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프랑스어로 헐렁한 옷이라는 뜻의 블루즈(Blouse)가 변형된 옷인 블라우스는 청순하고 우아한 느낌을 주는 아름다운 옷입니다.
그런데 이 블라우스를 남자인 제가 입는다면 어떨까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옷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니스커트는 어떨까요?
이는 블라우스보다도 더 보기 싫은 모습이겠지요. 이제 아름답고 화려한 파티용 드레스는 어떨까요?
분명히 그 자체는 아름답지만 제가 입는다면 도저히 봐 줄 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
아무리 멋진 옷이라 할지라도 옷을 입는 사람에 따라 옷의 가치가 바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서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셨던 ‘사랑’의 가치는 세상의 어떤 것보다 높습니다.
그렇다면 그 가치를 더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 사랑을 받아들이는 나 자신이 합당한 자세를 갖춰야만 합니다.
욕심과 이기심을 가득 들고서는 오히려 주님 사랑이 끔찍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나의 모습에 따라 세상에서 환하게 또 아름답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통해 주님 사랑을 드러내고 있었을까요?
나의 많은 죄로 인해 주님 사랑을 끔직해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 하느님의 영광을 전혀 드러내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내가 받을 사랑만을 청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나’의 변화였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늘 변함없이 내 곁에서 함께 해 주셨습니다.
문제는 이를 받아들이는 내가 그 사랑을 거룩하게 드러내지 못하게 했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향해 “베엘제불이 들렸다.”,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었습니다.
온전히 사랑을 전해줘서 우리 모두를 구원으로 이끌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적의를 표현하면서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마음만 키우고 있었지요.
그들 자체가 변하지 못하니, 주님 사랑이 그들 안에서 변질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루카 3,28.29)
주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곧 성령을 모독하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에 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을 끔찍한 것으로 변질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사랑이라는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세상에 아름답고 멋진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자신의 가치는 다른 어떤 누군가가 아닌, 바로 자신이 정하는 것이다(엘리노어 루스벨트).
사탄은 끝장이 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