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휴먼 에세이 >
풀꽃들과 들녘에서 만나다
崔 秉 昌
너울거리는 푸르름이 가슴속으로 환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소리 나게 두드리지 마라.> 멀리 하늘 끝에서 창공을 가르며 들려오는
아득한 메시지, 벌판 속으로 밀려오는 감성만으론 도저히 두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어 조용히 두 손을 모아 본다.
<기도하는 마음은 삶의 아름다운 적정(寂靜)>이니, 깨어나 속살거리는
평온함을 코끝으로 전해주는 들녘의 풀꽃들에게는 굳이 생명의 번거로움을
말할 필요가 없다. 몸과 마음이 한결 정갈해진다.
세상의 바람이 일렁거릴 때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색깔의 옷을 바꿔 입고
출렁거리며 흔들린다지만, 풀꽃들은 제각가 모양은 달리해도 색깔만은
동일한 녹색의 싱그러운 옷 빛으로 요란하지도 자만하지도 않은 모습들로
그 자리에 차분히 머물러있다.
세상사람들의 옷과 들녘의 빈자리를 말없이 채워내는 풀꽃들의 모양새,
풍겨 나는 향기도 감춰진 언어도 사뭇 다른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수시로 바꿔 입는 인위적인 옷들의 말, 사람들의 그것과는 명분조차 사뭇 다른,
그래서 <자연은 생명들의 원초적 진리>였다 한다면, 들판에 차분하게 펼쳐진
잔디밭 속의 토끼풀꽃, 민들레꽃, 미나리아제비, 애기똥풀, 제비꽃, 엉겅퀴,
질경이 등 온갖 풀꽃들의 안온한 자태는 한층 더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내 앞에
다가선다.
때문에 이 땅에 자라나는 모든 풀꽃들은 이구동성으로 <오래된 아픔이나 역설>
을 말하려 들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도 사람과 풀꽃들의 이성적 생장점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리라.
사람들과 풀꽃들을 견주어 말하자면, 아무래도 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의 선후(先後)를 말해야 될 것 같다.
판단을 먼저 하고 행동하는 번거로운 사람들보다는 해야 될 일을 그저, 묵묵히
자생적으로 풀어내는 풀꽃들은 절대로 먼저 명분을 따지지 않는 애당초
성선설의 전신(全身)인 듯하다.
그렇다면, 사람이 성악설의 단초란 말도 그리 무리한 가설(假設)은 아닐는지
모르지만, 풀꽃들보다는 성악설에 더 가까운 가변적 당위라 한다면 아무래도
지나친 독설이 될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행태가 독선적으로 목소리만 크면 된다는
비자연적 사고와 비중 없는 가치관이 아무래도 생존이란 본질을 왜곡되게
하는 모습은 아니었는지, 말하자면 풀꽃들의 일생이 사람들의 행태처럼
자기 우선이나 비교우위를 찾아볼 수 없이 무조건적으로 자연에 순응하여
삶의 절대적 가치를 지니는 그것과는 너무 대조되기 때문이다.
삶이란 자연스러운 방식과 순응이라는 진리에 의하여 진행되는 것이어서
그 이상이나 그 이하를 거스른다면 기형적인 이상(異狀)만 조작될 뿐,
결국에는 그에 상응하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다.
풀꽃들은 말한다. 인간이란 대지 위에 인간과 이반(離反)하는 비인간화의
꽃은 절대로 피어나서도 존재해서도 안 된다고 말이다.
그것은 진리라는 토양이 비인간화란 기형적인 꽃을 피워내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며 모든 것은 자연 속에서 순리대로 존재하여야 하기 때문이리라.
이즈음의 삶에는 지혜로운 철학이 아쉽다. 지식의 충만으로 문명이니
문화니 하는 형식논리에 밀려 분명(分明)의 확인을 단절하고 중도(中途)를
지향한다는 불확실성의 어정쩡한 표현으로 추상적 형용사들만 무책임하게
난무하는, 그래서 인간이란 논리이전의 기본적 사고와 지혜로운 행위가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빨리 가려면 혼자서 가야만 되고, 멀리 가려면 더불어 가야 된다>는
말처럼 우리의 삶은 빨리, 남보다 먼저 가야 된다는 독선적 경쟁의
성악적(性惡的) 속성이 우선하기 때문은 아닐까.
풀꽃들의 속살거림에 귀 기울여본다.
사람들의 다가섬조차 달갑지 않은 오직 향일성의 자체만으로 하늘만을
우러르며, 더불어 피고 지는 삶에 충실할 뿐, 어떠한 이상향도 추구하지
않는다.
자연이란 그 속에 모든 것이 다 있어 자연을 어긋나게 하는 초자연으로
거듭나서는 그 절대성이 상실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닌지, 풀꽃들은
산들바람에 드높아진 하늘 끝으로 향기만을 전하고 있다.
< 필자, 시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