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도교의 약사
천도교는 1860년 水雲 崔濟愚(1824∼1854)가 경주에서 창시한 교로 그 근원은 東學에서 비롯되고 있다. 그는 본시 유교집안에서 태어나 經史를 익히는 가운데 당시 물밀듯이 밀려드는 서학사상과 서양세력에 맞서 이를 능가하는 정신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한 나머지 1844년 홀연히 구도행각에 나섰다.
그는 1857년 49일간의 기도를 하면서 이미 奇人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1860년 4월 5일에 급기야 결정적인 신의 계시를 받게 되었다. 바로 그날 수운은 하느님으로부터 만고에 없는 無極大道를 받은 것이다. 그는 서학 즉 천주교에 대항하여 전래의 동양의 유, 불, 선 삼교를 민간신앙에 융합시켜 侍天主의 사상을 핵심으로 하는 人乃天의 교리를 정립시키고 보국안민(輔國安民),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을 선포하고 1862년에 東學運動을 일으켰다.
그 후 종교적 차원에서 교세를 확장하면서 포교활동이 날로 강화되자 조정에서는 첫째로 서양기술을 전습(全襲)하여 우중(愚衆)을 현혹하고 둘째로 유, 불의 쇠운에 따르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을 예고하며, 셋째로 왕조 붕괴와 사회 개혁을 선동함으로써 나라를 극도로 위태롭게 하는 이단적 집단이라 규정짓고 철저히 탄압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교세를 더욱 확장시키기 위해 조직강화의 일환으로 지방에 接所를 두고 接主制를 실시하여 포교하다가 마침내 1864년에 체포되고 만다. 그해 3월 10일 대구 將台에서 처형되어 순교자가 되었고, 그를 따르던 신도들은 뿔뿔이 흩어져 숨어 버렸다. 그 뒤로 동학운동은 다시 불붙기 시작하여 조직화됨으로써 당시 北接大道主로 敎統을 계승한 海月 崔時亨이 2대 교주로 등장하였다.
그는 태백과 소백산맥 양 지역을 넘나들며 은밀하게 포교하면서 『東經大典』 , 『龍潭遺詞』 등의 경전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해월은 갖은 탄압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모여드는 신도들로 조직을 대폭 늘려 나갔고, 1884년에는 탄압이 완화해짐에 따라 접주제를 六任制로 바꾸고 종교로서 면모를 일신시켜 나가자 신도는 수십만명을 헤아렸다.
그러나 그 뒤 탄압이 계속되었는데, 신도들은 가중되는 탄압에 못견디어 처음으로 관찰사를 상대로 교조 신원(伸寃) 운동을 벌이는 대규모 시위를 감행하였다. 1893년에는 제2차로 신도대표 朴光浩 등 40여명이 광화문에서 복소단식으로 교조신원을 요구했으나 오히려 탄압을 자초한 형국이 되었다.
이는 서울에 있던 외국인들의 압력으로 비화되었으나 신도들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급기야 충청도 보은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2만여명의 신도가 봉기한 이 시위는 외세를 몰아내자는 척외척양(斥外斥洋)으로 표출되었으나 조정의 설득으로 20여일 만에 자진 해산해 버렸다.
드디어 1894년에 전라도 고부에서 탐관오리로 악명이 높았던 군수를 응징하기 위하여 접주 全琫準이 민중봉기의 선봉장이 되어 항쟁으로 돌입하였는데 이것이 '甲午東學革命'이다. 이 무렵 동학운동은 정부군의 합의제의로 일시 그쳤으나 9월에 재봉기를 시도하는 바람에 결국 관군과 청·일의 외세개입으로 진압되고 말았다.
호남, 충청 등지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번진 동학혁명은 서부경남지방에서도 맹위를 떨쳤다. 서부경남일대에서도 특히 관아가 있었던 하동, 진주, 昆陽, 丹城, 安義 등지에는 더욱 심했다.
결국 조직적인 관군의 반격에 거의 비조직인 농민으로 이루어져 싸웠던 동학혁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로 말미암아 전봉준을 비롯하여 동학군 40만명에 이르는 엄청난 희생자를 내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1898년은 교주 최시형마저 경성에서 체포되어 교수형을 당하자 세불리를 느낀 동학도들은 지하로 활동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1900년에 義庵 孫秉熙가 3대 교주가 되어 그 동안 분파되었던 교단을 이끌어 오다가 1904년에는 신도들이 進步會를 만들어 民會活動을 전개한바, 이때 회원수가 11만명이나 되었다. 서슬퍼런 관의 탄압에 시달려온 진보회는 회원들의 체포령이 내려지자 李容九 등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수단으로 친일파 조직인 一進會에 합류해 버렸다. 경남의 신도들도 진주의 頭領 孫殷錫이 중심이 되어 이용구 일파와 손잡고 대부분 일진회에 가입하고 말았다.
1904년 노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에서 돌아온 여러 두령들이 모여 회합을 가졌다 처음에는 大同會로 모였다가 그해 7월, 中立會라 고치고 의결된 내용들을 각지에 알렸다 일본에 망명중인 손병희는 權東鎭, 吳世昌, 趙義淵 등과 상의하여 회명을 진보회라 하고 취지, 강령, 규약을 작성하여 본국에 보내었다.
4대강령의 내용은 첫째로 황실을 존중하고 그 독립기초를 공고히 할 것, 둘째로 정부를 개선할 것, 셋째로 군정, 재정을 정리할 것, 넷째로 인민의 생명재산을 보호할 것을 골자로 한 것이었다. 이 같은 강령 아래 수많은 동학교도와 민중들이 경향 각지에서 일제히 시위를 하는 가운데 단발(短髮)을 통한 행동도 서슴치 않았다. 정부개혁을 절규하면서 단발한 교도만도 20만명에 이르렀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진보회의 깃발이 거세게 나부꼈다.
1905년 노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 세력이 동양을 제패하려는 야심을 간파한 이용구, 宋秉俊 등이 11월 27일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 요지는 조선이 일본의 보호를 받는 일에 찬성해야 한다고 기세를 올린 것이다. 이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 손병희는 "보호를 받고자 하면 독립을 버려야 하고, 독립을 하고자 하면 보호를 버려야 하니 어찌 보호라는 이름 아래 독립을 하고자 하느냐?" 하며 이용구 일파에게 일격을 가했다.
1905년 손병희는 귀국 즉시 분파된 동학을 통일교단으로 수습하고 신도의 재조직 착수와 함께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는 한편, 民會활동을 순수한 종교운동으로 진로를 바꿔 나갔다. 동시에 일진회에 야합한 무리들을 몰아내고 근대적 교회조직으로 본격화해 나갔다.
1906년에 천도교 대헌(大憲)을 송포(頌布)하고 서울에 중앙총본부를 두어 스스로 大道主가 되고 지방에 72개교구로 나눠 敎領이 관장케 하였다. 그런데 이곳 경남은 진주교구 하나뿐이었는데 이때 천도교에 속하는 신도들은 진주, 함안, 남해, 단성, 사천, 곤양, 고성등 전부 합해 1백여호밖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바로 일진회를 조직할 때 진주의 두령 손은석이 이용구에 합류하여 경남 동학도 전부를 거느리고 일진회에 가입했기 때문이었다. 1908년 손병희는 朴仁浩에게 대도주를 인계하고 1919년에는 3·1독립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하였다. 3·1운동 직후 손병희는 옥고를 치르던중 병보석으로 풀렸으나 1922년 5월에 사망하였다.
1910년부터 포교활동을 본격 전개하던 천도교는 출판, 교육, 사업 등 민족문화 운동으로 승화발전시켜 이 땅의 개화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청년, 학생, 어린이, 농민, 노동자, 상인, 어민 등 7개부문 운동을 벌인 청년당 靑友棠 운동과 『개벽사운동』 , 『어린이』 , 『별건곤(別乾坤)』 , 『신여성』 , 『신인간』 , 『천도교회월보』 등을 발간한 것이 문화운동의 대표적인 것으로 꼽힌다. 1921년 들어 교주문제로 분열을 일으켰는데 종전의 연원제(淵源制)를 주장하던 박인호의 수구파와 지방 대의제에 의한 衆議制를 주장하던 최린(崔麟)의 개혁파로 분파되고 만다. 그러던 중, 수구파는 吳學昌의 천도교중앙본부로 다시 분열되고 개혁파에서는 吳智永의 천도교연합회로 분열되어 4파로 분리된 결과를 빚었다.
해방 후로 접어들어 신·구파의 단합을 절감한 나머지 1965년에야 천도교 교헌을 확정, 시행함으로써 통일된 교단을 확정지었다. 이 교헌에도 불구하고 다시 1976년 교내 분규가 일어나자 같은 해 12월에 임시 전국대회를 열어 사태를 수습하기도 했다. 이 후로는 철저한 임기제에 의한 교령 선출과 추대를 함으로써 李永馥, 高正勳 교령을 거쳐 1988년 6월에 鄭雲彩 교령이 취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