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하지 못할 상처는 없다》
심인 전춘택
나는 2004년 1월 말부터 이듬해 7월 말일 귀국하기까지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에서 파견임무를 수행했다. 이라크는 2003년 5월 부시 미국 대통령이 종전을 선언할 때만 해도 전쟁을 겪은 나라 같지 않은 평온한 상태였으나, 그해 가을부터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고, 당시 자이툰부대 파병을 앞두고 각 방송사는 매일 이라크의 위험한 상황을 메인 뉴스로 전하고 있었다.
바그다드, 죽음의 공포
2004년 2월 초순, 쿠웨이트에서 미군 수송기를 타고 저녁 9시쯤 바그다드 군 공항에 도착했다. 군에서는 해가 진 후에는 일절 이동이 불가능하다며 공항 밖으로의 이동을 원천 봉쇄하고 있었다. 할 수 없이 흙먼지 풀풀 날리는 맨바닥에서 각종 장비를 포함한 짐 열두 덩이를 쌓아놓고 기대 앉아 밤을 꼬박 새웠다. 밤새 전쟁영화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폭음소리를 자장가처럼 들어야 했다. 종전이 되었다지만 현지 상황은 더 악화되는 이상한 전쟁터였다. 근무지인 바그다드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에 도착해보니 3중으로 경비를 하고 있었다. 비무장지대보다 더한 요새였다. 공관원들은 호신용 권총을 항상 휴대해야 했고, 심지어 잠을 잘 때도 머리맡에 총을 두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하루에도 몇 차례씩 시내 곳곳에서 자살폭탄 공격 폭발음이 들렸다. 여기에 주택가 옥상에 닿을 듯 낮고 빠르게 비행하는 미군 헬기의 소음과 헬기에서 발사하는 기관총 소음, 저항세력의 소총 사격소리, 도로정찰 명목으로 시가지를 거칠 것 없이 고속으로 질주하는 미군 전차와 장갑차의 굉음, 그리고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시도 때도 없이 귓전을 때렸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 교통이 정체되는 곳, 검문소 등에서는 거의 매일 자살폭탄 공격이 이어졌다. 주요 인사들이 납치되거나 살해되는 일이 너무 흔했다. 이유 없이 집단 학살되어 대로변이나 티그리스 강변에 버려진 시신들이 시내와 외곡 도처에서 발견되었다. 몸값을 받아내기 위한 납치와 강도, 절도가 다반사였다. 길가에는 폭탄 공격에 채 수습하지 못한 시신의 일부가 나뒹굴었다. 자살폭탄 공격에 전우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한 미군들은 체크포인트에 접근하는 차량이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면 자신도 살고 동료들도 살리기 위해 가차 없이 사살해버렸다. 여기엔 조금의 자비심도 없었다. 도로정찰 중인 미군이나 검문소의 미군은 구세주 같은 아군이 아니었다. 잘못 접근했다가는 저항세력으로 오인 받아서 그들의 총에 언제 사살 당할지 모르는 ‘기피대상 1호’였다. 나도 몇 차례 미군의 총에 사살될 뻔했다. 자신과 동료들을 살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자구책이라고는 하지만 무고한 양민이 너무나 많이 희생되었다. 미군 병사가 운전으로 검문소에 접근하는 나에게 특별한 이유도 없이 총구를 겨냥할 때, 90%는 사살될 운명이었다. 대사관 차라고 해서 서울에서 보는 것처럼 외교관 번호판에 국기 게양은 엄두고 못내고 아예 번호판도 없으니 한번 총구를 겨누고 대치하면 어느 쪽도 꼼짝할 수가 없다. 아직도 당시 상황을 떠올리면 그 끔찍했던 악몽들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머릿속이 암흑상태가 된다. 6월 하순 어느 날, 당시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김선일’ 시신을 미군 수송기로 이운했다. 시신 이운이란 것이 시신 안치실에서 꺼낼 때부터 관 뚜껑을 열고 확인하고, 관의 위치가 바뀔 때마다 뚜껑을 열고 다시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을 확인해야 했다. 쿠웨이트에서 시신을 인계할 때도 관 뚜껑을 열고 확인시킨 다음에 참수되어 몸체와 분리된 머리 부분을 봉합하여 인계해야 했다. 바그다드로 돌아와 혈혈단신으로 시내를 다녀야 했을 때, 공포영화의 귀신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사람이 제일 무서웠다. 어떤 살인귀가 항상 그림자처럼 내 등 뒤를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기도 그리고 인연
바그다드에서의 생활은 하루하루가 지뢰밭을 걷는 것 같았고, 아수라의 무간지옥에 있는 듯 공포와 긴장의 연속이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게 될지, 아무도 모르게 납치되어 산채로 목을 잘리는 건 아닌지 너무나 두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스스로 나의 중심을 잡고 일어서기 위해 언제부터인가 나도 모르게 《반야심경》을 암송하거나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었다. 아랍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1인 기도용 카세트를 하나 사서 매일 밤 남들이 잠든 후 손바닥만 한 《금강경》을 옆에 두고 백팔배를 했다.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내가 지은 나쁜 업장을 소멸하고, 나를 항상 보호해달라고 나무관세음보살을 읊었다. 새벽 4시가 되어도 잠이 오지 않아 나를 붙잡기 위한 방편으로 《반야심경》과 《천수경》을 염송하고 《화엄경》약찬게를 흥얼거렸다. 꿈속에서도 염불을 하고 있으니 꿈인지 생시인지 비몽사몽간 잠깐 잠이 들었는가 하다가 귓가를 때리는 쿵! 쾅! 하는 굉음에 잠을 설치다보면 아침이었다. 어느 날 쿠웨이트에 출장을 나왔는데 쿠웨이트 주재 연락반장이 내게 줄 것이 있다고 했다.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스님께서 자이툰부대를 위문하시는 길에 높이 30센터미터 정도의 금동반가사유상 축소형을 선물로 주셨는데 자기한테는 필요 없으니 불심이 돈독한 나에게 인계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반가사유 부처님을 내가 모시게 되었고, 귀국 후에는 우리 집에 모셔지게 되었다. 물론 점안식도 없었지만 그런 의식행사 없이 모신다고, 경우에 맞지 않는다고, 예의범절을 모른다고, 화내거나 노여워하실 부처님이신가. 그런 일로 인해 나를 심판하고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길 바라는 보살님이 계신다면 이미 불보살님이 아니다. 그때 나는 알게 되었다. 자신의 피조물에 대해 노여워하고 심판한다는 기독교의 유일신과 불교의 불보살님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부처님과 보살님은 항상 자비의 미소로 우리 중생을 굽어살필 뿐, 중생들에 대해 노여워하거나 심판하겠다고 겁을 주는 불보살님은 단 한 분도 안 계신다’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처님은 불안佛眼과 혜안慧眼과 신통력으로 이미 모든 중생의 마음을 꿰뚫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 중생들로 하여금 불교의 인연법을 확실히 알고 윤회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용맹정진하기만을 발원하신다. 이런 인과법을 알려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악업을 짓고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중생들을 보고 슬퍼하시고 또한 불쌍히 여기시어 이러한 중생들을 구제하시겠다는 높고 큰 원력이 바로 부처님의 자비심慈悲心이 아니던가! 귀국 후에는 이 반가사유 부처님을 집에 모셔두고 항상 퇴근하면 제일 먼저 촛불을 밝히고 향을 올리고 백팔배를 최우선으로 했다. 그저 나의 불심 하나로 시작된 우연이 절체절명의 인연이 되어 우리 집안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후에 나를 죽음의 나락으로부터 살리게 될 것이라고까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불면증으로 시작한 죽음의 그림자
2004년 늦봄부터 불면증을 겪기 시작했다. 왠지 모를 두려움과 공포감 때문에 눈은 감기는데 머릿속은 24시간 각성 상태가 되었다. 어쩌다 잠깐 잠이 들면 악몽이 시작되었고 공포에 떨면서 퍼뜩 잠에서 깨었다.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언제부터인가 머릿속 정중앙이라 느껴지는 곳에 전기 자극을 댄 것처럼 경련이 일어났다. 이런 이상한 증상이 계속되면서 그대로 의자나 소파에 털썩 쓰러지기를 반복했다. 이런 증상은 귀국 후 3년쯤 되어서야 사라졌다. 귀국한 다음 2년 정도만 해도 사십대였기 때문에 불면증을 버텨낼 체력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증상이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고 이제 오십대가 되다보니 부수적으로 따르는 집중력 장애, 건망증 등이 붙어 또 다른 초조와 긴장으로 나를 괴롭혔다. 언제부터인가 사람 얼굴을 구분할 수 없고 기억할 수도 없다. 방금 전에 식사하고 대화했던 사람의 얼굴을 돌이서는 순간 기억해낼 수가 없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옆 사무실 사람이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고, 시내에서 마주치면 전혀 알아볼 수가 없다. 내내 다니던 길이 낯설게 보였다. 밤에 집을 찾지 못해 헤매고 다닐 때에는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이제껏 대수롭지 않게 사용하던 단어와 지명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당연히 알고 있던 내용도 누가 물어보면 이것 같기도 하고 저것 같기도 했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들로 인해 우울증이 왔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가족들에게 폭발하듯 소리를 지르곤 했다. 그리고 후회스런 마음에 곧바로 부처님께 향을 사르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백팔배를 하곤 했다. 결국은 사이가 좋아졌지만 한동안은 나의 행동에 가족들과 소원해지고 어울리지 못하기도 했다. 지금도 누가 면전에 대고 노골적으로 욕설을 퍼부어도 뭔가 대응할 말이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아서 그저 멍하니 듣고만 있다. 내내 내 뒤를 바짝 따라다니는 것 같던 죽음의 그림자가 아예 뒤통수에 달라붙은 느낌이었다. 이것을 떼어내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다. 달리기를 하면 피곤해져서 불면증도 해결하고, 묵직한 뒤통수가 개운해지지 않을까 해서 매일 8킬로미터 정도를 죽어라 뛰었다. 처음엔 효과가 조금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것도 잠시 뿐이었다. 증상이 악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계속하며 스스로 극복하려 노력했다. 퇴근 후 집에 오면 밥 먹는 시간 외에는 집에 모신 반가사유 부처님께 쉬지 않고 절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국방일보 광고란에서 그동안 별 관심 없어 보아온 동산불교대학 학생모집 공고가 마치 구세주의 초청장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지금에서야 고백하지만, 나는 불교대학 2년을 다니는 동안 어떻게 그곳에 가고 수업을 들었는지 아무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몇 번이나 지하철 종각역을 지나쳤다가 되돌아왔는지, 들었던 강의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아무런 기억이 없다. 강의든 회의든 2~3분만 지나면 아무것도 안보이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엇을 읽어도 3줄 이상 길어지면 몇 번을 반복해 읽어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당시 ‘나’라는 존재는 이미 절반 이상 혼이 나간 상태였던 것이다.
죽음의 충동을 극복한 사불수행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죽음의 어두운 계곡으로 서서히 끌려들어가던 나를 밝은 삶으로 방향전환하게 해준 한 줄기 빛이 비춰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불교대학 졸업과제였다. 과제 내용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10만 8천 사불寫佛.’ 나는 ‘南無阿彌陀佛’을 A4용지 한 면에 108번씩, 양면쓰기로 500장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2007년, 근무지 이동이 있어 나는 일 년 정도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 살게 되었다. 그즈음 증세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 내 뒤통수에 붙어 잇는 그 무엇인가가 혼자 있는 나에게 누군가를 죽이라고 주문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도 어딘가 조용한 곳에서 목을 매라고 했다. 어느 때는 뛰어내리라고도 했다. 나는 유서도 쓰고 자살 시도도 했었다. 퇴근길에 야산을 찾아 목을 맬 장소를 찾기도 했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신기하게도 꼭 그럴 때는 어김없이 아내로부터 애정이 가득 담긴 문자가 왔다. 그 덕분에 정신을 퍼뜩 차려 마음을 추스르고 집으로 왔다. 고속도로에서 차를 몰 때면 시속 200킬로미터의 속도로 질주하며 오직 죽음의 충동만이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나도 내가 무서웠다. 아직 젊은 아내와 아이들이 셋이나 있는데 내가 왜 이러는 것인가? 도대체 왜? ‘저는 살아야 합니다! 제가 지금 죽는다면...’ 나는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집에 있는 반가사유 부처님을 이곳으로 모셨다.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가 나를 덮치려 하면 미친 듯 절을 했고, 나무아미타불 사경에 들일 수 있는 모든 열성과 시간을 투자했다. 처음엔 사불을 쉽게 생각했는데, 막상 한자漢字로 쓰려니 업무시간을 제외하고 하루에 한면 쓰기도 바빴다. 한자로 쓰는 것은 한글로 쓰기보다 최소 5배 이상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잠깐 든 잠에 악몽에 시달리다 깨면 일어나서 반가사유불상에 향을 올리고 ‘南無阿彌陀佛’을 사불했다. 한참을 쓰다가 손이 저려오면 차분히 앉아서 명상을 하기도 했다. 지금 이 고통, 이 괴로움이 어째서 내게 닥치게 되었을까? 과거 생에 내가 지은 죄업을 현생에 받는 것일까? 아니면 과거의 좋지 않은 업장을 떨어내기 위해 나에게 자연스럽게 다가온 고통일까? 어찌 되었든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살기 위해 절하고 살기 위해 사불했다. 모든 정성과 마음을 다했다. 이렇게 해서 불교 대학 졸업을 일주일 정도 앞두고 사불을 완료했다. 그 순간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기묘한 감정, 기쁨과 슬픔이 뒤엉키고 교차하는 감정이 나를 지배하며 나도 모를 눈물이 두 뺨을 적셨다. 그렇게 지난 2년간 정성들여 사불한 500장 종이뭉치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2010년 가을 어느 날, 이웃과의 작은 마찰이 불씨가 되었다. 그동안 나를 괴롭히던 그 무언가가 저들을 죽이고 나도 죽으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직전 퍼뜩 정신이 들었다. 하마터면 큰 사건이 일어날 뻔했다. 이 일로 불명예 전역으로 가닥이 잡히던 차에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것으로 급선회했다. 불명예 전역을 하게 되면 30년 공직생활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된다. 그런데도 나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오직 ‘죽음’만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루 사이에 지옥과 천당을 오간 것이다. 그때 행동을 멈출 수 있던 것은 그동안 열심히 절하고 기도하고 사불한 공덕에 대한 부처님의 가피력이라고밖에 더 이상 다른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없다. 이렇게 해서 2년 동안 4회의 입원치료를 반복한 끝에 군의관의 권유로 전역을 하게 되었다.
치유의 장소, 오대산 북대 미륵암
정신과 치료가 계속되던 2011년 3월 하순 어느 날, 친근한 불자님의 소개로 오대산의 북대 미륵암彌勒庵을 찾아가게 되었다. 3월 하순이라지만 상원사에서 북대 가는 길은 제설작업을 하지 않아서 무릎까지 눈에 빠졌다. 바람이 매섭게 불면서 쌓인 눈을 날렸다. 어렵게 찾아간 미륵암의 주지스님께서는 내가 이렇게 되기까지 자초지종을 들으시고는 언제든지 와서 요양할 수 있도록 특별히 배려해주셨다. 고즈넉한 암자에서 맑은 공기 마시며 내가 할 일이란 뻔했다. 그러나 주지스님께서는 누구라도 철야기도는 일체 불허하시기 때문에 하루 세 번 예불 때와 틈날 때마다 그저 쉼 없이 절만 열심히 했다. 모든 업장을 소멸하기 위해 마지막 투혼을 불사르는 마음으로 절하고 절했다. 절을 하도 많이 하다 보니 방석이 비교적 두툼한데도 무릎이 아팠지만 꾹 참고 계속했다. 절을 하면서 조상님들의 왕생극락 발원으로부터 나와 인연 있는 모든 사람들의 건강과 행복과 소원성취를 위해 기도하다 보니 막상 나 자신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잊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잠깐 잠이 들었다가 눈만 뜨면 스님의 독경소리가 들렸다. 암자를 나와서 눈 쌓인 산길을 걸어도 똑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오대산 능선에 설구雪丘를 만드는 칼바람 사이로 독경소리가 들렸다. 스님께 이런 말씀을 드렸더니 나무아미타불을 계속 염송하라고 하셨다. 나는 계속 절만 하면서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뛰쳐나오듯 미륵암을 나와서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을 무작정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눈보라 속에서 발밑으로 소나무 꼭대기 가지가 보였다. 능선 위로 눈이 날려 소나무 꼭대기에 두텁게 눈이 쌓였고, 내가 그 꼭대기 위에 서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눈 속에 빠지면 그대로 동사凍死할 것이다. 문득 정신이 들어 옆으로 굴러서 눈 쌓인 억덕을 내려왔다. 해가 저물 무렵 미륵암으로 돌아오니 주지스님께서 걱정스런 마음으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몸에 묻은 눈을 털어내고 드넓은 대지를 향해 심호흡을 하니 오대산의 맑은 공기와 정기가 나를 정화시키고 악연들을 말끔히 소멸시키는 것 같았다.
천백억 화신 석가모니불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본다. 하루하루가 생과 사의 기로였던 바그다드 파견근무, 그 기간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납치 및 살해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모른다. 내 생명이 미군 병사의 손가락 하나에 달려 있던 그 순간들, 자살충동의 극복... 그 어떤 경우라도 불보살님과 화엄성중님의 가피력이 존재하지 않고서는 나는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사지死地에서 나를 붙잡아주었던 경전, 염불, 매일의 백팔배, 반가사유 부처님을 모시게 된 기쁨, 나무아미타불 10만 8천 사불, 오대산 북대에서의 수행 등 지난 십여 년의 신행생활을 되돌아본다. 그렇다. 지금에 와서 다시 돌이켜 생각해봐도 정신과 치료를 시작하기 전까지 이러한 신행생활이 없었더라면 나는 벌써 이 세상과의 인연을 끊었을 가능성이 99퍼센트였다. 그동안 독실한 불자의 길을 걸어왔기에 결정적인 순간순간에 악연을 끊고 부처님의 가피력을 받을 수 있었다고 확신하고 또 확신한다. 그동안의 모든 일들이 나의 몸과 말과 행동으로 지어진 악업을 떨쳐버리기 위한 길이었고, 그것이 곧 인연법의 길이었고 부처님의 가르침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영혼이 정화되는 듯한 시원한 기쁨과 함께 마음이 한결 평온해지는 것을 느낀다. 지나온 인연의 길에서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도록 ‘나’를 붙잡아주었던 그 모든 선악과들이 곧 천백억 화신 석가모니불이었다고 확신하며, 그 모든 경우에서 ‘나는 부처님을 보았노라’고 세상 앞에 확언할 수 있을 것이다.
- 도서 : 나는 그곳에서 부처님을 보았네 - |
출처: 상민이의 불교 자료실, 법보시 원문보기 글쓴이: 상민
첫댓글 _()_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대단한 정신력입니다.
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_()()()_
부처님의 현화를 몸소 체험 하시었슴을 축하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_()_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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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머아미타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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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관세음보살!
금강송 합장//
정말 장하십니다.. 그시간들의 고통이 느껴집니다. 정말
잘 견디셨습니다. 불보살님의 가호가피와 함께 마움수행 잘해나가시기를 .. 축원을 보냅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