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3.3.연중 제8주간 월요일
집회17,24-29 마르10,17-27
회개의 여정
“회개와 하느님의 나라”
“행복하여라, 죄를 용서받고, 잘못을 씻은 이!
행복하여라, 주님이 허물을 헤아리지 않으시고,
그 영에 거짓이 없는 사람!”(시편32,1-2)
참 빠르게 흐르는 세월입니다. 벌써 2025년도 3월 성요셉성월에 사순시기를 바로 앞두고 있습니다. 늘 거기 그 자리의 수도원에 정주해도 흐르는 세월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온 지도 엊그제 같은데 벌써 11년이 지났습니다. 산티아고 순례 여정 이후 강론에 가장 많이 사용한 주제가 ‘여정’이요 오늘 강론 역시 ‘회개의 여정’입니다. 피정중 여정에 관한 강론후 결론때 늘 제시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여러분 삶의 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일년사계로 압축할 때, 아침 6시에 시작하여 오후 6시에 끝나는 하루중, 봄-여름-가을-겨울 1년중 어느 시점에 위치해 있겠는가?”
저의 경우 수도원에 부임할 때는 나이 40으로 하루중 정오쯤이고 일년중 늦여름쯤이었는데, 지금은 하루로 하면 오후 5시쯤, 일년계절로 하면 초겨울에 접어든 느낌입니다. 이렇게 지금의 시점을 확인할 때 하루하루 날마다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있다는 것입니다. 저절로 사부 성 베네딕도의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말씀을 자주 연상하게 됩니다. 오늘 옛 현자의 가르침도 회개의 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 솔직하고 진심을 다할 때, 상대에 대한 진심도 흘러나온다.”<다산>
“자로가 군주를 섬기는 자세를 묻자 공자가 답했다. ‘속이지도 숨기지도 말고, 바른 말을 하는 것이다.”<논어>
이런 솔직한 자세야 말로 회개의 정신입니다. 어제 잠시 나눴던 금주 본기도 후반부, ‘교회가 자유로이 주님을 섬길 수 있게 하소서.’ 내용을 보면서 ‘섬김을 위한 자유’임을 깨닫습니다. 자유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섬김의 사랑과 책임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며, 이런 섬김의 실천이 없는 자유는 길을 잃고 방종과 혼란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회개의 삶은 섬김의 삶으로 입증됩니다. 오늘 집회서도 강조하는 바 회입니다.
“회개하는 이들에게는 돌아올 기회를 주시고
인내심을 잃어버린 자들은 위로하신다.
주님께 돌아오고 죄악을 버려라.
그분 앞에서 기도하고 잘못을 줄여라.
지극히 높으신 분께 돌아오고 불의에서 돌아서라.
그분께서 너를 이끄시어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살았을 때 회개요, 기도요, 공부요, 사랑이지 죽으면 모두가 끝입니다. 회개하라고, 기도하라고, 공부하라고, 사랑하라고, 감사하라고, 찬미하라고 연장되는 선물같은 절박한 하루하루 날들임을 깨닫습니다.
“누가 저승에서 지극히 높으신 분께 찬미를 드리겠느냐?
죽은 이에게서는 찬양이 그치지만,
건강하게 살아 있는 이는 주님께 찬미를 드리리라.
주님의 자비는 얼마나 크시며,
당신께 돌아오는 이들에 대한 그분의 용서는 얼마나 크신가?”
바로 오늘 복음의 젊은 부자는 이런 회개와 겸손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음을 봅니다. 영원한 생명의 하느님 나라에 대해 제시한 그의 물음은 옳았습니다. 그러나 회개의 실천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의 하느님 나라는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됨은 몰랐습니다. 젊은 부자가 지켰다는 6섯 계명들중 부모공경을 제외한 5섯개 “안된다”의 부정적 금령들은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을 말해 줍니다.
소극적이고 모범적 좋은 신자일지는 몰라도 적극적 진취의 성화의 여정을 걷는 신자는 아니었습니다. 사랑의 회개는, 영원한 생명의 하느님 나라는 추상 명사가 아닌 구체적 실천의 동사입니다. 젊은 부자의 심중을 꿰뚫어 통찰한 주님의 직격입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팔라-주라-따르라 실천적 동사의 연속입니다. 땅에 보물을 쌓는 부자의 삶에서 나눔과 따름을 통해 하늘에 보물을 쌓는 회개의 삶으로의 전환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하느님 나라는 추상적이 아닌 구체적 나눔과 섬김, 주님을 따름이라는 회개의 삶을 통해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충격을 받은 그는 슬퍼하며 떠났으니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대화를 통한 제자교육입니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부자의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회개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가난하다 구원이 아니라 가난하든 부자든 전격적 방향의 전환인 은총의 회개 하나가 구원의 요건입니다. 나눔과 섬김과 따름을 통해 자기를 비워가는, 무욕과 이탈의 초연한 ‘가난한 부자’의 역설적 삶을 산다면 바로 하느님 나라의 구원에 영원한 생명의 실현입니다.
구원의 잣대는 가난도 부요도 아닌, 나눔과 섬김 그리고 따름으로 표현되는 구체적 회개의 실천에 있음을 봅니다. 바로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런 회개의 여정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의 하느님 나라의 구원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피신처,
곤경에서 저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환호로, 저를 감싸시나이다.”(시편32,7).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