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시 곽도경, 사회자의 낭송입니다
복사꽃을 빌리다
쫓겨 와 세 든 집에
나보다 몇 해 먼저 세 들어 살고 있었던가
복숭아 한 그루
슬픈 마당에 내리는 별들의 발자국같이
시린 연분홍 자국
자욱, 자욱 번지네
번지네…
번지다가 오늘밤 환하네
여러 해 홀로 환하였을
저것이 지는 날
꽃 진 자리마다 열리게 될 천도天桃
혹은, 천도天道
내일조차 깜깜한 나도
무작정 환해지네
박경조 시인의 낭송입니다
수마노
천길 바닷물 속에 잠긴 돌
누군가의 그물에 닿아 건져 올려지면
그리하여 제 모습이 드러나면
비로소 아름다운 색이 발현되는 돌
수마노水瑪瑙,
수마노, 오래전 그가 나에게 준 이름이다
그가 그윽이도 불러줄 때의 나였다
나는 그것을 움켜쥐고
스스로 천길 깜깜한 깊이에 잠겨서
어떤 손길을 기다리며
언젠가는 내 모습을 드러내리라
보석이 되리라, 갈망하며 살았다
그렇게 부질없이 철없는 시절을 보내는 중에
수마노란 불가에서는 숫돌을 지칭함을 알았다
숫돌, 아버지와 마주하여 서로 살을 깎고 깎여 주며
새파랗게 벼려내었던 낫과 칼
그 낫으로 곡식을 거두고 그 칼로 음식을 만들어
사람을 살찌우는, 목숨의 가장 밑자리 도구인 그것
그가 나를 수마노, 하고 불렀었다
보석이 되기는 고사하고 점점점 작아지는 몰골이
지극이 타당해야 하며
슬며시 다가와 혹은 작정하고 달려들어
나를 깎아 내리며 날 세워 나간 그들도
누군가를 살찌우는 그것! 이었으니
그리 억울해 할 일도 아니어야 한다
이상길님께서 낭독해주셨습니다
패목牌木
나무는
아버지 무덤가에 있다
어찌 보면 여윈 팔뚝 같고
어찌 보면 미처 수습 못한
파묘 속 정강이 뼈 같은 나무의 가지는
궁벽한 몰골의 동질감을 내세워
아버지와 내통을 하는 모양이다
그렇게 오래 내통하다
한 계절을 빌려 몸짓으로 오는 나무의 꽃은
나에게 한 번도 들킨 적 없는 아버지 울음 같아서
명치가 꽉 막히고
불꽃같아서
심장이 데이고 급기야 곤죽이 되는데
그때가 되면
나도 그 붉은 배롱나무가 흘려 쓴 문장을 읽고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내 울음을
아래로, 아래로 흘러 보내
아버지에게로 간다
박종천 시인의 낭송입니다
조우
내가 나를 가두지 못하고 흐르다
산청 어디쯤에서
표지석, 합천을 보았다
합천, 합천 소리 내어 불러보면
합陜! 하고
나를 봉할 것도 같아
목젖이 눌리도록 다시 합천,
호명하며 찾아드니 영암사지 있다
영암사지,
이 사라진 절터는 무엇을 봉인하고 있는지
무너진 금당 석축 아래 사자 두 마리
두발로 서서 석등을 받치고 있다
흡사 두 손 들고 벌서는 아이의 뒷모습이어서
용맹은 거세당한지 오래인 듯하다
어느 생에 한번쯤 스쳤던가?
여기까지 와서 두 무릎사이 얼굴을 묻으며
척추를 꺾어 버린 나와
두 다리로 서서 척추를 바르르 떨며 견디는
저 사자와의 조우
우리는 때로 예기치 못한 상대에게
훼손당한 상징을 들킬 때가 있다
좁고 좁은 곳으로 숨어들다가 마주칠 때가 있다
김청수 시인의 낭송입니다
궁금하다
도배를 하면서 문설주 옆 꺾어진 부분에
사방연속무늬의 귀를 맞추다가
잔뜩 풀 먹어 처진 벽지를 떼었다 붙였다가를
몇 번이고 반복하다가 문득 이방 너머
세상의 벽, 그 무늬 궁금한 거라
하여, 얼핏 들여다 본 그곳 현란하네
색 확 두드러지기 상하 좌우 무시하고 뒤섞이기
돌출되기, 또는 함몰되기
자기의 무늬만을 고집하는 수천만, 수억의
내가 그리고 네가 잔뜩 풀 먹힌 채로
악착같이 달라붙고 있는 벽
저 벽,
저 완벽한 치졸미를 이루고 있는 세상을 꾸민 벽지 속
어디쯤 끼여 있을 나의 무늬는 알랑가 몰라
잘 꾸며진 하나의 방을 만들려면
벽지의 무늬부터 맞추어야 한다는 거
각진 부분에선 무늬의 반을 잘라낼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알기는 할랑가 몰라
첫댓글 축하드립니다
내가 나를 가두지 못하고
흐르는..일상들
멋진 시간이셨습니다
쏨~수고했어용♡♡♡
수고는 늘 그대가 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