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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땅을 제비뽑아 나누다
민 33:50-56
50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강 가 모압 평지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51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52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깨뜨리며 산당을 다 헐고
53 그 땅을 점령하여 거기 거주하라 내가 그 땅을 너희 소유로 너희에게 주었음이라
54 너희의 종족을 따라 그 땅을 제비 뽑아 나눌 것이니 수가 많으면 많은 기업을 주고 적으면 적은 기업을 주되 각기 제비 뽑은 대로 그 소유가 될 것인즉 너희 조상의 지파를 따라 기업을 받을 것이니라
55 너희가 만일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가 남겨둔 자들이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
56 나는 그들에게 행하기로 생각한 것을 너희에게 행하리라
민 33:50-56 /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할 일]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강가에 있는 모압 평원에 진을 치고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지시하셨다. 51) `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주어라. 너희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발을 내딛거든 52)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몰아내어라. 그들이 돌로 새겨 만든 신상이나 쇳물을 부어 만든 신상을 모조리 부숴 버려라. 또 그들이 지어 놓은 산당도 모두 다 허물어 버려라. 53) 그리고 그들이 살던 땅을 차지하고 살아라. 그 땅은 이미 너희가 대대로 물려받으면서 살라고 내가 너희에게 준 땅이다. 54) 너희 땅에 들어가면 각 씨족 단위로 제비를 뽑아 그 땅을 사람 수에 따라서 나누어라. 너희 각 지파별로 땅을 나누어 그 땅을 차지하고 앞으로도 내내 대물림하면서 살아라. 55) 만일 너희가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다 몰아내지 못하면 그들이 너희를 괴롭힐 것이다. 눈엣 가시처럼, 옆구리에 박힌 바늘처럼 너희를 괴롭힐 것이다. 56) 만일 너희가 그들을 다 몰아내지 못하면 내가 그들을 쓸어 버리기로 마음먹은 것을 오히려 너희에게 갚을 것이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행해야 할 것들을 미리 알립니다. 특히 원주민에 관한 것과 우상 제거에서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를 엄히 경고합니다.
내가 그 땅을 너희 소유로 너희에 주었음이라(50-53) 먼저 약속의 땅을 이스라엘에 허락하셨으니 정복하여 주인처럼 소유하고 누리며 살라는 것입니다. 온 세계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가나안을 원주민에게서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이유는 먼저 그 땅을 온전히 청소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에 섞이지 말고, 그들의 우상 종교와 우상 문화에 구별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출 19:5-6).
그 땅을 제비 뽑아 나눌 것이니(54) 아직 가나안 땅을 아직 얻지 못했는데 땅 배분부터 언급합니다. 그 이유는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가나안 땅 정복 비전을 구체화시켜 각 지파의 사기를 높이려는 목적과 미리 공평한 땅 분배 원칙을 교육해서 땅을 정복한 후 내분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의도하는 분배 원칙은 종족을 따라서 수가 많으면 많은 기업을 주고 적으면 적은 기업을 주는 방식은 생명 존중의 공평한 방식입니다(54). 그리고 제비뽑기는 어떤 종류의 땅을 차지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인간적인 욕심을 배제하려는 하나님의 결정 방식입니다.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55-56) 그 땅의 원주민을 모두 몰아내거나 제거해야할 이유는 창세기 15장 12-16절에서 보았듯이, 그들의 죄악이 하나님의 심판에 이를 만큼 관영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그들의 농사법인데 이는 농사를 시작하며 씨를 뿌릴 때에 생식의 풍요의 신들인, 바알이라는 이름의 남 신상이나 아세라라는 이름의 여 신상 앞에서 농부들이 생식의 풍요 행위를 뜻하는 질펀한 성관계를 가지면 비도 내리고 농사가 풍요로워진다는 숭배 사상이 바탕이 됩니다. 목축업이 주업이었던 이스라엘은 농사법을 배운다는 미명 아래 원주민을 남겨두어, 그들의 노동력을 이용하면서 그들의 우상 문화에 쉬이 현혹될 것은 뻔합니다. 그리고 훗날 그 원주민들은 다시 강해져서 이스라엘의 눈엣가시가 되고, 옆구리를 찌르는 바늘이 될 것은 분명합니다.
적용: 당신이 아름답고 거룩한 하늘의 유산을 누림에 있어서 제거하지 못한, 실제로 눈엣가시와 옆구리를 찌르는 바늘 같은 지인이나 자기 생명을 갈아먹는 치명적인 악습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과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싶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명령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명령이었고, 나를 위한 명령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담긴 의미는 우리가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는 죄악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시고 그 죄악에 뿌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 설 교 >
비전 성취를 위한 말씀
민 33:50-56 / 이한규 목사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 후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강가 모압 평지에 있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가나안의 비전 성취를 위한 말씀을 주셨다. 어떤 말씀인가?
1. 가나안을 점령하라 - 자기를 정복하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주기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거룩한 땅으로 만들도록 원주민을 몰아내고 우상을 다 깨뜨리고 산당을 다 헐고 그 땅을 점령해 거주하라고 말씀하셨다(51-53절). 그 말씀은 가나안을 점령해 강대국으로 만들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성결한 국가로 만들라는 뜻이다.
구약 성경의 많은 말씀은 복된 삶을 위한 영적인 교훈으로 주어진 것이지 그 말씀 그대로 따라하라고 주어진 것만은 아니다. 즉 가나안 땅을 점령하라는 말을 근거로 이웃 국가를 침략하고 그 국민을 불신자란 이유로 죽이는 기독교 탈레반이 되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고 처음 하신 땅을 정복하라는 문화 명령(창 1:28)은 약탈적인 정복자가 되라는 말씀이 아니라 땅을 잘 관리하라는 말씀이다.
가나안을 점령하라는 명령도 “마귀의 세력을 정복하라. 불신앙적인 요소와 세속적인 욕망을 이겨내라.”라는 영적인 의미가 있다. 즉 세상을 정복하기 전에 세속적인 자기를 먼저 정복하고 구체적으로 자신의 이성과 감정과 기분도 정복하라. 가끔 너무 억울한 일을 당하면 분노가 생기고 심해지면 한이 맺힌다. 그때 한에 사로잡히면 상황이 더 어려워지는 경험을 통해 내려놓는 법도 배우고 용서 능력도 얻는다. 그리고 나중에 보면 분노와 폭력을 자제하고 인내하고 용서한 것이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자기감정을 이기는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란 신분과 자부심이 큰 역할을 한다. 크게 보면 구원에는 악한 감정과 힘든 상황에서 구원받는 것도 포함된다. 자기감정을 지혜롭게 잘 정복하라. 하나님의 자녀란 신분을 중시하면 그 신분이 자신을 정복할 힘을 배가시켜 주고 성도다운 삶에 대한 책임의식도 키워 준다. 남의 눈치를 보며 비겁하게 살지는 말되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책임적으로 살라.
성도에게는 감정을 다스릴 최상의 무기가 있다. 무엇인가? 성도가 당하는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신다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몰라도 좋고 꼭 알아야 필요도 없다. 다만 살면서 나를 낮추게 만드는 수많은 사건에는 나를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 자기 정복은 모든 정복 중 최고의 정복이다. 쉽지 않아도 그 일을 이루면 더 본질적인 진리를 얻고 믿음이 커지고 영적으로 앞서게 되고 비전 성취의 때도 가까워질 것이다.
2. 제비 뽑아 나누라 - 공평하게 나누라
가나안 땅은 각 지파의 인구수에 따라 공평하게 주되 어떤 땅을 차지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인간적인 욕심을 배제하려고 제비 뽑아 나누게 했다(54절). 왜 가나안 땅을 아직 얻지 못했는데 땅 배분 말씀부터 하셨는가? 가나안 땅 정복 비전을 구체화시켜 각 지파의 사기를 높이려는 목적도 있지만 사전에 공평한 땅 분배 원칙을 미리 교육해서 땅을 차지한 후 내분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문제가 생긴 후 잘 수습하기보다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낫다. 특히 전쟁은 인간 사회에 가장 무서운 참극을 낳기에 전쟁이 벌어진 후 용감하게 싸우기보다 전쟁을 최대한 막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전쟁이 이미 벌어지면 아무리 용감하게 나라를 잘 지켜도 국민이 무서운 고통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더는 문제를 대비하고 막아내는 선견지명과 협상 능력과 리더십을 갖춰야 한다.
모세는 선견지명이 있는 리더였다. 그 선견지명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 삶의 열매였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나안 땅을 미리 공평하게 배분해 가나안 땅을 얻는 의지를 불태우게 하면서 욕심으로 인한 내분을 사전에 방지했다. 비전 성취도 중요하지만 그 성취로 인한 열매를 어떻게 나누는가도 중요하다. 그때 각각의 공로와 헌신과 현실에 따라 최대한 공평하게 나누려고 하라.
3. 원주민을 몰아내라 - 죄를 뿌리 뽑으라
하나님은 값싼 동정심으로 가나안 원주민들을 몰아내지 않으면 그들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고 하셨다(55절). 그 말씀은 죄를 뿌리 뽑으라는 상징적인 말씀이다. 값싼 동정심을 품고 죄의 세력에 이끌리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래서 좋은 만남이 중요하다. 그런 만남을 위해 기도하라. 어떤 사람이 내 영혼에 잘못된 말을 계속 집어넣는다면 그 상황을 그냥 방치하지 말라. 사람을 차별하지는 말되 멀리할 상황이라면 멀리하라. 살면서 때로는 부정적인 영향권에서 잠시 물러서거나 멀어지는 전략도 필요하다.
어느 날 다리 위에 있던 두 사람 중 하나가 강에 뛰어들려고 했다. 옆 사람이 말렸다. “왜 그러세요? 문제가 뭔가요? 제게 문제를 말해보세요.” 그렇게 둘이 한참 대화한 후 둘 다 강에 뛰어들었다는 의미심장한 유머가 있다. 계속되는 부정적인 얘기에 휩쓸리면 자신도 부정적으로 된다는 뜻이다. 기도 모임을 잘 해야 하는 이유도 서로를 위해 기도한다면서 서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때도 많기 때문이다.
많은 교회에서 기도 모임이 갈등과 분열의 씨앗이 되는 현실은 한국 교회의 가장 아픈 현실 중 하나다. 왜 교회를 위한 기도가 교회를 깨뜨리는 아픈 현실을 낳는가? 교회를 깨뜨리려고 작정한 악인 때문이 아니라 기도 모임의 참된 속성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이다. 무엇을 위해 기도한다면서 기도하기도 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라. 그래서 잘 준비된 사람이 기도 모임을 이끌어야 한다. 동정심은 소중한 것이지만 동정심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면 해가 될 때도 많다.
남의 부정적이고 한스러운 얘기를 계속 들으면 안타까워서 기도도 나오고 동정심도 생긴다. 때로는 힘을 주려고 돈도 준다. 그래도 계속 불평하는 사람에게는 돈 지원도 거의 효과가 없다. 좋은 자리나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어도 나중에는 실망스런 얘기나 원망을 들을 때가 많다.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어느 날 깨닫는다. “이러면 하나님이 이끄시는 나의 사명적인 길이 자꾸 저해되는구나.” 동정심도 바르게 펼쳐져야 하나님 나라 확장에도 좋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도 이룰 수 있다.
어느 날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 발아래 엎드려 병든 자기 딸을 살려달라고 했다. 예수님이 그를 따라갈 때 큰 무리들 중 열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어 예수님의 행보가 지체되었다. 그때 회당장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그 딸이 죽었다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다른 제자들은 “왜 나를 차별하지? 상처 받았다.”라고 할 수 없다.
예수님이 회당장의 집에 도착해 사람들이 떠들고 울며 심히 통곡하는 것을 보고 그 집에 들어가 말씀하셨다. “너희가 왜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다.” 그때 사람들이 비웃자 예수님이 그들을 다 내보내셨다(막 5:40). 그때 사람들이 “왜 나를 내보내지? 상처 받았다.”라고 할 수 없다. 예수님은 사랑이 많으시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부정적인 사람을 문 밖으로 내보내신다.
결국 예수님은 자신과 함께한 자들만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라고 하셔서 아이를 살리셨다. 사람들이 크게 놀랄 때 예수님이 경계하며 말씀하셨다.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 그렇다고 “왜 그 일을 비밀에 붙이지? 왜 내게 비밀로 하지? 상처 받았다.”라고 할 수 없다. 부정적인 면만 보면 예수님에게서도 상처 받을 일이 많다. 예수님도 때로는 누군가를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고 문밖으로 내보내 멀리하셨고 누군가에게는 어떤 사실을 비밀로 붙이셨다.
사랑한다는 것이 나쁜 것이나 불신적인 것도 용납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어디서든지 부정적인 영향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서 자신의 복을 지키라.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면서도 그와의 대화나 만남을 멀리하는 길을 선택해야 할 때도 있다. 사명의 길로 나아가는 데 계속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 상황에서 그 상황에 매몰되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부정적인 당사자에게도 좋은 것이 아니다.
지금 내가 누구와 동행하고 동역하는지 깊이 생각해보라. 부정적인 영향을 계속 받으며 살기에 인생은 너무 짧고 사명은 너무 크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길 원하는 일을 위해 나의 소중한 시간을 가치 있게 쓰라. 계속 부정적인 영향을 받아 참된 복이 막히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할 영적인 에너지가 고갈되면 그 상황을 지혜롭게 끝내라. 필요하다면 예수님처럼 믿음이 없이 떠들며 우는 사람을 지혜롭게 문밖으로 내보냄으로 찬란한 비전을 훌륭한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복된 심령이 되라.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민수기 33:50-34:1 / 피영민 목사
오늘은 민수기 34장의 내용을 중심으로 설교하도록 하겠습니다. 민수기 22장 1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평지에 진을 치게 되었습니다. 모압 평지는 요단 강 동편이고, 이제 요단 강을 건너가면 가나안 땅에 진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민수기 22장부터 32장까지 총 11개장은 모두 모압 평지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리고 민수기 33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 이동했던 광야 노정에 대해 기록되어 있고, 과거를 돌아보는 내용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민수기 34장부터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34~36장에는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앞으로 들어가 얻게 될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미래적인 일들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도는 인생을 살아갈 때에 뒤를 돌아보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 앞을 내다보며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앞날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뒤를 돌아보면 70~80년이지만, 앞을 내다보면 영원한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구만 리입니다. 짧은 인생, 뒤를 돌아보는 일에만 마음을 두지 말고 미래를 보는 시각이 있어야 합니다. 민수기 34~36장은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내용들인데 핵심적인 주제는 바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기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민수기 33장의 후반부와 34장의 내용을 중심으로 말씀을 살펴보기 원하는데, 33장의 후반부는 기업으로 받을 가나안 땅에서 실천해야 할 두 가지 책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고, 34장은 가나안 땅의 경계와 분배, 또 땅을 분배받을 대상과 같은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설교의 전개는 34장을 먼저 살펴보고, 33장 후반부에 기록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두 가지 책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Ⅰ. 하나님의 기업으로서 가나안 땅의 경계와 분배의 문제(민 34장)
1~2절은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기업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때에 그 땅은 너희의 기업이 되리니 곧 가나안 사방 지경이라.” 땅 1평도 소유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민수기 34장 3~12절을 보면 얻게 될 가나안 땅의 경계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3절은 남방 경계, 6절은 서방 경계, 7절은 북방 경계, 10절은 동편 경계입니다.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말하기를 “오늘 점심이나 같이 먹자”라고 했고, 또 다른 어떤 사람은 “오늘 점심에 막국수 같이 먹자”고 했다면 진짜 점심을 같이 먹을 확률이 높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당연히 후자입니다. 후자는 점심을 같이 먹을 가능성이 전자보다 높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체적인 제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주시는데 두루뭉술하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동서남북의 경계를 정하셔서 그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민수기 34장 13~15절에는 가나안 땅을 주실 때 이미 땅을 분배받은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는 제외해야 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단 강 동편의 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분배받은 지파 사람들이 서편 땅을 정복하고 그 땅을 기업으로 나눠달라고 요청해도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단 강 서편 땅은 아홉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서 분배할 것을 언급하셨습니다.
또 민수기 34장 16~29절에는 땅을 분배할 때 12명의 족장을 세워서 제비뽑기를 통해 일을 추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논하거나 상의해서 하지 말라신 것입니다. 그러면 아홉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를 계산했을 때 10명밖에 나오지 않는데 어찌하여 하나님은 12명의 족장을 세우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제사장 엘르아살과 지도자 여호수아가 포함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을 포함하면 12명이 됩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제비를 뽑을 지파 대표들을 임명하셨고, 땅을 분배해 주셨습니다. 땅을 분배하는 것도, 분배하는 방법도 모두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결국 가나안 땅의 분배 역시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겠다는 것임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쉽게 와 닿지 않는 몇몇 단어들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단어가 바로 ‘구속’입니다. 저는 구속하면 경찰서에 잡혀 가는 것밖에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구속’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듣기 싫었는지 모릅니다. 또 머릿속에 개념정리가 쉽게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구속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업’이라는 단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기업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기업은 현대, 삼성, 롯데와 같은 기업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기업하면 생각나는 것이 그것밖에 없으니까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백성들에게 비즈니스를 한 가지씩 주신다는 말씀이신가하는 의아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기업은 기업체나 비즈니스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본문의 ‘기업’은 영어로 ‘Inheritance’라고 하는데, 아버지가 아들에게 나눠주는 땅이라는 뜻입니다. 유산과 비슷한 의미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하나님으로부터 땅을 받을 권리가 있을까요? 그리고 다른 이방 민족들을 쫓아내시면서까지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땅을 주지 옆집 자녀들에게 주지 않습니다. 땅은 아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4장 22~23절에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땅의 경계가 애매모호하고 흐릿한 땅이 아니라 아주 명명백백한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이 가나안 땅의 전 경계를 단 한 번도 100% 온전히 차지한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사시대, 통일왕국시대, 분열왕국시대, 포로시대, 포로귀환시대를 거치면서 단 한 번도 이 땅을 온전히 차지한 적이 없었습니다. 다윗 왕 치세 당시 영토를 많이 확장하기는 하였으나 온전히 점령한 적은 없었습니다. 솔로몬의 시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신약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그 땅을 온전히 차지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주시리라고 약속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그 땅을 완벽하게 차지해 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땅의 어느 한 부분은 꼭 이방민족들에게 점령당한 채 완벽히 차지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런 일이 있었을까요? 왜 주시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지금까지 이뤄지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가나안 일곱 족속을 다 몰아내지 못하고 남겨두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민수기 33장 55절에 “너희가 만일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의 남겨둔 자가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 거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가나안 일곱 족속을 다 쫓아내야 하는데 그들을 쫓아내지 않고 종으로 쓰기도 하고 결혼도 했으며, 심지어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버리지 않고 같이 섬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 땅을 온전히 차지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 증거들은 사시기를 읽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민수기 34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이 실패한 것일까요? 전능하신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를 인간이 범죄한다고 이루지 못할 분이십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민수기 34장에 약속된 가나안 땅의 온전한 경계를 차지하는 것이 미래의 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미래의 일일 뿐만 아니라 하늘의 일이라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민수기 34장에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이 약속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이었습니다. 창세기 15장 18절에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유프라테스 강 유역까지 땅을 차지한 적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았지만 모두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살아생전 가진 땅이라고는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묘지로 사용하기 위해 산 몇 평의 땅이 전부였습니다. 그 땅이 마므레 수풀가에 있는 막벨라 굴 아닙니까?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았지만, 그 역시 약속하신 땅을 모두 차지하지 못하고 죽었던 것입니다. 약속의 실현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8~10절에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지만, 그는 땅만 바라보고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을 바라봤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성을 바라며 살았던 것입니다.
또 히브리서 11장 13~16절에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위해 하늘의 한 성을 예비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은 미래의 일이고, 하늘에서 이뤄지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업을 주시리라고 약속하신 것의 참된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게 되는 것은 예표입니다. 실체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천국을 기업으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그 천국의 이름은 ‘새 예루살렘 성’이라고 했습니다. 이 성은 하나님이 건축자가 되시고 예표된 가나안 땅의 실체가 되는 곳입니다.
이사야를 포함한 많은 구약의 예언자들도 성도들이 받게 될 기업을 장래의 일, 하늘의 일이라고 말했고, 그 땅을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우리 육신으로 밟는 가나안 땅을 모두 차지하지 못할지라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모두 차지하게 된다는 말씀을 했던 것입니다.
이사야 65장 17절에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에 거하게 되면 이전 것은 생각나지 않는 것입니다. 서울이 어떠했는지, 강남이 어떠했는지, 논현동이 어떠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거하는 성도들은 이전 것을 잊게 될 것이지만 기쁨이 충만하고 평화와 만족함이 있는 땅에서 영원복락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뛰놀고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해를 받지 않는 일들이 있는 곳, 영생하는 그 땅에서 왕노릇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민수기 34장에 기록된 기업의 궁극적인 실현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2절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바다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이유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이 땅에 내려와 영원한 천국이 될 것입니다. 천국은 해왕성이나 명왕성과 같이 멀리 있는 한 행성이 아닙니다. 천국은 우리가 사는 이곳으로 내려와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것입니다. 지구가 변하여 ‘새로운 지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 때의 지구는 죄의 흔적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영원히 복된 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곳의 기업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기업은 이 땅의 것과 다릅니다. 지금은 땅을 갖지 못한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그 때가 되면 땅을 차지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단지 그 땅을 넓게 차지할 것이냐 좁게 차지할 것이냐의 차이가 있을 따름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충성했던 성도는 넓을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고, 소홀했던 성도는 좁은 땅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땅의 넓이는 하나님을 어떻게 섬겼느냐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모두 기업을 넓게 차지하는 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영원한 땅을 얻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이 누구에게 주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2편 7~8절에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땅을 기업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은 원래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고, 마귀의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영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말씀 그대로 마귀의 자녀였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 과정을 성경은 ‘양자됨’(Adoption)이라는 단어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양자가 되었다는 의미는 친자와 양자를 구분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던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상속권을 우리가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양자됨의 확신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시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5~17절 전반절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저씨나 아버님이 아니십니다. 아버지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보통 특권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령을 양자의 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심으로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고백과 확신을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상속권을 가진 사람을 영어로 ‘Heir’라고 합니다. 후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후사)가 되었습니다. 공동의 상속자(Co-heir)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속받을 사람들인 줄 믿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기업입니다. 지금은 땅을 억 만 평 갖고 있어도 그리 좋을 일이 없습니다. 죽으면 다 놓고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국의 기업은 영원한 것입니다.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땅입니다. 넓은 땅을 차지하는 충성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기업을 받는 것에서 민수기 34장의 약속은 완전히 실현이 되는 것입니다.
Ⅱ.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수행해야 할 두 가지 책임(민 33:50~56)
33장 52~53절에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파멸하며 산당을 다 훼파하고 그 땅을 취하여 거기 거하라 내가 그 땅을 너희 산업으로 너희에게 주었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첫 번째 책임은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모든 거민들을 몰수이 몰아내고 이스라엘 백성들만 그 땅에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가나안 땅에는 하나님의 백성들만 거하도록 하라”는 명령입니다. 가나안 땅에는 하나님의 백성들만 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약의 용어로 바꾸면 불신자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27절에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만 들어가는 것이지, 우상숭배자들은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5장 5절에도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상 숭배자는 기업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고, 베드로후서 3장 13절에도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압 평지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듯이 의에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에 이르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천년왕국을 보라고 했습니다. 천년왕국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단어입니다. 저는 왕국이라는 단어를 성경에서 본 적이 없습니다. 지상 왕국이 된다는 말은 더더욱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천년왕국을 왜 기다리며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의에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지, 왕국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불신자들은 그곳에 절대 발을 들일 수 없습니다. 물론 지상에서 예배에 참여하고 참석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기업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두 번째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은 땅에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부수고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우상은 가나안 땅에서 제거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을 오해해서 불상을 목을 자르고 락카를 뿌리는 등 몰상식적인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종교 전쟁을 피할 수 없습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은 금칠한 불상들 섬기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대한민국의 영토가 천국인 것은 아닙니다. 이 땅은 가나안 땅이 아닙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은 숭배하도록 내버려 둬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을 수 없으니 그런 일이라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내용은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석상이나 우상을 훼파하라는 의미입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땅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새 예루살렘 성에 가면 그 곳엔 우상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천국에 우상이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우상 숭배하는 자들도 없고 세워줄 우상도 없습니다. 마귀, 귀신들도 없습니다. 불과 유황으로 타는 곳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0절에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8절에도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국에 우상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천국의 예표입니다. 예표니까 그 땅의 우상, 석상들을 파괴하고 산당을 폐하라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땅이 천국의 예표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상의 교회는 다릅니다. 우상과 관련된 것은 조금도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 안에 있는 보이지 않는 우상들을 척결해야 합니다. 특별히 사상적인 우상들이 많이 침투해 있습니다. 공산주의, 종교혼합주의, 종교다원주의, 샤머니즘, 신사도 운동 등 보이지 않는 교회 안의 우상들을 완전히 몰아내야 합니다.
결 론
모압 평지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늘의 도성인 새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할 성도들의 모습을 예표합니다. 우리는 민수기 34장을 대하면서 몇 가지 질문을 스스로 해봐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약속의 기업을 받을 하나님의 자녀들인가?” 또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의 기업을 상속받게 될 것을 확신하고 있는가?”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땅을 받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차이는 넓은 땅을 받는 것인지, 좁은 땅을 받는 것이지 하는 문제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넓은 땅을 상속하시길 바랍니다. 교회 안에는 여러 가지 봉사의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학교, 찬양대, 전도회, 위원회, 찬양대, 친교실 봉사 등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 충성된 일꾼으로 인정받아 넓은 땅에 거하게 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민 33:50-56 / 코너스톤 장로교회
깊은 산 속에서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마을까지 가기 위해서는 숲을 우회하여 멀리 돌아가는 길이 있는가 하면, 숲을 가로질러 가는 지름 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름길에는 가시덤불이 우거져 있었습니다. 가시덤불 자르는 일을 귀찮아 한 농부는 지름길을 막고 있는 가시를 치우지 않고 그대로 놔두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랑하는 딸 아이가 열병에 걸렸습니다. 고열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딸을 위하여 농부는 마을까지 말을 타고 달려가야 했습니다. 한 시가 급한 경우라, 그는 평상시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가시덤불이 우거진 숲 길을 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농부는 이전에도 가시 덤불 사이를 지나간 적이 있었기에 이번에도 그렇게 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생각보다 더 자란 가시에 계속 찔리고 찔려 불편함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만일 이 농부가 평상시에 가시덤불을 미리 치워 두었더라면 그의 여정은 훨씬 순조로웠을 것입니다. 또한 그의 딸을 살리기 위한 약을 사러 가는 길로 더 수월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에 살고 있는 가나안 족속을 가만히 놔두면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과 옆구리를 찌르는 가시가 될 것이라고 경고 하셨습니다. 55절을 봅시다. “[민33:55] 너희가 만일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가 남겨둔 자들이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을 멸하라고 명령하신 이유는 그들이 우상을 숭배하며 음란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나안 족속을 가만히 놔두면 그들의 우상숭배 문화와 음란한 생활 문화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흘러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에게 영적 올무가 되어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께 복 받지 못하고 징계와 저주를 받아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잘 알고 계셨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가나안 민족을 남겨두지 말고 반드시 그들을 진멸하고 그 땅에서 몰아내라고 강력하게 경고하신 것입니다.
추운 겨울 날, 굳게 닫힌 창문 주변을 보면 밖은 춥고, 집 안은 따뜻해서 생긴 온도 차이로 인해 유리 창에 결로 물상이 생기는, 일명 결로 현상이 생깁니다. 이 물방울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여도 가만히 두면 결국 창문 틈에 검은 곰팡이가 자라게 됩니다. 그리고 이 곰팡이를 놔두면 집안 벽지까지 다 곰팡이가 번지게 됩니다. 곰팡이는 호흡기에도 매우 안 좋은 영향을 끼치고 건강에도 해롭습니다. 이처럼 별 것 아닌 것 같은 작은 일이 우리 인생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일들을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불순종한다고 해서 지금 당장 교회 밖에 길을 걸어 가다가 넘어져 코가 깨지는 일들이 일어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오히려 불순종을 해도 당장 어떤 고통이나 심판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가 더 많습니다. 창문에 생긴 결로처럼 죄악과 함께 살아도 아무런 해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더 많은 이들이 과감하게 죄악의 길에 거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죄악은 가시덤불 같습니다. 처음에는 별 것 아닌 것 같아서 가만히 두게 되면, 나중에는 우리 온 몸을 찌르는 고통과 아픔을 수반하는 심판과 형벌로 임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반드시 죄악의 뿌리 까지 다 뽑아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51-52절을 함께 봅시다. [민33:51-52] 51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52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깨뜨리며 산당을 다 헐고” 하나님은 먼저 그 땅의 원주민들 즉 가나안 족속들을 다 몰아내고, 그들이 섬기던 돌로 만든 우상을 다 깨트리고, 우상을 섬기던 산당들도 다 헐어 버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에서 살기 위해서는 먼저 우상을 버리고 모든 죄악을 갖다 버려야 합니다. 우리 일상의 자리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예배의 자리가 되도록 우리 삶 속 자리 잡은 세상 문화, 죄의 유혹들, 거짓 우상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불순종의 결과에 대해서 분명하게 경고하셨습니다. 죄악을 놔두면 가시덤불이 되어 우리 눈과 옆구리를 찌른다고 했습니다. 가시가 옆구리를 찌르면 아프겠습니다만, 눈을 찌른다는 것은 치명타를 의미합니다. 회복 할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을 상징합니다. 이처럼 죄악의 씨앗은 우리의 삶을 무척이나 괴롭게 만드는 썩은 열매로 우리 삶에 돌아오게 됩니다.
아무리 어마어마한 크기의 비옥한 토지를 상속받은 농부라 해도 그 부지의 가시덤불, 잡초, 바위를 가만히 놔두면 풍성한 수확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방해물을 제거하지 않고 씨앗을 심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씨앗이 먹어야 하는 영양분을 가시덤불과 잡초가 다 먹고, 바위 때문에 농작물이 잘 자라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농부는 먼저 땅을 개간하고, 잡초와 가시덤불과 바위를 제거해야만 합니다. 이스라엘도 하나님께서 상속해 주신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복을 받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그곳에서 우상과 이방 신전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크신 복을 받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삶에서도 우상과 죄악을 제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을 만큼 큰 영적 유산을 복으로 주셨습니다. 혹시 하나님의 이 놀라운 축복이 열매 맺는데 방해하는 죄악이 우리 삶에 남아 있지 않은 지 확인해 봅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적 유산, 영적 은혜, 영적 축복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 삶에서 죄를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모든 것을 제거해야 합니다.
찌르는 가시
민 33:50-56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가 '당신은 필요 없는 존재다'라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 가치 있고 인정받고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어느 곳에도 필요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될 때의 절망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없을 때 일이 잘 안돼는 것을 보면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하면서 쾌감을 가지게 되지만, 반대로 자기가 없는데도 일에 전혀 지장을 받지 않고 잘되어갈 때 '내가 무엇 때문에 있나?'라는 절망감에 휩싸이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회사에서 퇴직을 당하는 직장인들의 가장 큰 절망감도 역시 자신이 회사에서 필요치 않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에서 오는 자괴감입니다. 나이 드신 분들이 노상 하는 얘기도 '나는 이제 아무데도 쓸모가 없어'입니다. 그래서 노인분들이 모여 폐지를 주워서 이웃을 돕거나 청소를 하거나 여러 가지 봉사활동을 하면서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스스로 확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생각하고 인정받고 싶어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신자의 가치는 '세상에 얼마나 필요한 자인가?'라는 것으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신자의 가치는 전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각되어져야 할 문제입니다.
이럴 때 많은 분들은 신자의 가치관을 열심히 하고 많이 하는 것에 두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가장 가치 있는 신자는 자신을 가장 가치 없는 인간으로 보는 신자입니다. 자신을 가장 가치 없고 무능한 인간으로 보는 자가 하나님 앞에서 가장 가치 있고 귀한 신자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신을 가치 있는 신자로 만들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나는 가치 없는 인간입니다'라고 고백한다고 해서 가치 있는 신자가 되어지지는 않습니다. 모든 것은 행동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가치 없는 인간으로 인정하고 살아가는 신자는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만 내세울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소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 믿음에서 벗어나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가장 기본적인 믿음의 본질조차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쓸모 없는 존재이고 하나님 앞에서 무용지물인 인간에 지나지 않습니다'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지식층이고 소위 고위 종교계층의 사람들인 바리새인들이 아니라 낮은 계층의 사람들인 죄인, 세리, 창기들이었습니다. 세상에 내세울 것이 없고 자기 소유로 삼아서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자신은 전혀 구원받을 가망성이 없는 인간임을 고백하는 자들을 환영하신 것입니다. 이런 신자들만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할 때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면 신자가 왜 세상에 있어야 하느냐? 신자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냐?'라고 묻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반문입니다.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이유가 뭔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는 분명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해야 할 일이라는 것에 대한 이해가 전혀 다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행동을 해야 하나님의 일이 성취되어진다고 주장합니다. 즉 인간이 안하면 안할수록 하나님의 일은 그만큼 손상을 입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사정을 하고 아부를 해야할 판입니다. 창조주인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에게 '신자님, 제발 내 일좀 해주세요'라고 사정을 해야 하는 입장이 되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 일 해줄테니까 복좀 줄래요'하면서 큰소리치는 것입니다. 때문에 뭔가 일이 잘돼서 기분이 좋으면 이것저것 열심히 하게 되고, 일이 잘안풀려서 기분이 좋지 않으면 하던 일까지 팽개쳐 버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기분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이 방해되거나 미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내가 신자로서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 라는 점에 대해서 혼란이 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면 도대체 나는 뭐냐?'는 자신에 대한 가치관이 흔들려지면서 발생하는 혼란입니다.
특히 선교단체들이 이런 혼란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자기 단체의 존재가치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에 두고 있고, 하나님의 일이란 열심히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그들이 '당신의 단체가 없어도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라는 이 말에 반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단체가 세워진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알고 있고, 또 열심히 성경 가르치고 전도하면서 자신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던 그들에게 '하나님의 일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십니다'라는 말이 이해될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일은 자기들이 더욱 더 열심히 할 수 있도록 힘을 공급해주는 것이고, 일이 잘되도록 도와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거의 모든 교회와 신자들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열심히 함으로써 자기 선교단체의 가치를 높이려고 합니다. 한국교회에 필요한 존재가 되겠다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신다는 말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이기 때문에 절대로 망해서는 안되고 꼭 존재해야하고 발전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나님보다는 눈에 보이는 교회에 가치를 두는데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그렇다면 신자는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분명히 할 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땅에 남겨두시고 살게 하십니다. 그러면 그 할 일은 무엇입니까? 신자의 할 일은 '내가 없어도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진다'는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 대한 봉사이고, 충성이고, 전도이며, 헌신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드러내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면서 자기 기도 응답을 내세우지 말고 하나님은 주님의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봉사를 하면서 하나님은 내 봉사를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봉사를 기뻐하심을 전하는 것입니다. 헌금을 하면서 하나님은 내 헌금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몸을 받으심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여러분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망각하고 자신에게 의미와 가치를 두게 될 때 그것이 곧 우상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상이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가치 두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우상이 안돼는 것은 없으며 모든 인간은 우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식이 우상이고 남편도 우상이고 아내도 우상이며 심지어 교회도 우상이고 교회에서 말하는 하나님도 우상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들의 욕망과 소망과 상식과 가치관을 혼합해서 제조해낸 가짜 하나님에 불과합니다.
출 20:5절에 보면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너를 위하여'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우상은 나 자신을 위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나를 위하여 하는 모든 것은 우상이 됩니다. 자기를 위하여 그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형상이란 부처나 마리아 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형상입니다. 예배당 건물도 형상이며 예배 의식도 형상입니다. 따라서 예배당 건물이 우상이 될 수 있고, 예배의식이 우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떨 때입니까? 자기를 위할 때입니다. 형상을 없애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다 형상인데 어떻게 형상을 없앨 수가 있습니까? 다만 자기를 위한 형상을 만들어 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 형상으로 인해서 하나님에 대한 시각이 가려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도 우상이야기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을 잘 기억하시면서 본문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요단 가 모압 평지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시기 전에 중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은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파멸하며 산당을 다 훼파하고 그 땅을 취하여 거기 거하라 내가 그 땅을 너희 산업으로 너희에게 주었음이라'(52,53절)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며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러한 것들이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상은 하나님의 뜻을 가리우고 거부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 말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부처나 무당이나 점치는 것들만이 우상이 아닙니다. '내가 이것을 위해서 열심히 금식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일이 잘되겠지' 이렇게 자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 응답을 위해서 온갖 방법과 기술을 동원하는 것들도 우상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기도하다 보니까 기도의 참된 의미가 가려져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손에 붙들려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힘으로 자기의 세계를 이루어 보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것을 어찌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도 없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복음을 전할들 그것이 받아들여지겠습니까? 이미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있고, 자기 욕망으로 가득차 있고, 무엇을 해도 자기를 위해서 하려고 하고, 눈에 보이는 신비한 현상에 마음 뺏겨서 자신도 그런 경험을 하고 싶어서 안달인 사람들에게 과연 복음이 복음으로 들리겠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사람을 다 몰아내고 우상을 부수라고 하는 것은 '이제 너희는 너희들의 생각과 욕망으로 살아온 세계를 벗어나서 나에게 붙들린 채 살아가야 하는 새로운 세계를 들어가게 되었다. 그 세계는 눈에 보이는 형상을 의지하는 세계가 아니라 오직 여호와를 의지하고 여호와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세계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울고 원망하며 살았습니다. 홍해 앞에서 애굽 군사 때문에 죽게되었다고 울었고, 먹을 것이 없다고 원망했고, 물이 없다고 해서 불평하며 울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그러한 것으로 사는 나라가 아닙니다. 오직 은혜로 사는 나라입니다. 때문에 은혜로 사는 이스라엘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보이는 것을 의지했던 가나안 사람과 우상은 크나큰 방해거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 없애라고 하신 것입니다.
신자 역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힘을 얻고 은혜 안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세상 것이 나에게서 사라지면 금방 죽을 듯이 야단들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나를 살린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한시라도 세상으로부터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친구라는 관계, 친척이라는 관계에서 멀어지지 않으려고 예배당에 앉아 있으면서도 예식장에 가야할 일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우리들이 눈에 보이는 우상에 둘려 싸여 있을 때 복음에 대해서는 희미하게 되고, 희미한 마음으로는 결코 그리스도를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린 결코 우상으로부터 떠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 깊숙이 오랜 세월동안 습관으로 자리한 채 우리를 따라다녔던 것이 우상입니다. 그런데 우린 그 우상에 대해서 너무 소홀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역시 이스라엘이 우상을 철저하게 무너뜨리고 가나안 사람을 모두 쫓아낼 것을 기대하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우상을 부수라고 말씀하신 것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사고방식이나 습관들이 어느 정도 뿌리깊이 박혀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과 괴로움과 근심 걱정은 바로 뿌리깊은 습관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할 때의 습관이 사라지지 않고 우리 안에 깊숙이 뿌리박고 자리하고 있음으로서 온갖 괴로움과 근심과 번민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 때문에 남을 시기하면서 못견뎌하고, 남의 것을 빼앗고 싶고, 미워하는 모든 고통과 번민들이 사실은 우상으로부터 떠나지 못한 결과로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54절에 보면 '너희의 가족을 따라서 그 땅을 제비뽑아 나눌 것이니 수가 많으면 많은 기업을 주고 적으면 적은 기업을 주되 각기 제비뽑힌대로 그 소유가 될 것인즉 너희 열조의 지파를 따라 기업을 얻을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산업으로 주시는 방법은 지파의 수에 따라서 공평하게 분배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잘한 사람에게 많이 주고 못한 사람에게 적게 주는 방식이 아닙니다. 그 누구에게도 많고 적음이 없도록 수에 따라 분배하십니다. 그리고 땅위 위치는 제비뽑아서 결정했습니다. 제비뽑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주어진 기업으로 만족하며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상을 다 무너뜨렸을 때 가능한 삶의 모습입니다. 즉 눈에 보이는 것에 가치를 두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바라며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고자 할 때 옆의 사람이 얻은 것을 돌아보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럴 때 시기나 다툼이나 경쟁이나 미움이란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옛날 습성이 드러날 때 결국 그들은 주어진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것을 보면서 불평하는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괴로움을 당하고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지 않아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저렇게 좋은 것을 주셨으면서 왜 나는 주시지 않느냐'라고 하면서 자신의 근심과 걱정을 하나님의 불공평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것을 똑같이 분배했다고 해서 인간의 욕심이 사라지고 경쟁이 사라지겠습니까? 아닙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과 똑같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더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결국 공평하게 분배해봐야 불평은 끊이지 않습니다. 나중에는 '하나님, 나는 저 사람보다 열심히 했는데 왜 저 사람과 똑같이 줍니까?'라는 불평으로 하나님을 공격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인간의 속성을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우상을 무너뜨릴 것을 기대하지도 않으셨고, 하나님이 나누어 주신대로 감사하면서 살 인간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아셨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우상을 부수라는 하나님의 진짜 뜻은 55, 56절에 숨겨져 있습니다. '너희가 만일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의 남겨 둔 자가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 거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 나는 그들에게 행하기로 생각한 것을 너희에게 행하리라' 이것이 하나님이 가르치시고자 하신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거민을 몰아내지 않았을 때 그 남겨둔 자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가시가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나안 거민에게 행하기로 한 심판을 이스라엘에게도 행하겠다고 하십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알게 위해서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을 포기한 대가는 하나님의 기업이지만, 그 하나님의 기업은 우리가 바른 인간 되지 못할 때 도리어 우리를 심판해 버린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상을 부수라고 말씀합니다. 우상을 부숴야 할 이유는, 우상이 우리로 하여금 시기하게 만들고, 분쟁하게 만들고, 원수 맺게 만들고, 미워하게 만들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기업을 받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원하시는 뜻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방해하는 것은 우리들의 욕심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부수지 못한 육체의 욕심이 도리어 가시가 되어서 우리를 찌르고 괴롭히게 함으로 말미암아 이 괴로움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고 우상을 부숴 버리지 못한 결과임을 깨닫게 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보다 좋아하는 그것이 여러분을 찌르는 가시가 된다는 것입니다. 눈물이 흐르게 하고, 번민과 고통에 빠지게 하는 가시들은 사실은 여러분들이 귀하게 여기고 사랑했던 것들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것들이 주어진 것을 가지고 축복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축복이 아니라 찌르는 가시입니다. 가시 역할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세상의 것을 여러분들에게 두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시가 여러분을 인간 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아내가 남편이 가시역할을 합니다. 자식이 가시 역할을 합니다. 교회에서 여러분을 찌르는 가시가 있습니다. 찌르게 함으로서 이 괴로움은 내가 하나님만 사랑하지 못하고 하나님만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무너뜨려야 할 것을 무너뜨리지 못하고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주어진 괴로움인 것을 알게 하셔서 인간 만드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괴로움을 당할 때 곰곰이 생각해 보시면 처음에 축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괴로움의 조건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인간다운 인간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 이런 인간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찌르는 가시를 우리 곁에 두시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는 상처도 받고 괴로움도 당해봐야 합니다. 그럴 때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자신이 얼마큼 가치 없는 인간이며 믿음이 없는 인간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인간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습니다. 무엇을 해도 하나님이 하신 것임을 잊지 않게 됩니다. 찌르는 가시로 인해 눈물만 흘리고 한탄만 하지 마시고 믿음을 배우고 새로운 인생을 발견하는 참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가나안에 들어 가거든
40여년간의 광야길을 마치고 이제 그토록 소망하던 가나안 땅이 보이는 곳까지 도달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20세 이상의 출애굽 1세대들은 모두 죽고 이제는 new generation들이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이어받으려고 한다. 이민 1세대는 땅에 떨어져서 지고 이제는 새로운 이민 2세대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 새로운 이민 2세대에게 어떻게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받을 수 있는지를 가르쳐야 할 때가 왔다.
삭막한 광야생활을 통해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께 온전하게 순종할떄에는 모든 것이 평탄하고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받기 위해 앞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었지만, 여호와를 잊어 버리고 자신들의 길을 가며 패역한 일을 행하며 여호와의 얼굴 또한 그들은 쳐다 보지 않으므로 온갖 어려움과 실패를 경험하였다.
광야생활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오직 여호와를 의지하고 믿어 순종하는 것만이 최선의 축복의 길임을 경험하였다. 모세의 사명은 이스라엘의 광야길을 인도하는 것이었다. 이제 그의 사명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여호와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후대들에게 여호와께서 주시는 경고의 message를 주신다.
여호와께서는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받을 이스라엘이 무엇을 어떻게 행하여야 하는지를 가르치신다.
여호와께서는 그동안 수없이 가르치셨다. 하지만 패역한 이민 1세대는 온갖 이유를 대며 여호와께서 명하신 것들을 제대로 순종한 적이 거의 없다. 늘 자신들의 뜻대로 행하려고 하였고, 조금만 힘에 부치면 현실과 타협하려 하였고, 강한 적을 만나면 애굽에 있었던 것이 좋았더라며 애굽으로 돌아간다고 불평과 불만들을 쏟아내기 일수였다. 그것을 너무나 잘 아시는 여호와께서는 여러가지 고난과 역경을 통하여 오직 여호와를 믿고 의지하여 순종하는 길만이 최선의 축복의 길임을 꺠닫게 하셨다. 다시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마음을 모세를 통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전하여 준다.
여호와께서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면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52-53)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깨뜨리며, 산당을 다 헐라 그 땅을 점령하여 거기 거주하라. 내가 그 땅을 너희 소유로 너희에게 주었음이라.
ASV를 보자.
then ye shall drive out all the inhabitants of the land from before you, and destroy all their figured stones, and destroy all their molten images, and demolish all their high places: and ye shall take possession of the land, and dwell therein; for unto you have I given the land to possess it.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해야 할 일을 “D”로 시작하는 단어로 표현한다.
Drive out all the inhabitants
Destroy all the idols
Demolish all the high places
Dwell therein
1. Drive out all the inhabitants
(52)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
이스라엘은 모압 여인들과 가증한 이방신을 섬기는 음행을 하였다.
(민25:1-2)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이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진노하신 여호와께서는 모압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셨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모든 미디안의 남자들은 죽였지만 여자들과 아이들은 살려 두었다.
(민31:7) 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미디안을 쳐서 남자를 다 죽였고
(민31:9)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의 부녀들과 그들의 아이들을 사로잡고 그들의 가축과 양 떼와 재물을 다 탈취하고
여호와께서는 완전하게 진멸하지 않은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셨다.
이에 이스라엘은 살려준 아이들과 여자들 중에서 남자와 동침하지 않은 여자들과 어린 여자아이들은 살려 두고 모두 죽였다. 여호와께서 모든 것을 진멸하라 하신 것은 어찌보면 매우 잔혹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남겨진 여인들의 후손들은 후에 결국 이스라엘의 올무와 가시가 되어 지금껏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있다.
이 말씀은 죄의 근원을 잘라내야 함을 말씀하고 있다.
나에게 죄의 근원이 있나 살펴보자. 죄의 근원인 그 싹을 잘라내야 내가 살 수 있다. 죄의 싹은 내 안에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쫓아내기가 매우 어렵고 또한 내성을 갖고 있다.
Virus들은 날로 내성을 스스로 키우며 변형을 하여 치료하기 어렵게 한다. 내가 갖고 있는 죄성 또한 변형에 변형을 하며 죄의 근원을 쉽게 알지 못하게 하며 내성을 키운다. 참으로 고약한 이 죄성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날마다 날마다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한다. 성령의 충만을 간구해햐 하는 이유이다.
2. Destroy all the idols
(52)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깨뜨리며
우상을 모두 깨뜨려 멸절하라고 명령하신다. 손으로 만든 우상, 나무나 돌을 우상화하며 섬긴다.
(수23:16) 만일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언약을 범하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들에게 절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미치리니 너희에게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가 속히 멸망하리라.
꼭 눈에 보이는 형상화된 이방신들이 우상은 아니다.
내 마음속에 주님보다 더욱 귀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있는가.
주님 보다 더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이 곧 우상이지 않겠는가!
주님보다 자식을 더 사랑하는가.
주님보다 재물을 더욱 얻고자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가.
주님보다 거짓을 더욱 좋아하는가.
주님보다 어떤 그 무엇을 더욱 사랑한다면 곧 그것이 우상이다.
주님은 내가 그 무엇에 마음이 빼았겨 있다면 확실하건데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은 그런 나를 반드시 고쳐주셔서 주님 앞으로 나아오게 하신다. 왜냐하면 우상을 섬기면 그 종말은 결국은 멸망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고쳐 주시는 과정이 우리에게는 고통과 절망과 슬픔이 있을 수 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기 전에 미리 우상 숭배를 버리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현명한 자세일 것이다.
또한 가증한 것들은 제하라고 말씀하신다.
조각한 신상이나 금이나 은으로 만든 어떤 형상들은 가증한 것이다. 그것들이 값어치가 있다고 하여 취하지 말고 불사르라고 말씀하신다.
(신7:26)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것과 같이 진멸 당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멀리하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 당할 것임이니라.
내 주변에 행여나 가증한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자.
집안 구석 구석 모아놓은 가증한 것들이 있을수도 있다. 마귀의 형상, 이상한 그림이나 사진들. 음산하게 느껴지는 물건들. 이런 것들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가증한 것들이다. 이런 것들이 집에 있어 불태우거나 불태울 수가 없다면 악한 기운이 더 이상 내 집에 영향을 주지 못하도록 기도하고 쓰레기 통에 버리자. 하찮은 것으로 인해 여호와의 진노가 임해서는 않되지 않겠는가.
3. Demolish all the high places
(52) 산당을 다 헐고
산당은 성전이 세워지기 전까지 제사를 드리는 장소였다. 출애굽을 하고 광야길을 가는 동안 성소에서 제사들 드렸다. 그 후에 곳곳에서 이방종교의 영향을 받아 산당들을 지어서 제사들 드렸다. 하지만 제사의 형태는 왜곡이 되어 인간적인 요소와 이방종교의 영향이 가미가 되어 올바른 제사의 모습이 변질이 되었다. 여호와께서는 잘못된 제사를 드리는 산당을 모두 헐고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께서 기뻐 받으시는 올바른 제사를 지내라고 명령하신다.
예배의 회복이 있어야 한다.
지금의 우리는 어떠한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나는 어떤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는가 한번 생각해 보자.
왜 교회를 가는가?
누구를 만나기 위해서 교회를 가는가?
어떤 목적이 있어서 교회를 가는가?
나는 과연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주님의 임재가 있는 예배를 드리는가?
여호와의 임재가 있는 예배.
여호와께서는 결코 화려하게 장식된 곳이 아닌 작고 단촐한 성소의 지성소에 임재하셨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형식이나 눈에 보이는 외식적인 모습보다 더욱 중요한 예배 가운데 주님께서 임재하시는가?
우리는 너무나 왜곡된 예배를 드리는 것에 익숙해 있다.
거짓되고 가식적인 예배.
겉만 화려하게 치장된 예배.
사람의 눈에 보이고자 꾸며진 예배.
사람의 귀를 만족하게 하는 말씀의 선포.
왜 목사들은 자신을 그토록 거룩하고 근엄하게 보이려고 하는 것일까?
외식적인 목사들이 주관하는 예배 가운데 주님은 과연 임재하실까?
주님의 임재가 없는 예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배의 회복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시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히10:19-20)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음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에 성소에 있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갈라졌다. 이는 예수님의 육체를 통해 우리 또한 여호와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열어 주신 것이다. 여호와 앞에 나아가게 하는 것은 예배이다. 예배의 회복이란 예배의 순서나 방법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본질인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주님을 떠난 악한 마음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 앞에 나아가 변화받는 것을 의미한다. 예배의 회복을 통하여 가난하고 낮아진 마음으로 오직 주님 만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면 내 안에는 평강이 차고 흘러 넘칠 것이며 그것이 흘러 닿는 곳마다 주님의 사랑 또한 전파하게 될 것이다.
4. Dwell therein
(52) 산당을 다 헐고 그 땅을 점령하여 거기 거주하라. 내가 그 땅을 너희 소유로 너희에게 주었음이라.
가난안 땅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땅이다.
가나안 땅에는 이미 모압족속이 살고 있지만 그들을 쫓아내고 이스라엘이 그 땅을 차지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권리였다.
(55-56) 너희가 만일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가 남겨둔 자들이 너희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 나는 그들에게 행하기로 생각한 것을 너희에게 행하리라.
약속의 땅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축복이 있어야 하며 그리고 나의 노력과 헌신이 반드시 필요하다.
살고 있는 거민들을 쫓아내야 하고, 척박한 땅을 일구어 내야 하고, 기후에 적응해야 한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거민을 몰아 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이스라엘은 힘에 부쳐서 현실에 타협하였다.
결국 쫓아 내지 못한 그 땅의 거민들은 두고 두고 이스라엘에게 눈에 가시처럼 옆구리를 찌르며 괴롭힘이 되었다.
나의 삶 또한 마찬가지이다.
죄의 근원을 제거하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힘에 부쳐서 현실과 타협하고 죄악의 근원을 짤라 내지 못하고 받아 드리면 결국 그것들은 나에게 가시와 올무가 되어서 나를 괴롭게 할 것이다. 고통과 두려움이 절망이 있을 것이며 실패와 좌절과 낙심함이 있을 것이다.
정신을 차리자.
잠자고 있는 영혼들은 깨어 나야 한다.
(레20:23) 너희는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의 풍속을 따르지 말라. 그들이 이 모든 일을 행하므로 내가 그들을 가증히 여기노라.
(레18:28)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 있기 전 주민을 토함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지금 내가 사는 곳이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허락하신 땅이다.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땅에서 여호와께서 주신 축복을 기뻐하며 즐기며 온전하게 거주하기 위해서는 내가 해야 할 일들이 있다.
곧 거룩하게 구별되어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나에게 주어진 축복의 땅을 더 이상 더럽히지 말자.
거룩하게 사는 법을 배우며 열심히 꾀를 부리지 않고 최선의 경주를 할 때에 내게 주어진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기업으로 받는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축복의 땅을 제게도 허락하셨습니다. 주님의 임재가 함께 하는 땅에서 온전한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말씀하셨습니다. 땅의 거민을 쫓아내고, 우상을 타파하고, 산당을 헐어 버리고 그리고 약속의 땅에 거룩하게 구별되어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죄의 근원을 깨끗하게 제하여 버려야 한다고 명령을 하십니다. 죄악으로부터 구별된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죄를 일으키는 장소 에 가지 않도록 저의 발걸음을 금하게 하옵소서. 예배의 회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보다 사랑하는 것이 제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보다 더욱 귀하게 여기는 것들이 우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주 여호와 하나님만을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제 안에 주님보다 사랑하는 저의 우상들을 깨닫고 버리게 하옵소서. 예배를 통하여 주님의 임재를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마음을 느끼기를 원합니다. 경건한 예배. 진정과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저를 도와주옵소서. 약속의 땅에서 온전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약속의 땅에서 불평과 불만이 없는 항상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가나안 땅을 제비뽑아 나누다
민 33:50-56
‘정치(政治)’라는 말은 고대 중국의 유교 경전인 『상서(尙書)』에서 처음 나오는데, “자신과 다른 사람의 부조화(不調和)로운 것, 부정적인 것을 바로잡아 극복하는 일”이라고 정의 내립니다. 이러한 정치 개념이 발전하여 독일의 사회학자이자 법학자, 철학자인 막스 베버(Maximilian Carl Emil Weber)는 정치를 “국가의 운영 또는 이 운영에 영향을 미치는 활동”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인간 정치가 올바로 세워지는 데 필요한 개념이 바로 “정의(正義)”입니다. 40년간 ‘정의’라는 한 주제만 연구한 존 롤스(John Bordley Rawls)는 그의 책 『정의론』에서 정의에 관해 “사회는 구성원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 구성한 협력 체계고, 정의는 사회 구성원이 합의한 기준”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개념은 어디까지나 인간들이 만들어 낸 체제에 불과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회체제는 왕정(王政)입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의 왕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 아래에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인간인 우리가 하나님을 100%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욥처럼 아무 이유 없이 고난받은 사람도 막상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절대 선(善)이시고, 흠이 없으시며,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에 주인이 있다면 그분은 하나님입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고 이 뜻을 거부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가나안에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 만들어 낸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또 하나님의 거룩하신 속성과는 상관없는 음행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땅을 이스라엘을 통해 거룩하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어 그곳을 점령하게 하십니다. 문제는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른 데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노력 없이 하나님이 주신 땅을 차지하려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최소한의 노력과 힘이라도 써서 하나님이 명령하신 뜻을 이루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그 땅의 원주민을 다 몰아내고 우상과 산단을 헐고, 그 땅을 점령하라고 말씀합니다. 마치 아담에게 주셨던 명령과 비슷합니다. 아담이 그랬듯이 만약 우상을 섬기려는 아주 작은 불씨가 남아 있으면 이스라엘은 사탄의 꾐에 언제든 빠져 하나님을 멀리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분배받을 땅을 제비 뽑아 결정하겠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땅의 크기와 위치가 아니라 그 땅의 거주민을 몰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시선은 땅의 크기와 위치, 그리고 그 땅에서 어떤 일을 하여 많은 열매를 얻을지에 쏠려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져야 할 분명한 사명을 말씀합니다. 그곳의 원주민을 몰아내지 못하면 남겨진 자들이 이스라엘의 가시가 된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원주민에게 내리려는 심판을 이스라엘에게 내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뭔가 주실 때, 그냥 주시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분명한 사명을 함께 주시며 그 일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것을 나의 것으로 삼아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 사용하지 마세요.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법을 배워보세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큰 은혜와 평안이 우리 삶에 놓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