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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10,11-18
“나는 참된 목자이다.”(10,11.14)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당신 자신을 드러내는 선언입니다.
여기서 “참된”(그리스어 kalòs)이라는 말은 ‘선한’, ‘참된’, ‘아름다운’이라는 의미를 함께 지닙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도덕적으로 좋은 분이라는 뜻을 넘어, 참되고 아름답고 온전한 목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참된 목자됨’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그것은 생명을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품꾼은 위험이 닥치면 도망칩니다. 양이 목적이 아니라, 자기 안전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양은 ‘지켜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은 결국 자신을 내어주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으신 사랑, 조건도 계산도 없이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단순한 희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목숨을 스스로 내놓는다.”
여기에는 놀라운 자유가 담겨 있습니다. 억지로 빼앗긴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여 내어주신 생명입니다. 동시에 이 선택은 아버지의 뜻에 대한 깊은 순종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흔히 자유와 순종을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 곧 사랑이며, 그 사랑 안에서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 참된 자유입니다. 사랑하는 능력,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진짜 자유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14)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아는 정보가 아니라, 관계를 뜻합니다. 서로의 삶 안으로 들어가는 친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멀리서 지켜보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이름을 알고, 우리의 기쁨과 상처를 아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이 관계는 놀랍게도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15) 같은 깊이를 지닙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그런 관계 안으로 초대받았습니다.
단순히 믿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사는 관계로,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라가는 삶으로 초대받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에게는 이 우리에 들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다.”(16)
이 말씀은 우리를 편안한 울타리 안에만 머물게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언제나 ‘더 밖으로’, ‘아직 오지 않은 이들’에게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닫힌 공동체의 사랑이 아니라, 끊임없이 넓어지고 흘러가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도 질문을 받습니다.
ㆍ 나는 그저 보호받는 양으로 머물러 있는가, 아니면 목자의 마음을 닮아가고 있는가?
ㆍ 나는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르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다른 목소리들에 흔들리고 있는가?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름을 불러 부르시고, 앞서 걸어가시며,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십니다.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것, 그리고 그분을 따라 한 걸음 내딛는 것,
바로 거기에서
우리의 삶도 조금씩 그분의 사랑을 닮아가기 시작합니다.
(천 사비나 수녀님)
4월27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요한 10,11-18
이런 목자들은 조심해야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러 올 뿐이다.
하지만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풍성히 얻게
하려고 왔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요한 10,10-11)
찬미 예수님! 부활 제4주간 월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양들의 문'이자 '착한 목자'라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이 목숨을 내어놓으면서까지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은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본질적인 값어치, 즉 '정체성'과 '자존감'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 자존감을 도둑질하는 가짜 목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오늘은 세 부류의 지도자를 통해, 왜 우리는 우리를 위해 '피를 쏟으며' 우리를 하느님이라 불러주는 목자만을 따라야 하는지 함께 나누어 보겠습니다.
첫 번째 유형: 자존감을 짓밟아 영혼을 멸망시키는 교사
도둑의 특징은 양들의 자존감을 깎아내려 자신에게 종속시키는 것입니다.
"너는 부족해, 너는 문제가 많아, 그러니 나만 믿고 따라와"라고 말하며 상대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이들이 바로 가짜 목자입니다.
영화 '위플래쉬' (2014) 속 플렛처 교수는 최고의 드럼 연주자를 만든다는 명목하에 제자 앤드류를
혹독하게 몰아세웁니다.
그는 제자의 뺨을 때리고 부모를 욕하며, 그의 자존감을 바닥까지 짓밟습니다.
플렛처의 논리는 명확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해로운 말은 '그만하면 잘했어'라는 말이다."
그는 인간의 한계와 열등감을 자극하여 예술적 성취를 이뤄내려 하지만, 결국 그 과정에서 제자의 인격과 영혼은 산산조각이 납니다.
이것이 도둑의 모습입니다.
"너는 하느님이 될 수 없다"고 말하며 인간의 한계 속에 가두고 지배하려는 자는 목자가 아니라 강도입니다. (출처: 데이미언 셔젤 감독, 영화 '위플래쉬' 2014)
두 번째 유형: 말로만 높여주고 피는 쏟지 않는 거짓 교사
가장 교묘한 가짜 목자는 '달콤한 말'로 자존감을 세워주는 척하지만, 정작 그 자존감의 값을 치르기 위한 희생은 전혀 하지 않는 '삯꾼'입니다.
영화 '미스 진 브로디의 전성기' (1969)에서 에든버러의 여학교 교사인 진 브로디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의 정예 부대다, 너희는 최고(Creme de la creme)다"라며 환상적인 자존감을 불어넣습니다.
아이들은 그녀를 숭배하며 자신들이 특별한 존재라고 믿게 됩니다.
하지만 브로디 선생은 아이들에게 그에 걸맞은 '실력'이나 '고결한 인격'을 심어주기 위해 자신의 땀을 흘리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의 로맨틱한 환상과 정치적 선동을 아이들의 머릿속에 집어넣습니다.
결국 그녀가 키워낸 자존감은 모래성과 같았습니다.
한 제자는 그녀의 부추김에 넘어가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다가 허무하게 전사하고, 다른 제자들은 스승의 사생활을 폭로하는 증오자로 변합니다. 브로디는 제자들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눈에 비친 '위대한 스승'이라는 자기 영광을 사랑했습니다.
자기가 피 흘려 제자를 지키지 않고 말로만 추켜세우는 지도자는 양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비겁한 거짓 목자일 뿐입니다.
(출처: 로널드 님 감독, 영화 '미스 진 브로디의 전성기' 1969)
오늘 복음의 바로 앞 장인 요한복음 9장에는 태생 소경의 치유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십니다.
이것은 창세기에서 인간을 빚으실 때의 그 재료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소경의 망가진 눈을 '재창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눈을 뜬 그에게 사람들이 누구냐고 묻자 그는 기상천외한 대답을 합니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 (요한 9,9). 이 문장의 그리스어 원문은 "Ego Eimi", 즉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실 때 쓰시는 성호인 "나는 나다"입니다.
소경은 예수님에 의해 눈이 만들어지는 순간,
자신이 단순히 눈먼 거지가 아니라 하느님의 본성을 지닌 고귀한 존재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착한 목자는 바로 이런 분입니다.
우리에게 오셔서 "너는 죄인이고, 너는 흙에 불과하며, 너는 나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벌레다"라고 말하는 분이 아니라,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 눈에 발라주시며 "너는 나다.
너는 하느님이다"라고 선언해주시는 분입니다.
이 정체성을 주는 분만이 우리의 참된 목자입니다.
세 번째 유형: 자존감을 높여주기 위해 자신의 피를 쏟는 참된 목자
참된 목자는 양이 자신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깨닫게 하기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쏟아부어
그 가치를 증명해내는 분입니다.
「예화 3: 교육의 목자 마리아 몬테소리 - "너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신적 존재란다"」
20세기 초 이탈리아의 첫 여성 의사였던 마리아 몬테소리는 로마의 빈민가 산 로렌초에
『어린이의 집』을 세웠습니다.
그녀는 당대 사회가 '교육 불능'이라고 낙인찍은 아이들에게 "너는 스스로를 완성할 수 있는 하느님의 작품이다"라는 자존감을 심어주었습니다.
단순히 말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아이들의 신성을 증명하기 위해 의사로서의 부귀영화와 명예를 모두 내던졌습니다.
무릎 관절이 닳도록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기어 다녔고, 아이들의 작은 손 근육 하나가 발달하도록 밤을 새워 교구를 직접 깎아 만들었습니다.
세상이 그녀를 미쳤다고 비웃을 때, 그녀는 자신의 모든 시간과 열정(피)을 쏟아부어
아이들의 자존감을 실재하는 능력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스승의 피를 먹고 자란 아이들은 마침내 전 세계를 놀라게 하는 천재들로 부활했습니다.
(출처: 마리아 몬테소리 저, 『인간 마음의 흡수』)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요한 10,11).
주님은 입으로만 "너는 소중하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피를 쏟으심으로써, 우리의 몸값이 하느님의 아들의 생명과 맞먹는다는 사실을 온 우주에 공포하셨습니다.
성체를 모시는 것은 주님이 피로 보증해주신 나의 자존감을 먹는 것입니다.
말만 번지르르하고 희생은 하지 않는 세상의 가짜 목자들에게 속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자존감을 깎아내려 지배하려는 도둑들을 떠나십시오.
오직 여러분을 위해 피 흘리신 예수님만을 목자로 삼으십시오.
"너는 나다. 그러니 나를 따라오너라!"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부활 제4주간 월요일 강론>
(2026. 4. 27. 월)(요한 10,11-18)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요한 10,11-18).”
1)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는, “삯꾼은 양들을 사랑하지 않는다.”입니다.
여기서 ‘삯꾼’은 도둑이나 강도들과는 달리 ‘목자 직무’를 수행하긴 하지만, 그 일을 하나의 ‘직업’으로 선택한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양들에 대한 사랑도 없고, 자신의 직무에 대한 사명감도 없고, 책임감도 없고, 정해진 일만 하고 월급만 받으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라는 말씀에서, 침몰하는 배에 승객들을 버려두고 자기 혼자 탈출하는 선장이 연상됩니다.
‘좋은 선장들’은 배가 침몰할 때 승객들과 승무원들을 먼저 탈출시키고 자신은 끝까지 배에 남아 있습니다.
그 책임감은 ‘사랑’과 거의 같습니다.
바로 그런 선장의 모습을 예수님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다.‵ 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 두어라.’
이는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사람들 가운데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고 당신께서 전에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요한 18,8-9).”
물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려고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내주신 일이고, 그래서 침몰하는 배의 선장과는 경우가 다르지만, 그래도 제자들을 아끼는 예수님의 심정은, 승객들을 살리고 마지막까지 혼자 남아 있는 선장의 심정과 많이 비슷합니다.
<“나는 죽더라도 너는 살린다.” 라는 그 마음이......>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정신’은, “내가 너를 위해서 죽을 테니 너는 살아라.”입니다.
바로 그 ‘십자가의 정신’을, 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2)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는, “나는 내 양들을 사랑하고 내 양들은 나를 사랑한다.”입니다.
이 말씀은,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라고 자주
말씀하셨지만, 당신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6-18).”
자기가 먼저 배불리 먹고 나서 조금 남은 음식을
굶고 있는 형제에게 주는 것은, 사랑도 아니고 선행도 아니고 ‘위선’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음식을 ‘먼저’ 나누어 주고
‘함께’ 먹는 것이 사랑이고 선행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은 것과
같은 사랑입니다.
3) 예수님께서 양들을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일은, 우리가 지금 어떤 마음으로, 어떤 태도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반성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살리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는데, 나는 나 자신이 살기 위해서 내 목숨을 걸고 있는가?”
예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살기 위해서, 내가 살고 싶어서 하는 생활입니다.
구원받지 못하면 목숨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은 모든 것을 걸고, 목숨도 걸고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시간이 날 때나 하는 취미생활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할 수 있으면 하고, 못하면 어쩔 수 없고...” 같은
미지근한 태도로 하는 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안 하면 죽는다.” 라는 간절하고 뜨거운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4월27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복음: 요한 10,11-18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따뜻한 아버지!
저희 살레시오회를 포함한 살레시오 가족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성인 및 복자, 가경자, 하느님의 종 등 교회로부터 성성에 대한 공식적 인정을 받은 인물이 많은 편입니다.
헤아려보니 성인 10분, 복자 19분, 가경자 13분, 하느님의 종 9분. 그 외에도 수많은 분들이
돈보스코의 선한 영향력에 견인되어 후보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수많은 거룩한 분들 가운데 착한 목자이자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유명한 분이 돈보스코의 3대 후계자이신 복자 필립보 리날디(1856~1931) 신부입니다.
이 필립보 리날디 신부의 따뜻한 부성애는 정말 각별했습니다.
단 하루라도 그와 살아본 사람들이라면 다들 한목소리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정말이지 저는 단 한 번도 그분을 윗사람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저의 행복을 위해 온갖 수고를 마다 않는 제 친아버지와도 같았습니다.
그분과 함께 했던 오라토리오 생활은 아기자기하고 화목한 가정생활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농부 출신의 나이 많은 요한이라는 지원자가 자신의 지적 무능력을 한탄하며 리날디 신부님의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신부님, 죄송합니다만, 저는 결코 훌륭한 살레시안 사제가 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만 두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 형제가 겪고 있던 고초뿐만 아니라, 그가 지니고 있던 많은 잠재력과 열정을 파악하고 있던
필립보 리날디 신부는 그의 지친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며 그를 대성당으로 안내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격려의 말을 건넸습니다.
“요한, 중앙 제대 위의 초들을 본적이 있는가?
어떤 것은 길고 어떤 것은 짧지. 하지만 모든 초가 주님께 봉사하기 위해 거기 서 있는 것이라네.
사실 짧은 초가 긴 초보다 훨씬 유용할 때가 있다네.
동트기 전에 미사를 드릴 때, 긴 초들은 사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네.
반면에 짧은 초는 사제가 미사경본을 읽은 데 아주 큰 도움을 주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라네.
교회는 낮은 자리에서 주님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할 키 작은 사제들을 더 필요로 한다네.
자네는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될 거야.
필립보 리날디 신부의 진한 부성애와 잔잔한 위로에 크게 감동을 받은 요한 지원자는 다시 죽기보다 들기 싫었던 라틴어 책을 손에 들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애 오랜 양성 과정을 다 마친 그는 사제로 서품되었고, 브라질 선교사로 파견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위기에 처한 인디언들의 사도이자 또 다른 돈보스코요, 제2의 필립보 리날디로 살다가 그곳에 뼈를 묻게 됩니다.
어제 오늘 복음은 계속 착한 목자가 어떠한 존재여야 하는가 소개하고 있습니다.
많은 교우들을 만나면서, 그들이 많은 것들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따뜻한 아버지!
부성애,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 훈훈해지는 단어입니다.
사제나 수도자들뿐이 아니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따뜻한 부성애를 지닌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