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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 : | 이부오 |
출간일 | : | 2021년 10월 20일 |
판 형 | : | 152×225mm |
분 량 | : | 245쪽 |
ISBN | : | 979-11-90429-20-7 03910 |
정 가 | : | 15,000원 |
발행처 | : | 도서출판 역사산책 |
도서문의 | : | 031-969-2004 |
* 국내도서>역사문화>한국사>한국고대사
[책소개]
신라는 어떻게 천년을 이어왔는가?
천년왕국 신라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가?
이 책은 신라의 운명을 바꾼 사람들이 한 구실을 조명해 보는 것이다.
신라의 역사는 소국으로부터 출발해 고대국가로 발전하던 시기,
삼국 통일로 번영의 절정을 구가하던 시기,
국운이 기우는 가운데 부흥을 꿈꾸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각 단계마다 기로에 선 신라의 운명을 이끌고 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려고 한다.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들은 신라인에게 닥쳤던 위기와 겹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신라의 운명을 바꾼 주인공들의 구실을 참고한다면
오늘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작은 보탬이 될 것이다.
[저자 소개]
이부오
충북대학교 역사교육과 졸업
한국정신문화연구원부속대학원 역사학과 석사과정 졸업
서강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 졸업
고양시 중산고, 화정고, 백석고, 주엽고 역사교사
충북대학교․국민대학교 강사/세종대학교 겸임교수
현 파주시 한가람중학교 역사교사
『영토한국사』(공저), 소나무, 2006.
『한국고전사』-고대편-(공저), 육군본부, 2007.
『경기도 역사지명사전』(공저),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1.
『신라의 영역지배 편성과정과 외위』, 서경문화사, 2019(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삼국사기≫ 지리지에 기재된 삼국 지명 분포의 역사적 배경」, 『지명학』14, 2008.
「≪한국사≫의 고대 전쟁사 서술과 개선방향」, 『군사』94, 2015.
『고양 문화유산 답사기』, 역사산책, 2020.
[여는 글]
신라는 기원전 57년부터 기원후 935년까지 천 년 가까이 존속했다. 고려가 474년, 조선이 518년간 이어진 것과 비교하면 아주 긴 세월이다. 천하를 호령하던 중국의 왕조들이 짧게는 수십 년, 길어도 300여 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신라의 존속 기간은 고대 로마에도 크게 뒤지지 않는다.
고대 삼국 중에서 신라는 가장 늦게 성장했으며 세력도 제일 약했다. 하지만 일단 성장의 기세를 잡은 뒤에는 이를 놓치지 않았고, 결국에는 백제와 고구려를 눌러 삼국 통일의 주인공이 되었으며 그 뒤로도 상당한 기간 동안 번영을 이루었다. 멸망한 뒤에는 김씨와 박씨 등 많은 인구를 차지하는 성씨를 비롯해 불교와 유교 문화, 중앙집권적 정치 등 그 유산이 고려와 조선을 거쳐 현재 우리에게까지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그럼 신라가 오랫동안 번영한 비결이 뭘까?
신라는 태백산맥 꼬리뼈의 잘록한 골짜기에서 탄생하고 낙동강 유역을 무대로 성장했다. 소백산맥으로 차단된 지리적 조건이 선진 문물 수용에 지장을 주었지만, 비교적 안정된 환경에서 성장하는 바탕을 제공했다. 건국 초부터 강하게 유지된 전통적인 지배 질서가 국가적 단결에 유리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신라도 성장 과정에 수많은 격동을 겪었고, 세력의 부침도 적지 않았다. 이를 극복하고 천년 왕국이 된 요인을 환경적인 측면에서만 찾을 순 없다. 한 나라가 주변 세력과 끊임없이 경쟁하는 가운데 발전하려면 한정된 역량을 효과적으로 투자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지혜로운 선택을 해야 한다. 신라도 그랬을 것이다. 번영과 쇠락의 기로에 선 신라의 운명을 개척한 사람들이 어떤 구실을 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 주인공은 왕일 수도 있고, 영웅일 수도 있고,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일 수도 있다.
이 책의 목적이, 신라의 운명을 바꾼 사람들을 조명해 보는 것이다. 신라의 역사는 소국에서 출발해 고대국가로 발전하던 시기, 삼국 통일로 번영의 절정을 구가하던 시기, 국운이 기우는 가운데 부흥을 꿈꾸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각 단계마다 기로에 선 신라의 운명을 이끌고 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려고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래 100년 조금 넘는 세월이 흘렀다. 1948년 정부 수립을 기준으로 하면 73년이 지났을 뿐이다. 건국 당시 형편을 생각하면 대한민국이 커다란 발전을 이뤄 냈다. 하지만 출발부터 품을 수밖에 없던 민족 분단의 문제는 쉽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주변 강대국 사이에서 우리 입지를 확보하는 일도 녹록지 않다. 해방 직후 시작된 이념 갈등은 신자유주의에 따른 계층 갈등까지 더해져 한국 사회를 짓누르고 있다. 앞으로 수백 년 이상 번영하려면 역사에서 지혜로운 선택의 순간을 살펴보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들은 신라인에게 닥쳤던 위기와 겹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신라의 운명을 바꾼 주인공들의 구실을 참고한다면 오늘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작은 보탬이 될 것이다.
[본문 중에서]
p. 10
신라는 기원전 57년에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세웠다고 알려져 있다. 그로부터 56대에 이르는 왕이 즉위했으니, 박혁거세는 신라의 상징적 인물이다. 하지만 고려를 세운 왕건王建이나 조선을 세운 이성계李成桂에 비해 박혁거세의 이미지는 왠지 어렴풋하다.
박혁거세에 대한 이야기는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박혁거세는 기원전 69년 오늘날 경주시 탑동의 나정蘿井에서 알을 깨고 태어났다. 그리고 열세 살 되던 해에 경주 지역 6촌장의 추대로 신라의 거서간이 되었다고 한다. ‘간’은 부족장을 가리키는 말로, 마립간의 간이나 몽골에서 최고 지배자를 가리키는 칸과 같은 뜻이다. ‘거서’는 높고 존귀함을 가리킨다.
p. 22
한편 6촌장을 모두 토착 세력으로 보기는 어렵다. 기원전 1세기에 경주에 들어온 고조선의 망명인 중 상당수도 점차 토착 세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고조선에서 가져온 철기 기술이나 정치적 경험으로 고인돌 주인공의 후예들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했을 것이다. 고조선의 망명인과 기존 토착 세력이 충돌과 타협을 거치면서 6촌장이 대표하는 세력을 형성한 것이다. 물론 이들 사이에도 세력의 차이가 있었다. 예컨대 앞에서 말한 것처럼 고허촌장이 소벌도리인데, ‘소벌’이 ‘높다’는 뜻을 담고 있다. 소벌도리는 6촌장이 모여 의논할 때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혁거세 탄생 신화에 등장하는 것도 이런 지위를 말해 준다.
p. 29
탈해는 처음에 자신을 맞이한 할멈을 따라 고기잡이를 하며 성실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골상骨相이 남달랐기 때문에 할멈이 그에게 학문에 힘써 이름을 떨치라고 했고, 공부를 열심히 한 그가 결국 지리地理의 이치를 터득했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어느 날 탈해가 노비 두 명을 거느리고 토함산에 올라가 돌무더기를 쌓고 7일간 머물렀다. 이 기간 동안 그의 활동은 신화 속 영웅들이 일반적으로 거치는 수련 과정이다.
p. 57
즉위한 지 3년 만인 517년에 법흥왕이 오늘날의 국방부에 해당하는 병부를 설치했다. 대보나 이벌찬과 같은 직책이 이미 건국 초기부터 있었지만 일반 사무와 군사 업무를 함께 총괄했다. 이제 군사만 총괄하는 관직, 병부령이 처음 만들어진 것이다. 왕이 신하들과 협의해 결정하던 군사 안건을 왕명으로 집행하게 되었다. 법흥왕은 단일 창구로 군사 지휘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520년에는 왕권을 더욱 안정시키고 통치의 기준을 확립하기 위해 율령을 반포했다.
p. 79
신라는 이사부가 도살성과 금현성을 함락한 550년에 단양 일대와 국원성도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충성을 바친 지역민들을 추모하기 위해 신라가 세운 단양 적성비가 그 증거다. 비를 세우라는 명령은 진흥왕이 내렸지만, 이를 위한 회의는 이사부가 주재했다. 그가 두 성을 함락한 뒤 경주로 돌아가 국정을 총괄한 것이다. 이듬해에 진흥왕이 낭성에 행차했다. 이곳에 있던 하림궁에서 왕이 우륵于勒의 가야금 연주를 들을 만큼 남한강 상류에 대한 신라의 지배가 안정되었다. 이 주변에서 전공을 크게 세운 이사부가 이 행차에도 참여했을 가능성이 크다.
p. 97
진흥왕은 자신이 어려서 왕위에 올랐지만 훌륭한 신하들의 보필을 받아 사방의 토지와 백성을 잘 다스리게 되었다고 운을 뗐다. 지역 군주와 그 휘하 지방관, 촌주들의 구실도 잊지 않았다. 그들 덕에 온 나라의 토지와 산림과 하천을 잘 다스리게 되었다고 밝혔다. 북한산 순수에서 는 하늘에 초점을 맞췄지만, 이곳에서는 토지와 백성을 강조했다. 이것은 비자벌뿐만 아니라 주변 일대를 모두 신라의 영토로 삼겠다는 선언이었다. 낙동강 서쪽의 가야 소국들을 손에 넣겠다는 선전포고와 같았다. 이런 내용을 담은 순수비가 목마산성 아래에 세워졌다. 그리고 진흥왕의 선언은 현실이 되었다. 이듬해에 반란을 이유로 대가야를 정복하고, 거의 동시에 다라국을 비롯한 나머지 가야 소국을 모두 손에 넣었다. 낙동강 유역 전체를 영토로 확보한 것이다.
p. 132
675년 1월, 토번 쪽이 안정되자 당이 신라에 대한 전면 공세에 나섰다. 2월에 유인궤劉仁軌가 대군을 이끌고 와 칠중성을 함락했고, 이근행은 매초성을 장악했다. 하지만 이해 9월에는 신라군이 당군의 보급선단을 천성 주변 한강에서 격침해 보급을 기다리던 이근행의 부대에 치명타를 입혔다. 그리고 즉시 매초성을 공격해 대승을 거뒀다. 임진강과 한강을 연결하는 요충지를 확보한 것이다. 당군이 칠중성을 총공격하며 만회에 나섰으나, 신라군의 농성전에 격퇴당했다.
p. 169
이런 분위기를 이용해 일길찬 대공大恭과 그 아우인 아찬 대렴大廉이 혜공왕을 몰아내려고 했다. 이들은 왕권에 대항하는 진골을 최대한 끌어모아 33일간 왕궁을 포위했다. 경주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유력한 세력이 반란군을 지지했다. 하지만 왕권파에 가담한 세력도 많았다. 전국적으로 96각간이 서로 싸웠다고 전하는데, 통일 전쟁을 거치면서 첫째 관등인 각간의 수가 늘어났다고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는 지배 세력의 대부분이 왕권파와 진골 귀족파로 나뉘어 싸웠다는 뜻이다. 왕 권파의 정부군은 간신히 반란을 진압했다. 반란 세력이라면 친가와 외가를 막론하고 친족을 모조리 처형했다.
p. 190
민애왕의 쿠데타에 참여해 시중까지 하던 이홍은 두려움 때문에 처자식을 버리고 산으로 도망쳤는데, 신무왕이 보낸 기병들에게 잡혀 죽었다. 이로써 신무왕이 반대파의 핵심을 제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달벌 전투에서 정부군을 이끌던 대흔 같은 이를 관대하게 처분했다. 김 헌창의 반란을 진압한 경험이 있는 그가 반란군의 지휘자를 모두 제거하기보다는 통치에 활용하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p. 214
888년 2월, 진성여왕의 명령으로 위홍이 승려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향가집 『삼대목三代目』을 펴냈다. 삼대가 신라의 1,000년 역사를 구분하는 상대, 중대, 하대라는 견해가 있다. 신라인들이 신라의 역사를 삼대로 구분하고, 선덕왕 이후를 하대로 여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구분은 신라가 곧 망한다는 가정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다. 진성여왕이 세상을 떠나고 거의 40년 만에 신라가 망했지만, 『삼대목』이 편찬된 888년에는 신라의 멸망 시기가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대는 진성여왕의 아버지와 형제들, 즉 경문왕·헌강왕·정강왕의 재위기를 가리킬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삼대목』의 편찬은 진성여왕과 위홍이 자기 가문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작업이었다.
[차 례]
-여는 글-
1장 천년 왕국의 여명
1. 신라를 세운 수많은 혁거세들 10
혁거세 신화의 의문|경주 오릉에 전하는 혁거세 이야기|
신라의 건국과 혁거세의 실체
2. 탈해이사금, 석씨 왕가를 개척하다 26
월성 땅을 빼앗은 대장장이|떡을 물어 왕위를 다투다|
석씨 왕가를 개척한 비결
3. 내물마립간, 신라를 반석에 올리다 40
김씨 왕가를 확립하다|시대의 변혁을 과시한 배경|
고구려의 간섭 속에 외세를 이용하려는 줄타기
4. 법흥왕, 고대국가의 초석을 다지다 55
율령을 반포하기까지|이차돈을 희생시킨 이유|
금관국 흡수를 둘러싼 신라의 전략
5. 이사부 장군, 영토 확장의 영웅이 되다 69
낙동강 하구를 건넌 청년 장군|우산국을 정복하기까지|
가야 4촌을 공격하다|금현성과 도살성을 차지하다|대가야를 정복한 노장군
2장 통일 왕국의 절정
6. 진흥왕, 삼국 통일의 밑돌을 놓다 84
한반도의 허리를 차지하다|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처단하다|
하늘과 땅에 과시한 진흥왕 순수비
7. 김춘추와 김유신, 삼국 통일의 문을 열다 100
두 가문의 만남|김유신이 압량주 군주로 부임한 이유|
외교 전략가 김춘추의 큰 그림|김유신의 백제 원정을 둘러싼 의문
8. 문무왕, 당에 맞서 삼국을 통일하다 120
백제 지배를 둘러싼 갈등|고구려 원정에 나선 신라군의 고난|
당에 대한 신라의 이중 플레이|나당전쟁 승리의 비결
9. 신문왕, 통일신라의 뼈대를 완성하다 137
장인 김흠돌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천하를 통일한 제국 만들기|
만파식적에 담긴 비밀
10. 경덕왕, 중대 왕권의 안위를 근심하다 151
한화 정책의 전말|충담의 「안민가」에 담긴 뜻|
간절히 바란 태자를 얻었으나
3장 천년 왕국의 부흥을 꿈꾸며
11. 원성왕, 신라 하대의 왕통을 열다 168
김경신과 김양상의 쿠데타|북천의 물이 가른 운명|
종묘의 주인공 바꾸기|다시 불러낸 만파식적과 동해 호국룡
12. 장보고와 신무왕, 골품제의 장벽을 넘다 183
실패한 쿠데타 세력을 품어 준 장보고|장보고와 김우징의 약속|
꿈에 화살을 맞고 죽은 신무왕|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삼으려 했으나
13. 경문왕, 신라의 중흥을 꾀하다 196
면접시험으로 왕이 된 응렴|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작은 왕통을 열다
14. 최치원과 진성여왕, 개혁과 보수의 기로에 서다 210
세 번째 여왕의 탄생|왕거인의 예언|떨쳐 일어서는 지방 세력|
최치원의 시무 10조를 둘러싼 갈등
15. 경순왕, 천년 왕국을 왕건에게 바치다 227
견훤이 앉힌 경순왕|신라의 안방에서 격돌한 견훤과 왕건|
왕건의 경주 방문을 둘러싼 기싸움|개경으로 가는 길
참고 문헌 • 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