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695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3 : 경상도 좌안동 우함양에 얽힌 내력
안의 옆 고을이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이고, 그곳에 일두 정여창의 고택이 있다. 흔히 ‘뼈대 있는’ 고장을 말할 때면 ‘좌안동, 우함양’이라고 한다. 좌안동이라고 부르는 낙동강의 동쪽 안동은 훌륭한 유학자를 많이 배출할 땅이고, 낙동강 서쪽인 함양에서는 빼어난 인물들이 태어난다는 설이다. 이러한 우함양의 기틀이 된 사람이 조선 성종 때의 문신으로 안의현감을 지냈던 정여창이다. 그는 혼자서 독서를 하다 김굉필과 함께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는데, 특히 『논어』에 밝았고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함양 정여창 고택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시묘를 한 뒤 하동 악약동에 들어가 섬진나루에 집을 짓고 대나무와 매화를 심은 뒤 한평생을 그곳에서 지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성종은 정여창의 사직 상소문에 “경의 행실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행실을 감출 수 없는데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이것이 경의 선행이다”라고 쓰고 사임을 허락하지 않았다.
연산군 1년(1495)에 안음현감에 제수된 정여창은 일을 처리함에 공정하였으므로 정치가 맑아지고 백성들의 칭송이 그치지 않았다. 벼슬길에 올라서는 세자에게 강론하는 시강원설서(侍講院說書)를 지낼 만큼 학문이 뛰어났다. 그러나 연산군 때 스승인 김종직과 더불어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함경북도 종성면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 뒤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 되기도 하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중국의 사신을 만났을 때 그를 눈여겨본 사신이 “커서 집을 크게 번창하게 만들 것이니 이름을 여창이라 하라”라고 하였다는데, 그 말처럼 정여창의 학문과 덕망이 출중하여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더불어 조선 성리학의 5현으로 추앙받았다.
그가 태어난 개평리 생가는 중요민속자료 제186호로 지정되었으며, 그의 후손 정병호의 이름을 따서 정병호 가옥으로 불리는데, 이 집이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대하소설 『토지』가 TV 드라마로 만들어지면서부터였을 것이다. 『토지』의 무대인 하동 평사리에서 최 참판 댁을 구하지 못한 제작진이 정병호 가옥을 최 참판 댁으로 설정하였고, 정면 5칸에 측면 2칸의 ‘ㄱ’ 자 팔작지붕 집인 이 집의 사랑채가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은 것이다.
지안고개 © 이종원
개평마을에서 경호강 건너에 정여창을 모신 남계서원(南溪書院)이 있고, 바로 그 옆에는 무오사화로 희생된 탁영 김일손을 모신 청계서원(靑溪書院)이 있다. 남계서원은 소수서원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서원이다. 이곳 함양군 안의를 찾았던 배둔의 글 한 편을 보자.
청계서원
개평마을에서 경호강 건너에 정여창을 모신 남계서원이 있고, 바로 그 옆에는 무오사화로 희생된 탁영 김일손을 모신 청계서원이 있다. 청계서원은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56호로 지정되었다.
아침에 산음(산청)을 떠나 저물녘 안음(안의의 옛 이름)에 와서
홀로 동헌에 기대니 가을밤이 깊어만 가네.
객사의 한 점 등잔불이 반쪽 벽을 밝히고,
몇 개의 피리 소리 앞 숲 너머서 들려오네.
만고 흥망성쇠 겪은 산은 예나 다름없고
온갖 영욕을 겪다가 보니 백발만 되었구나.
성은을 갚지 못한 몸 안타깝게 벌써 늙어
길게 읊으며 삼각산과 한강을 그리워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