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고, 오랜만에 한가로이 책장에 꽂혀있는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읽으니
오빠와 언니가 생각난다. 오빠 둘, 언니 둘...
부모님이 주신 가장 큰 선물.
독수리 오형제...보다 다툴때도 있지만, 때론 더 평화적인 오남매.
어릴적 떨어져 지낸 시기 때문인지,
헤어지면 그립고, 만나면 말없이 눈으로 대화하는 이상한 형제들이다.
(올케언니는 우리를 이상한 형제라 부르며, 자주 질투한다)
큰 오빠 한양수. 10살 많은 오빠는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결혼하였다.
자원봉사로 만났던 고아원아이를 돌보고 싶어 간호학과에 가려고,
고3 겨울 방학 때 종합병원에서 아르바이트하다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총무과 정직원이 되었다.
좋은 직장 버리고 다시 공부하여 대학간다 하였을 때,
닫혀진 대입학원 철장문 사이로, 신문지에 감싼 학원등록금을 말없이 내밀던 오빠의 모습.
한밤중 일층 부모님 방에서, 바뀌벌레 때문에 이층 내 방으로 가는 통로 계단을 못 올라가고 있으면,
늘 용감하게 처치해 주던 큰오빠는, 아직도 가끔 용돈을 준다.
형제와 함께 밥을 먹을 때면, 집 안에 남겨놓고 못 먹인 것이 있을까
늘 노심초사 엄마 마음을 가진 아버지처럼, 나를 챙긴다.
작은 오빠 한인수. 9살 많은 작은오빠는 "짝은 옵빠~"라고 문자 보내면,
나에게 "막내 아가씨~ "하며 때때로 속마음 가득담긴 문자를 보낸다.
어릴 적에 아버지가, 다섯형제 간식을 사 먹으라 하면,
고리타분 큰 오빠는 다섯등분 나눠서, 기어다니는 어린 나에게도 똑 같이 줬다며,
자기는 홀랑 다 먹고 없는데, 나는 쪽쪽 빨아가며 늦게까지 먹어 분통터졌다고,
어린것들(나와 옥경언니)은 조금주고, 큰 애들은 많이 먹자고 큰 오빠를 꼬드겼지만, 바늘도 안 들어갔다나...
가족종교 버리고 교회간다 하여, 여고생이던 내 종아리를 몽둥이로 때려 피멍들게 하였던,
그런 작은오빠가 몇 년전 부터, 건강챙기라며 용돈으로 오십만원, 백만원씩 준다.
큰 언니, 한옥희.
작은오빠와 생일이 몇 일 밖에 차이나지 않는 연년생이다.
어머니처럼 AB형인 언니는, 언제나 참는다.
아파도 참고, 힘들어도 참는다. 참지 말라 해도 참고, 작은 것에 감사하며 아이처럼 잘 웃는다.
어머니를 닮았다. 나를 볼 때 마다 업어키웠다며 자랑하고, 잘 컷다며 나를 자랑스러워한다.
아마 아이같은 내 모습은, 부모 형제들이 "막내야~ 막딩아~" 챙겨주고 섬겨준 때문인 지도...
그리고, 나의 친구이자 멘토인. 옥돌이 옥경언니.
잠 안오는 밤에 가끔 읽었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의 포르투가는 옥경언니를 떠올기게 한다.
주인공 제제처럼, 나는 사람들과 거의 대화를 하지 않았다. 말썽은 피우지 않았지만 소리없이 다녔다.
제제가 밍기뉴와 대화하듯 나뭇잎하나, 꽃잎하나 있으면 땅에 묻었다 찾았다 하며
며칠을 보물감추듯 두고 혼자 잘 놀았었다.
4살 때, 다섯남매중에서 막내인 나를 외할머니집에 맡겼을 때,
혼자노는 수위가 거의 자폐끼 수준으로 올랐었다.
그리고 늘 '옥낑이 데려와~"하며 떼를 썼단다.
7살 때, 초등학교에 옥경언니와 같이 입학하여 같은 반 짝궁이 되었을 때, 참 기뻤다.
하루종일 졸졸 따라다니며, 친구가 잘 따르는 언니에게 삐지고,
언니와 붙어다니는 언니친구를 얄미워하였다.
같은 반 아이였지만, 친구옥경을 '언니'라 부르는 나를, 그들도 동생처럼 여겼다.
옥경언니를 친구들은 '옥돌아~'라고 불렀고, 결혼한 지금도 그리부른다.
동네아주머니와 할머니도 "옥경씨~"라고 부르지, "아줌마"라고 부르지 않는다.
지금은 멘토처럼 여기지만, 어릴적 옥돌언니는 나의 우상이었다.
글씨, 표정, 공부등 대부분 따라하였다.
교회도 언니와 초등학교 때 새벽기도를 함께 다녔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부터 언니와 결별하여 떨어졌다.
자아가 커진 탓도 있지만, 나는 보수로 언니는 진보로 삶의 방식이 나눠졌다.
함께 예수님을 믿었지만,
주일공부금지와 술과 담배 등 청교도적인 생활방식을 고집하였던 나는,
교회청소년들과 어울려 다니고, 막걸리를 마시고,
새벽에 갑자기 훌쩍 기차여행을 떠나버리는 언니의 무책임함을 용납할 수 없었다.
대학다니는 동안, 나는 한국대학생선교회 씨씨씨에서 울타리속 양처럼,
기독교선교훈련에 불탔고, 언니는 동네사람들과 교회청소년들과 여전히 싸돌아(엄마표현) 다녔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섬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러 떠났고,
옥돌언니는 여전히 교회와 동네주변의 청소년들과 어울려 다녔다.
8개월 만에 섬에서 돌아왔을 때, 언니는 나의 지친 마음을 감싸안았다.
둘이 의기투합하여 어머니가 주신 자본으로 공부방을 차렸다. '한사랑음악원'
큰오빠 부부는 자신의 집 옆에 새로생기는 아파트단지를 추천하였고,
언니와 나는 교회 어려운 청소년을 마음에 두고, 교회옆에 학원을 차렸다.
낮에는 동네아이들이 공부하러 왔고, 오후가 되면 교회청소년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돈버는 일을 해 본 적이 없는 언니와 나는, 학부형들에게 회비받는 것이 서툴러 학원은 늘 적자였다.
도로가에 위치한 우리집에서, 약 30분 이상을 산골짜기로 올라가는 위치에 있었던 교회는,
유독 어려운 청소년이 많았다. 밤마다 울며 힘들어하는 그들을 언니는 말없이 보듬었다.
옥돌언니는 일상생활에서 누구든지 복지적 삶을 살 수 있음을, 오래동안 나에게 보여주었다.
교육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언니는, 지금도 돈을 잘 벌지 못한다.
굿네이버스 인권강사로 일하는 언니는, 청소년상담사와 청소년지도사이다.
지금도 예전의 교회는 아랫동네로 터를 사서 이사했지만, 언니는 여전히 그 산동네에서 살고 있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어려운 일이 있으면, "옥경씨~ 상담하는 일 하지요?"하며 찾아온다.
어떤 분은 남편의 가정폭력에 엄청 시달리면서 밖으로 표시를 내지 않아, 아이가 크도록 동네사람들도 몰랐단다.
어느 날, 언니에게 고민을 털어놓았고, 언니는그녀의 남편이 가정폭력을 행사할 때, 경찰에 몇 번 신고하였다.
몇 번의 신고와 그 여성에게 남편의 폭력앞에 무기력하게 있지 말것을 당부하였다.
몇 년이 지난 지금, 그 남편은 경찰이 어찌알고 오는지 무서워 조심하게 되었다 한다.
또 구석에 말없이 매를 맞다가, 아침이면 말끔히 그 흔적을 치우던 아내가,
왜 때리냐 소리치고, 깨진 잔해를 니가 그랬으니 니가 치워라 큰소리치니 점점 순한 남편이 되었단다.
또 어떤 여성은 불안정한 부부관계속에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2학년 쯤 되어 담임 선생님께 연락이 오기를
"아이가 자페끼가 있는 것 같고,
행동장애가 있는 지 불안정해서 도저히 가르칠 수가 없으니, 병원에 데려가 보라" 연락을 받았다 한다.
언니는 잠시 근무하던 복지관 상담팀에 연락하여 상담을 의뢰하였고,
꼭 부모와 동반하여 참여하기를 부탁하였다 한다.
몇 개월이 지난 후 아이는 자폐도 행동장애도 아닌,
정서적 불안정으로 감정조절이 잘 되지 않았을 뿐이었단다.
지난 주, 교회가까이 이사한 언니집에 잠시 있을 때, 이웃분들이 전화도 없이 노크도 없이 불쑥불쑥 찾아와
이런 저런 간섭과 이야기거리를 내 쏟고 가는 것을 보며, 언니의 삶이 여전한 것을 보았다.
교회근처 동네에서 더욱 교회옆으로 이사한 이유가,
동네청소년들이 이용할 공간이 없어서 도서관을 교회안에 만들었는데,
따로이 사서가 없으니, 틈틈이 도서관을 지키기 위해서 라고...
나는 중학교때까지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잘 몰랐다.
어머니와 이야기하고 책을 읽고, 자연을 관찰하는 것으로 족하였다.
사람들은 시끄럽고 복잡하고 번잡하여, 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힘들게 느껴졌다.
그런 나에게 언니는 사람들과의 연결고리가 되어 주었다.
혼자만의 세계에서 빠져나오도록 도와주었다.
어디든 "내 동생 미경이에요~" 소개하고 부탁하였다.
그리스도와 깊은 교류를 하게 되면서,
언니로 부터 독립하기 까지, 옥돌언니는 그렇게 나의 포르투가가 되었다.
가끔 어머니가 그리울 때면 "미잉아~"라고 어머니가 부르시던 애칭으로 불러 준다.
옥돌언니는 일상생활에서 누구든지 복지적 삶을 살 수 있음을, 오랫동안 나에게 보여주었다.
내가 다른 사람의 멘토가 되어, 소진하고 탈진될 때면
언제든 찾아가서 마음을 털어낼 수 있는, 쉴 곳이 되어준다.
첫댓글 진짜 훌륭한 언니를 두셨네요. 그것을 아는 님두 훌륭해요.
그 언니 그 동생입니다.."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그리 아름다운지요..." 다문화가정을 위해 헌신하시는 한미경 사모님, 목사님...혁주..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