일한 답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간 생존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지냈던 40년의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불순종, 그리고 광야의 모든 악조건들을 능가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우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광야 여정에 대한 개요
본문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지나왔던 광야의 노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지나 온 곳들은 출발지인 애굽의 라암셋에서 시내 광야까지 11곳, 시내 광야에서 가데스까지 21곳, 그리고 가데스에서 모압 평야까지의 9곳, 모두 41곳이었습니다.
광야의 여정을 이렇게 기록한 것은 그 지명들을 돌아보면서 그 때마다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과거를 회상함으로써 하나님께 받았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게 됩니다. 이 광야의 여정은 느리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진행되었으므로 최선의 진행이었습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나그네 길을 가고 있으나 하나님께서 그 은혜 가운데 우리를 가장 선하게 인도하십니다.
광야 40년
광야 여정을 기록한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때로부터 요단 동편 모압 평지에 이르기까지 40년 역사의 요약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기록을 통해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의 역사를 보아야 합니다. 본문을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볼 때 우리는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중요한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이 기록은 애굽의 라암셋에서 시작하여 가나안이 바라다 보이는 요단 건너 모압 평지에서 끝이 납니다. 그 시작이 종살이 하던 애굽이라는 매우 암울한 형편을 보여 준다면, 그 마지막은 가나안이라는 밝은 미래와 소망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중간 단계들은 수많은 곤경과 실패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무한한 은혜와 이적들로 아름답게 수놓아져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걸어가는 신앙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흥미롭게 보여 줍니다. 우리는 죄로부터 떠나 나왔으며, 이제 영광스런 천국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걸어가고 있는 나그네 길은 예측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거기에는 시련과 실패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출애굽
이스라엘의 여정은 애굽에서 나오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출애굽은 너무나도 위대하고 은혜로운 구원의 역사이므로 그 사건을 특별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의 인도로 대오를 갖추어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자손들의 노정은 이러하니라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 노정을 따라 그들이 행진한 것을 기록하였으니 그들이 행진한 대로의 노정은 이러하니라 그들이 첫째 달 열다섯째 날에 라암셋을 떠났으니 곧 유월절 다음 날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모든 사람의 목전에서 큰 권능으로 나왔으니 애굽인은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 치신 그 모든 장자를 장사하는 때라 여호와께서 그들의 신들에게도 벌을 주셨더라”(1-4절)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은 ‘모든 애굽 사람의 목전에서 큰 권능으로’ 나왔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이 애굽인들의 관용이나 그들과의 타협에 의한 비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을 치실 때, 애굽 왕 바로와 애굽 사람들만이 아니라 애굽의 신들에게도 벌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을 치실 때 애굽 사람들이 숭배하던 그 많은 신들은 애굽인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출애굽 사건의 감격을 반복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끊임없이 기억하며 감격하고 감사해야 함을 교훈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처럼 우리의 구원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크고 귀합니까? 구원받은 이후부터 우리는 광야의 여정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라와 엘림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은 성도의 세상살이를 비유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가는 동안 고통과 어려움도 많았으나 은혜와 위로도 많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마라와 엘림입니다. “하히롯 앞을 떠나 광야를 바라보고 바다 가운데를 지나 에담 광야로 사흘 길을 가서 마라에 진을 치고 마라를 떠나 엘림에 이르니 엘림에는 샘물 열둘과 종려 칠십 그루가 있으므로 거기에 진을 치고”(8-9절)
마라는 ‘쓰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서 거칠고 메마른 광야를 지나가다가 모처럼 물을 찾아 낸 곳이 바로 마라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의 물은 써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 때 만나는 고통스럽고 실망스러운 일들을 나타냅니다. 마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우성을 치며 원망할 때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그 물을 고치셔서 마실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마라를 떠난 이스라엘은 엘림에 와서 샘물 열둘과 칠십 주의 종려나무를 발견했습니다. 12는 열두 지파의 수이며, 70은 칠십 장로의 수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것을 예비해 주셨음을 나타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것을 보면서 엘림의 오아시스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예비해두신 은혜임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은 우리는 지금 광야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광야 여정에도 역시 고통과 위로가 함께 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는 고통스럽고 슬픈 일을 만나는가 하면, 기쁘고 즐거운 일을 만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일들을 만날 때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처신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르게 처신하는 것일까요?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교훈했습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7:14) 야고보 사도는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5:13)고 말했습니다. 형통할 때는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곤고한 일을 당할 때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그 문제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해야 합니다.
아론의 죽음(38-39절)
아론은 모세와 더불어 출애굽과 광야 여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광야의 여정을 기록하면서 특별히 아론의 죽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지 사십 년 째 오월 초하루에 제사장 아론이 여호와의 명령으로 호르산에 올라가 거기서 죽었으니 아론이 호르 산에서 죽던 때의 나이는 백이십삼 세였더라”(38-39절)
아론의 죽음은 모든 신자들의 죽음에 대한 샘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론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백성들의 성화를 못 이기고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므리바에서의 죄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호르산에 올라가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아론의 죽음은 패배와 저주가 아니라 승리와 축복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충성되게 쓰임 받은 종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죽음을 특별하게 취급하셨습니다. 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으나, 그보다 훨씬 영광스럽고 복된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오늘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우리에게 죽음은 더 이상 저주와 절망이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죽음은 이제 영생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사망을 이기셨으므로 사망은 더 이상 우리에게서 왕 노릇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믿음을 지키고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죽음도 아론처럼 복된 죽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하라!
이스라엘이 지나온 광야 여정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풀어주신 과거의 은혜를 가득히 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장차 가나안 정복에 대한 보증서와도 같았습니다. 여기까지 은혜로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앞으로 가나안 땅에도 넉넉히 들어가게 하실 것이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광야의 여정 다음에 이어지는 기사는 가나안 정복 전쟁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정복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주의해야 할 것과 그 땅의 분배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가나안 정복을 기정사실로 간주하고 기록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면 제비를 뽑아서 각 지파에게 땅을 분배해야 했습니다. 이 때 수가 많은 지파에게는 많은 땅을 주고, 수가 적은 지파에게는 적게 주도록 했습니다. “너희가 종족을 따라 그 땅을 제비 뽑아 나눌 것이니 수가 많으면 많은 기업을 주고 적으면 적은 기업을 주되 각기 제비 뽑은 대로 그 소유가 될 것인즉 너희 조상의 지파를 따라 기업을 받을 것이니라”(54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하신 공평을 잘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사회는 이렇게 처음부터 공평하고 평등한 사회였습니다. 그들은 능력과 공적에 따라 땅을 나눈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원리를 가르쳐 줍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후 초대 교회에는 모든 것을 유무상통하는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사회가 어떤 것인지를 말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함께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가장 강조된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가나안 민족들을 모두 몰아내고 그 땅의 우상을 모두 파괴해야 했습니다. “너희가 만일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가 남겨둔 자들이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 나는 그들에게 행하기로 생각한 것을 너희에게 행하리라”(55-56절) 하나님께서 이 일을 강조해서 명령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족속들의 죄에 오염되지 않고 거룩함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백성이 거룩함을 상실하면 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모두 몰아내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가나안에 정착한 후부터 사사시대와 왕정 초기까지 이방 민족들에게 시달림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방 족속들의 우상을 받아들임으로써 죄와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은 마침내 앗수르와 바벨론에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자신들의 삶 속에서 죄악을 몰아내지 않는다면, 죄악이 오히려 우리를 망하게 한다는 진리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40년 여정은 그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가득 찬 역사였습니다. 메마르고 거친 광야, 생존에 필요한 것을 전혀 얻을 수 없는 광야에서 그들은 40년이나 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주 하나님을 거역하고 범죄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진멸 당하지 않고 생존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광야의 여정을 지나오면서 많은 시험과 연단 끝에 당당하고 아름다운 하나님 백성들로 변화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은 한 마디로 ‘은총의 승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회상해 보는 우리의 과거에서도 동일하게 확인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살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승리하고 마침내 영광스런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걸어온 광야 인생길을 되돌아보면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뜨겁게 감사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미래를 위한 기억
민 33:1-2 / 이익환 목사
우리는 기억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좋았던 기억보다 아팠던 기억, 실수했던 기억이 더 오래 가는 것 같다. 나쁜 기억들은 우리가 원치 않은 순간에 우리 현재의 삶에 불쑥 찾아와 우리를 괴롭힌다. 그래서 우리는 아픈 기억들을 빨리 덮어버리거나 잊어버리고 싶어한다. 광야 40년의 시간을 끝내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평지 아벨싯딤에 다다른다. 이제 정말 가나안 바로 코 앞에 이르렀다. 하나님은 여기서 모세에게 광야 40년의 노정을 기록하게 하신다. 왜 한시라도 빨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시지, 과거의 여정을 기록하게 하셨을까? 기록은 기억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기억하기 원하셨다. 이 기억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오늘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라암셋을 떠나 여리고 맞은 편 모압평지에 이르기까지 40번 진을 친다. 광야 40년에 40번이니까 평균 1년에 한번 이사한 꼴이다. 애굽 라암셋에서 모압평지까지 걸어서 일주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 이유는 뭘까? 거기엔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 8:2-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광야는 하나님의 백성을 낮추시는 겸손 훈련의 기간이었다. 광야는 또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백성으로 만들기 위한 순종 훈련의 기간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광야의 시간을 지나면서 40년 만에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준비가 된 것이다.
이들이 어떤 노정을 지나왔는지 간략히 살펴보겠다. 먼저 이들은 모세의 인도로 라암셋을 떠나게 된다. 라암셋에서 그들은 애굽의 노예였다. 거기서 하나님과 상관 없는 삶, 애굽과 구별됨 없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유월절 다음 날 이 라암셋을 떠난다. 유월절을 기점으로 광야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유월절은 어린 양의 피를 통해 구원받은 날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속죄를 예표하는 사건이었다. 유월절이 있고 나서 출애굽이 시작된 것처럼 우리 인생의 출애굽도 우리가 예수님의 속죄의 피를 믿을 때 시작되는 것이다. 여러분은 죄의 노예로 살았던 라암셋을 떠났는가? 여러분의 인생에 대속의 피가 뿌려진 출애굽 사건이 있었는가?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다.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은 역사 없이 구원의 여정은 시작될 수 없기 때문이다.
250만 되는 민족이 애굽을 떠나는 것은 사실 대책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대책 없는 일을 믿음으로 저질렀을 때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손길이 나타난다. 출 13:20-21, “그들이 숙곳을 떠나서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큰 손길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을 경험했음에도 그들의 광야 여정은 불신으로 가득했다. 바로의 군대가 쫓아오자 그들은 곧 불신에 빠진다. 그들은 모세에게 대든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고 원망한다. 하나님은 이 불신으로 가득찬 백성들 앞에서 홍해를 가르시고 애굽 군대를 그 바다 가운데 엎으시며 큰 구원의 역사를 행하신다.
홍해를 건너고 사흘이 못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원망에 빠진다. 마라에서 마실 물이 없자 모세를 원망한 것이다. 그들은 신광야에서 애굽에서 먹던 고기 생각이 나자 또 원망한다. 하나님은 원망하는 백성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제공해주신다. 그러나 르비딤에 이르러 마실 물이 없자 그들은 또 다시 원망한다. 이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을 치게 하셔서 물을 공급해 주신다.
이스라엘이 시내산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신다. 그러나 백성들은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디자 그 새를 못참고 자신들을 인도할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스라엘은 삼천명이 죽임을 당한다. 그 후 이들은 가데스바네아에 이른다. 그들은 거기서 가나안 땅으로 정탐꾼을 보낸다. 그 정탐 이후 그들은 집단적 두려움과 원망에 빠진다. 계속되는 원망의 대가는 엄중했다. 불신의 세대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하나님의 선언이 있게 된 것이다. 이 후 호르마에서 그들은 고라의 반역으로 만 사천 칠백 명의 백성이 염병으로 죽게 된다. 싯딤에서는 모압 여자들과 음행에 빠지면서 이만 사천 명이 염병으로 죽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집단적 죽음이라는 트라우마를 광야에서 경험하게 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역사는 불신의 역사였고, 배역의 역사였다. 집단적 죽음을 경험한 고통의 역사였다. 모세는 그가 죽기 전 광야 1세대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노정을 기록해야 했다. 과거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돌아보는 것이 왜 필요했을까?
뇌과학자 한나 모니어는 “기억은 미래를 향한다”라는 책에서 “기억은 과거를 보존하는 능력이 아니라 미래를 계획하는 능력이다”라고 말한다. 즉 기억은 단순히 과거를 추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두고 있었던 미래는 무엇이었나? 그들의 미래는 광야가 아니라 가나안이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사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 정복 전쟁을 치르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이 지나온 노정을 열거하신 후에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민 33:51-53,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깨뜨리며 산당을 다 헐고 그 땅을 점령하여 거기 거주하라 내가 그 땅을 너희 소유로 너희에게 주었음이라”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까지 걸어온 노정이 끝이 아니었다. 그들에겐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사명이 있었다. 하나님은 지금 광야 2세대를 하나님이 준비하신 미래로 이끄시기 위해 그들의 과거를 돌아보고 정리하게 하신 것이다.
한나 모니어는 우리가 과거를 회상하는 과정을 통해 기억의 원래 버전이 아니라 변화된 버전을 저장하게 된다고 말한다. 우리가 기억할 내용들을 살펴보는 동안에 그 내용은 새로운 버전으로 다시 기록된다는 것이다. 모압평지에 살아남은 광야 2세대들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부모 세대의 아픈 역사를 기억해야 했다. 이들은 부모 세대의 반역과 불신, 그로 인한 죽음을 광야에서 지켜보았다. 이들은 염병으로 죽어가는 가족들을 바라보며 깊은 아픔과 상처를 받았다. 이들은 하나님이 택한 장자 민족으로 너무도 혹독한 대가를 치르며 광야 40년의 시간을 지나왔다. 그들이 지나온 노정마다 부끄럽고 아픈 기억들이 베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과정에서 자신들을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말 원하셨던 것이 무엇인지를 점차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광야에서 고통스럽고 아팠던 기억을 재평가하는 작업을 해야 했다. 그들에게 광야가 단순히 고통스럽고 아픈 시간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겸손히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빚어지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시간으로 기억되어야 했다. 그들이 거쳐갔던 광야의 노정을 회상하며 그들의 기억은 원래 버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버전으로 다시 저장되어야 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 못하고,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지 못한 채 맞이하는 가나안은 사실 의미가 없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나 원망을 간직한 채 가나안을 맞이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미래인 가나안을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들의 과거가 다루어져야 했던 것이다.
인생그래프를 그려본 적이 있다. 심하게 나락으로 떨어진 지점들이 있었다.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웠기에 그 당시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했던 지점들이었다. 상처로 남았던 과거였고 아프기만한 과거였다. 그러나 돌아보니 거기엔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 그 내려간 지점은 고통 속에서 다시 하나님을 찾는 시작점이 되었던 것이다. 교만했던 내가 다시 겸손히 하나님을 찾고, 불순종했던 내가 다시 순종하게 되는 전환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은혜였다.
신 9:6-7, “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 곳에 이르기까지 늘 여호와를 거역하였으되” 하나님은 우리가 괜찮은 사람이기 때문에 가나안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목이 곧은 자들이었다. 틈만 나면 불신과 원망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던 자들이었다. 우리가 살면서 고통 당하는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 아니다. 그 분이 우리를 축복해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고통 당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고통 당하는 이유는 우리의 목이 곧기 때문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곧은 목을 쳐서라도 가나안을 주시기 원하시는 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 빨리 교만을 회개하고 겸손히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축복된 미래를 맞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는 기억을 위한 시간이었다. 불신으로 사는 삶과 믿음으로 사는 삶의 차이를 그들은 광야에서 경험했다. 인생의 광야에서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따라 간 사람에게만 가나안은 의미 있는 곳이 되었다.하나님의 의도는 광야에서 하나님만 순종하는 백성을 만드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가나안 땅에서도 다른 신에게 절하지 않는 거룩한 백성을 만드는 것이었다.신 8:19,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광야의 노정에서 있었던 사실을 기억하는 자가 된다면 그 사람은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믿음으로 사는 자가 된다. 그래서 광야의 노정을 기억하는 것은 과거를 추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광야를 믿음의 눈으로 기억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풍요로운 가나안이 주어져도 그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중에 광야가 없는 인생은 없다. 우리 각자 인생의 광야에서 겪었던 고통과 아픔은 시퍼렇게 우리의 기억속에 살아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픔을 단순히 고통으로 기억해선 안된다. 반드시 믿음의 눈으로 그 고통스런 기억을 재구성해야 한다. 한나 모니어는 다른 기억은 재구성하는데 어려움이 없지만, 감정과 연결된 감정기억은 그게 힘들다고 한다. 그래서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자신을 개방하기 보다는 과거의 고통스런운 기억에 매이는 삶을 살게 된다고 말한다. 고통스러운 기억, 아픈 관계들,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떨쳐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좀처럼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광야의 노정 어느 지점에 여전히 자신의 인생이 머물러 있는 경우가 있다. 여러분은 어떤가? 과거의 기억이 여러분의 발목을 잡고 있지는 않는가? 가나안이 여러분의 눈 앞에 있는데 거기에서 머뭇거리고 있지 않는가? 미래를 위한 싸움을 준비하지 않고 과거와의 씨름에 머물러 있지는 않는가?
우리의 인생이 어느 지점에서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해도 그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그 고통과 상처를 뛰어넘을 수 있다. 예레미아 선지자는 포로로 끌려간 민족의 참담한 현실 속에서도 다음과 같이 애가를 불렀다. 애 3:19-24,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시다. 진노 중에라도 마침내 복을 주시려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다. 예레미야 선지자 역시 고통스런 기억을 재구성한다. 그는 그의 고초와 재난과 쑥과 담즙을 기억하고 처음엔 낙심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아픈 기억을 다시 꺼낸다. ‘내 마음에 두었다’는 것은 그것을 회상했다는 말이다. 과거의 기억을 꺼내보며 그는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히 무궁하다는 사실에 다시 소망을 갖는다. 주님의 성실하신 사랑에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여러분도 고초와 재난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신실하신 주님을 바라게 되길 축원한다. 우리가 이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면 과거 광야의 노정에서 있었던 우리의 상처는 치유될 수 있다. 고통스러운 기억은 고통에 머물지 않고 우리 미래를 향한 재료로 사용될 수 있다. 그리하여 과거에 매이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미래 가나안을 향하여 전진하는 삶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바라기는 과거 여러분이 지나왔던 광야의 노정을 믿음으로 재평가 할 수 있길 바란다. 그 광야에서 있었던 모든 아픈 기억들을 치유받는 은혜가 있길 바란다. 그리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가나안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자가 되길 바란다. 그곳에서 여러분이 싸워야 할 전쟁을 감당하는 자가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된 미래를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은혜를 지속시키는 길
민 33:1 / 이한규 목사
< 은혜가 넘치게 하라 >
인천에 가까운 사람의 죽음의 냄새를 잘 맡는 한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가족과 친지의 죽음의 순간을 미리 느낀 적이 많았다. 한번은 조카가 자기 방으로 “이모!” 하면서 들어오는데 그 조카의 뒤에 죽은 그 아이의 영이 선 것이 보였다. 그 후 그 아이는 3일 만에 교통사고로 죽었다. 또한 그녀의 남편이 죽기 얼마 전에도 죽음의 냄새가 강하게 느껴졌다.
죽음의 냄새를 맡는 신기한 능력을 받고 싶은가? 그런 능력에 대한 호기심은 영혼을 더 약화시킨다. 어떤 능력이 영혼을 병들게 만들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만들면 그 능력은 사실상 사탄의 능력이다. 누군가의 죽은 영이 미리 보이면 정상 생활이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이 알 필요가 없는 앞날은 절대 비밀로 두셨다.
사도행전 1장 7-8절에서 예수님이 명령하셨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어떤 일이 이뤄질 때와 시기는 하나님이 비밀로 감춰두셨기에 미래를 아는 데 관심을 두기보다 주님의 증인이 되는 데 관심을 두라는 말씀이다.
남의 죽은 영이 미리 보이는 능력은 영혼을 두렵게 만들기에 일반인은 오히려 그 능력이 사라지길 원할 것이다. 죽음을 막지도 못하면서 죽을 때를 미리 알면 얼마나 괴롭고 두려운 일인가? 그런 능력이 있기를 바라는 사람은 오직 그 능력을 이용해 돈을 벌거나 자신을 높이거나 남의 영혼을 속박하려는 사람일 것이다. 실제로 사이비 교주가 영혼을 속박하려고 내세우는 핵심 방법은 사람에게 두려움을 심는 것이다.
사이비 교주는 영혼을 미혹할 때 먼저 두려움을 심는 작업부터 한다. 두려움에 속박된 영혼은 조종이 쉬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름이 오싹 끼치게 만들려고 장소와 분위기와 얼굴 표정을 무섭게 만들고 끔직한 소리를 내고 기괴한 행동을 한다. 그렇게 영혼을 두렵게 만든 후에 “기도한다, 귀신을 쫓아낸다.”라고 하면서 자신을 의지하게 만든다. 반면에 선한 목자는 영혼을 두려움에서 해방시키고 은혜로 품어 주려고 애쓴다.
결국 사이비 교주를 분별하는 핵심 원리는 은혜를 앞세우고 은혜가 넘치느냐를 보면 된다. 성령충만의 핵심 증거도 은혜가 넘치는 것이다. 엄격하게 ‘옳다, 그르다’의 흑백 논리로 살면 갈등이 커지지만 은혜로 이해하면 갈등이 줄어든다. 은혜가 넘치면 지혜도 넘친다. 그처럼 은혜가 넘치는 지혜로운 사람을 만나면 큰 힘이 된다. 결국 지식이 넘치는 삶보다 은혜가 넘치는 삶이 더 영혼을 변화시키고 더 힘을 준다.
< 은혜를 지속시키는 길 >
사람에게 은혜만큼 필수적인 것은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사람은 한 시도 살 수 없다. 이제까지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내게 하나님의 은혜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특히 은혜를 받는 것보다 받은 은혜를 지속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은혜를 지속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은혜의 기록을 남기라
본문에는 모세와 아론의 인도로 대오를 갖추어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자손들의 노정이 기록되어 있다(1절). 출애굽 후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광야에서의 행진 노정을 상세히 기록했다(2절). 왜 하나님은 광야에서의 행진 노정을 상세히 기록하게 하셨는가? 그 기록을 통해 인간의 연약성과 하나님의 신실성을 후대에게 교훈해서 후대들이 가나안 땅에서 선민답게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라는 의미로 기록하게 하셨을 것이다. 그런 기록들이 나중에 성경이 되었다.
어떤 사람은 큰 문제를 만나면 용하다는 사람을 찾아 점을 치거나 기도를 부탁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용한 사람은 없다. 문제가 생기면 오직 하나님을 찾으라. 그리고 어떤 문제를 풀어 주면 어떤 헌신을 하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쉽게 약속하지 말라. 쉽게 약속했다가 문제가 풀린 후에 이전의 약속을 외면하고 자신의 시간과 소유와 재능을 드리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결국 최소한만 드리다가 점차 그 드리는 삶도 없어진다. 그러면 언젠가 다시 이전보다 더 큰 문제를 맞이할 수 있다.
누군가로부터 받은 은혜를 잊지 말라. 나의 삶은 은혜 없이는 한 시도 지탱될 수 없다. 사람으로부터 받은 은혜도 많다. 심지어는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받는 은혜도 많다. 그 은혜를 잊지 말고 나도 누군가에게 소리 없이 은혜를 베풀라.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잊지 말라. 하나님의 은혜는 대부분 소리 없이 주어진다. 그 은혜를 잊지 않도록 마음 판에 새기고 더 나아가 필요하다면 기록으로도 남기라.
사도 바울은 종종 자신의 서신서에서 신실한 동역자와 후원자의 실명까지 기록했다. 언젠가 나도 <성경전권강해>를 완성하면 서문이나 후기 등에 저의 문서 선교를 후원했던 신실한 후원자를 기록하고 싶다. 그중에 상당수는 소리 없이 헌신하다가 나보다 먼저 천국에 갔을 것이다. 그처럼 자신은 소리 없이 헌신해도 그 헌신을 지켜본 누군가는 감동 가운데 그 이름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 기록에 남기기도 한다. 사람의 은혜도 기록으로 남기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기록으로 남기려고 하라.
2.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라
이스라엘 자손은 1월 15일에 라암셋을 떠났다(3절). 출애굽 날은 유월절인 1월 14일 다음날이었는데 그날 애굽인은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 치신 그 모든 장자를 장사했다(4절). 즉 출애굽은 애굽인이 보는 데서 애굽의 모든 장자를 치신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뤄진 역사였다. 그 권능이 얼마나 놀라운지 애굽 신들에게도 벌을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기록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깨닫고 범사에 감사하며 살라는 교훈을 준다.
감사해야 더 감사거리가 주어진다. 다른 것은 다 잊어도 하나님의 은혜는 잊지 말고 범사에 감사하라. 하나님의 은혜는 삶의 곳곳에 미쳐 있다. 매일의 삶이 기적이고 감사의 조건이다. 나의 삶 자체에 대해서도 감사하고 힘들 때도 감사하라. 가진 것이 많아도 감사가 없으면 불행한 삶이고 가진 것이 적어도 범사에 감사하면 행복한 삶이다.
물질을 추구할 때도 사명감을 가지고 잘 쓰려고 추구하라. 인간적인 만족을 얻으려고 물질을 추구하면 결코 만족이 없다. 만족의 핵심 기준은 물질이 아니라 은혜를 깨닫고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물질에 소유되지 말고 물질을 소유하라. 즉 물질로 만족과 행복을 저울질하지 말고 물질을 좋은 일에 사용할 도구로 여기라. 그처럼 물질에 대한 가치관이 저하되지 않도록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삶을 훈련하라.
가끔 나의 딸들과 연락이 두절된 상태가 될 때가 있다. 그 시간이 길어지면 때로는 최악의 상황에 대한 염려가 생긴다. 그러면 기도한다. “하나님! 가족애가 너무 지나쳐도 안 되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가족을 하나님께 먼저 보내면 마음이 너무 아플 것 같습니다. 제가 먼저 하나님께 가는 은혜를 주시고 가족들은 안전하게 지켜 주소서.” 그런 기도를 드릴 때마다 언뜻 드는 생각은 살아있는 것 자체가 은혜라는 생각이다. 삶 자체에 대해 감사하라. 결국 범사에 감사하는 삶은 은혜를 예비하는 핵심 기초다.
3. 은혜를 앞세워 살아가라
모세가 기록한 출애굽 이후의 구체적인 여정은 본문 다음의 5-49절에 언급된다. 왜 모세는 출애굽 이후 40년의 이동 경로를 상세히 기록했는가? 후대들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생생하게 깨닫고 감사하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앞세워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도 승리하고 가나안에서 선민답게 살라는 교훈을 주려고 기록했을 것이다. 그처럼 모든 일에 인간적인 힘과 법과 질서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앞세워 살아가야 인생 전쟁에서도 승리하고 은혜도 지속시킬 수 있다.
한 국립공원 입구의 플래카드에 이런 글귀가 있었다. “쓰레기를 버리려는 마음을 버려주세요.” 그 말이 “쓰레기를 버리지 마시오.”라는 강요적인 글귀보다 더 효과가 좋았다. 어느 교회 예배당 입구에 붙인 “휴대폰을 잠시 꺼 놓으셔도 좋아요.”라는 글귀는 “핸드폰을 끄시오.”라는 글귀보다 더 반응이 좋았다. 율법보다 은혜가 사람을 더 움직이고 정죄보다 은혜가 사람에게 더 큰 변화를 일으킨다.
어떤 사람은 은혜보다 법을 내세워 남을 정죄한다. 그러면 언젠가 똑같이 법에 의해 자신도 정죄된다. 혹시 세상적인 법에 의한 심판을 피할 수 있어도 나중에 하나님의 추상같은 법에 의한 심판까지 피할 수는 없다. 그처럼 법과 공정을 내세워 남을 심하게 재단하면 언젠가 법과 공정에 의해 자신도 심하게 재단된다. 은혜를 앞세워 살라. 남에게 관대하지 않으면 나도 관대함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관대한 은혜도 얻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앞세워 은혜롭게 살면 앞날은 더욱 복된 날이 될 것이다.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며 은혜를 앞세워 살라. 그래서 나의 미래가 나의 과거보다 더욱 찬란한 날이 되게 하라. 하나님은 나를 통해 새로운 놀라운 일을 하려고 계획하시고 이전보다 더 놀라운 은혜를 주려고 준비하시고 있다. 하나님이 기적적인 하나님이란 표현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전례 없는 놀라운 은혜를 주실 수 있다는 뜻이다. 앞날의 은혜는 이전의 은혜보다 더욱 클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면 전례 없는 은혜의 때가 찾아오고 지금까지 불가능하다고 여기던 찬란한 꿈이 이뤄지는 기적적인 역사가 있을 것이다.
감사할 이유 있네
민 33:1-49 / 한대근 목사
감사절의 주제를 “감사할 이유 있네”로 정한 것은 어려운 중에도 우리 자신이 은혜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함입니다. 본래 감사(thank)라는 단어는 생각한다(think)는 단어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감사란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 어렵고 고통스러운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힘겹고 어려운 일들로만 채워져 있는 것 같을 때에도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은혜를 베풀고 계십니다. 그 은혜를 기억하면서 세어보면 감사할 이유는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민수기 33장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로부터 시작하여 요단에 이르기까지 걸어 온 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올 때만해도 그들의 앞에는 좋은 일만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가득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40년간의 광야 생활이었습니다. 평탄한 길이 아니라 모래바람과 전갈과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어 내야 하는 모질고 힘겨운 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40년이 지난 지금 멀고 험한 길을 걸어 가나안 바로 앞 요단에서 바라보는 그 길은 오히려 은혜의 시간들이었습니다. 비록 광야의 삶이 고달프고 힘들었지만 생각해보면 그들이 지나온 모든 발걸음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흐르고 있었습니다(장자보호, 홍해의 기적, 마라의 축복, 엘림의 샘물, 반석의 물, 불기둥 구름기둥, 만나와 메추라기, 대적으로부터의 보호, 시내산 율법, 성막 등).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역사적인 사건이 있을 때마다, 예를 들어서 국가적인 위기를 만났을 때, 또는 전쟁을 앞두고 있을 때, 그래서 신앙의 부흥을 위한 결단이 필요할 때에는 반드시 옛적 자신들의 조상, 아브라함 때로부터 지금까지의 전 과정을 돌아보는 과정을 밟았습니다. 이것을 통해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믿음을 결단을 하고 감사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바로 그 때마다 새롭게 하시고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여호수아 12장, 느헤미야 9장).
지금 이 나라는 위기의 때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위기가 새로운 기회가 되게 하려면, 과거 이 민족 가운데 역사하셨고, 축복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여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믿음을 결단하여야 합니다. 복음이 들어오기 전 이 나라의 역사는 말 그대로 질곡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120년 전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옴으로부터 이 민족에 서광이 비치게 되었습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빼앗긴 민족을 구했고, 폐허가 된 민족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돌아 보건데 오늘 이 축복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베푸신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풍요의 축복에 도취되어 살 때가 아니라 그 은혜를 더욱 새롭게 회복하고 감사해야 할 때인 것입니다.
우리 개인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인생의 발자취를 돌아보십시오. 걸어온 인생의 발걸음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묻어 있습니다. 그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하나 세어서 고백해보십시오. 그 고백 속에서 하나님의 기적들을 날마다 체험하고 살아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광야 노정을 기억하라
민수기 33:1-4 / 피영민 목사
사람이 늙어가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 중 하나는 기억력이 감퇴하는 것입니다. 성경구절도 그렇고 영단어도 그렇고 사람 이름도 그렇고 갑자기 생각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의 기억력이 감퇴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다가 치매에 걸린 분들을 찾아 심방을 다녀보면 알아보지도 못하는 분들이 허다합니다. 이렇듯 사람의 기억력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육적인 삶에도 반드시 필요하고, 영적인 삶에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생각하고 기억하라’는 명령이 아주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희 교회 카페 이름도 ‘T&R’(Think and Remember)이지 않습니까? 베드로후서 3장의 생각하고 기억하라는 명령을 따라 지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하고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행하셨는지, 또 어떤 명령을 내리셨는지를 생각하고 늘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억하는 일은 성도의 영적인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가 40년 간 광야 생활하며 이동한 노정을 전부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총 42개의 지명이 등장합니다. 모세는 그것을 잊지 않고 다 기록하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모세가 기록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민수기 33장 2절에 “모세가 여호와의 명대로 그 노정을 따라 그 진행한 것을 기록하였으니 그 진행한 대로 그 노정은 이러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기록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42개 지명을 포함, 광야의 전 노정을 빠짐없이 기록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12장 37절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당시 출발점이 라암셋이라는 곳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민수기 22장 1절에 도달한 곳이 바로 모압 평지였습니다. 라암셋에서 발행하여 모압 평지에 이르기까지 40년 동안 모든 노정을 민수기 33장에 다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나 민수기에서 언급된 사건에 따른 지명은 총 17개 밖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나머지 25개 지명은 딱히 어떤 사건이 언급되지 않았음에도 지명만 기록해 둔 것입니다. 이처럼 민수기 33장에 기록된 광야 노정은 성경에 언급된 사건이 있었던 지명뿐만 아니라 아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지명까지 전부 기록해 놓은 가장 완벽하고 포괄적인 광야 노정에 대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수기 33장에 기록된 40년 동안의 광야 노정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3~15절은 라암셋에서 시내광야까지의 여정을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총 3개월간의 이동경로입니다. 12개의 지명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 광야에 도착해서 약 10개월 동안 이 곳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인 3~15절에는 각 지명에서 일어난 간단한 사건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둘째, 16~36절까지입니다. 시내광야에서 가나안 땅까지는 열하루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거리를 38년 동안 방황했습니다. 가나안 땅 지경에 있는 가데스 바네아에 처음 도착했을 때 12명의 정탐꾼 중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은 부정적인 보고를 했고, 거기에 흔들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불평하고 불신앙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들의 불신앙은 40년 광야 방황이라는 형벌을 초래하게 되었고, 그 기간이 끝날 때쯤 이들은 다시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기 두 번째 부분은 시내산에서 출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 번째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는 전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 기간의 여정은 하나님께 벌을 받는 시간이었습니다. 총 21개의 지명이 언급되고 있고,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들이었기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가데스 바네아를 두 번 갔었는데 민수기 33장 광야 노정에는 가데스 바네아가 한 번밖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갔을 때는 기록되어 있는데 처음 갔을 때는 가데스바네아라는 지명이 언급되고 있지 않습니다. 이유는 이름을 바꿔서 기록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18절에 “하세롯에서 발행하여 릿마에 진 쳤고”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 ‘릿마’가 바로 가데스 바네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똑같은 지명을 반복해서 기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 받은 곳의 이름을 ‘릿마’라고 쓰고, 두 번째는 ‘가데스’라고 정확하게 기록해 둔 것입니다.
셋째, 37~49절까지입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부터 모압 평지에 이르는 마지막 여정입니다. 여기에 9개 지명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한 가지 사건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애굽한 지 40년이 되던 해 5월에 아론이 호르산에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나이가 123세였다는 사실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40년 광야 생활에서 첫 번째 부분이 1년, 두 번째 부분이 38년, 그리고 마지막 부분이 1년에 해당하는 기록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제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그동안 지나온 모든 지명들을 돌아보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과 무엇을 기대하고 계신지 생각하고 기억하라는 목적으로 모세를 향해 광야 노정을 기록하라고 명하신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살아온 영적인 삶의 노정을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셨고, 또 내가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지르며 살았는지 돌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엄청난 잘못들이 있었음에도 우리를 죽이지 않으시고 살려주셨으니 하나님의 이 놀라운 은혜에 감격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민수기 33장의 광야 노정의 기록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Ⅰ. 자기 백성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무궁무진하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능력으로 자기 백성을 도와주십니다. 물론 아무나 도와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기 백성을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작은 능력이 아니라 전지전능한 능력으로 도우십니다. 사람이 자기 능력으로 인생을 살아간다면 그 결과가 어떻겠습니까?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서 살아야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싫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 능력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의 인생에 배경이 되어 주십니다. 도와주시는 하나님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비교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자기 능력으로 조금만 잘 되는 것 같아 보여도 잠시 잠깐이지 물거품과 같은 것입니다. 영원에 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이란 도대체 어떤 능력일까요?
첫째, 하나님의 능력은 구원하시는 능력입니다. 민수기 33장 3절에 “그들이 정월 십오일에 라암셋에서 발행하였으니 곧 유월절 다음날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모든 사람의 목전에서 큰 권능으로 나왔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라암셋은 애굽의 주요도시였고, 바로는 애굽의 왕입니다.
지금은 이집트가 후진국가가 되었지만, 그 당시 애굽은 세계 최강대국이었습니다. 바로는 신의 아들로 백성들의 숭배를 받았고, 그의 권력을 하늘을 찌르듯 높았습니다. 라암셋은 바로 그 애굽 왕 바로가 통치하는 도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하급수적인 인구증가로 200만 명이 넘는 대민족이 되었으나 바로에게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노예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바로의 손에서 해방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내셨습니다.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은 짐승의 첫 새끼와 애굽 사람들의 첫째 아들을 죽이시는 재앙이었는데, 바로는 이 장자 죽음의 재앙으로 말미암아 백기를 들고 하나님께 항복했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르지 않은 애굽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그들의 첫째 아들들을 죽였기 때문에 ‘넘어갔다’는 의미의 영단어 ‘Passover’가 이스라엘의 최대 절기인 ‘유월절’이 된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이 아들들의 장례를 치르기에 여념이 없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달 15일에 라암셋을 빠져나와 출애굽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200만 명이 넘는 대민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의 족쇄에서 해방될 수 있었겠습니까? 자기 백성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구원하시는 능력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의 손에서 해방시켜 놓으시고 그냥 가버리셨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계속해서 보호해 주셨습니다. 민수기 33장 8절에 “하히롯 앞에서 발행하여 바다 가운데로 지나 광야에 이르고 에담 광야로 삼 일 길쯤 들어가서 마라에 진 쳤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시는데 육지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비하히롯 앞 바알스본 맞은 편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곳은 홍해 바닷가입니다. 홍해는 호수가 아니라 깊은 바다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바다 앞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바로는 신이 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사로잡기 위해 그들을 쫓아갑니다. 이 때다 싶었던 바로는 애굽의 온 군대와 철병거 600승을 대동한 채 바다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로잡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이들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홍해를 단박에 가르시고 200만 명이 넘는 많은 백성들로 홍해바다를 맨땅처럼 걸어가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능력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바로와 그의 군대는 홍해를 건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뒤를 쫓아가다가 그 곳에 모두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능력은 보호하시는 능력이었습니다.
그리고 광야 생활을 하는데 백성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물도 없고 고기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광야 생활이 짜증스러웠던 모양입니다. 마라에서 마신 물은 쓴 물이었으나 나무 하나를 던져 단 물로 바뀌게 되었고, 엘림이라는 오아시스로 인도하셔서 자연적인 방법으로 물을 공급해 주셨으며, 르비딤에 비록 물이 없었으나 모세를 향해 반석을 치라 명하셔서 쏟아져 나오는 생수를 마실 수 있었습니다. 또 신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어 울부짖으니 만나를 주셨고, 기브롯 핫다아와라는 곳에서는 고기가 없어 불평하는 백성들에게 메추라기 떼를 보내주셔서 고기를 실컫 먹게 해 주셨습니다. 마지막 하나님의 능력은 공급해 주시는 능력이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보호도 해 주실 뿐만 아니라 필요를 아시고 공급해 주시는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위대함보다 이 능력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실적인 삶 속에 그대로 역사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생각하고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 능력은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나타나는 능력이 아닙니다. 오늘 이 시간 예배하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이 능력이 그대로 나타나고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방언이나 예언, 병 고침 등만 능력인줄 압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적인 것만 능력인 것이 아닙니다. 정말 위대한 능력은 구원의 능력, 보호의 능력, 공급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 때문입니다. 33세에 십자가에 비참히 못 박혀 죽은 예수를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까? 미치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이것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미치지 않았지만 지극히 이성적으로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성령의 능력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맨땅처럼 건너간 것을 침례로 비유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4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홍해 건넌 것을 예수님을 믿고 침례를 받은 것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바로를 굴복시키신 하나님의 능력이 오늘도 역사함으로 우리로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죄와 사망과 마귀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어떤 분은 자기가 자유의지로 예수님을 믿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인간의 자유의지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내팽개치지 않고 보호하는 분이십니다. 베드로전서 1장 5절에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성도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20세기에 세대주의 종말론이라는 잘못된 신학사상으로 말미암아 성도들 가운데 ‘환란 도피주의’가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성도들 중에는 환란을 피해 휴거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등장했습니다.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교리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7년 대 환란을 피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자들이 환란 속에 고통 받는 것을 구경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이상한 복수주의입니다. 성경은 그런 사상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은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어려움과 환란이 있어도 하나님의 능력이 이들을 보호하시고 지키신다는 진리를 가르쳐줍니다. 세대주의 종말론에 빠진 수많은 목사님들은 잘못된 교리로 성도들을 오도했습니다. 환란이 없는 것이 아니라, 환란을 피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능력이 성도를 보호하신다는 것이 중요한 성경적 진리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얼마나 큰 국가적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 나라를 지켜주실 줄 믿습니다. 프리메이슨이라는 단체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이상한 예언으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그림책, 카드 같은 것들을 만들어서 얼마나 허황된 주장들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도 모두 허사일 것입니다.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적으로 위태로운 일들이 참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은 위태로움 속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능력으로 성도를 보호해 주신다고 증거합니다. 질병이나 전쟁, 불의한 사고나 위험과 같은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지만 우리가 범죄함으로 마귀들에게 문을 열지 않는 한 악한 것들은 성도를 위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18절 하반절에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구원의 능력, 보호의 능력, 그리고 우리 삶에 필요한 부분들을 공급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풍성히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성도들을 향해 구원의 능력도 베푸시고 보호의 능력으로 지키시고 공급의 능력으로 모든 쓸 것을 채워주시는데, 도대체 이 능력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3장 20절에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업이 잘 안 되고 굶주리고 이제 끝났다고 생각되어도 결코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능력이 성도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다시 시작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 지금도 역사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골로새서 1장 29절에도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속에서 역사하시고 우리 속에서도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지금도 역사하고 계신다는 이것이 우리 삶의 현실입니다. 사실이고 진리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두려움 없이 인생을 전진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성도의 원동력입니다.
Ⅱ.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성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간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인간으로써 지을 수 있는 죄는 거의 다 지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 광야 노정을 다시 생각하고 기억하라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의 백성들에게 좋은 분이시고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는 분이시라는 점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무엇이 그리 좋느냐고 나쁜 말로 험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좋은 것들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좋은 말을 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게 선하신 분이시고 내게 복을 주는 분이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게 불행이 찾아온 것은 내 잘못으로 인함이고, 하나님은 좋은 것으로 풍족하게 하시는 분이시라고 생각하면 하나님의 좋은 것들을 많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와서 “아빠 엄마 때문에 행복하다”고 하면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해 좋은 말 하는 습관을 길러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는 동안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변함없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얼마나 하나님께 범죄한 백성들이었습니까? 불평과 불만 일색이었습니다. 지도자 모세를 돌로 쳐 죽이려 했고,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으며, 반역하고, 우상숭배하고, 음행에 빠지는 등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죄를 저질렀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하나님이라면 이런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겠습니까? 이런 백성들을 계속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 진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백성들의 끝없는 죄악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약속한 대로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이십니다. 때론 죄에 대해 징벌하실 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22~23절에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지나간 자기 인생을 돌아보십시오. 그 때 죽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로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한 적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범죄한 일들을 돌아보면 하나님의 사랑에 감복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노정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는 거울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내게 좋은 분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선을 행하는 좋은 분이시라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좋은 분이시라는 사실을 날마다 경험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나쁜 말만 하고 비판하는 일에 핏대를 세우면 그 사람의 삶 속에 항상 나쁜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좋은 것을 공급해 주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좋은 말을 하고 또 하나님의 선하심 날마다 맛보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Ⅲ. 광야 노정은 성도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재확인시켜준다
광야 노정 중 42개 지점은 모두 지나가는 정류장과 같습니다. 목적지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어떤 환란을 겪었을지라도 이것이 모두 일시적인 것임을 보여줍니다. 모두 지나가는 땅에 불과한 것입니다. 정거장에 멈춰 서서 정거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지나치게 집착하며 살 필요가 없습니다. 가야할 궁극적인 목적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일본으로 여행을 갔는데 사소한 일로 시비가 붙었습니다. 상대는 야쿠자입니다. 싸우겠습니까? 도망가겠습니까? 여행 와서 야쿠자와 싸워 좋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본문에 기록된 42개의 지명과 같습니다.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목적지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은 그저 출애굽한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하는 때와 일반입니다. 정거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너무 집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음 쓰고 좌절하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두 지나가는 일들입니다. 우리에게는 가야 할 목적지가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그곳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결 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짧고 속히 지나갑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인생을 마감하는 순간 상상할 수도 없는 영광 가운데로 들어가게 됩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재에는 고난이 있어도 장차 얻게 될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이 아무리 커도 얻게 될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또 고린도후서 4장 16~17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환란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두 경한 것들입니다. 가볍고 일시적인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며 받을 환란은 가벼운 것이지만, 성경은 우리가 장차 얻게 될 영광이 무거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중한 것, 엄청난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고백하기를 “나는 이후에 큰 영광을 누릴 사람이다”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우리를 위해 영원한 축복을 예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가 가야 할 궁극적인 목적지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서 늘 승리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회고하는 역사
민 33:1-2 / 석원태 목사
유명한 실레겔(Cyreker)은 ‘역사는 회고하는 예언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괴테(J. W. Goethe)는 ‘역사의 의무는 진실과 허위, 확실과 불확실, 의문과 부인을 명백히 구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시세로(Cicero)는 ‘역사는 시대의 증인이요, 진실의 등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모세를 통하여 신명기 33장을 기록하게 하였습니다.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나와 요단 가 모압 평지에 도착하기까지 40년 동안의 이스라엘 백성의 노정을 회고하고 있는 기록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신명기 8장 2절에는 「사십 년 동안의 … 광야의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스데반은 그의 설교에서 「광야 교회」라고 하였습니다(행 7:38). 광야길 40년의 역사를 회고하는 내용입니다. 출애굽 40년을 회고하는 내용입니다.
Ⅰ. 광야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 자신이었다고 하였습니다.
1. 여호와의 명대로 시작된 출애굽의 역사였습니다.
본문 민수기 33장 2절에 「모세가 여호와의 명대로 그 노정을 따라 그 진행한 것을 기록하였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출애굽의 거사는 모세 자신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산물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애굽 바로왕의 산물은 더욱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벌써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들이 이방 애굽에서 객이 되는 기간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거기서 400년 동안의 역사를 만든 다음에 그 자손이 큰 재물을 모아 가지고 나올 것이라고 예언한 일이었습니다(창 15:13-14).
하나님의 작정하신 때가 올 때, 그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서, 종된 애굽의 고통에서 그리고 바로왕의 굴레에서 떠나라고 명령하였습니다(출 3: ). 마침내 모세는 애굽 왕 바로 앞에 나타났고,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내라」고 출애굽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출 5:1).
2. 여호와의 정하신 노정을 따른 출애굽의 역사였습니다.
민수기 33장 2절이 다시 말하기를 「모세가 여호와의 명대로 그 노정을 따라 그 진행한 것을 기록하였으니 그 진행한 대로 그 노정은 이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노정’, ‘그 진행’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실상 애굽 땅 라암셋에서부터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최종 지점인 모압 평지까지는 일주일 남짓한 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잡았습니다. 그 이유를 신명기 8장 2-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둘러 가는 길(노정)을 정하신 것입니다(출 13:17). 그 노정, 그 시간, 그 사건은 모두 하나님 자신께서 기쁘시게 계획하신 경륜을 좇아 되어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출애굽의 역사, 광야길 40년의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출애굽의 주인은 모세가 아니고 하나님 자신입니다.
Ⅱ. 광야 역사는 유월절(속죄)을 기점으로 출발하였습니다.
민수기 33장 3절에 「그들이 정월 십오일에 라암셋에서 발행하였으니 곧 유월절 다음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유월절 다음 날이라’는 말에 유의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출애굽은 유월절 이후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출애굽 이전에 유월절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유월절을 해의 첫 달이 되게 하였습니다. 저들은 애굽을 떠나기 전에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양을 잡아서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그 양고기를 반드시 불에 구워 먹되,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그 문설주에 양의 피가 발라져 있는 집안에서 양고기를 구워 먹고 있던 사람들은, 그 날 밤에 하나님의 사자가 애굽의 모든 장자들과 초태생의 짐승을 죽일 때 모두 살아남았습니다(출 12:1-14).
바로 이스라엘의 이러한 유월절은 신약시대에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우리의 속죄를 예표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유월절이 없으면 출애굽이 불가능하고, 출애굽의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가나안 행군의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신약시대에 예수로 말미암는 십가가에서 피흘리신 속죄가 없이는 이 세상에서 갈라져 나오는 일이나, 나와서 천국으로 가는 신령한 가나안 행군의 의미나 내용, 목적이 전혀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믿어 죄사함 받는 기본적인 순서가 없이는 구원이라든지, 천국으로 가는 길은 전혀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십자가의 속죄는 언제나 개인과 그 가정과 역사의 기원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속죄의 피로 말미암는 사죄의 은총이 없이는 그 어떤 삶의 진행도, 역사도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예수 피로 살아나지 않으면 하늘을 향하여 나아갈 수 없습니다. 죽은 송장에게는 호흡도 움직임도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속죄의 피를 받은 자만이 세상에서 나와, 세상을 이기고, 힘있는 신앙의 전진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Ⅲ. 광야 역사는 출애굽(애굽에서 나옴) 역사입니다.
어떻게 나왔던가?
1. 광명정대(光明正大)하게 나왔습니다.
민수기 33장 3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모든 사람의 목전에서…」라고 하였습니다.
결코 출애굽 운동은 몰래, 비밀히 도망쳐 나온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12장 35-36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출애굽을 할 때 애굽 사람들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요구하였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저들이 요구하는 대로 가져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은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라고 하였습니다(출 12:37).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삼십 년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백삼십 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다고 하였습니다(출 12:40-41).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모습입니다.
2. 여호와의 권능으로 나왔습니다.
민수기 33장 3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모든 사람의 목전에서 큰 권능으로 나왔으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모든 장자들을 죽이심으로 전 애굽에 절망의 곡성이 진동케 하고, 애굽의 신들에게도 벌을 주었습니다(민 33:4). 애굽의 바로왕과 백성들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항복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숙곳에서 출발하여 광야 끝 에담에 진을 칠 때, 하나님이 그곳에서 저들에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40년 동안 떠나지 아니하시고 이스라엘의 인도와 방패(보호)가 되셨습니다(출 13:20-22). 40년 광야길에 주식으로 만나를 주셨습니다. 바위를 터뜨려 생수를 공급하셨습니다. 메추라기를 보내어 고기를 대신하게 하셨습니다. 길쌈하지 않고, 농사짓지 않아도 되게 하셨습니다. 아무런 질병에 걸리지 않게 하셨습니다. 저들의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셨습니다. 대적들의 침략에서 구원하셨습니다. 홍해를 기적으로 건너게 하셨습니다. 실로 하나님의 권능으로 충만해버린 40년이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보장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여주는 진리입니다.
3. 조금씩 조금씩 점진적으로 나아갔습니다.
민수기 33장에 주류를 이루고 있는 말씀이 「…진쳤고」, 「…진쳤다」라고 하는 말입니다. 저들이 40년 동안 장막을 쳤던 장소를 열거하는 것입니다. 출발지인 라암셋과 도착지인 모압평지를 제하면 꼭 40처가 됩니다. 40년 동안 40처를 통과한 것입니다.
이 어간에 저들은 무수한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스라엘은 연약함과 실수를 연발하였습니다. 실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의 기간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40이란 숫자는 고난의 상징도 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권능 속에 살면서도 저들의 범죄로 인하여 광야길이 고난으로 점철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애굽에서 점점 멀어지고 가나안이 가까워져서, 마침내 가나안에 이르고야 마는 점진적인 진행이었습니다. 바로 이 세상에서 하늘로 가는 우리 신자들의 점진적 나그네 여로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4. 공동체의 진행이었습니다.
민수기 33장 1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와 아론의 관할 하에 그 항오 대로 애굽 땅에서 나오던 때…」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의 광야 여정은 ‘모세의 관할 하에’ 되어졌다고 하였습니다. 또 ‘항오 대로’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질서 있는 군대 행렬을 가리킵니다. 그 다음 2절에는 「모세가 여호와의 명대로…」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광야교회의 행진을 명령하셨고, 그 명령을 받은 모세와 아론은 백성들을 지도했다는 말입니다. 그 위에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권능들이 모세와 아론의 지도를 보장해 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역사는 무질서나 혼란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공동체의 엄격한 조직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저들이 그 공동체 조직의 질서를 파괴시키고 문란하게 만들 때, 하나님은 진노하셔서 저들을 심판하셨습니다. 반역하는 고라와 그 일당들을 불로 태우고 염병으로 치셨습니다(민 16: ). 바로 오늘 천성을 향하는 지상교회의 공동체 행군을 알려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역사는 결코 운명의 계교일 수는 없습니다. 존재하는 역사는 하나님의 계획하신 목적적 명령을 따라 착오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정확하신 하나님 자신의 명령을 따라 역사는 흥망성쇠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왕(통치자)들은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심부름꾼들입니다.
성령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광야 역사 40년을 회고하게 하였습니다. 그 역사는 우연이나 인간의 산물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 계획하시고 진행하신 역사였습니다. 그 역사는 여호와의 명대로, 여호와께서 정하여 놓으신 노정을 따라 진행된 역사였습니다. 가나안을 향하는 광야 역사는 결코 유월절 없이는 불가능했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예수 속죄가 없이는 교회운동이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광야 역사는 본질적으로 애굽을 떠나는 역사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광명정대하게, 여호와의 권능으로, 점진적으로 그리고 철두철미하게 공동체 의식을 가진 행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지상 교회(광야 교회)의 운동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예표였습니다. 우리의 교회 운동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습니다. 우리의 교회 운동은 예수 십자가의 속죄에다가 그 뿌리를 둡니다. 우리의 교회 운동은 본질적으로 이 세상(애굽)을 떠나 가나안 곧 천성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만인 앞에서 광명정대하게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산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권능의 은혜입니다. 한 걸음씩 진을 치면서 나아갑니다. 나 혼자가 아닌 구속인의 무리로서 나아가는 교회 운동입니다.
희망은 역사보다 더 앞서고 위대합니다. 역사가 희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희망이 역사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허물과 죄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에게 결정적인 희망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죽지 않고 산다는 생명의 소식입니다. 바로 이것은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주신 희망입니다. 그 놀라운 구원의 희망이 찬란한 기독교 2000년의 역사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바로 그 영광스러운 구원의 희망, 영생의 희망이 지난 2000년 한해의 경향교회의 역사를 기록한 것입니다. 아니 27년 경향의 역사를 기록한 것입니다.
광야 교회 40년의 회고! 아니 경향 27년의 회고! 아니 지난 2000년 1년의 회고!
여기에는 하나님만이 남아 있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명령(말씀), 하나님의 정하신 노정만이 남기를 기원합니다.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값없이 받은 속죄은총(유월절)만이 남기를 기원합니다. 세상(애굽)을 점점 떠나 교회로 가까워지고, 하나님께로 점점 가까워진 영의 진보만이 남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30배, 60배, 100배의 축복들이 변함없이 진행되기를 축원합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2000년 속에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입니다!”라고 하는(고전 15:10) 감사의 잔이 넘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