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부(通信簿)이야기
주 재순
“1억, 1억 5천, 2억! 아이구 조상님, 우리에게도
TV쇼(진품명품)를 보고있던 아내가 어떤 유명인사의 친필유묵 한 점 감정가가
2억 원을 돌파하는 순간, 무심코 내뱉은 넋두리다. 작품은 할아버지가 남긴 유품
이라고 하니, 조상이 내려준 이 큰 횡재(橫財)가 어찌 아니 부러우랴. 저녁때 주
말연속극은 놓치지 않던 아내가 일찌감치 자리에 눕는다. 어딘지 심기(心氣)가
불편한지 시무룩한 표정인데. '그놈의 2억.’에 쇼크를 받은 것일까? 이제는 인생
의 떫은맛은 가셔야 할 나이도 되었는데. 법정의 무소유나 읽기를 권해 볼까? 불
난 집에 부채질일까? 하기야 아파트 몇 채가 굴러들어 왔다고 해 보라. 떨리는
가슴을 어이할거나, 심장이 터지거나 멈출 일이로다.
아내는 생존의 현장에서만은 나보다 현실적인 면이 있다. 내가 밀친 밥상에 남
겨진 두부부침 한 점을 버리기가 아까워 결국 입에 넣고 마는 알뜰한 살림꾼이
다. 그 옛날 얄팍한 월급봉투 쪼개기 작전을 불평 없이 잘 이겨낸 경제통이다.
남을 잘 믿는 것이 탈이 되어 손해를 보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버티어온 끈질
긴 아내이다. 힘든 세월들이 저만큼 흘러갔다.
이제는 다 성장한 자식들은 저만치 비켜선 자리에 각기 한 구루의 나무가 되
어, 뿌리내리기에 정신들이 없는데, 동그마니 남겨진 당신. 어찌 허망함이 져며오
지 않으리요. 그러나 어쩌랴. 떠도는 만복(萬福)을 어이 손안에 다 잡을 수 있으
리까.
몇 일이 지나갔다. 그 동안 궤짝에 아무렇게 쌓아 두었던 소장품(所藏品)들을
꺼내어 정리를 하였다. 삶의 파편(破片)이 하나하나 모습을 보일 때마다 반세기
가 넘는 시공(時空)속을 순식간에 넘나들며, 아물거리던 추억들이 실타래로 풀려
나왔다. 손때 묻은 물건들이 세상 밖으로 나와 각개점호를 받는 순간이었다. 맨
밑에 깔려 있었던 누런 사각봉투를 개봉하는 순간, 꿈에도 그리던 내 유년시절의
그 얼굴을 다시 만날 줄이야!.………
'아니, 이게 어떻게 지금까지 숨어 있었을까?' 바로 해방전, 만주 용정(龍井)에
서 초등학교 일 학년을 마치는 통신부 한 장이 뜻밖에 발견되었다. 세계 제2차
대전, 그리고 해방, 다시 6·25 사변의 처참한 피난살이에서 어떻게 숨어 있었단
말인가? 사람들도 살아 남기 힘들었던 극한 상황을 어이 넘어왔을까. 그 전쟁의
깊은 상처와 후유증은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채 마음의 슬픈 강물이 되어 오늘도
계속 흐르고 있는데.
*通信簿(통신부). 내 어린 시절의 무지개가 십육절 크기의 백지 한 장속에서 나
와서 흰머리가 된 나를 다시 만난다. 누런 색깔의 세월의 이끼가 얼룩무늬를 그
려 놓았지만 담겨진 그리운 사연들이 되살아나고 까닭 모를 설레임을 어떻게 하
랴. 접혀진 첫 장에 우리 부자(父子)의 이름 요시다(吉田). 저들의 강압에 굴하여
창씨 개명한 아버지의 꺾였던 자존심을 무엇으로 보상(補償)하리. 중간쪽 보호자
란에 거꾸로 나란히 찍힌 여섯 개의도장은 아버지의 무언의 반일 감정표출이 아
니었는지. 마지막 한쪽을 훑어보니 펜글씨로 學力優等(학력우등), 品行方正(품행
방정)이라고 한자로 또박또박 적혀 있는 것은 낯익은 일본인 담임 다모도(田本)
선생님의 글씨이다. 다모도선생님. 너무도 보고픈 사람이다. 세상에 태어나 핏줄
말고는 처음으로 만난 신비스럽고, 흠모(欽慕)했던 아련한 그리움이다. 학교가 파
한 뒤에도 교실에 남아 청소와 심부름을 도맡아 하며 예쁜 선생님 곁에 그냥 있
고 싶었다.
동그스레한 얼굴에 오똑한 코, 뽀얀 살결, 아담한 키의 선생님이 어찌 그리도
예쁘던지. 옆으로 다가가면 향긋한 분내음이 어린 내 가슴 깊이 선생님에 대한 사
모(思慕)의 정(情)으로 더욱 가깝게 다가서고 싶게 했나 보다. 난 좀 조숙했던 것
이 아니었을까? 무덥던 어느 여름날. 선생님은 아이들을 냇가로 데리고 나아가
모두 홀랑 벗게 하고는 한사람씩 몸 검사를 하면서 깨끗이 씻어 주었다. 그때의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관심 쏟을 여유가 없었다. 우리들은 벌거숭이가 된 채 사진
을 찍었다.
이 사진 한 장은 전쟁 속에 행방불명이 되었다. 선생님의 큰 사랑이야기를 잊
을 수 없다. 어느 날 음악시간, 오르간소리에 맞춰 뜻 모르는 일본군가인 동요
몇 곡을 앵무새처럼 따라 부르고 이어서 독창순서로 내 차례가 되었다. 상기된
얼굴로 뛰는 가슴을 억누를 겨를 없이 앞으로 나아가 아버지가 가르쳐 주신 노
래를 불렀다.
‘구름 없는 하늘엔 별만 총총, 고요한 해변에 물결만 출렁. 한 손에 총을 들고
모자를 눈썹까지 푹 눌러 쓰고 나서니 흉악한 꼴이다. ㆍㆍㆍㆍㆍ…' 아 노래가 조선독
립군이나 광복군이 부르는 노래인줄 어찌 알았으랴. 이어지는 후렴을 부르려는
순간, 사색이 된 선생님이 내 입을 손으로 꽉 틀어막고는 잠시 주변 동정을 살피
는 것이 아닌가.
“요시다! 또다시 이 노래 부를 거야?”
나는 방과후 남아서 처음으로 회초리를 맞았다. 종아리에 몇 개의 줄이 맺혔고
사랑받던 선생님께 처음으로 매맞은 것이 서러워 울고 있는데 선생님은 가슴에
가만히 품어 주었다. 엄마의 품속보다 더 좋았다. 예쁜 선생님을 실망시킨 사실
이 더 서러워 눈물이 또 났다.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아주신 선생님이셨다.
한세상이 흐른 후에야 선생님이 “누구에게 그 노래를 배웠느냐?”고 묻지도 않
고 당국에 신고도 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고, 만일 그 당시 신고되었다면 아버
지의 생사가 뒤바뀌는 운명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전쟁말기에 광기가 극에 달한 일본은 조선사람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수많은 애국투사와 그 가족을 붙잡아 가두고 죽였다. 우리 집에도 일본 헌병대원
들이 권총과 긴칼을 차고 쳐들어와 온 집안을 몇 번이나 뒤졌다.
아버지, 누나, 큰형은 체포, 감금되고 얼마나 심한 고문을 당했던가. 이 핏줄
세 분은 불귀의 객이 되셨으니………… 내 어찌 저들에 대한 시퍼런 앙금이 녹아 없
어지겠는지. 인간이 어디까지 처절하고 참혹해질 수 있는가를 똑똑히 보지 않았
던가.
그러나 다모도 선생님! 단 한사람 용서하고픈 사람이다. 아니 어쩌면 당신도
전쟁피해자가 아닐까? 아련한 어머니의 젖무덤처럼 그리운 선생님. 당신은 큰사
랑으로 국경을 초월한 인간애를 실천한 천사이리라.
내인생사의 숱한 추억이 살아있는 통신부! 큰사랑의 스승, 다모도 선생님은 아
직도 살아 계실까? 돌아가셨을까? 살아만 계신다면 뜨거운 가슴으로 맞이하고
싶다. 이제는 이 가슴으로 그때 그 전쟁은 밉지만 선생님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98. 9. 14.
첫댓글 당신은 큰사
랑으로 국경을 초월한 인간애를 실천한 천사이리라.
내인생사의 숱한 추억이 살아있는 통신부! 큰사랑의 스승, 다모도 선생님은 아
직도 살아 계실까? 돌아가셨을까? 살아만 계신다면 뜨거운 가슴으로 맞이하고
싶다. 이제는 이 가슴으로 그때 그 전쟁은 밉지만 선생님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다모도 선생님! 단 한사람 용서하고픈 사람이다. 아니 어쩌면 당신도 전쟁피해자가 아닐까? 아련한 어머니의 젖무덤처럼 그리운 선생님. 당신은 큰사랑으로 국경을 초월한 인간애를 실천한 천사이리라.
내인생사의 숱한 추억이 살아있는 통신부! 큰사랑의 스승, 다모도 선생님은 아직도 살아 계실까? 돌아가셨을까? 살아만 계신다면 뜨거운 가슴으로 맞이하고 싶다. 이제는 이 가슴으로 그때 그 전쟁은 밉지만 선생님을 사랑하고 존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