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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깊은 교제생활이 이루어 지기를 소망합니다 |
올겐을 고치려고 이리저리 뜯어보았으나 시골에서는 수리하기도 어려웠고 그렇다고 새로 구입할 형편도 아니었다. 모올 신부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깊은 밤에 창 밖으로 마을을 내려다 보았다. 참으로 고요한 밤이었다.그는 마을의 고요한 모습에 감동을 받아 시 한편을 적어보았다. 다음날 아침 그는 시를 들고 그 성당의 올게니스트이자 학교의 선생인 구루버를 찾아갔다. "선생임, 제가 시를 한 편 써보았습니다. 이시를 작곡 좀 해 주세요. 그리고 성탄미사 때 기타연주를 하면 어떨까요?" 크리스마스날 시골의 한 작은 성당에서는 신부가 쓴 시에 곡을 달은 음악이 기타로 연주되었다. 지금 이 노래는 성탄절에 가장 많이 불리는 노래가 되었지만 아마도 예전의 한 작은 시골성당의 어려움이 없었다면 이 노래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전 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제 목: 형통한 날, 공고한 날 성 경: 전 7:13-14
솔로몬은 세상적으로는 성공한 사람이지만 신앙적으로는 실패한 사람입니다. 솔로몬은 노경에 이르러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인생의 바른 길을 가리치면서 자신을 가리켜 전도자라고 했습니다. 요즘 백성들은 무거운 마음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런 때 전도자 솔로몬의 교훈을 받고 힘을 얻고자 합니다. 오늘은 "형통한 날, 곤고한 날"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날짜에 대한 불신자들의 관심은 절대적이며 신앙적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던지 길일을 택하고 흉한 날을 피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주역사상에서 나온 사주 팔자 사상입니다. 날짜 자체에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우리의 주장입니다. 무슨 날이든지 하나님 안에 있는 날은 좋은 날이며 하나님밖에 있는 날은 나쁜 날입니다. 성경 본문은 형통한 날과 고통의 날에 대한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 형통한 날에 대한 두 가지 다른 자세가 있습니다.
(전 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라 고 권고했습니다. 형통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형통한날은 성공적인 날, 번창한 날, 그리고 좋은 시간을 뜻합니다. (NIV 는 When times are good) 이런 날을 기뻐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1. 형통한 날에 자기의 즐거움만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자만에 빠진 부자 두 사람이 나타납니다. 한 사람은 밭에 소출이 풍성한 부자입니다. (눅 12:17) 그는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눅 12:18)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이 부자는 스스로 말하기를 (눅 12: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눅 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형통한 날에 자기만 생각하는 자들은 다 이런 자들입니다. 눅 16장에 또 다른 부자가 있습니다. (눅 16: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눅 16:20)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눅 16:21)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 부자도 형통한 날에 자신의 연락만 생각하고 가난한 거지 나사로의 어려움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아니했습니다. 이런 자는 교만하여 남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도 모릅니다. 이런 자들은 갑자기 곤고한 날이 다가오거나 죽음이 찾아 온다는 것을 잊고 삽니다. 형통한 날이 영원히 지속 될 수 없습니다. 갑자기 어려운 날이 찾아왔습니다. 우리 민족과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어리석은 부자처럼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형통한 날에 주님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라" 이 날을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미래를 대비하는 사람이며, 무엇이나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요셉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창 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창 39:3)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그는 형통이 하나님의 축복인 줄 알고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자신의 주인의 아내가 그를 유혹했을 때 (창 39: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우리는 형통한 날에 더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으로 주일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육체를 쉬게 하고 영이 평안을 얻게 했습니다. 이날은 우리에게 있어서 최고의 날입니다.
(계 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사도 요한 때 벌써 주의 날이라는 용어를 사요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기뻐해야 할 날은 주의 날입니다. 이 날은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이 날은 성령님이 임하신 날입니다. 이날은 우리를 다시 새롭게 하는 주의 날입니다. 이 날은 나의 모든 죄 사함 받은 날입니다. 이 날을 축복의 날이 되게 합시다. 기뻐하며 즐거워합시다. 우리에게 축복으로 주신 주의 날을 나의 쾌락을 위해서 사용치 말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의 안식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 누려야 할 것입니다
둘째, 공고한 날의 대한 두 가지 자세가 있습니다.
(전 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 이 말은 역경, 불행, 재난. 등 나쁜 날들를 의미합니다.(when times are bad--NIV)
1. 곤고한 날에 자기 자신만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낙망하고 좌절합니다. 고통 자체가 주는 해보다 고통 때문에 좌절하는 마음이 더 나쁩니다. 사람에게 범죄 후에 이런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지금도 이런 고통은 모든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그렇지만 고통 당하는 사람은 자기만이 비운의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여기에서 온갖 염려도 찾아옵니다. 염려는 불신앙입니다. 사람들의 염려에는 커트라인도 없습니다. 현재의 염려, 미래 다가올 염려, 지나가 버린 과거의 염려까지 지고 힘겨워합니다.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고 합니다. 그때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2. 곤고한 날에 주님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좌절하지 않습니다. 욥이 그러했습니다. 욥은 이유 없이 하루 사이에 자신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어 버렸습니다. 재산도 자녀도 가정도 잃어버렸습니다. 그 때 고백하기를 (욥 1:21)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 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 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마침내 욥의 몸에 중병까지 들어 죽을 지경까지 이르렀을 때 욥의 아내는 조롱하기를 (욥 2:9)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했습니다. (욥 2:10) 욥은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마침내 욥은 고백하기를 (욥 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형통한 날, 공고한 날은 순간에 지나갑니다. 이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닙니다. 형통한 날이 있으면 공고한 날도 있습니다. 밤이 있으면 낮도 찾아옵니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있기 마련입니다. 고통은 우리를 시련 하는 좋은 교사가 될 것입니다. 이런 어려움 중에서도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좌절하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가 당하는 어려움 중에서 모든 국민들이 주님을 바라본다면 이 어려움이 큰 축복이 될 것입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면 서로 원망한다면 끝내 망하고 말 것입니다. 무엇에나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십시다.
청년 여러분! 젊음과 꿈은 청년들의 특권입니다. 이 때 아름다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고통이 있다면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고 싸워서 이기십시오
(전 12:1)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십시오
소년, 소녀 여러분! 학생 시절은 배우며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날입니다. 바른 것을 배우고 더 큰 꿈을 가지십시오. (전 4:13)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소년은 늙고 둔하여 간함을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났습니다. (사 40: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사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셋째, 하나님은 이 둘을 같게 만들었습나다.
1. 하나님은 형통과 곤고를 같은 것으로 봅니다. 무엇에 있어서 같다는 말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데 있어서, 죄 짖는대도 같이 작용한다.
(전 7:13)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Consider)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전 7:14)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인생은 다 같습니다. 좀 잘 먹고 못 먹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50대 이상은 죽을 먹으면서 배 음을 참았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아무리 어려워도 그런 고통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좀 잘나고 못나고가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키가 크고 작은 것을 따지지만 63빌딩 꼭대기서 내려다보면 크고 작은 것이 구별이 안됩니다. 인생은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한 때 고생했던 일을 잊지 못하고 자주 말하게 됩니다. 사실이 그 고생이 우리 일생에 비추어 보면 얼마 안되는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하나님의 시간에 비교하면 우리들의 일생이란 지극히 짧은 시간에 불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통한 날, 공고한 날이 하나님의 안목에서 보면 다 같은 것에 불과 합니다. 그 일에 얽매여 살지 말고 거기서 자유를 누리십시오 보다 큰 문제는 하나님을 찾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전 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2. 인생을 겸손하게 만들기 위해 장래 일을 알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만들었습니다. 불신자들은 점쟁이를 찾아가서 미래사를 알아보려고 애씁니다. 다 헛된 일입니다.
(전 8:7)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전 10:14) 우매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신후사를 알게 할 자가 누구이냐
다만 사람의 본성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사람의 종교심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찾게 했습니다.
(전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그리고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도록 했습니다. (신 29:29)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형통한 일, 공고한 일은 협력을 해서 모두 유익을 가져오게 하는 것을 믿습니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모두가 유익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
범사에 감사 생활하여야 한다는 말씀임에 감사하죠.
존재 목사님, 만경강 목사님 오늘도 함께해 주셔서 감사드리며
축복된 성탄절을 맞으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