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책 쓰기 중에서 군 생활에 대한 글을 일부 실어봅니다. 오늘은 부대에 배속되어 병력계일을 맡게 되는 이야기를 실어봅니다.
‘군 생활 바보 이야기. 1’
바보 목사 이야기가 나왔으니 군 생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나는 1969년 7월 4일 육군 논산 훈련소로 입소했다. 요즘은 훈련소가 여기저기 있지만 당시는 훈련소가 없어 거의 논산으로 입소했다. 11976340 작대기 군번이다. 당시 나의 체중은 49키로로 1키로만 모자라면 체중미달로 병역이 면제되는 상황이었다.
월남파병으로 수많은 군인들이 베트콩과 싸우다 죽어가는 상황이어서 군대 가는 이들은 죽어 시체로 돌아올지 모른다는 불안으로 초상집 분위기였다. 입대할 때 가족들이 마중 나오면 부둥켜안고 울고불고 난리였다. 그래서 군대 안 가려고 방아쇠 당기는 손가락을 도끼로 찍어 불구로 만드는 사람도 있었고 몸의 어느 부분을 손상시켜 면제를 받으려는 이들이 많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몇 끼만 굶으면 미달이라니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인가? 하지만 나는 결코 그런 방법으로 군 생활을 면제 받을 수 없었다. 베트콩과 싸우다 죽으면 죽었지 어찌 신앙인이 속임수로 국가의 신성한 국방의무를 피할 수 있겠는가. 나는 당당히 군 생활에 도전했다. 이런 점도 약삭빠른 이들이 볼 때 얼마나 바보 같은 행동인가? 하지만 그 바보 같은 행동 덕분에 아내를 만나게 된다.
그렇게 입소한 훈련소 생활은 거의 전투수준이었다. 밤에 속옷을 빨아 널어놓으면 순식간에 누군가 걷어가 버린다. 그러면 매일 같이 검열하는 관물검사에 걸려 매를 맞고 변상을 해야 한다. 찬 난감한 일어어서 어쩔 줄 모르고 있으니 동료 훈련병이 어디선가 순식간에 훔쳐서 가져다준다.
‘야, 여기 있어. 짜식아 앞으론 조심해!’사실은 내가 훔치지 않았어도 여전히 도둑질인데 나는 고맙다며 그냥 눈 감고 슬쩍 넘어갔다. 바보는 동료들도 보호하고 아껴준다.
훈련생활은 늘 마라톤 훈련으로 단련된 내게는 힘든 일이 아니었다. 선착순만 하면 난 언제나 1등이었으니까. 그런데 6주 기본훈련을 마치고 의정부에 위치한 101 보충대에서 식사 당번병으로 차출되었다가 잘못해서 국을 푸는 중 부뚜막에 손이 미끄러지며 국솥에 손이 들어가 순식간에 화상을 입었다. 내일이면 26사단으로 배출되는데 나는 붕대로 손을 칭칭 감고 함께 고생한 전우들을 눈물로 떠나보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충청도 병력인 우리들끼리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함께 해온 동료들인데 떠나고 홀로 남는 다는 건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렇게 나는 치료를 받고 다른 지역 훈련병들과 함께 전곡 지역 비무장지대 20사단 105미리 포병부대에 배속 되었다. 해가 넘어가고 어스름한 밤에 철책선 안 이북방송이 들리는 산속 부대에 배속되니 불안감이 엄습했다.
밤이 되니 북한의 대남방송이 들려왔다. ‘친애하는 남조선 인민 병사 여러분, 돈 없고 빽이 없어 이곳 전선까지 끌려오시니 얼마나 슬프고 처량하십니까? 우리 김일성 수령님께서는 여러분들을 걱정하시며 밤잠을 못 이루고 계십니다.
그곳에 머무르지 말고 어서 속히 북조선으로 넘어오십시오. 우리는 여러분들을 열렬히 환영할 것입니다.’얼마나 여성 아나운서가 애절한 목소리로 방송했는지 실제로 그 방송에 감격해서 북으로 넘어간 병사들도 있었다.
나는 인사과에 갖고 간 인사기록 카드를 넘겨주고 신상명세서를 작성했다. 그런데 내가 쓴 글씨를 본 인사과 고참들이 감탄하며 반색한다.‘야, 이 자식 글씨 봐라. 너무 잘 쓴다. 이놈 우리 인사과로 들이자.’당시 나는 학교에 갈수 없는 가난한 학생들을 가르치는 옥산 교회의 중학원 교사를 하다가 그만두고 지인의 인도로 청주 프린트 인쇄업 필경사로 일하다 입소했었다.
그 회사는 작은 인쇄 회사로 당시는 원지에 글을 써서 프린트해 책을 만들어 공공기관이나 학교에 납부하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 하루에 자기가 쓰는 원고지 매 수 만큼 수당을 받는데 나는 작은 월급으로 먹고 자며 일하다 입대했다.
그러니 그런 똑바로 쓴 정자 글씨를 보기 힘든 이들이 대 환영 할만 했다. (후에 글씨는 신학교 다니며 빨리 강의를 받아쓰다 엉망이 되고 말았다.)
인사과는 700 주특기인데 나는 13이라는 임시 주특기를 달고 배속되었었다.
임시 주특기는 그 뒤에 어떤 직책을 받느냐에 따라 숫자가 달라진다. 포를 쏘는 포수는 130. 사격 지휘는 133. 나는 포수가 되거나 사격 지휘 반에 들어가야 하는데 글씨 때문에 700 주특기로 변경되어 인사과로 특채되었다. 이런 과정들이 장차 벌어지는 운명의 기로가 되었다.
나는 임시로 알파, 브라보, 챠리 세 개 부대와 본부 포대 들 중 챠리 포대로 배속되었다. 당시 제대를 곧 앞둔 최고참 병력계 후임으로 발탁되어 비공식 파견으로 가게 된 것이다. 당시는 필요에 의해 일은 본부에서 하지만 소속은 타 부대에 두어 집합이나 불침번, 혼련 등 모든 일에서 면제를 받는 묵인된 특수 병들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내가 부대 안에서 그런 유일한 특수 병사였다.
그런데 며칠 뒤 나는 분부포대 인사과 병력계로 급속히 발령을 받는다. 제대를 앞두고 사단으로 가던 선임 김 병장이 급식차를 타고가다 대전차 지뢰 폭발로 공중으로 날아가 다리가 절단되어 후송되게 된 것이다. 당시는 병사들에게 지급되는 부식들과 쌀들을 빼돌려 부대장이나 선임하사 등에게 가는 일이 허다했다.
이 급식차도 그렇게 정로로 가지 않고 검문소를 피해 개울로 가다가 장마에 떠내려온 대전차 지뢰를 건드려 사고를 당한 것이다. 지난 일들이지만 당시에는 이런 군 부정들이 비일비재했다.
예정보다 빠르게 차출 받아 선임 병의 지도도 없이 병력계를 맡게 된 나는 날마다 부대의 병력 이동 상황을 육본에 보고하는 임무를 위해 20사단 본부로 가서 일주일 동안 사단 병력계의 특별지도를 받으며 일보를 작성하게 된다. 이 일보 작성은 육본으로 직송되어 그날그날의 부대 이동상황과 휴가, 출장들이 체크되어 병력 공급과 식량 보급이 이루어지는 너무도 중요한 직책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틀리면 인사과 과장이 시말서를 쓰고 문책을 당하게 된다.
그래서 가장 늦게까지 남아 부대의 병력상황을 체크해서 보고하기에 훈련, 불침번, 집합들을 면제시키는 비공식 파견 병으로 근무하게 되는 것이다. 군대서 집합, 보초. 훈련이 면제되는 특수 병이란 최고의 직책이다.
나는 얼떨결에 선임 병의 사고로 특과병이 되는 행운을 누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근무하는 동안 사랑하는 나의 아내와 인연이 되어 평생을 함께 하게 된 것이다. 이런 과정들은 과연 우연일까?
사단에서 배우는 일주일 훈련기간을 미치고 오니 부관이 나를 하늘처럼 받들어 주었다. 내가 배우는 동안 보고에 오차가 생겨 몇 번이나 불려가 시말서를 쓰고 대대장께 혼이 났기 때문이다. 얼마 후 내가 너무 신경 쓰고 과로했는지 갑자기 배가 아파 의무실에 가니 맹장염이라며 빨리 의무부대로 후송을 하고 수술을 받아야 한단다.
그렇게 되면 이제 시작한 병력계 일은 어찌되며 부관은 얼마나 또 시달림을 받게 될 것인가? 나는 생각할 것도 없이 염증을 가라앉히는 주사를 맞고 그대로 병력계 일을 맡아 일했다. 부관이 너무 기뻐하며 나를 더 사랑해주었고 이일로 나는 부대 안에서 의리의 사나이로 소문이 나게 된다.
수송부 선임하사가 여러 사람 앞에서 농담으로 건넨 말은‘야. 형우. 얘는 병력 계 일 한다고 맹장 수술도 안 받고 가라 앉혔대. 이런 놈이 어딨냐. 참 첨보는 희안한 놈이야’그분은 배중사로 아주 엄한 군인이었는데 나에게는 천사였다.
그 다음부터는 우리 69포병부대 전체에 소문이나 내가 뭔가 부탁하면 일사천리로 해결되었다. 제대 후에 결국 맹장이 재발되어 성모병원에 후송되어 수술을 받게 된다. 군에서 받았으면 공짜인데 그러기에 역시 난 바보지.
~ 바보 목사 이형우의 힐링 칼럼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