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차는 휘발유를 넣어야 달릴 수 있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다른 것을 넣으면 달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넣어야 달릴 수 있도록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스스로 우리 영혼이 연소시킬 연료가 되시고
우리 영혼이 먹을 음식이 되신 것입니다.
2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임을 당했으며,
그 죽음이 우리의 죄를 씻어 주었고,
그가 죽음으로써 죽음의 세력이 힘을 잃었다는 말을 듣습니다.
이것이 공식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어야 하는 바입니다.
3
타락한 인간은 개선의 필요가 있는 불완전한 피조물이 아니라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아야 하는 반역자입니다.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면서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
그 동안 잘못된 길을 걸어 왔음을 깨닫고
삶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준비를 하는 것,
이것이 이 '곤경'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렇게 항복하는 과정을 그리스도인들은 '회개'라고 부릅니다.
4
회개한다는 것은 수천 년 간 익혀 온
자기 만족과 자기 의지를 버린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여러분 자신의 일부를 죽이는 것,
일종의 죽음을 겪는 것을 뜻합니다.
5
그리스도인이란 절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회개하고 다시 일어나 몇 번이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사람
-그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생명이 매번 그를 회복시키며
그리스도처럼 일종의 자발적인 죽음을 반복할 수 있게(어느 정도까지는 해 주므로)
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여타의 사람들과 구별되는 이유입니다.
6
각 개인의 용기와 이타심 없이는
어떤 제도도 제대로 작동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한,
아무리 사회적, 경제적 개선책을 찾은들 다 뜬구름 잡는 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법으로는 인간을 선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선해지지 않는 한 사회는 좋아질 수 없습니다.
7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면 평화뿐 아니라
지식도 얻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사람은 선해지면 선해질수록 자기 안에 남아 있는 악을
더 분명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악해지면 악해질 수록 자신의 악을 깨닫지 못하지요.
8
쾌락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은
전적으로 영적인 쾌락입니다.
즉 잘못을 남에게 미루고 즐거워하는 것,
남을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거나 선심 쓰는 척하면서
남의 흥을 깨뜨려 놓고 좋아하는 것,
험담을 즐기는 것,
권력을 즐기는 것,
증오를 즐기는 것이야말로 악한 죄입니다.
9
용서하는 법을 정말 배우고 싶다면
(모든 성패는 용서를 배우고 싶어하는 마음이 정말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좀더 쉬운 대상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즉 남편이나 아내, 부모나 자녀,
또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지난주에 내게 잘못한 행동이나
말을 용서하는 일부터 시작하라는 것이지요.
두 번째로 우리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듯이 내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는 나 자신을
얼마나 한 치 오차 없이 사랑하고 있습니까?
#10
기독교는 그 사람이 왜 그런 짓을 저질러야 했을까 안타까워하면서,
할 수만 있다면 언제 어디에서 어떤 식으로든 치유되어
그의 인간다움을 되찾기를 바라라는 것입니다.
#11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그의 잘못을 벌하지 말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벌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2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그에게 호감을 가지라거나
그가 근사한 사람이 아닌데도 근사함 사람이라고 말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잘되기를 바라라는 것입니다.
#13
악이란, 교만입니다.
악마는 바로 이 교만 때문에 악마가 되었습니다.
교만은 온갖 다른 악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맞서는 마음 상태입니다.
#14
교만은 본질적으로 경쟁적이라는 것입니다.
교만은 옆사람보다 더 가져야만 만족합니다.
여러분을 교만하게 만드는 것은 남과의 비교입니다.
즉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데서 오는 즐거움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15
자신이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 선한 사람으로 느껴질 때는
-특히나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낫게 느껴질 때는-
확실히 하나님이 아니라
악마를 따르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16
교만은 영적인 암입니다.
그것은 사랑이나 자족하는 마음,
심지어 상식까지 갉아먹습니다.
#17
겸손, 그 첫걸음이란
바로 자신이 교만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18
기독교적 의미의 사랑은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의지의 상태로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자연적으로 가지고 있지만
남에 대해서는 배워서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
#19
천국을 지향하면 세상을 '덤'으로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지향하면 둘 다 잃을 것입니다.
#20
만약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들로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내 안에 있다면,
그건 내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 맞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가장 그럴듯한 애길 거야.
#21
믿음은,
아무리 기분이 바뀌어도 한번 받아들인 것은 끝까지 고수하는 기술입니다.
#22
믿음의 습관을 훈련하는 첫 단계는
사람의 기분은 바뀌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단계는 기도교를 받아이들인 이상 날마다 조금씩이라도 시간을 내서
그 주요 교리들을 찬찬히 정신에 새겨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바를 지속적으로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념은 계속 북돋워 주어야 합니다.
#23
사람이 하나님을...거래 상대로 생각하는 한...
그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24
신학은 지도와 같습니다.
신학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 아무 개념도 가지고 있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잘못된 개념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25
인간이 자연적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영적인 생명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으로서 생물학적 생명과 다른 생명,
그보다 더 뒤에 있는 생명-입니다.
#26
여러분은 하나님의 차원에서 세 인격인 동시에 하나인 존재를 보게 됩니다.
정육면체가 하나의 정육면체인 동시에
여섯 개의 정사각혀인 것처럼 말이지요.
#27
이처럼 한 평범한 사람이 기도하는 있는 평범한 작은 침실 안에서도
삼위일에 하나님의 삼중적인 생명 전체가 실제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28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고자 할 때,
그 주도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보여 주시지 않는 한 우리는
무슨 수를 써도 그를 찾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자신을 더 많이 보여 주시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편애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마음과 됨됨이가 온통 잘못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도 자신을 보여 주실 수 없습니다.
햇빛은 편애라는 것을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깨끗한 거울에 비치는 밝기만큼
더러운 거울에 환히 비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도구는 여러분 자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자아가 깨끗하고 밝지 못하면
하나님의 모습 또한 더러운 망원경 렌즈로 보는 달처럼
흐려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 29
하나님을 배우기에 정말 적합한 도구는
다함께 하나님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입니다.
#30
제가 도저히 소화할 수 없는 건
하나님이 어떻게 수백만 명의 기도를 동시에 듣느냐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삶은 연속되는 순간들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늘밤 10시 30분에 100만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기도한다 해도,
하나님은 우리가 '10시 30분'이라고 부르는 짧은 순간에
그 모든 기도를 들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10시 30분은 언제나 '현재'입니다.
#31
그분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가 만든 유일한 존재인 양,
그 각각의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여러분 하나 하나가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인간인 양,
그 각각의 사람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32
시간을 우리가 곧장 따라가야 하는 직선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그 직선이 그려진 종이 전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직선의 일부를 한 걸음씩 밟아갑니다.
우리는 A를 지나야 B에 갈 수 있으며 B를 지나야 C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위에서, 밖에서, 또는 사방에서
이 직선 전체를 품고 계시며
이 모든 것을 보고 계십니다.
#33
정말 하나님이 우리의 행동을 예견하신다면,
우리에게 행동의 자유가 있다고 보기는 대단히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시간의 흐름 밖,
그 위에 계신 분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그는 우리가 '내일'이라고 부르는 날도
'오늘'처럼 보실 수 있습니다.
그는 여러분이 어제 한 일을 기억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보고 계십니다.
그는 당신이 내일 할 일을 예견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보고 계십니다.
#34
어떤 부류의 사람이든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한1서 4:8)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안에 적어도 두 인격이 있지 않는 한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는 말은
무의미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사랑이란 한 인격체가 다른 인격체에게 품는 것입니다.
#35
성부가 여러분 앞 '저기' 계시는 분이고,
성자가 여러분 옆에서 기도를 도우시며
여러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바꾸시는 분이라면,
성령은 여러분 안 또는 뒤에 계시는 분입니다.
#35
기독교는 인간 개개인을...한 몸의 기관들로 봅니다.
그가(다른 사람) 여러분과 같은 유기체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잊을 때
여러분은 개인주의자가 됩니다.
반면에 그가(다른 사람) 여러분과 다른 기관이라는 것을 잊을 때,
각자의 차이를 무시하고 모든 사람을 획일화시키고자 할 때,
여러분은 전체주의자가 됩니다.
#36
빵이 없으면 토스트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도움이 없으면 사람의 도움도 없습니다.
그는 온갖 방법으로 우리에게 역사하십니다.
그리스도는 무엇보다 먼저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사람은 그리스도를 전해주는 운반인입니다.
#37
아기가 처음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는
젖 주는 사람이 어머니인 줄 모르는 게 당연합니다.
우리도 처음 사람의 도움을 받을 때에는
그 뒤에 계신 그리스도를 못 보는 게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에게 정말 도움을 주시는 분이
누구인지 알아보는 수준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안 된다면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 사람을 의지하게 될 테니까요.
사람을 의지하면 곧 실망하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실수를 합니다.
어떤 인간에게도 절대로, 절대로 믿음 전체를 걸지는 마십시오.
<옮긴글>
[출처] 순전한 기독교/C.S.루이스 (은혜성서교회) | 작성자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