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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2: 38 예언의 성취 - 요 12: 40 고침을 받지 못하게 (상)
요 12: 38 예언의 성취 -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하여 계시하신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과 그의 사역을 통한 증언에 대하여 유대인들의 불신에 대한 예언이다.
1]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이 말씀은 사 53: 1의 인용이다.
* 사 53: 1 –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이 예언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수효가 많지 못할 것을 가리킨 것이다.
2]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주의 팔"이란 것은 주님의 능력(곧, 사람의 마음 눈을 열어 복음을 깨닫게 하시는 능력)을 가리킨다.
이 예언과 같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그 때에 별로 많지 못하였다.
요 12: 39 능히 믿지 못한 것 -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
유대인들이 믿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의 자유의지로 행한 스스로의 선택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1]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요한 사도는 사람들이 믿기를 거부했을 때(37절) 믿을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믿기를 거부하는 완악한 마음을 그대로 두신 것이다.
* 고후 3: 14-16 – 14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 고후 4: 4 -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은혜가 많을수록 불신앙을 고집하는(37절) 원인은, 그들이 택함을 받지 못한 사실에 있다.
우리가 이 원리를 현재에 믿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할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그들 중에 믿을 자도 있기 때문이다.
요 12: 40 고침을 받지 못하게 -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
하나님은 택함을 받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그들의 눈을 멀게하고,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그들이 깨닫고 고침을 받지 못하도록 하셨다.
1]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이것은, 이사야서에 있는 대로 이사야가 주님의 영광을 본 뒤에 받은 말씀이다.
* 사 6: 10 -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께서 선한 인간들을 강팍하게 만드셨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반역하는고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악화하는 대로 버려두심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의 이렇게 하심이 그의 거룩하신 계획에 들어 있었다는 뜻도 여기 포함되어 있다. 물론 유대인들이 저렇게 되는(40절의 내용과 같이 되는) 죄책은 저희 자신들에게 있었다.
하나님의 예정(豫定)과 인간(人間)의 자유(自由)
일반적으로 성도들이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부분이 자유라고 하는 개념과 예정이라는 교리이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면서 믿음의 경륜이 깊어 갈수록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인간의 자유에 대하여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혼자서 생각하기에는 벅찬 주제라고 생각되어 하나님의 말씀과 권위 있는 학자들의 가르침을 따라 이해할 수 있는 데까지 이 문제를 알기 쉽게 정리함으로 우리의 믿음의 터를 더욱 돈독하게 하려고 한다.
자유(ejleuqeriva, Freedom)라는 말은 매우 흔하게 쓰이고 있는 말이면서도 우리가 잘못하면 오해할 수 있는 말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자유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 자유가 어디까지 자유한 것인지를 밝히 앎으로써 우리가 참 자유를 누리게 된다.
(1) 하나님의 예정(豫定)
예정론은 신학적인 교리로서 무엇보다도 칼뱅주의와 연관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칼뱅주의자들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일어날 모든 일들을 정해 놓으셨는데 그중에는 궁극적인 구원과 인간의 유기(遺棄)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예정 교리는 수많은 복음적 교회들의 신조들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교회와 국가에 현저한 영향을 끼쳤다. 예정에 대한 가장 완전한 표현은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에 나타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은 전 세계 대부분의 장로교회들과 개혁교회들에 있어서는 권위 있는 신조(信條)이다. 또한 영국 국교회와 미국의 감독 교회는 39개항의 온건한 칼뱅주의 신조(信條)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침례교회와 회중교회는 일반적으로 공식적인 신조를 지니고 있지 않지만, 이러한 교회들의 수많은 대표적인 신학자들의 저서들 속에는 이 예정교리가 나타나 있다.
기독교회의 처음 3세기 동안에 교부들의 글 속에는 이 예정 교리가 주로 미개발된 상태로 되어 있었다. 이 예정 교리는 어거스틴에 의해 처음으로 적극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는데,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 구원의 유일한 근거라고 했다.
중세 시대에 안셀름(Anselm)과 롬바르드(Peter Lombard)와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다소 어거스틴의 견해를 따랐다. 예정이란 하나님께서 만물을 개괄적으로 섭리하고 통치하는 것과 어느 정도 동일시됐다. 종교 개혁의 선구자들인 위클리프(Wycliffe)와 후스(Huss)는 엄격한 예정론적 견해들을 주장했다.
종교 개혁 시대에는 예정 교리가 루터(Luther), 칼뱅(Calvin), 쯔빙글리(Zwingli), 멜랑크톤(Melanchthon), 낙스(Knox)와 당시의 모든 탁월한 지도자들에 의해 강력하게 주장되었다. 그런데, 멜랑크톤은 이후에 자기의 견해를 수정하였고, 그의 지도를 받은 루터 교회는 이 예정 교리를 반대하게 되었다.
루터의 주요한 저서인 [의지의 굴레](The Bondage of the Will)와 [로마서 주석](the Commentary on Romans)에는 루터가 칼뱅과 같이 이 예정 교리를 충성스럽게 받아들였다는 것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 예정 교리를 분명한 논리로써 강조한 사람은 칼뱅이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이 교리는 '칼뱅주의'라고 명명되었으며 개혁 신학 체계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교리가 되었다. 영국의 청교도들과 미국에 처음으로 이주한 사람들, 그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의 계약파들(the Covenanters)과 불란서의 위그노들(the Huguenots)도 철저한 칼뱅주의자들이었다. 근래에 예정 교리는 휫필드(Whitefield), 핫지(Hodge), 댑니(Dabney), 커닝햄(Cunningham), 스미드(Smith), 쉐드(Shedd), 스트롱(Strong), 카이퍼(Kuyper), 워필드(Warfield)에 의해 주장되어 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에는 이 교리가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그 자신의 뜻의 가장 지혜롭고 지극히 거룩하신 계획에 따라 장차 될 모든 일을 자유롭고 변함없게 예정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죄의 창조자라는 것도 아니요, 모든 피조물들의 의지가 강압을 받는다는 것도 아니요, 제 2인자(因者)들의 자유나 우연성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성립하는 것이다".
예정 교리에는 이처럼 하나님의 목적이 모든 유한한 피조물에 대해서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이고 독자적인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오직 그 뜻의 영원한 계획에서 비롯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또한 하나님은 자연의 운행을 지시하시며 역사의 진행을 가장 세밀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주관하신다.
그러므로 그의 뜻은 영원불변하고, 거룩하고 지혜로우며, 주권적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미래 모든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豫知,foreknowledge)의 근거가 되며, 또한 하나님의 뜻은 미래 사건에 대한 지식이나 미래 사건들 자체에서 비롯되는 어떤 것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을 자신이 알고 있다면, 그 이전에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결정을 했던 것이 분명하다. 우리의 예지(豫知)는 우리의 결정보다 앞서는 것이 아니라 결정에 뒤따르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지는 우리의 결정에 근거한 것이 확실하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미래를 예지하고 계시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미래를 예정하셨기 때문이다.
이 예정 교리가 나타나 있는 몇몇 성경의 참고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 엡 1: 5 -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 엡 1: 11 -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 행 4: 27-28 –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 행 2: 23 -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등이다.(행 13: 48. 롬 8: 29-30. 9: 11-12, 23. 고전 2: 7. 엡 2: 10. 시 139: 16 참조)
심지어는 인간의 범죄 행위조차도 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인간의 범죄 행위도 예견되고 허용되어 정확한 곳에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통제되고 다스려지게 된다. 그리스도의 못 박히심은 인류역사상 최악의 범죄임이 틀림없지만, 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정확히 꼭 필요한 곳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행 2: 23. 4: 28)
선택(選擇)교리는 특정한 사람들의 선택과 관련된 것으로서, 일반적인 예정 교리를 특별하게 적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마치 예정의 교리가 죄인의 구원과 관계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성경은 일차적으로 죄인의 구원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이 선택의 교리는 자연히 특별한 곳에서만 언급되는데, 이 선택이라는 단어가 신약 성경에만 약 48회 나온다.1)
이 선택을 통해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어떤 차이점과 공로보다 앞선 것으로서 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류는 두 부류로 나뉜다. 즉 한 부류는 영생을 얻도록 선택된 자들이며, 다른 한 부류는 영원한 사망에 버려지게 된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이러한 뜻은 아담 안에서 구원 얻을 만한 절대적인 호기(好機)를 가졌지만 그것을 놓쳐 버린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를 가리킨다. 이런 자들은 타락의 결과로 죄책에 사로잡혀 있고 부패해 있다. 따라서 그들의 동기는 그릇되어 있고,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얻을 모든 권한을 상실해 버려서, 모든 타락한 천사들처럼 그들의 불순종에 대한 형벌을 당연히 받게 될 것이다.
그 반면에 인류의 한 부류인 선택받은 자들은 죄와 죄책의 상태에서 구원을 받고 거룩함과 축복의 상태에 들어간다.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단지 파멸된 그들의 이전 상태대로 그냥 남아 있을 뿐이다. 그들은 근거 없는 처벌은 아무것도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단지 사람으로 취급하실 뿐만이 아니라 죄인들로 취급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 문제에 있어서 선행(good works)이란 구원에 종속되어 나타나는 것이고, 구원을 얻기 위한 공로는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하고... "(요 15: 16)라고 했다.
바울도 말하기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 10)라고 했다. 그러므로 선행은 구원의 열매요, 증거이다.
칼뱅주의자들 간에도 신적 계획 속에 있는 사건들의 순서에 관하여 서로 다른 몇 가지의 견해들이 있어 왔다. 그 문제점은 이것이니,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피조물들을 그 섭리의 대상으로 생각하셨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는 단지 그 창조하신 인간들을 모두 동등한 섭리의 대상으로 생각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타락 후 선택설 학자들(Infralapsarians)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들의 일부분만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사건들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시기를,
① 창조하시고, ② 타락을 허용하시고, ③ 이 타락한 사람들 중의 일부를 구원하기로 선택하시고, 나머지 타락자들을 그대로 버려두시며, ④ 선택자들을 위해서 구속주를 예비하시며, ⑤ 성령을 보내사 이 구속을 선택자들에게 적용하신다는 것이다.
이 계획에 의하면 선택은 타락에 뒤따르는 것이다.
타락 전 선택설 학자들(supralapsarians)의 견해에 의하면, 그 사건들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시기를,
① 창조될 인간들 중 일부는 생명을 주시기로 선택하시고 다른 일부는 파멸하기로 선택하시고, ② 창조하시고, ③ 타락을 허용하시고, ④ 선택자를 구속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⑤ 성령을 보내사 이 구속을 선택자들에게 적용하신다는 것이다.
이 계획에 의하면 선택은 타락에 앞선다. 그리고 토기장이는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리가 있다고 했다(롬 9: 21). 즉 선택받은 자와 선택 받지 못한 자가 원래는 동일하게 불행에 처한 존재들로 간주되었다.
(2) 예정(豫定)이란 무엇인가?
많은 사람이 “하나님이 예정을 하셨다고 하면 인간의 자유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하고 묻고 싶어 한다. 만약 하나님께서 예정하시는 폭이 두 사람도 피할 수 없이 좁은 예정이라면 거기에는 아무런 자유도 없고 선택의 여지가 없다. 자유가 없다면 거기에는 책임도 물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하면 인생은 그야말로 숙명론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협소하고 협착한 예정을 하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예정(豫定) 즉 제한(制限)은 극히 작은 부분이고 인간에게 주신 자유(自由)는 충분(充分)하게 주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넘치도록 부여받은 자유를 누릴 때에는 그 후에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진리로 인도하는 문은 언제나 좁아 보인다. 그리고 그 길이 협착해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다. 그러나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우선 보기에 넓고 많은 사람이 그 길로 접어들고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후에 보면 진리의 길 생명의 길에는 자유가 있고 갈수록 넓어지고 자유롭다.
세상 사람들이 많이 찾는 넓어 보이는 문은 들어갈 때는 넓어 보이나 갈수록 협착해서 나중에는 돌이킬 수도 없는 곳에 이르게 되고 마지막에는 막힌 곳에 당도하게 되는데 거기서 그는 위를 쳐다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발밑이 빠지면서 끝이 없는 갱속(無低坑)으로 들어가게 된다.
처음에 좁은 문으로 들어온 우리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의 폭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상당히 자유롭고 넓다. 우리가 허락하신 길 위를 걸어가면서도 좌편으로 걸어갈 수도 있고 우편으로 걸어갈 수가 있다. 결코 선택의 여지가 없이 비좁은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 길을 걸어가면서도 천천히 갈 수도 있고 부지런히 갈 수도 있다. 열심히 일하면서 갈 수도 있고 빈둥빈둥 놀면서 갈 수도 있다. 사치하면서 갈 수도 있고 근검절약하여 남을 도와 가면서 갈 수도 있다. 겸손히 걸어갈 수도 있고 교만한 걸음으로 갈 수도 있다. 불평불만과 원망을 토로하면서 갈 수도 있고 찬송하면서 갈 수도 있다. 위를 쳐다보면서 걸을 수가 있고 땅만 보고 걸을 수도 있다. 앞을 보고 걸을 수도 있고 계속하여 뒤를 돌아다보면서 걸을 수도 있다. 진리를 따라 살수도 있고 욕심을 따라 살수도 있다.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따라 살수도 있고 유행을 따라 살수도 있다. 주님의 뜻을 따라 계명을 따라 살수도 있고 기분대로. 제멋대로 살수도 있다.
이처럼 우리 주님께서 예정하셨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없이 속박되거나 억압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르면서 자유로 인한 책임 때문에 오히려 너무 많은 자유가 부담될 수도 있다.
솔로몬의 일생을 보면 그를 향하신 하나님의 예정과 솔로몬이 걸어갔던 자유로운 길과 그 결과로 말미암은 타락과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지 않고 회개하게 하시는 은혜의 구원을 볼 수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사람이었다. 사실 솔로몬이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솔로몬을 사랑하셨다. '사랑은 내리사랑'이란 말도 있듯이 언제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삼하 7: 8-16 – 8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와 같이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9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10 내가 또 내 백성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그를 심고 그를 거주하게 하고 다시 옮기지 못하게 하며 악한 종류로 전과 같이 그들을 해하지 못하게 하여 11 전에 내가 사사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게 하고,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13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14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다윗이 무슨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다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솔로몬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에게 ... 하리라”하신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작정(作定)이며 예정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실제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을 역사를 통하여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고는 반드시 이루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예정 속에 포함되었는지는 사람이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作定속에 이미 확정되어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 요 6: 37. 44. 65 –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65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이 말씀들은 다 요한복음 6 장에서 하신 말씀이다. 벳새다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후에 제자들이 부쩍 많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얻어먹으려고 따라다니는 사람들은 원치 않으셨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하신 말씀을 잘 새겨서 들어보아야 한다.
37절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44절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라도 올 수 없으며 65절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올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다시 이를 정리하면 아버지께서 주시고. 이끄시고. 오게 하여 주시는 사람만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다.
바울은 말하기를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기록하고 있다.(롬 9: 16)
원하는 자라고 되는 것이 아니요 힘쓴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의하여 구원하시는 것이어서 구원의 문제는 인간이 어떤 조건을 충족시켜서 구원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구원받게 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 8: 29-30)
* 잠 16: 33 -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 잠 29: 26 -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
* 단 5: 23 - 도리어 자신을 하늘의 주재보다 높이며 그의 성전 그릇을 왕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족들과 왕후들과 후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구리, 쇠와 나무, 돌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 눅 22: 22 -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 행 13: 48 -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작정하신 사람은 우리가 전도하기 전에 이미 작정되어 있다. 바울이 처음 고린도에 가서는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이때 주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이 성에 내 백성이 많다고 하셨다.
* 행 18: 9-10 – 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아직은 바울이 전도를 하지도 않아서 주를 영접한 사람들이 별로 없는 때였다. 누가 아직 중생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있는 때도 아니다. 그런데 이미 주님은 이 성에 내 백성이 많다고 하셨다. 물론 바울은 누구누구가 주님의 백성으로 예정되었는지를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성에는 주님의 백성이 많이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시고 있다.
우리가 전도하러 가는 것은 지옥 가기로 작정된 사람들을 향하여 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누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예정되었는지 모르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전도해야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전도해서 믿음을 가지게 되는 사람들은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사람들이었다.
우리의 전도를 통하여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은 지옥 가기로 작정된 사람들이 아니라 천국의 백성으로 예정되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믿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가 선포하는 교리들 중에 예정론은 많은 사람의 찬성과 반대의 격렬한 논쟁이 있었던 교리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지금은 거의 이러한 교리적인 논쟁을 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신앙의 경륜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의 예정을 체험하게 되는 것은 거의 공통적인 것 같다.
이 논의는 본래 에베소서 1 장 3-14과 로마서 8 장 29-30에 기록된 내용을 중심으로 연구되어진 이론이었다. 그러나 성경을 깊이 연구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예정이 확실해지는 것을 알게 된다. 예정론의 원리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그는 절대적인 주권자이셔야 한다.’는 전제하에서 출발하게 된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전지성(Omniscience)과 전능성(Omnipotence)은 미래에 이루실 모든 일을 예정하셨다는 필연적인 결론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이론은 귀납법적인 방법으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이요. 성경의 선포는 연역법적인 방법으로 드러나게 된다.
초기에 이 예정을 말한 사람은 사도 바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논의하기 시작한 학자는 어거스틴이었다. 그는 자신의 신앙적인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예정을 깨닫게 되었고 학문적인 이론으로 주장하였지만 많은 사람이 주목하지 않았다. 이 예정론이 다시 보강되어 완성된 것은 그 후 천년의 세월이 지나서 칼뱅에 의하여 완성된 이론이다. 그러나 근대를 넘어서 현대인들은 거의 관심을 가지고 이 문제를 논의하는 사람들이 없다.
보수적 견해에서 신학을 하는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양보 없이 예정론을 고수하려고 한다. 일반적으로 예정론을 고수하려는 사람들도 예정론에 대하여 깊이 알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교리를 신봉하려는 자세는 마치 바리새인들의 교리와도 같다. 율법의 참 의미를 알지도 못하면서 그것을 고수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죽이기까지 했던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다.
예정이라는 말만 듣고 그 내용을 진지하게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이 교리에 대하여 거부하는 자세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고수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의 자세는 다 잘못되었다. 그래서인지 요즈음은 조용히 덮어둔 교리처럼 되었다. 이러한 교리는 사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교리라 할 수 있다.
현대인들은 대체로 까다로운 것은 기피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여러 이단들이 성도들을 독특한 교리를 조작하여 유혹하면서 자기들을 추종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할 때는 예정론과 같은 교리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교회사적으로 경험된 대부분의 이단들은 예정을 부인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칼뱅의 예정론에 기초한 신학은 네덜란드와 스코틀랜드에서 정착된 후에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한국의 기독교가 미국 선교사들에 의하여 그 기초가 닦아졌기 때문에 대부분 이 예정의 교리를 받아들였다.
일반적으로 예정론을 몇 부류로 나누어 생각하고 있다. 그 중에 극단적인 예정론을 슈프라랖싸리안(Supralapsarians)이라 한다. 이 주장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 인간이 타락하기 전부터 이 모든 일들이 이미 예정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구원받을 자와 멸망될 자가 이미 다 예정되었다고 본다.
칼뱅이 이러한 극단적인 예정론 자였는지는 알 수 없다. 칼뱅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이론을 신봉한다. 에베소서의 경우는 바로 이러한 예정을 시사하고 있다. 유명한 도르트 회의(Synod Of Dort 1618-1619)의 결정은 이러한 교리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이를 요약하면.
① 무조건적인 선택 ② 제한된 속죄 ③ 완전 타락 ④ 불가항력적인 은혜. ⑤ 보존의 확실성 등으로 정리할 수 있는 교리였다
온건한 입장의 예정론은 예정의 시기를 타락한 후라고 본다. 이를 인프라랖싸리안(Infralapsarians)이라고 한다. 즉 하나님은 타락을 허용은 하셨으나 그것까지 하나님이 예정하셨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타락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그리고 멸망을 예정하신 것은 아니고 단지 함께 타락한 후에 그중에서 얼마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뿐이다.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미 정죄된 그대로 버려두신 것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이 이론의 핵심이 되는 예정된 자의 경로는
① 타락 ② 선택 ③ 부르시고 ④ 의롭다 하시고 ⑤ 영화롭게 하신다.
이러한 이론은 로마서 8 장 29 절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인데 이들은 이 경로는 변경할 수 없는 황금사슬(Goldn Chain)이라고 부른다. 어거스틴은 이 이론의 대표자로 칼뱅주의자들이 많이 수용하는 이론이다.
제 삼의 예정론(Predestination)은 위의 예정론과 자유의지를 조화시켜서 수정한 이론인데 이를 수브랖싸리안(Sublapsarin)이라고 한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타락을 허용하신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구원받을 자를 예정하신 것은 아니고 모든 사람 중에서 믿는 자들만 선택을 입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세 가지의 예정론이 다 성서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어느 한 편만이 진리라고 잘라서 확정하기는 어려운 난제에 속한다. 이 신비는 인간의 이성으로 다 파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신자가 감격 속에서 충성하는 자세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사람의 의지, 능력에 의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에 기초한다는 성서의 교리를 예정론이라 한다. 즉,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그 은혜로 구원하실 모든 사람들을 정해 놓으셨다는 것이다.
구약에는 예정이라는 말이 쓰여 있지 않으나, 신약에는 로마서 8: 29-30 과 에베소 1: 5, 11에 나와 있다. 예정의 예(豫, 이전)란 어떤 논리적, 시간적 이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로마서 9: 11-13에 이 하나님의 선택, 선행규정에 대한 의미가 나타나 있다.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의 출생 이전에, 선도 악도 행하기 전에, 에서는 하나님께 선택받은 동생 야곱 아래 종속되어야 했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 칼뱅의 신학에도 보인다. 어거스틴, 루터, 칼뱅의 예정론은 미리 예정되어 도저히 변경할 수 없다는 관점이 아니라, 창조 이전에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었던 영원한 목적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주의 모든 계획과 가장 세밀한 점까지 그 마음속에 미리 결정하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그 결과까지 미리 내다보셨다는 것이다. 시간은 이 계획을 온전히 실행시킬 뿐이다. 성경에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대해 선택한다는 견해가 나온다. 상벌간 그 결과는 각 사람의 영혼에 돌렸다.(롬 2: 1-16) 이스라엘이 버림을 받은 것은 그 원죄 때문이 아니라 선택과 신뢰가 관계되는 불신앙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갈 1: 15)에 대한 순종(고전 9: 26)과 구원을 위한 노력(빌 2: 12)을 권하였다.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며 그 사랑 안에서 행할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은 무조건이 아니다.(엡 1 장, 골 1 장)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인간의 역사도 예정을 넘어서 그 사랑 안에 비추어 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불행한 운명은 조상의 죄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최고의 은혜를 거절하는 불신앙으로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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