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아노?”
“왜, 처음 봐?”
“어. 책에선 봤지만 실제로는 처음 본다. 근데 누가 치노?”
“우리 엄마. 대학교에서 피아노 전공하셨어.”
“그라모......가만, 피아노치는 사람을 뭐라캤는데?”
“피아니스트.”
“맞다. 그럼 피아니스트시겠네?”
“응, 그렇긴 한데, 요즘은 쉬면서 나만 가르치셔.”
“니만...... 그럼 니도 이 피아노를 칠 줄 안단 말이가?”
“왜? 보여줘?”
혜석은 내가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웃으며 말을 받아주었고, 내 고개를 자동적으로 끄덕여졌다.
“어. 보고 싶다.”
“알았어. 그럼 잠깐만 기다려 봐. 엄마 허락부터 받고 올게.”
그러면서 그녀는 부엌으로 뛰듯 걸어갔고, 나는 놀랍고도 신기한 요술쟁이를 보듯 그녀를 쳐다보다가, 슬그머니 뚜껑이 닫혀있는 검은색 피아노를 쓰다듬어 보았다.
‘풍금도 아니고 피아노를 친다고? 근데 이런 피아노는 억수로 비싸겠제......’
차마 피아노 건반 뚜껑은 열어 볼 생각은 못하고, 그저 이곳저곳을 만져보는 사이에 혜석이 피아노 악보집을 가지고 그녀 엄마와 같이 왔다.
혜석 엄마는 피아노의 건반 뚜껑과 위판을 열어주면서 내게 웃으면서 혜석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셨다.
“호호, 우리 혜석이는 여간해선 친척들 앞에서도 피아노 연주를 잘 해주지 않는 애야. 우리 가족들을 제외하면 영훈이가 혜석이 연주의 첫 번째 관객이니까 영광으로 생각해야 해.”
“.......”
나는 속으로 혜석이 ‘어지간히 부끄럼쟁인가 보다’라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혜석 엄마는 그런 나를 향해 빙긋 웃으면서 내가 이해하기엔 모호한 이야기를 하면서 부엌으로 돌아갔다.
“호호, 피아노를 제대로 치려면 아직 까마득히 멀지만, 그래도 어린이 피아노 콩쿨에 나가면 입상할 실력정도는 되니까, 잘 들어보고 혹시 고칠 점이 있으면 나중에 이야기를 좀 해줘”
“......”
그 말이 혜석이가 피아노를 잘 친다는 건지 못 친다는 건지 헷갈려하는 사이, 뚜루루룽~ 피아노 건반을 치면 들리는 청아한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그렇게 피아노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피아노의자에 앉아 허리를 꼿꼿이 펴서 피아노의 고음과 저음을 확인하며 손을 푸는 혜석과, 피아노 건반 위를 숨 쉴 사이 없이 빠르게 오가는 그녀의 현란한 손가락 놀림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넋이 나간 듯 눈을 크게 뜬 채로 그녀의 손가락 놀림을 쳐다보는 동안, 어느덧 그녀는 손이 풀린 듯 연습을 끝낸 듯 건반에서 손을 떼며 내게 말했다.
“곧 시작 할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어, 그래......”
그녀는 곧 가져온 악보집을 펴서 피아노 건반 위의 보면대에 고정시키고는, “후우~” 큰 호흡과 동시에 건반을 누르는가 싶더니 지그시 눈을 감으면서 본격적으로 연주를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생전처음 들어보는 청아한 구슬이 구르는 듯한 피아노 음과, 그녀의 현란한 손가락 움직임, 그리고 소리에 따라 변화는 그녀의 표정들을, 그녀의 바로 옆에 서서 쳐다보노라니 거의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차마 숨소리조차 내 뱉지 못하고 연주를 하는 혜석을 보노라니, 어느새 그녀는 그동안 내가 보아왔던 그녀가 아니었다.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를 하는 그녀는, 그저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아껴주고 보호해주고 싶기만 했던 공주님과는 사뭇 달랐다. 내게 그녀는 자신이 연주하는 피아노 음에 진지하게 몰입하고 있는 그 모습이, 얼마 전 아미성당 사제관에서 보았던 가시면류관을 쓴 아들 예수를 품에 안은 피에타의 성모가 겹쳐지면서, 차라리 성스러워 보였다.
그렇게 나는 그녀의 새로운 모습, 오로지 연주에만 몰입하고 있는 그녀의 성스러우면서 열정적인 프로페셔널한 그 모습을 내 심장 깊은 곳에 각인시키고 있었다.
어느새 연주는 마지막으로 접어들었고, 내가 정신없이 그녀의 연주와 그 자태에 넋이 빠져있는 사이, 혜석의 엄마와 담임 선생님도 가까이 와서 연주를 듣고 있었다.
띠리리링~ 띵~ 땅, 따당!
하는 소리와 함께 연주가 끝나자, 연주가 끝났는지도 모르고 멍하니 그녀만 쳐다보고 있는 내 뒤에서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짝짝짝......
“브라보!”
짝짝짝.....
놀라 돌아보니 혜석 어머니와 선생님이었고, 난 그때서야 연주가 끝났음을 알고 박수를 쳐야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혜석만 쳐다보았다.
그녀는 그런 내 모습을 쳐다보면서 악보를 접어들더니 새침한 표정으로 나를 보면서 물었다.
“어땠어?”
“어? 어......”
내가 부산으로 내려 온 후 지금까지 주로 들었던 음악이란, 가끔 동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이미자를 비롯한 트로트 가수들의 노래와 학교 음악시간에 풍금(리드 오르간) 소리에 맞춰 부르던 노래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내가 생전처음으로 듣게 된 피아노 연주에 대해 대체 무슨 평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어쨌든 연주를 듣긴 들었으니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힘들어 할 때, 기습적으로 물어온 그녀의 질문은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리를 일거에 엉망진창 헤집어 버렸다.
“그, 그기 있다 아이가......”
그러나 나는 침착하게 특유의 고속연산을 통해 어렵게 입을 떼자, 혜식은 새침한 표정 가운데서도 귀를 바짝 세웠으며, 그녀의 엄마와 선생님 역시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내 입에서는 역시 오래 전 할배들에게 많이 들었던 제법 그럴싸한 표현들이 수식어와 함께 나오기 시작했다.
“지가 견문이 좁다보이 피아노 연주라곤 오늘 처음이라 감히 뭐라 이야기하기가 좀 그렇네예. 그래서 지는 연주가 아니라 혜석이가 피아노를 치려고 의자에 앉고나서 확 달라진 자세부터, 연주하면서 얼마나 연습을 마이 했으면 손가락이 보이지도 않게 건반을 두드릴까 하는 그동안의 수고와, 소절이 바뀌고 음이 달라질 때면 혜석이의 얼굴표정도 같이 변하는 것을 보면서, 옛날 백아가 거문고를 탈 때 저런 느낌이었는가 보다. 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더.”
그런 내 말에 혜석은 그 큰 눈을 더 크게 뜨고선 대체 무슨 말이냐는 듯 제 엄마를 쳐다보았고, 담임 선생님은 고개를 잘래잘래 흔드시면서 혜석 엄마에게 귓속말을 했다.
혜석 엄마는 손바닥을 치면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었고.
“호호호호, 맞아요, 맞아. 그 유명한 백아와 종자기의 백아절현의 이야기가......어쩜!”
그러면서 그녀는 자기도 알고 싶다는 듯 빨리 이야기 해 달라는 표정으로 엄마인 자신을 쳐다보는 혜석에게 웃으면서 이야기해줬다.
“호호, 이것아. 그건 나중에 이야기 해 줄게. 그건 그렇고, 네 친구는 너를 저렇게까지 대단한 사람으로 인정을 다 해주는데, 넌 아직도 그 점수를 가지고 약을 올리면 어떡하니, 응?”
“어머, 그럼 영훈이가 한 이야기가 나를 칭찬한 말이었어요?”
“어쭈~ 끝까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려고?”
엄마의 웃음속의 날카로운 눈빛에 혜석은 입을 살짝 삐쭉이면서 툴툴거리듯 말했다.
“쳇, 물론 나도 영훈이가 내 피아노 실력을 칭찬한 건 알아요. 그런데 뒤에 거문고 이야기가 대체 뭐냐고요? 난 한 번씩 영훈이 쟤가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해 놓고 설명도 안 해주고 입을 닫을 때면 콱~ 꼬집어 주고 싶다고요.”
“호호호, 나도 그 마음은 이해가 되긴 해. 그렇지만 그러면 안 된다는 거 잘 알지?”
“헤헤, 물론 농담 이예요. 내가 쟤를 얼마나 좋아......꺅!”
혜석은 그녀의 엄마와 말을 나누더니 갑자기 얼굴이 빨갛게 변해 후다닥~ 방으로 뛰어갔고, 엄마는 그런 모습을 쳐다보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호호호, 정말 못 말린다니까......”
그러더니 그녀는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영훈인, 여자 친구의 피아노 솜씨가 그렇게 대단해 보였어?”
“야. 정말 공자님이 제나라 음악을 처음 듣고 너무나 좋아서 세달 동안 고기 맛을 잊어버리셨다는 말을 와 했는지 다 이해가 될 정도로예.”(在齊聞紹 三月 不知肉味)
그런 내 대답에 혜석엄마는 마치 원하던 대답을 들었다는 듯 만족한 얼굴이 되더니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피아노 연주는 처음 들어 본 거야?”
“야.”
“그럼, 영훈이도 피아노를 한 번 배워볼래?”
“혜석이 하고 같이예?”
나는 설마하는 생각에 혜석이를 끌어들여 물었고, 그녀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둘이 같이 배우는 건 실력차이가 너무 나서 불가능하고, 영훈이는 따로 기초부터 배워야 해.”
그녀의 이야기에 호기심과 배우고 싶은 욕망이 넘쳤지만 나는 곧 내가 처한 상황을 생각하면서 거절 해야만 했다.
“고맙지만, 죄송합니더.”
“왜? 군자는 불기라며. 뭐든 많이 배우고 익히는 것을 즐거워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했잖아.”
어느새 혜석이 다시 돌아와서 나를 책망하듯 끼어들었고, 그녀 엄마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모두에게 내가 처한 상황을 털어 놓을 수밖에 없었다.
“지가 집에 가면 좀 마이 바쁩니더.”
“엄마가 계시는데도?”
선생님이 궁금한 듯 물었고, 나는 살짝 기가 죽어서 이야기했다.
“엄마가 집에서 수만 놓는 날은 제가 동생들을 보다가 다섯 시까지 성당에 맡은 일이 있어서 거기 가야 하고예. 다른 날들은 엄마가 다섯 시에 달비(머리카락) 장사를 나가셔야해서 누야가 올 때까지 지가 동생들을 다 맡아야 합니더. 그래서......”
내가 성당이야기를 꺼내자 혜석의 눈이 잠깐사이에 반짝 거렸지만, 그건 곧 그녀 엄마와 선생님의 이야기에 묻혔다.
“저런......”
“쯧쯧, 동생 한 명은 1학년이고 더 어린 동생도 있나보구나?”
선생님이 답답한 표정으로 물으셨다.
“두 살짜리가 있어예. 이제 막 서기 시작해가지고, 눈만 떼면 사고를 칩니더.”
“아이고......그럼 중학교 다닌다는 누나는 몇 시에 오는데?”
“누야만 오면 막내가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를 않는데다, 집에 아직 전기가 없어가지고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온다고 매일 일곱 시가 넘어야 옵니더.”
내 대답에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찰나, 혜석이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끼어들었다.
“애기가 두 살이면 엄청 귀엽겠다~”
“어, 진짜 억수로 귀엽다. 생긴 것도 가시나처럼 예쁘게 생기가꼬 순해서 잘 울지도 않는다.”
“나, 한 번 보러 가도 돼?”
그런 혜석의 요청에 순간적으로 지금 이 피아노까지 있는 커다란 저택과 얼기설기 판잣집인 우리 집이 비교되면서 머릿속이 복잡해 졌으나,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언제든 온나, 보여 줄테니까. 근데 옷을 좀 더럽힐 각오는 해야 할 끼다.”
“왜에~?”
“금마, 아, 우리 간난쟁이 준이가 침도 엄청 마이 흘리는데다, 뭐든 손에 잡히는 대로 막 입에다 다 집어넣는다. 요샌 이빨이 나서 막 깨물고......”
“흐응~ 정말 너무 귀엽겠다.”
그러더니 문득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물었다.
“너 닮았어?”
“와?”
“너 닮았으면 진짜 귀여울 것 같아서.”
“아닌데, 갸는 내보다 니를 더 닮았다. 여자처럼 얼굴도 갸름하고 코도 오똑하면서 눈도 니만큼 크다. 피부도 하예서 우리 누야가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모른다.”
막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중에 갑자기 큰 방에서 전화기가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전화기 소리는 만화에서 본 것처럼 진짜 따르르릉~ 하면서 울렸다.
와~ 그러고 보니 전화기도 있었구나.
나는 혜석과 이야기를 멈추고 전화소리가 들리는 곳만 쳐다보았고, 혜석엄마는 전화를 받고 나오면서 곤란한 얼굴로 우리와 선생님을 보면서 말했다.
“수위실에서 여학생 세 명이 혜석이 쟤 병문안을 왔다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불현 듯 출입문 맞은편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쳐다보았는데, 어느덧 시간은 세시를 넘어 세시 반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오늘은 엄마가 달비 장사를 하러 가시는 날이었다.
적어도 등짝 스매싱 두 대는 예약 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첫댓글 사랑합니더^^
어제 이곳에 들어오지 못해서,
이제야 들어와
내리 두편을
갈증에 물 마시듯 순간 다 읽었네요.
애써 쓰신글에
답례도 없이 재미난 글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언제나 이렇듯 댓글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즐거운 불금이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