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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비딤에서 모압 평지까지
민 33:16-49
16 시내 광야를 떠나 기브롯핫다아와에 진을 치고
17 기브롯핫다아와를 떠나 하세롯에 진을 치고
18 하세롯을 떠나 릿마에 진을 치고
19 릿마를 떠나 림몬베레스에 진을 치고
20 림몬베레스를 떠나 립나에 진을 치고
21 립나를 떠나 릿사에 진을 치고
22 릿사를 떠나 그헬라다에 진을 치고
23 그헬라다를 떠나 세벨 산에 진을 치고
24 세벨 산을 떠나 하라다에 진을 치고
25 하라다를 떠나 막헬롯에 진을 치고
26 막헬롯을 떠나 다핫에 진을 치고
27 다핫을 떠나 데라에 진을 치고
28 데라를 떠나 밋가에 진을 치고
29 밋가를 떠나 하스모나에 진을 치고
30 하스모나를 떠나 모세롯에 진을 치고
31 모세롯을 떠나 브네야아간에 진을 치고
32 브네야아간을 떠나 홀하깃갓에 진을 치고
33 홀하깃갓을 떠나 욧바다에 진을 치고
34 욧바다를 떠나 아브로나에 진을 치고
35 아브로나를 떠나 에시온게벨에 진을 치고
36 에시온게벨을 떠나 신 광야 곧 가데스에 진을 치고
37 가데스를 떠나 에돔 땅 변경의 호르 산에 진을 쳤더라
38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십 년째 오월 초하루에 제사장 아론이 여호와의 명령으로 호르 산에 올라가 거기서 죽었으니
39 아론이 호르 산에서 죽던 때의 나이는 백이십삼 세였더라
40 가나안 땅 남방에 살고 있는 가나안 사람 아랏 왕은 이스라엘 자손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더라
41 그들이 호르 산을 떠나 살모나에 진을 치고
42 살모나를 떠나 부논에 진을 치고
43 부논을 떠나 오봇에 진을 치고
44 오봇을 떠나 모압 변경 이예아바림에 진을 치고
45 이임을 떠나 디본갓에 진을 치고
46 디본갓을 떠나 알몬디블라다임에 진을 치고
47 알몬디블라다임을 떠나 느보 앞 아바림 산에 진을 치고
48 아바림 산을 떠나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강 가 모압 평지에 진을 쳤으니
49 요단 강 가 모압 평지의 진영이 벧여시못에서부터 아벨싯딤에 이르렀더라
민 33:16-49 / 시내 광야를 출발하여 기브롯핫다아와에 진을 쳤다. 17) 기브롯핫다아와를 출발하여 하세롯에 진을 쳤다. 18) 하세롯을 출발하여 릿마에 진을 쳤다. 19) 릿마를 출발하여 림몬베레스에 진쳤다. 20) 림몬베레스를 출발하여 립나에 진쳤다. 21) 립나를 출발하여 릿사에 진을 쳤다. 22) 릿사를 출발하여 그헬라다에 진을 쳤다. 23) 그헬라다를 출발하여 세벨산에 진쳤다. 24) 세벨산을 출발하여 하라다에 진을 쳤다. 25) 하라다를 출발하여 막헬롯에 진을 쳤다. 260 막헬롯을 출발하여 다핫에 진을 쳤다. 270 다핫을 출발하여 데라에 진을 쳤다. 28) 데라를 출발하여 밋가에 진을 쳤다. 29) 밋가를 출발하여 하스모나에 진을 쳤다. 30) 하스모나를 출발하여 모세롯에 진쳤다. 31) 모세롯을 출발하여 브네야아간에 진을 쳤다. 32) 브네야아간을 출발하여 흘하깃갓에 진을 쳤다. 33) 흘하깃갓을 출발하여 욧바다에 진쳤다. 34) 욧바다를 출발하여 아브로나에 진쳤다. 35) 아브로나를 출발하여 에시온게벨에 진을 쳤다. 36) 에시온게벨을 출발하여 신 광야에 다다라 가데스에 진을 쳤다. 37) 가데스를 출발하여 에돔 땅과 맞닿아 있는 호르산에 진을 쳤다. 38)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40년이 되던 해 5월 초하룻날 여호와의 명령으로 아론 제사장이 호르산으로 올라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39) 아론 제사장은 123세로 호르산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40) 가나안 남부 지역에 살던 아랏왕은 이스라엘 백성이 오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41) 이스라엘 백성은 호르산을 출발하여 살모나에 진을 쳤다. 42) 살모나를 출발하여 부논에 진을 쳤다. 43) 부논을 출발하여 오봇에 진을 쳤다. 44) 오봇을 출발하여 모압 땅 가장자리에 있는 이예아바림에 진을 쳤다. 45) 이임을 떠나 디본갓에 진을 쳤다. 46) 디본갓을 출발하여 알몬디블라다임에 진을 쳤다. 47) 알몬디블라다임을 출발하여 느보 맞은편에 있는 아바림산에 진을 쳤다. 48) 아바림산을 떠나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강가에 있는 모압 평원에 진을 쳤다. 49) 요단 강가에 있는 모압 평원에 이스라엘 백성이 친 진영은 벧여시못에서 아벨싯딤까지 다다랐다.
이스라엘이 장막을 친 광야의 지명들은 이스라엘의 뼈아픈 실패와 죄악들이 담겨 있는 곳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런 이스라엘을 안고 인도하신 은혜의 지명이기도 했습니다.
시내 광야를 떠나 기브롯핫다아와에 진을 치고(16-17) 시내 광야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율법을 수여하시고 성막을 주시어 예배의 특권을 부여한 곳입니다. 특별히 이곳에서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소유, 하나님의 마음이 머무는 보물이면서 제사장의 나라, 거룩한 백성이라는 축복을 받습니다. 반면 수치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다른 신 곧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곳이기도 합니다. 또한 기브롯핫다아와에는 만나에 싫증을 내 불평하므로 하나님께서 메추라기를 떼로 내려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음식을 탐하여 감사도 없이 먹기 시작하자 고기가 이빨 사이에서 씹히기도 전에 많은 이가 죽임을 당한 곳입니다.
하세롯에서 호르 산까지(18-37) 광야 진을 치고 이동하는 것을 반복했던 광야의 여정은 여호와의 함께하심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그 약속의 땅을 향한 목적이 이루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망각했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신실하시고 자비로우신 여호와 하나님은 여전히 성막을 중심으로 불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며 낮에는 그늘이 되어 주셨고 밤에는 따스한 온기가 되어주셨습니다. 또한 변함없이 만나와 메추라기를 매일 내려 주셨으며, 낮의 해와 밤의 달이 해하지 못하도록 했고, 옷이 해어지지도 않게 해 주셨으며, 모든 위험으로 보호하시고 지켜 주셨습니다.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강 가 모압 평지에 진을 쳤으니(38-49) 이스라엘 백성이 머문 곳의 지명이 열거됩니다. 그런데 그 지명들은 자랑스럽지 못한 사연을 내포하고 있는 곳이 대부분입니다. 아론이 호르 산에서 123세에 죽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은 호르 산을 떠나 요단 강가의 벧여시못에서부터 아벨싯딤까지에 이르는 모압 평지에 이릅니다. 이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자비 때문에 가능한 여정입니다. 가나안 남방의 아랏 왕을 비롯하여 그 땅의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관한 놀라운 소식들을 접합니다. 이는 그들도 여호와 신앙에게로 돌아올 기회가 주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적용: 지금까지 인생의 광야 길을 나아갈 때 주님은 어떻게 변함없이 당신을 지키시고 인도하셨는지를, 어떻게 실망시키지 않으셨는지를 간증하며 나누어 보세요.
찬송가 301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당신의 지나온 인생을 뒤돌아보면 이 찬양 가운데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는 혹독한 훈련의 장소였습니다. 불 기둥과 구름 기둥을 따라 가다서다 진을 쳤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억합니다. 믿고 따라가니 모압 평지에 이르렀고 소망하던 가나안이 보이는 것처럼 당신의 인생도 하나님이 인도하셨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 설 교 >
르비딤에서 모압까지
민 33:16-49 / 구성교회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겠다고 했을 때, 하나님은 다윗이 “피를 많이 흘렸고 큰 전쟁을 했기에 내 성전을 건축하지 못한다(대상 22:8)”라고 말씀합니다. 이미 지난 사건들을 말씀하는 듯하지만, 주님은 다윗이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실제로 다윗의 정복 전쟁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언약을 주신 이후(삼하 7장)를 지나 사무엘하 8장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집니다. 다윗은 블레셋, 보압, 소바, 아람, 에돔을 차례로 정복합니다. 이 모든 전쟁은 하나님이 주도하셨기에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이 이기게 하셨다(삼하 8:6)”라는 기록이 남게 됩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다윗은 그대로 만족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백성에게 공의와 정의를 행하고(삼하 8:7), 사울의 손자이자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에게 은혜를 베풉니다(삼하 9장).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지는 못하지만, 다윗의 자녀가 성전을 건축할 것과 그의 나라가 영원할 거라는 언약을 받음으로써 자신이 원했던 것보다 더 큰 은혜를 받습니다.
다윗을 보며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알고 그 일을 완수하는 것이야말로 큰 은혜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나온 뒤, 때로는 불평과 원망, 때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습을 보이며 심판과 은혜를 동시에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이 반복되면서 누군가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심판받고, 누군가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자기 사명을 완수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본문에 나오는 지명이 현재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장소가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장소들은 슬픔과 기쁨, 고통과 감사, 두려움과 승리의 장소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런데 38절에 있는 아론의 죽음에 대해선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기록합니다. 그가 더 살 수 있었는데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그의 생명이 다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아론의 이름을 떠올리면 그가 제사장으로서 백성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어 가기 위해 노력했다는 모습보다 출애굽기 32장에서의 황금송아지 사건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아론이 맡은 제사장 직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드러내야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아론은 하나님의 기대를 완전히 무너뜨려 버립니다. 자신이 제사장으로서 마음대로 ‘우상’을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에 대해 출애굽기 32장의 아람어 역본(타르굼)은 “아론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이 임재하신 영광을 송아지로 바꾸었다”라고 말합니다(시 106:19~21). 아론은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고, 결국 그 선물을 누리지 못해 엉뚱한 것을 만든 것입니다.
아론으로 인한 황금송아지 사건은 이스라엘에게 하나의 전환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황금송아지 사건 이전에는 십계명, 언약, 성막 건축에 관한 법이 등장하지만, 황금송아지 사건 이후에는 광범위한 제사장법(출 35장~레16장)이 등장합니다. 즉, 황금송아지 사건 이후,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은 더 복잡하고, 더 범위가 넓은 제사장법을 지켜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엉뚱하게 사용하면 그 사명을 완수하기까지 매우 먼 길을 돌아와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치 삼손처럼 말이죠. 본문에서 ‘호르 산’을 언급하며 굳이 아론을 언급하는 이유는 그가 제사장으로서 헌신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유로는 그가 보여준 실수와 잘못이 이스라엘의 멸망을 가져올 수 있었다는 교훈을 줍니다. 사명 앞에서 도망치고 피하지 마시고 주께서 주신 은혜를 바라보며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하나님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애굽에서 모압 평지까지 로정
민 33:5-49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이 광야에서 방랑하던 일을 자세하게 진술해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행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를 우리에게 전해 주신다는 것을 생각할 때 감개무량합니다. 그 여행은 백성들이 애굽에서 떠나는 순간을 기점으로 요단을 건널 때까지니, 말하자면 사망과 암흑의 땅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까지의 여행입니다. 신 2:7에 “네 하나님 여호와가 이 40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였음으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길의 모든 보조를 정하셨고 광야의 모든 단계를 같이 여행하셨으며 백성의 모든 고통을 친히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 많은 간호원처럼 백성들을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40년 동안 백성들의 옷이 헤어지는 것이나, 백성들의 발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보시는 것을 견딜 수가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손으로 그들을 인도하실 길을 정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노정입니까? 이 얼마나 놀라운 노정의 동반자입니까? 광야의 여행의 매단계가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과 조금도 실수가 없는 그의 지혜에 의해 정해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는 것은 피곤에 지친 여행자의 마음에는 그대로 큰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을은 길을 따라 자기에게로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그들의 생활의 단 하나의 환경이나, 그들의 산에 있는 단 하나의 물의 성분이라도 그들의 현재적 유익 및 미래의 영원한 축복과 관련해서 하나님께 주의 깊게 정해 놓지 아니한 것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 단순한 믿음 안에서 우리의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내어 던지고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소원을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손 안에 맡기고 우리는 다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만 하기로 하여야 할 것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라암셋에서 출발하여 40개의 장소가 모압 평 지에 이르는 동안 언급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와 민수기에 기록된 대로 이스라엘의 여행의 세 가지 중요 단계가 나열되어 있습니다. 1. 라암셋에서 시내 광야까지의 노정(5-15절) 그들은 계속 이동했습니다. 그들은 잠시 한 장소에 진을 치고 있다가 다 시 다른 곳으로 떠났습니다. 이러한 것이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상태입니다. 이같이 우리가 사는 세상도 영구히 살 장소가 아닌 순례자의 길에 지나지 않음을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길의 대부분은 사람이 거하지 않는, 사람의 자취가 없는, 심지어는 인생의 필수품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광야를 지나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높이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인내와 선물에 의해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40년 동안 그 황량한 곳에서 살아나갔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행군할수록 적어도 더욱 그 수가 불어나고 활기 있게 되어 갔던 것입니다. 맨 처음 그들은 “광야 끝에다 진을” 쳤습니다(6절). 후에는 그 심장부에 진을 쳤습니다. 별 어려움 없이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더 큰 것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에담 광야(8절), 신 광야(11절), 시내 광야(15절)에 있었던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라암셋에서 시내 광야까지 열 한 계단이 있었으니 지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라암셋-숙곳-광야 끝인 에담-믹돌-마라-엘림-홍해가-신광야-돕가 알루스-르비딤-시내 광야 2. 시내 광야에서 가데스까지의 노정(16-36절) 여행은 첫 해 정월 15일에 시작됩니다. 다른 월력은 호르산에서 아론이 죽은 것은 40년 5월 첫 날이라고 합니다. 만일 이 여행기가 처음 단계에서 1년을 머물고(민 10:11), 전체적으로 40년 걸렸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처음 열 곳에서는 1년간 머물렀고 두 번째 단계에서 본문의 아홉 단계 지역에서 21년간 머물렀으며, 나머지 단계에는 9년을 머문 셈이 됩니다. 40이라는 숫자는 광야 40년의 전승에 적응시켜 보려는 이상적인 여행기의 노력인 듯합니다. 물론 그 숫자가 분명히 한 장소에 1년씩 머물렀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민수기는 모세가 기록한 것으로(2절)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특별한 기록입니다. 그들은 미로나 미궁에 있는 자들처럼 이리저리로 전후방으로 이끌려 다녔으나, 항상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호위 아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인도하셨으며(신 32:10),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셨습니다(시 107:7).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그에게로 데리고 오기 위하여 대하시는 길은 더욱 그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가까운 길로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길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이었고 가장 좋은 길이었습니다. 시내 광야에서 가데스까지 21계단이 있었으니 그 지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시내 광야-릿마-림몬 베레스-립나-릿사-그렐라다-세벨산-하라다-막헬롯-다핫-데라-밋가-하스모나-모세롯-브헤야아간-흘하깃갓-욧바다-아브론다야-에시온게벨-가데스 3. 가데스에서 모압까지의 노정(37-49절) 여기 기록된 지명들의 위치가 명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광야의 진은 오래 오래 계속해서 기억되지는 않습니다. 또한 그 지명들은 그 지 방을 사용한 사람들에 의해 소멸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 나타 난 정확한 통로를 그대로 지도에 옮겨 놓기란 불가능합니다. 이미 알려진 것은 성서 지리부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위치가 분명한 것은 시내반도를 건너서 에서온게벨에 이르기까지입니다. 북쪽 가데스까지 그리고 최종적으로 에돔을 지나 동쪽으로 그리고 북쪽 모압 평지까지는 비교적 정확합니다. 40절에 “가나안 사람 아랏 왕이‥‥‥‥”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광야 노정에 전쟁에 관한 상세한 기록까지 제시한 것은 그들의 행로를 역사에 남기고자 기록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지경까지 여행왔을 때 그들은 마침내 원수들을 만나게 되어 이때부터 가나안 땅의 한 민족과 싸움을 시작했다고 전에 있었던 역사를 간략하게 다시 쓰고 있습니다. 르비딤에서 그들에게 물이 없었던 것(14절)과 아론의 사망(38-39절)과 아랏의 모욕(40절)과 같은 몇 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브롯 핫다와 곧 (정욕의 무덤)이라는 바로 그 이름은(16절) 거기에 따른 얘기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 가족, 우리와 우리 땅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를, 그 리고 여지껏 우리를 인도하고, 우리를 먹이고 지킨 하나님의 배려에 대한 여러 가지 사례들을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 브올의 사건으로 백성들이 죄를 지은(28정) 그 장소인 싯딤이 여기에서는 이벨싯딤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아벨(창 50:11)은 애곡을 의미합니다. 아마도 이 장소는 이스라엘의 선한 백성들이 그 죄로 인하여 그리고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슬퍼한 사실에서 그렇게 불리웠을 것입니다. 가데스에서 모압까지는 아홉 계단이 있습니다. 그 지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데스-호르산-살모나, 보논-오봇-이에아비림-디본갓-알몬디볼라다낌-아바림산-요단강가 모압 평지 이 모든 계단을 통하여 경유한 땅이 모두 41차였습니다. 이 땅 이름들중에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도 천국까지 인도하길 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함으로 그의 인도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세롯을 떠나 릿마에 진을 치고
민 33: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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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애굽에서 요단강가 모압 평지까지(민33:1~49).
16절. 시내 광야를 떠나 기브롯핫다아와에 진을 치고
“기브롯”은 히브리어로“카베르”인데“묻다, 매장하다”을 뜻하는“가바르”에서 유래한 것으로“무덤, 매장지, 묘실”을 뜻한다. “핫다아”는 히브리어로“타아바”인데“마음을 기울리다, 바라다, 열말하다”을 뜻하는“아바”에서 유래한 것으로“갈망, 소원, 탐욕, 소욕, 욕심”을 뜻한다, 이스라엘은 이곳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불순종에 따른 징벌을 받음으로써“탐욕의 무덤”이라는 이 오욕의이름을 남겼다(신9:22).
17절. 기브롯핫다아와를 떠나 하세롯에 진을 치고
“하세룻”은 히브리어로“하체로트”인데“울타리, 마을”을 뜻하는“하체르”에서 유래한 것으“기브롯 핫다아와” 인근 지역이라는 것 외에 그 위치에 대해 알려진 바 없다. 혹자는 이 곳을 오늘날 빌-엣-테벱(Bir-et-themmed) 지역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 이곳에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다가 화를 당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12:16, 신1:1)
18절. 하세롯을 떠나 릿마에 진을 치고
“릿마”는 히브리어로“리트마”인데“금작화, 로뎀나무, 떨기나무”을 뜻하는“레뎀”에서 유래한 것으로“사막의 한 지역을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곳을 이스라엘이 처음 도착했던“가데스”와 동일 지명으로 이해한다. 이에 대한 근거로 그는 민12:16절에 이스라엘이“하세롯”을떠난 후 바로 바란 광야에 진 쳤다는 사실과, 또한 그 다음에 곧바로 가데스의 정탐꾼사건이 나오는 것을 들고 있다(13장). 아울러 그는 고고학적으로도 이곳 릿마를 오늘날의 아부-레테맛 계곡(Wady Abu-Retemat)으로 보고, 숙영지로서는 매우 좋은 곳이라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을 종합하면, 당시“하세롯”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은“릿마”에 진쳤으나, 그곳은 200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가데스”까지 백성들의 진영이 퍼져나갔던 것으로 본다, 그리고 정탐꾼 사건은 이곳 가데스에서 일어났으므로, 이후로는 가데스란 지명으로 더욱 알려진 듯하다(민33:18).
이스라엘아 너는 행복하다
신 33:26~29
이제 신명기 34장 중에서 오늘 본문은 33장입니다.
신32장이 '모세의 노래' 라면
신33장은 '모세의 축복' 입니다.
임종 전에 남긴 유언과 같은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또 창세기가 50장까지 인데, 50장을 한 장 앞두고 49장에 '야곱의 축복'을 기록했다면,
신명기가 총34장까지 인데, 마지막 한 장을 앞두고 33장이 '모세의 축복'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본문 신33장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요,
◑1. 첫번째는 모세가 열두 지파를 축복하는 내용입니다. (신33:1~25)
33:1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푼 축복이 다음과 같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고 또 열두 지파를 축복기도를 해줍니다.
이 축복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가요?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얘기합니다.
'예배는 못 드려도 축복기도는 받는다.'
그러니까 예배를 못 드리는 한이 있어도, 그래도 마지막 시간에 참석해서 축복기도는 받아야 된다..는 거죠.
축복의 기도는, 단순히 좋은 말이 아니라 이 축복이라는 것은 사람의 입술을 빌려서, 하나님께서 그 복을 내려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소중한 의미가 있는 것이죠.
열두 지파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은, 창세기 49장은 야곱을 통한 축복기도, 그리고 오늘 본문 신33장은 모세를 통한 축복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열두 지파에 대한 두 장의 내용이 역사적인 시간으로는 한 470년의 차이가 나지만 굉장한 일관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 장chapter 을 비교해 가면서 함께 나누겠는데요.
이 두 개의 축복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주시는 일관된 메시지가 있습니다.
두 가지를 보겠는데요
▲1. 아버지 입술에 축복의 권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자녀를 훈계할 뿐만 아니라, 자녀를 축복하는 입술이 되기를 바랍니다.
각 가정마다 어머니는 세심하고, 아버지는 근엄하고.. 그런 집들이 많죠.
그러다 보니까 자녀들이 아버지를 좋아하면서도, 좀 멀리하는 그런 경향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그 아버지의 칭찬 한마디, 축복 한마디가 자녀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아버지가 늘 탁월함을 요구하다가도 '야 네가 정말 잘 한다!' 이 칭찬이나 축복의 한마디가
자녀에게 굉장한 자신감을 주고, 그의 인생의 방향을 바꿔 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삭이 에서와 야곱에게 축복해준 그대로 에서와 야곱의 인생이 진행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 야곱이 12 아들을 축복해준 그대로 그 후손들의 인생이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내용을 보면, '정말 부모가 말 한마디를 해도, 잘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죠.
부모의 언어가 굉장히 중요한 것이죠.
▲2. 이 축복기도를 통해서 보는 것은 오늘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는가가 가문의 미래를 좌우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미래만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가문의 미래를 좌우합니다.
'오늘' 이라는 시간은, 어제 위에, 내일은 오늘 위해 쌓아가는 것이잖아요.
인생이라는 것이 불연속이 아니고 연속이기 때문에 오늘 한순간에,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매우 중요한 것이죠.
근데 개인에게 뿐만 아니라, 그 개인 이후에 그 자손의 세대가 이어지잖아요.
그래서 가문 안에 영적인 도미노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요즘 보면, 안타까운 것이 '욜로족'이다. 이런 표현을 쓰는데 '당신은 인생을 한번 사는 거다. 그러니까 피곤하게 살지 마라.
누구하고 결혼해서 희생할 것도 없고, 자식 낳아서 고생할 필요도 없고 그러니까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죠.
그럼 한번 살고 끝나나요?
아니요. 그의 삶이 그 다음 세대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거예요.
이것을 또 다른 표현으로 얘기하자면 '영적인 나비효과' 같은 것이죠.
그래서 각 지파를 보면, 굉장히 좋게 시작했는데.. 안 좋아지거나 안 좋게 시작했는데.. 놀라운 반전을 이루는 경우들이 생깁니다.
왜 그런가요? 그 가문의 선조가, 아니면 첫 선조가 아니라, 그 중간에 있는 그 누군가가 (죄든지/선행이든지) 중요한 삶의 결단을 내렸을 때 가문의 역사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는 일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렇게 변화가 되면, 그것이 좋은 변화이든. 나쁜 변화이든 그 흐름이 계속해서 다음 세대로 그대로 흘러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심리적으로 내리 사랑, 내리 분노.. 이런 표현을 쓰죠.
이게 내려간다는 거예요. 계곡물처럼 아래로, 다음 세대로 흘러내려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아무리 힘들지라도 '에이 모르겠다' 그러고 막 살면 안 되는 것이죠.
하루 한 순간을 옷깃을 여미면서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 한 사람이 어떤 방향으로 기우느냐에 따라서 우리 가문의 역사가 완전히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죠.
신33:1~25절까지가 열두 지파에 대한 축복기도입니다.
이 시간 열두 지파를 다 다루고 싶지만,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몇 개 지파만 다루겠습니다.
<르우벤 지파>
33:6 '르우벤이 살고 죽지 않을 것이며 그의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살기는 살겠고 죽지는 않을 거다.. 이게 어떻게 축복이라고 얘기할 수 있나요?
르우벤은 장자이기 때문에, 축복 기도를 첫 시작으로 받긴 했지만 사실 이 장자 르우벤은 창49장을 보면, 아버지 야곱에게 저주를 받았던 아들이죠.
'네가 아비의 침상을 더럽혔기 때문에 너는 결코 탁월해 지지 못할 것이다'
물론 르우벤이 잘못했어요. 그러나 르우벤이 자기의 인생의 에너지와 힘을 엉뚱한데 쏟게 만든 이가 누구냐는 것이죠.
물론 아버지 야곱도 레아 하고 결혼할 생각은 없었어요.
레아는 자기가 원하는 아내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결혼식을 치르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레아인 거예요. 라헬이 아니라. 야곱은 레아를 사랑하지 않았어요.
사랑하지 않는 아내에게서 낳은 첫번째 아들 르우벤을, 아버지 야곱은 사랑하지 않았어요.
첫째 아들인데.. 그를 인정해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 아들은 전혀 리더십을 갖지 못했어요.
아버지가 세워주지 않는데, 동생들이 그 형을 인정하겠습니까?
동생들도 르우벤을 무시해버렸어요. (구덩이에 떨어진 요셉을 르우벤이 살리라고 했는데, 동생들이 말을 듣지 않음)
여러분, 여러분의 장남, 장녀 물론 다른 자녀들도 해당이 되지만 그들이 그냥 내가 축복해 줄 것이 없어서 그냥 생존의 축복을 해줄 정도의 관계라면... 다시 생각하셔야 됩니다.
여러분이 부부관계에 있어서 남편은 너무 밉지만.. 혹은 아내는 내가 꼴도 보기 싫지만 내가 자녀는 축복하겠다... 그게 가능한 줄 아십니까?
내 남편을 사랑하지 않고, 내 아내를 사랑하지 않으면 자녀를 온전하게 사랑할 수 없게 되어 있어요.
그것이 가정에 대한 성경적인 원리입니다.
여러분 가정안에 하나님의 회복과, 치유와, 사랑이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내 장남, 장녀에게 르우벤에게 '축복같지 않은 축복'을 해주는 이런 수준의 가문이 되지 않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첫 자녀인 장남 장녀를 사랑해주시고 인정해 주시고, 세워주셔야 돼요. 어디를 가나 인생에는 질서가 필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 유다 지파>
33:7 그리고 그는 유다에 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여, 유다의 부르짖음을 들어 주십시오. 그에게 그 백성들을 보내 주십시오. 자기 손으로 스스로 변호하고 있습니다. 그 원수들을 대항해 그의 도움이 돼 주십시오!”
이 축복기도문이 전부 시 형태로, 운문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약간 시적인 언어라서, 표현이나 이해가 빠르지는 않지만 유다 지파에게는 '그 백성들을 보내달라' 라는 축복을 했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어를 직역한 것인데, 그 의미를 풀면 '유다지파를, 그 백성들 12지파에게로 인도해주소서'라는 뜻이죠. 다시 이야기하자면 '유다지파가 지도자 역할을 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창 49장에서도 '통치자의 지팡이가 유다 지파에게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죠. 창49:10
그럼 처음부터 유다 지파가 훌륭했는가요? 아닙니다.
유다는 원래 넷째 아들이었고, 더 심각한 문제는 그는 기회주의자였죠. 창37장에 보면, 동생이 미워서 '야 저기 꿈쟁이가 온다' 그러고서는 그 동생을 구덩이에 넣고 죽이려고 했었죠.
그때 장자 르우벤이 '내가 잠시 어디 갔다 와야 되는데, 동생을 절대 해치지 마라!
근데 형이 아무런 리더십이 없었거든요. 아버지의 인정을 못 받으니까.
형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둘째 시므온, 셋째 레위가 역할을 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시므온과 레위가 요셉을 죽이려고 했어요.
그때 넷째 아들인 유다가 '동생 죽여서 우리가 무슨 좋은 일이 있겠느냐.. 그냥 팔아넘기자!'
그래서 구약에 유다도, 신약에 유다도 사람을 팔아넘기고 돈을 받았죠.
구약의 유다는 은 20개를 받았고, 신약의 유다는 30개를 받았죠.
은 20개를 챙겼어요. 그는 기회주의자였습니다. '난 적어도 죽이지는 않지 않았느냐?' 아니요. 실리적인 이득을 취하는.. 그 상황에서도 이익을 챙기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유다는 그 죄책감 때문에 창 38장에 보면 자기 가족을 떠나서 영적인 방황을 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를 집요하게 추적하시면서 자기 아내가 죽고, 자기 두 아들 엘과 오난이 죽고 또 집요한 며느리 다말을 만나서 그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고꾸라지고, 자기의 죄를 다 쏟아놓고 회개하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기회주의자였던 유다가 회개하고 가족에게 돌아와서, 가족을 위해서 헌신하기 시작하죠.
그리고 특별히 애굽에서, 총리 요셉과 나머지 11형제를 화해시키는데 있어서 유다가, 자기 목숨을 담보로 잡히면서, 큰 공헌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점들이, 그가 12지파의 실질적 지도자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으리라 봅니다.
그래서 아버지 야곱이, 유다를 축복하기를 '너는 우리 집안의 장차 대대로 지도자의 집안이 되라' 지도자는 물론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이기적인 시대가 되어가고, 개인주의시대가 되어가기 때문에 가정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정을 위해서 흘린 당신의 눈물을 반드시 헛되게 만들지 않으실 줄로 믿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리더십'의 법칙이에요. 세상만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도, 가정을 위해,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 리더가 돼야 된다는 거에요. 그래야 세상이 평안하다는 것이죠.
<시므온 지파가 누락되다. 신33장에서>
자 그런데 세 번째 지파로 넘어가기 전에 이 축복기도문에서 이상한 점은, 한 지파가 누락이 되어 있어요. 열한 지파가 등장하는데, 시므온 지파가 누락이 됐어요. 그래서 시므온 지파처럼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우리가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시므온 지파도 아버지 야곱에게 저주를 받았던 그런 아들입니다. 시므온이 동생 요셉을 죽이려고 선동했던 사람이고 또 세겜성 사람들이 밉다고 해서, 그들을 속여서 (레위와 함께) 칼로 대학살을 일으켰던 주동자 였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분노했던 것이죠. 그런데 이 시므온의 악행에 레위가 동참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창49:5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그들은 칼을 쓰는 자들이다, 폭력적인 자들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에 보면, 오늘 본문에 보면 레위 지파는 축복을 회복했어요.
그런데 시므온 지파는 회복을 못했어요.
그럼 누구는 회복을 하고, 왜 누구는 회복을 못했는가요?
민수기의 광야 여정에 보면, 싯딤에서 바알 브올 사건이 있었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방인들과 혼합되지 말라고 했는데 이방 여인들과 섞이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때 미디안 여자를, 감히 하나님의 임재가 계신데도 그 진영에 데리고 들어온 사람이 있었어요. 그래서 레위 지파 비느하스가 창을 들고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죠.
그때 죽은 그 사람이 바로 시므온 지파의 시므리 라는 사람이었어요. 민25:14
여러분 레위 지파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 다시 하겠지만 레위 지파는, 아버지에게 저주를 받고, 저주 받은 가문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지파의 운명을 바꿔놓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시므온 지파는 레위와 똑같은 저주를 받고, 그 저주가 계속해서 이어진 거에요.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에 회복의 기회는 늘 있습니다. (레위지파)
오늘이라도 회복의 기회는 있는 거예요.
상처를 서로가 보듬고, 치유하고, 회복하는 일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유턴하지 않으면 마치 물이 아래로 떨어질수록 가속도가 붙고 힘이 붙는 것처럼
내리 축복이 아니라, 내리 저주가 더 강력해지는 것을 이 시므온 가문의 역사에서 보게 됩니다.
<레위 지파>
33:8 레위에 관해 그가 말했습니다. ...
33:9 그가 자기 부모에 관해 ‘그들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자기 형제들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자식들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의 칼을 바라보고 주의 언약을 지켰습니다.
'부모도 형제도 자식도 눈에 안 보였다. 주의 칼만 바라봤다.' 여기 또 칼이 나오죠.
그럼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요?
레위 지파가 복을 받은 것은 '주의 칼을 바라봤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어요. 위9절.
출32장에 보면, 시내산 앞에서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십계명 돌판을 받는 그 중요한 시점에 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 우상을 세워 놓고, 그 앞에서 절을 하고 난리가 났어요.
모세가 내려와서 분노하면서 '누가 하나님 편에 서겠느냐?' 그때 놀랍게도 칼을 차고 레위 지파가 나옵니다.
세겜 성 사람들에게 칼을 썼던 레위와, 4백 년이 흐른 뒤에 그 레위 후손들도 다 칼을 썼어요.
그런데 예전에는 개인적인 원한을 갚는데 칼을 썼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데 칼을 쓴거에요.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기 위해서, 레위 지파가, 가족과 형제와 자기 자식조차도 내려놓고 하나님 편을 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이 평생 하나님 앞에 양을 '칼로' 잡는 제사장 지파가 되도록 만드셨던 것이죠.
여러분, 아버지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를 저주하면서 창49장에 보면, '너희는 지파로서 존속하지 못하고 흩어지게 될 것이다' 그런 저주를 내렸어요.
시므온 지파는 유다 지파안에 땅을 분배 받으면서 나중에는 지파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릴 정도로 흩어지게 됩니다. 사사기에서 실제로 그대로 이루어졌어요.
레위 지파도 놀랍게 그들은, 축복으로 그들 지파의 운명을 바꿔놓기는 했지만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하고 전국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지는 못했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너희의 기업이 되어 주시겠다' 할렐루야! 이 축복의 말씀을 주신 것이죠.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많이 속을 썩인 자식이 부모의 은혜를 더 알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늘 기로에 서 있는 것입니다.
내 인생은 시므온 지파로 전락할 것인가?
아니면 레위 지파로 회복될 것인가?
내가 그냥 우리 가문의 흘러오는 대로 이 분노가 '내리분노'로 흘러가도록 놔두고 이 저주가 '내리저주'로 흘러가게 놔둘 것인가? 그러면 시므온 지파로 전락하는 것이고요.
그러나 누군가가 하나님을 위해서 결단하고, 인생을 턴 turn 하면 하나님께서 그 지파를, 그 가문을 레위 지파처럼 회복하시리라는 약속입니다.
여러분, 칼을 쓸 줄 아는 것도 능력이죠.
다만 그 능력을 어디에 사용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칼을 사람들에게 휘두르면 다치는 것이고 그 칼을 가지고 음식을 만들면 많은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죠.
여러분의 자녀들가운데도, 시므온과 레위 같은 캐릭터를 가진 자녀들이 있을 겁니다.
의분이 강하고, 못 참고... 네 제 친구도 아들이 그래서 학교에서 뭔가 잘못된 일이 있으면 선생님께 찾아가서 항상 얘기하고.. 갈등하고..
이게 부모는 너무나 걱정스럽지만, 아이의 캐릭터가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주어진 아이들이 있어요.
부모가 볼 때는 '얘가 왜 이렇게 공격적인가?' 그래서 그것이 잘못됐다고 무조건 누르려고 하는데 그게 능사는 아니죠.
그의 내면에 있는 그 에너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대의를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다른 사람을 살리는 데 사용될 수 있도록 격려해주고 중보기도를 해주셔야 돼요.
<요셉지파>
33:13 요셉에 관해 그가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땅을 저 위 하늘의 귀한 이슬과 저 아래 저장한 깊은 물로 복 주시기를!
33:14 해가 내는 가장 좋은 빛으로, 달이 내는 가장 좋은 빛으로
33:15 옛 산들의 가장 좋은 선물로, 영원한 언덕의 많은 열매들로
33:16 땅과 그 충만함의 가장 좋은 선물로, 불타는 덤불 속에 계셨던 분의 은총으로, 이 모든 것들이 요셉의 머리 위에 머물기를, 그 형제들 가운데 왕자인 그의 눈썹에 있기를!
33:17 그의 위엄은 수송아지의 첫배 새끼 같으며 그의 뿔은 들소의 뿔과 같도다.
그 뿔들로 그가 민족들을 받을 것이고 땅 끝에 있는 민족들까지 받을 것이다.
에브라임에게는 만만이요 므낫세에게는 천천일 것이다.”
요셉지파를 볼 때마다 '복에 겨운 지파다' 하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위에 길게 예언된 내용이 모두 복, 복, 복입니다.
창49장에서도 가장 긴 구절로 복을 선언해 준 것이 요셉지파였고 본문 신33장도 5절에 걸쳐, 길게 계속해서 축복을 해줍니다. 축복이 넘치는 지파에요.
왜 그렇게 야곱이, 그 12 아들 중에서 11번째 아들인데 그를 그렇게 사랑했는가요?
자기가 사랑하는 아내의 첫번째 소생이기도 했지만 집에서 가장 출세했기도 했고, 근데 출세한 아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요셉이 자기를 죽이려고, 자기를 해코지하려고 했던 형제들을 다 용서하고 그들이 곤경에 빠졌을 때, 온 가족을 구원하는 역할을 하죠.
그래서 그 아들 요셉을 특별히 사랑했고 축복을 해줬어요.
그래서 유다가 세상적인 지도자의 그 축복을 받았다면, 레위는 영적인 지도자의 축복을 받게 되고, 요셉은 땅의 축복, 물질의 축복을 받게 됐어요.
만약에 여러분에게 위 세 가지 중에 선택을 하라면 뭘 선택하시겠어요?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면 '저는 세 가지를 다 원합니다' 이렇게 대답하지 마시고요..
요셉에 대한 이야기 좀 더 하면 창49:22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에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아버지가 아들에 대해서 막 감격하면서 해준 축복이에요.
그래서 "야곱의 축복"이라는 복음성가도 있는데, 저는 요즘 좀 이 노래를 잘 안 불러요.
왜냐하면 복 받는 건 좋은데, 제 성격상 '왜 남의 집 담장까지 넘어야 될까?'
요즘은 그러면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어요. 소송 걸고 난리나요.
결국에 이 요셉지파는 어마어마한 축복을 받았는데 땅의 축복, 물질의 축복을 받았는데 결국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나중에 여호수아서에서 12지파가 땅 분배한 것을 보면 요단강 서편 지역의 전체에서 거의 절반을 차지했어요. 땅도 넓게 분배받았어요.
12지파인데 사실 요셉에서 나온 두 아들을 각각 한 지파씩.. 그래서 두 분깃을 준 것입니다.
레위 지파가 주님을 섬기는 성막 봉사로 빠진 사이에, 요셉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로 두 지파가 되어서, 결국 12지파를 형성합니다.
그래서 이 두 아들이, 전체로 놓고 보면, 요단강 서편에서 2/5 또는 절반 정도를 차지합니다.
여호수아 때 땅분배 할 때 그렇게 넓게 받았어요. 정말 아버지가 축복해준 대로 됐어요.
근데 문제는 뭐냐면, 결국에 에브라임이 유다 지파를 향해서 '왜 너희만 지도자가 돼야 되냐? 왜 너희만 왕이 돼야 되냐? 우리가 최고 기득권을 주장할 수 있는 지파다.'
그래서 결국에는 반역을 일으키고 북왕국 을 세우죠. 그리고는 영적 정통성이 필요하니까, 그들이 우상숭배를 하기 시작하죠. 이스라엘을 타락시킨 장본인들이 돼버렸어요.
그리고 결국에는 그게 나중에 신약의 '사마리아인'까지 가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책을 쓰고 싶은데, 그건 뭐냐하면 글쎄요. 우리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축복의 원리, 하나님의 강복의 원리에 대해서 너무나 단순논리로 생각을 하고 있거든요.
근데 하나님의 강복의 원리, 성경적으로는 '시소의 법칙' 입니다. 여러분 '시소의 법칙' 이란, 내가 겸손이 뒤로 물러서면.. 인생이 오르막길이 되고요. 내가 나서겠다고 교만하게 앞으로 나가면.. 내리막길이 되는 거예요.
아니 그런 법칙이 어디 있나? 세상에서는 내가 잘 나고, 능력이 있고, 높이 오르면 다 되는 거지...
아니요. 세상에서도 그러면 위태로워지죠. 공공의 타겟이 되죠.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 겸비하는 사람의 인생을, 오르막길 인생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나 스스로 잘난 척하고, 교만하는 인생은 내리막길이 되도록 만드신다는 거예요.
요셉 지파와 유다 지파를 비교해 보면 처음에 겸손하고 성실했던 요셉은 정말 좋았죠.
그런데 후손들이, 그 섬김의 리더십을 다 망각해버린 거예요.
그들의 선조 요셉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그 형제들을 다 용서해주고 끌어안고 섬기며 살았는지... 그 시절을 다 망각하고 기득권만 주장한 거에요. 그리고는 망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 지파는 처음에는 기회주의자였지만, 회개하고 가정을 위해 헌신했잖아요. 막내 베냐민은 배다른 동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베냐민을 위해서 '베냐민을 살려주시면 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유다는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아내도, 두 아들도 다 데려가셨잖아요.
'저는 이제 가족도 없고, 저 혼자 뿐입니다. 네, 우리 12형제를 살릴 수만 있다면, 내 생명을 바치겠습니다.'
이런 눈물겨운 헌신을 했을 때, 아버지 야곱이 그 유다를 보면서 '너야말로 가족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너야말로 너로부터 왕들이 이어서 나오며 지도자들이 나오는 지파가 될 것이다.' 라고 축복하고, 예언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렇게 반전을 이루게 된 것이죠. 여러분의 인생에도 반전의 역사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2. 자 두 번째 이스라엘의 행복의 비결입니다. 신 33:26~29
33:26 '여수룬의 하나님 같은 분은 없다. 그분은 너를 도우러 하늘을 타고, 그분의 위엄으로 구름을 타고 오신다.'
'여수룬의 하나님 같은 분은 없다' 왜 이렇게 이야기를 했을까요?
오늘 본문의 내용, 그리고 신명기의 문맥, 성경 전체 문맥을 가지고 4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실제로 전능자 하나님 같은 분은 없기 때문입니다.
'여수룬의 하나님 같은 분' 이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이 하나님은, 그냥 다른 민족들이 보면 '여수룬이 믿는 신 같은 신은 없다' 이런 표현이에요.
그러니까 많은 민족들, 나라들, 족속들이 자기의 신을 믿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는 하나님과 같은 신은 세상에 없다는 거예요.
열방 민족들이 섬기는 신들을 보면 다 다신론적 개념의 선상위에 놓여있는 신들이죠.
그러나 우리는 영원하신, 유일한 창조주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 영원한 초월자께서, 시간 속에 내주하셔서 다른 그 누구도 아니고, 나에게 다가오셔서 나의 구원자, 나의 인도자가 되어 주신다는 게.. 이게 얼마나 놀라운 감격이냐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많은 족속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미약한 히브리 족속,
사실 여러분 팔레스타인 땅덩어리를 보면 이스라엘 영토가 충청남북도 사이즈죠. 우리는 분할되어 있는 남쪽 영토만 봐도 사실 큰 땅이 아니거든요. 근데 그것보다 훨씬 작은 그 이스라엘 영토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친백성을 삼으셨다는 거예요.
너무나 감격인거죠.
제가 이걸 어떻게 표현을 해야 될까 고민하며 설교를 준비하다가, 갑자기 최근에 뭐 굉장히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도깨비 드라마'가 생각이 났어요. 반년 전이지만, 아직도 그 열풍에 이렇게 빠져 계신 분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만약에 공유(주연배우)가 수천 수만 명의 팬들이 있는데 팬 미팅을 하다가 갑자기 무대에서 객석으로 내려와서 한 사람을 지목하면서 '제가 평생 당신 곁에서 당신을 돕는사람이 되겠다' 그러면 그가 기절하지 않겠어요?
왜 도대체 왜? 너무나 감격적인 거죠.
제가 이번에 동경 '러브소나타'에 가서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뭔가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알게 됐어요.
일본 목사님들이 한국 목사님들 보다 훨씬 전통적이고, 굉장히 젊잖으십니다. 예의 바른 분들이잖아요.
그런데 이재훈 목사님만 나타나시면, 너무 어린 아이처럼 해맑게 반가워하면서 막 사진 찍자 그러고, 너무나 다들 좋아하세요.
얘기를 들어보니까, 일본 사람들은 그 모임 중에서 '누구가 가장 중요한 지도자다' 그러면 딱 (그 권위를) 인정하고 들어가는 게 있다는 거에요.
근데 한국 사람들은 잘 인정을 안 하거든요. 그래서 그 한국인의 정서에 대해서, 한국학 학자의 강의를 들었을 때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외국에서는 누가 총리가 되고 그러면, 어렸을 때 초등학교 친구들이 '그 친구가 어렸을 때부터 좀 비범했던 것 같다.. 조용히 혼자 책 보고..'
근데 우리나라에서는 '그 사람, 어릴 때 내 가방 들고 다니던 아이였는데..' 뭐 이런 식으로 잘 인정을 안 하는 국민성이 있다는 그분의 주장입니다.
'네가 장관하면 나도 장관 한다' 뭐 이런 식의 문화잖아요.
그러니까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조선 땅에 와서 너무나 놀랐다는 거예요.
섬나라에서 그들끼리 싸울 때는, 무사들끼리 싸우면 누군가가 승자가 결정되거나 하면, 백성들은 무조건 승복이에요. 딱 인정입니다. 인정하고 들어가는 문화입니다.
임진왜란 때는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거의 주요 성읍들을 다 정복하고 왕은 도망치고 그럼 게임이 끝난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곳곳에서 의병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승자에 대해 인정을 안 하는 거예요. 승복을 안 하는 거예요. 그리고 한 노병이 나타나서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하면서 말도 안되는 전쟁을 일으키니까 당황스러운 거죠.
여러분 영적인 측면에서도, 우리 삶에서도, 적용할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아무리 강력해도, 뚫고 나가야 되고, 도전해야 될 것은 도전하셔야 돼요.
그러나 또 정반대로 인정해야 할 것은 인정하셔야 돼요.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게 무엇이냐면 '당신이 믿는 하나님 같은 분은 없다'는 거예요.
세상 어느 민족이 믿는 신들과 비교해보라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와 비교해도 당신의 믿는 하나님 같은 분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2. 하나님과 같이 당신을 사랑할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30장까지 그렇게 '순종하라. 사랑하라' 명령을 했잖아요.
그런데 신31~32장, 신명기가 거의 끝나는 지점에서 뭐라고 얘기합니까?
'그런데 너희는 하나님을 배신할 거야' 이런 우울한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러면 그런 우울한 이야기를 하고 나서 다시 33장에서 그런 우울한 얘기없었던 것처럼 축복 일변도의 이야기를 하고 있단 말이죠.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요?
왜냐하면 26절에 나오는 '여수룬'이라는 이 표현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여수룬은 이스라엘에 대한 별칭, 닉네임입니다.
'의로운 자'라는 뜻이, 담긴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이스라엘을 이야기하는 애칭이에요.
그러면 너희는 실패할 것이고, 너희는 망할 것이고, 너희는 배신할 것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결국 나중에 회복하시겠지만 그 어두운 터널을 지나갈 거라고 얘기하셨다고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을 향해서 '나의 사랑' 이라고 얘기하시는 거예요. '너는 존귀하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이 여수룬이라는 단어를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어떤 용어로 바꿔서 표현을 한다면 그 자식을 볼 때, 막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부모가 어쩔줄 모르는, 눈에서 막 꿀이 뚝뚝 뚝뚝 떨어지는 그런거 있잖아요.
제 큰아들이 사춘기를 거의 끝나 가는데,생일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서 불을끄라고 하니까 '아빠, 내가 이 나이에 그런 걸 해야 돼요?' 이렇게 얘기하니까 도대체 아빠인 제가 갑자기 어떻게 반응을 해야 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런데 사실은 저는 어렸을 때, 전혀 그런 스타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그 상남자 스타일의 그 아들이 너무 멋있어 보이는 거예요. '멋있다. 우리 멋진 아들!'
여러분, 이스라엘에 대해서 사실은 평가가 굉장히 박했습니다.
근데 부모가 볼 때는 어떤가요. '너는 여수룬이라'는 것입니다.
'너는 의로운 자고, 너는 잘 될 거야! 넌 앞으로 훌륭해질 거야!'
이런 사랑을 자식에게 베풀수 있는 건 부모밖에 없다는 거예요.
우리에게 육신의 아버지가 계신 것처럼 우리 영혼을 창조하신 우리 영혼이 아버지 하나님이 계신줄로 믿습니다.
이걸 어떻게 표현할까요?
어제 묵상을 하다가.. 이번 주에 한국 영화산업의 스크린 독점 논란이 몇 차례 났어요.
이유는 제작사와 상영관이 같은 컴퍼니이기 때문에 생기는 그런 문제죠.
이 특혜시비가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왜 갑자기 하냐면, 영적으로 볼 때 우리도 특혜 시비에 휘말릴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창조주와, 우리의 구원자가 같은 분이에요. 그러니까 사단 입장에서는 억울한 거에요.
'아니 당신이 세상을 이렇게 멋지게 창조해 놓고 사람들에게 생명과 시간과 인생이라는 기회를 주고, 너 스스로 한번 살아봐라 했으면 본인이 혼자 경기를 해야지.. 왜 하나님이 자꾸 개입을 해서 실수하고, 실패하고, 사고 치고 해도.. 또 구원해주고, 또 살려주고, 또 도와주느냐?'
천상의 법정에서는 사단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고소, 고발하잖아요.
'하나님 이거는 특혜입니다. 이렇게 하시면 이건 페어플레이가 아닙니다.'
이런 고발을 사단을 하고 있단 말이죠.
그게 욥에게도 했던 이야기 아닙니까?
욥을 너무 많이 축복해주시니까, 욥이 잘 하는 거지
저거 한번 다 털어보시라고... 그냥 제로 베이스 에서 진짜 공평하게 페어플레이 해보면
저 욥은 분명히 무너질 거다... 이게 사단의 주장이었잖아요.
여러분 천상에서는 끊임없이 사단은 그렇게 고발하고 있는데 실제로 하나님의 형상들인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나요?
인생이 좀 힘들어지고 어려워지고, 고난을 겪으면 '하나님이 도대체 나한테 해준 게 뭐냐?' 합니다.
몇 년 전에 한 장로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정말 이분은 저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아들바보' 이신 분이에요.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이 자기 인생이 좀 힘들다고 아버지가 이렇게 잘 타이르니까 아들이 뒤돌아서면서 '아빠가 내 인생에 해준 게 뭐야?' 그 말에 이 분이 무너진 거죠. 그래서 몇 달을 그냥 우울하게 다니시더라고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특혜인지를 알지 못해요. 사단은 이거는 지나치다고 얘기하고.. 우리는 부족하다고 얘기하고.. 사단도 알고 있는 걸, 우리는 모르고 있는 게 아닌가요? 여러분 영적 진실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세상에 내보내셨으면 그냥 놔두셔야 되는거 아닌가요? 인생은 사람이 살아 내는 것이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도와주시고 끊임없이 우리에게 가이드를 주시고 끊임없이 우리를 기다려주시고 격려해주시잖아요.
그래서 은혜는 특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개념은 특혜입니다. 선인과 악인에게 고루 햇빛과 단비를 주시는 보편적 은혜일 뿐만 아니라 선택은 특별한 은혜도 주십니다.
그런 특혜를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안 되는 거라는 거예요.
그런 하나님, 당신에게 아비의 사랑을 주실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은 없습니다.
▲3. 하나님과 같이 내게 잔소리를 해 주실 분은 없습니다.
제가 신명기 앞부분을 설교할 때 나눴던 것 같습니다.
자 신명기가 끝나가고 있어요.
모세의 3번에 걸친 계명에 대한 반복된 설교, 제가 만약에 똑같은 설교를, 지난주 했던 설교를 오늘도 하고, 다음 주에 또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웅성거리기 시작할 거예요.
어떤 목사님이 다른 교회에 설교 초대를 받아 갔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전했어요. 그 교회가 분열돼 있었거든요. 성도들이 너무나 은혜를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또 한 번 설교를 듣고 싶다고 다시 한번 설교 초청을 했어요. 똑같은 설교를 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3번이나 똑같은 설교를 했다는 얘기를 하는 중) 그러자 그 설교자는 '여러분이 사랑할 때까지, 여러분이 화합할 때까지 저는 똑같은 얘기를 계속할 것입니다.' (모세가 그래서 세 번 했다는 거죠)
여러분 하나님이 반복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우리는 듣기 힘들어하죠.
부모가 똑같은 얘기를 반복하면, 자녀들이 듣기 힘들어합니다. 잔소리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 왜 그 이야기를 반복해서 할까요?
내 삶이 변하는 것이 축복이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반복해서 해주시는 것이죠.
왜 사람들이 잔소리를 듣기 싫어 하는가요?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대로 '두말하면 잔소리지' 벌써 두 번만 반복해도 잔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의 삶이 변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그래서 반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아무도 나에게 쓴소리 해주지 않죠.
제가 친한 한 성도님이 계신데, 그분은 해외에 계신 분인데, 가끔 가다 입국하셔서 예배에 나오십니다.
그 성도님이 뜬금 없이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실 때가 있어요.
'목사님 요즘 설교가 예전 같지 않아요!'
네가 놀라서 '네? (방금 뭐라고 하신 거에요?)'
기도를 많이 안 하시는 것 같아요! 이렇게 얘기하시는 분이 있어요.
제가 신뢰하고, 그분이 저를 신뢰하고.. 그래서 직언을 해주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 분들이 제 곁에 있다는 건 감사한 것이죠. 그의 쓴소리는 사랑이죠.
여러분 세상에서는 쓴소리 하지 않습니다. 뒤에서 평가하지요, 평가만 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부모는 앞에서 잔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잔소리는 사랑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연로하신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그리운 것은 부모님의 그 잔소리가 너무 그리운 거예요.
너무나 바쁘게 도시 속에 살다가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오랜만에 전화했더니 '밥은 잘 챙겨먹니?' 그 한마디에 눈물이 나고 오랜만에 찾아 뵈니까 '왜 이렇게 춥게 입고 다니냐? 옷 좀 따뜻하게 입고 다녀라' 늘 내 생각을 하시며, 나를 위해서, 내가 잘되기를 원하시는그 부모님의 사랑이 있잖아요.
'왜 이렇게 얼굴이 피곤해 보이냐? 좀 자고 가라!' 이 얘기는 제가 저희 어머니께 많이 듣던 얘기인데, 저희 어머님돌아가시기 전에요.
전도사 시절에 어머니를 뵈러 가면 학업에, 뭐 신혼살림에, 전도사 사역에 뭐 정신이 없었어요.
제가 어머니 집에 가면 일단 저를 소파에 '괜찮아, 괜찮아' 하며 계속 눕히시더라고요. '좀 쉬다 가라, 자다가 가라'
내가 잘 되기를 그렇게 원하시는 분이, 하나님과 부모님 외에 과연 누가 있을 수 있을까요?
부모님의 잔소리가 사랑인 것처럼 하나님의 반복되는 이 메시지는 여러분을 향한 비교할 수 없는 사랑 인 줄로 믿습니다.
▲4. 하나님과 같이 당신에게 약속을 지키실 분은 없다는 거예요.
성경이 명령으로 가득한 책이라고 생각하시면 큰 오해입니다.
'절대 나를 떠나지 말아, 절대 다른 우상을 사랑하지 마라
나만 평생 사랑해라!' 그 얘기는 뭔가요?
상대방은 사랑이 막 흔들리고 있는데, 이쪽 편에서 '나만 사랑해야 돼!' 얘기를 계속하는 것은
사랑의 요구 인가요? 아닙니다.'나는 당신을 평생 사랑하겠다'는 결단이 이미 끝났다는 얘기에요.
하나님의 그 사랑의 결단의 고백인 것이죠.
33:29 "이스라엘아, 너는 행복하다. 여호와께서 구원하신 민족인 너 같은 자가 누구겠느냐?
그분은 네 방패이며 도우시는 분이고 네 영광스러운 칼이시다.
네 원수들이 네 앞에서 움츠리고 너는 그들의 높은 곳을 발로 밟을 것이다.”
'이스라엘아 너는 행복하다' 다른 역본에서는 '너는 행복자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행복한가요?
하나님의 복이 임하니까, 내 마음이 행복하고 내 마음이 행복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축복할 수 있는 흐름인 것이죠.
그런데 이스라엘의 행복이, 그들이 뭐 좋은 땅을 받기 때문에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기 때문에.. 이런 땅의 축복도 있지만, 결정적인 이유가 있어요.
29절에 보면, '너 같은 자가 누구겠느냐?' 그러면 내가 이 무한경쟁의 세상 속에서 상대적 우위를 점하고 '야 역시 이 분야에서는 내가 최고야!'
여러분 사람들이 어느 정도 노력해서 그 자리에 오르게 되면 다 내심 그런 마음들을 품는 경우가 많죠.
그러나 사실 이것은 허무한 나르시시즘인 경우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이건 그저 비교 우위일 뿐이에요. 절대적 우위라는 것은 세상에 없어요.
누군가는 또 따라오고, 누군가는 당신이 기록을 깨게 되어 있잖아요. 그게 세상이잖아요.
지금 그런 상대적 만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본문의 '너 같은 자가 없다!' 라는 것은 :29
우리가 이미 보았던 26절에 '너의 하나님 같은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너의 하나님 같이 너를 사랑해 주시는 분이 없기 때문에 너와 같은 인생이 없는 것이다!' 관계적 개념으로 말씀하는 것이죠.
여러분 인생이 언제 가장 행복한 거예요?
물질을 많이 누릴 때?
쾌락을 즐길 때?
아무것도 안 하고 쉬고 있을 때? 다 아닙니다.
그럼 언제 인생이 가장 행복한 거예요?
사랑이 행복입니다.
사랑할 때 사람은 가장 행복해요.
그런데 그 놀라운 사랑, 변치 않는 무조건 적인 영원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해주시는 분,
그분 같은 분이 없는데..
그분의 사랑을 받는 자녀로서의 내 인생,
'나와 같은 인생이 어디 있겠느냐?' 할렐루야!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