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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원(大團圓)의 막(幕)을 내리면서:
‘모교의 발자취’ 라는 거창한 제목을 달고 시작한 기획연재(企劃連載)의 바탕이 되는 좌담회를 주재(主宰)
하면서 매번 느꼈던 바 입니다. 능력의 과신(過信)과 과욕(過慾)으로 시작하여 필자의 능력의 한계와 역부족을 통감(痛感)하게 한 기획이었지만, 그러나 이러한 기획은 우리 동문들 선후배를 막론하고 아직도 우리 모두의 기억이 생생하고 거동이 활발할 때에 누군가가 이룩해야 할 일이며, 또한 이와 유사한 기획은 우리 동창회가 건재(健在)하고 동창회보가 존속(存續)하는 한 이어져야 할 기획물(企劃物)이라는 공감대(共感帶)를 형성하게 된 것은 큰 수확(收穫)임에 틀림 없습니다.
전번 회의 말미에 예고 했듯이 이번 좌담회에는 따로 초청장이나 공고가 나가지 않았습니다. 또한 연대(年代)와 토픽(Topic)도 제한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회에서 25회 동문 14명의 남녀 동문들이 어울려서 수십년전의 학창시절 소년 소녀로 돌아가서 추억(追憶)의 산책로(散策路)를 모두 함께 손잡고 걸으면서 환담(歡談)하고 환희(歡喜)하고 때로는 애석(哀惜)해 했던 일들은 우리 모두의 모교와 동창회를 사랑하는 마음의 발로(發露)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좌담회마다 토픽을 준비하면서 또는 그 후 기사 작성하면서 정확성을 기하는 의도로 참조한 ‘서울師大附高 半世紀史(1994년 발간)’ 와 ‘附中六十年史(2006년 발간)’는 그 거창한 제목에 비하여 내용이 부실(不實)하다는 것을 매번 통감(痛感)했습니다. 그러한 방대(尨大)한 내용의 책자를 만들기까지 모국의 관계자 및 편집위원들의 노심초사(勞心焦思)하고 불철주야(不徹晝夜)의 각고(刻苦)의 노력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이들 책자의 근간(根幹)이되는 1945년 개교 이후 약 10년간의 교직원 및 학생들의 인적 사항과 각종 행사들의 내용이 부실(不實)하게 기록이 된 것을 발견할 때 마다, 안타까운 느낌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1960년대부터의 기록은 거의 완벽하게 모든 부분이 잘 묘사 되었으나 정작 모교 역사의 시초가 되는 8.15 해방 직후부터의 개교후 10년간의 사실(史實)이 부실했던 주 원인은,
첫째 - 그 당시의 기록의 부재(不在) 및 손실(損失),
둘째 - 당시의 역사를 증언한 동문들의 제한된 증인들에 기인(起因)합니다.
전자의 경우는 이제와서는 속수무책(束手無策)이지만, 후자의 경우는 아직도 건재(健在)하여 국내외에서 활동을 계속하는 1회에서 10회의 남녀 동문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여 비록 여러 날이 걸리더라도 각자의 기억을 바탕으로 재학시절의 사실(史實)을 정리해 나가는 모임을 주재한다면, 우리 모교의 역사를 재창조(再創造)하는 각오와 결의를 토대(土臺)로 능히 이루어질 수 있는 과제(課題)입니다. ‘附中高七十年史' 에 기대를 걸어봅니다.
희귀한 사진들
좌중에 인원이 차기를 기다렸다는 듯 이정애(5회)가 낡은 사진 두 장을 꺼냈다. 한 장은 1948년 이정애가 중2때의 배구부 부원들의 사진이다. 앞줄에 주력선수 이정애, 임위규, 최경원, 송영희, 최옥영 등 중2의 깜찍한 소녀들이 있고 중3의 안정자(여자부 주장)를 위시하여 중6(최고학년)의 김성환(주장), 박득춘, 최태원, 그리고 중5의 전상수 등이 보인다. 중1인 서영해(남, 6회)의 얼굴도 보이는데 당시 키가 큰 거구의 소유자였던 점으로 미루어 배구부원이었기도 쉽다. 박득춘(1회)은 본 기획 ‘모교의 발자취(제1회)’ 에서 응원단장으로 그 활약상이 묘사된 바 있다. 최태원(1회)은 김진구(1회)와 함께 중5때 육사 8기로 입교했으나 임관이 되기 전에 별세한 걸로 전문했고, 김진구는 육군소장으로 퇴역후 미국 망명생활을 마치고 삼성그룹의 竊봐악卵퓬?사장 및 조선호텔 사장등을 오래 재직했다. 필자와도 친교가 있었고, 그가 미국에서의 망명시절, 그 후 귀국하여 방금 거명했던 기업체장의 현직등에 있을때, 몇번 선후배의 개인 관계로서 그리고 사업상 관련 등으로 자주 만난 적이 있는 참으로 그리운 선배이시다. 이에 관련되는 이야기는 다른 기회에 소개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전상수(2회)는 서양화 전공으로 한국 화단의 중진이다.
또 다른 사진은 1953년 3월의 5회 서울분교 졸업생 전체의 사진이다. 1951년 2월에 피란지 부산 임시수도의 보수산 중턱에 임시본교가 개교, 그리고 그 다음해 1952년 4월에 서울의 본교사에서 임시분교가 개학하였고, 그 다음해 1953년 3월에 부산과 서울에서 제5회 졸업식이 각각 거행되었다. 이 사진은 그 당시의 사진이다. 김영훈교장을 중심으로 하여 양 옆에 김성익, 양염규, 이일규, 염인걸, 이풍기, 주길준, 김교준 선생들이 있고, 남녀 졸업반 학생들이 둘둘 말은 졸업장을 각기 들고 있다. 희귀한 사진들이다. 앞으로도 기회를 보아서 그리고 지면이 허락하는대로 이러한 희귀하고 귀중한 사진들을 우리 회보에 연재하는 기획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스승들 이야기
‘모교의 발자취’에서는 역시 화제가 ‘스승들 이야기’로 시작이 된다. 이것은 당시의 교사와 학생이 이야기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6.25전에는 남녀공학이라지만 여학생과 남학생은 한 학년인 경우 같은 층에 교실이 있지 않았고 고학년과 저학년을 남녀별로 잘 안배(按配)해서 교실을 배정하였다. 예컨대 중3녀 교실은 3반과 4반 여학생 교실이 붙어 있고 양쪽 옆 교실은 남자 고학년 예로 중5나 중6 남자 교실이었고, 반대로 중3남 1반과 2반 양쪽 옆 교실은 여자부 선배교실 4학년, 5학년, 6학년 등으로 배치하였으나, 이제 와서 도리켜 보면 말짱 헛수고였던 것 같다. 그리고 남자 선생인 경우는 여학생을 가르쳤으나 여자선생이 남학생을 가르치는 경우는 없었다.
매주 월요일 아침의 남녀 합동 강당 조회 때, 청초한 새색씨 처럼 다소곳이 행동하는, 아니면 당당하게 활개치는 미녀 선생들을 바라보는 우리 사춘기 남학생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젊은 여선생들... 이름하여 김연옥(지리), 노신옥(음악, 피아노), 손정애(보건, 무용), 한춘호(가사, 수예) 등 미녀 4총사를 거론 안 할수 없다.
김연옥선생을 제일 먼저 거명한 것은 우리 동창회의 터줏대감 아닌 터줏대감마님 이인영(3회)이다. 금년부터 우리회보에 ‘모교의 발자취’가 연재되기 시작한 후 제자 이인영이 미국에서 보내주는 우리 동창회보를 매번 학수고대하신다는 우리 김연옥 스승님. 김연옥선생은 일정시대 경기고녀 졸업후 일본 나라(なら 奈良)여자사범학교를 졸업했다. 불행하게도 필자는 사변전 중4때까지도 배워 본 적은 없다. 그러나 마음속에 나의 여신(女神)으로 모셔 놓은 곱디 고운 여선생이었다. 당시 부군이 서울대 교수인 연유로 해서 동숭동 서울대 본부 뒤켠에 자리했던 관사에서 아침마다 통근길에 이화동에 살던 이인영도 동반 통학, 그래서 사제지간을 떠나 친 자매 같았다는 이인영의 회고. 6.25 사변중에 부군이 이북으로 납치당하여 홀몸이 되었다가 후에 이찬교수와 재혼하여 행복하게 사시나 했는데 지금은 다시 홀몸으로 사신다 한다. 이찬선생은 모교에서도 지리선생으로 계셨다고 직접 배웠었다는 박임하(8회)와 윤재명(8회)이 이야기한다.
미녀 4총사 노신옥선생은 중국 샹하이에 살다가 해방후에 귀국하여 부중(여자부) 에서 음악선생으로서 피아노 전공이었는데 그 당시 동양에서 최신 유행 첨단 도시 샹하이에서 귀국 ‘샹하이 가에리(上海 帰り)’ 에 걸맞게 파마머리에 긴 스타킹을 신고 빨강 긴 손톱을 하는 등 당시로서는 일반 여성들은 생각하지도 못하는 파격적인 차림새의 현대여성이었다. 아마도 고학년 남자학생들의 주목을 가장 많이 받았었을 것 같다 (다시 말해서 가슴을 설레게 했었다...).
손정애선생(무용)은 차가운 인상과 날카로운 성격의 미녀선생으로 별명이 ‘여자 김치옥’ 이라고 불렸다. 김치옥선생(공민과목 담당)은 키가 작달막한 미남자형으로 성격이 괄괄하고 학생들이 무서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상하급학생들 모두가 좋아하는 선생이었는데, 월요일 강당 조회때 전교생이 정렬하고 있을 때 뒷켠에서 웅성웅성하면 서슴치 않고 “야아! 조용해!” 하고 대성(大聲) 일갈(一喝) 하는 김치옥 선생을 앞서가는 여걸(女傑)형의 손정애선생에게 부쳐진 애칭이다. 생각해 보시라... "야아! 조용히 해!" 강당안을 쨍쨍하게 울리게 하는 미녀 선생의 그 곱디 고운 광경을!
남은 4총사인 한춘호선생(가사)은 이정애(5회)를 중학교 1학년부터 3학년까지의 담임을 했던 전형적인 한국 고전여성형의 미녀 선생이다. 함경도식 수예도 가르쳤다고 한다. 한복을 입고 있던 청초한 그 선생의 모습을 필자도 기억하고 있다. 목소리를 들어본 기억도 없을만큼 항상 조용한 그 미녀 선생은 요조숙녀이셨다.
윤재명(8회)과 박임하(8회)가 기억하는 스승으로서 이일규(화학), 이회우(공민), 김상준(국어), 황철수(역사), 태상근(수학), 박관우선생 등이 거명 되었다. 이일규선생은 필자가 일년 늦게 부산 임시본교에 복학했을 때 잠시 담임으로 있다가 곧 서울 임시분교로 부임해 갔는데 1953년 9월에 정부 환도로 본교와 분교가 합쳐지면서 고3의 1반을 담임했고 필자는 2반에 속했으므로 그 짧은 고3의 2학기 기간에 개인적인 친분은 없었으나 그 선생의 열성적인 강의는 서울공대 진학에 대비한 선택과목인 화학을 마스터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날 좌담회에서 이회우선생(공민)이 이회창 전한나라당 총재의 형이라는 말이 나왔으나 아마 집안의 형 쯤으로 될 것 같다. 황철수선생(역사)은 경기도 교육감 역임후 국회의원을 했었고 서울의 건설업계에서 대활약하는 황인수(10회)의 친형이 된다. 김상준선생(국어)은 서울시 교육감을 역임했던 걸로 알고 있다. 태상근선생(수학)은 필자가 6.25직전이던 4학년 1학기의 몇달간을 담임을 했고 필자와의 악연(惡緣)은 중3때 태선생이 서울공업에서 전근해 와서 수학교사로 부임하면서 옆반인 3학년 1반의 담임선생이 되면서 부터 시작이 되었고 부산에 일년 늦게 복학해서 그리고 53년에 서울로 수복하여 다시 담임이 되어 졸업하기 까지의 마지막 학기간 내내 그리고 졸업후 까지도 그 악연이 계속됐다 (그 선생과의 악연 이야기는 언제가 그 보따리를 풀어 놓을 기회가 있으리라고 본다). 돌이켜 생각하면 수학자(數學者)로 곧은 성격의 소유자로 말미암아 오랜 기간의 애제자(愛弟子)에 대한 나름대로의 애증(愛憎)의 표현이기도 했겠지만 어쨌던 장성한 후 사춘기 소년 소녀에 대하는 나의 태도를 도량있고 포용력 있는 품성으로 가다듬게 하는 좋은 교훈이 되었다. 반면교사(反面敎師)의 교훈이다.
서기현(15회)의 김순용선생(음악) 회고담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제1회의 ‘모교의 발자취’에 필자가 기술한
오류가 발견되었다. 그 기사에는 김순용선생이 정부 수복후에 본교로 복직한 후 얼마 안 있다가 퇴직한 걸로 기술했으나, 이 날의 좌담회에서 서기현(15회) 이길주(16회) 모두 김순용선생에게서 그 수많은 명곡과 가곡을 배웠다 했고 아마도 21회 동문까지는 그 선생에게서 음악을 배웠으리라 했다. 특히 이길주의 음악 실력은 그때의 배움이 전공의 토양이 되었다고도 볼수 있다 (이길주는 서울음대에서 성악 전공).
이인영(2회)의 설명에 의하면 김순용선생이 훨신 후에 사고사를 당하여 그 묘지의 비문을 김성익선생(역사)이 썼다고 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이인영이 '수업중에 황찬호선생(영어)에게서 노래를 배웠다'는 이야기를 한다. “아니, 그 분이 영어선생이었는데…” 하는 이중희(2회)의 말에, 실은 영어 단어와 발음 교육 차원에서 미국의 여러 훠크송 예컨대 ‘오 대니 보이’ ‘올드 켄터기 홈’ 등 등 많은 노래를 영어 수업시간에 배웠다고 한다. 황찬호선생은 첫번째 기획에서도 언급 되었듯이 훤칠한 키의 미남 선생으로 나중에 육사 교수로 있을때 두 전직 대통령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 당시의 실력있던 영어선생으로서 박시인선생을 빼 놓을수 없다. 넙적한 이마에다가 삼각형(三角形) 형(型) 얼굴로 웃을 때는 콧잔등에 주름이 잡히면서 “히힝...”하고 웃어서 별명이 ‘말대가리’로 불렸다 (2회 이중희 회고). 박시인선생은 웅변부의 지도교사로 있었고 필자도 교내 웅변대회에서 손도성(3회), 김태경(4회) 선배와 함께 입상했고 그런 연유로 해서 지도교사였던 박시인선생과는 가까웠다. 나중에 서울음대 교수로 자리를 옮기셨다.
그런데 잠시 이야기를 8.15 직후의 개교 당시로 돌린다. 이것은 좌담회 도중 화제가 6.25때 순직(殉職)한 김창화선생 이야기로 돌아 갔고 그러자 역시 해방 후 1947년에 순직한 신기범선생(초대 주사)으로 이야기가 되 돌려졌기 때문이다. 모교의 역사에는 초대주사(主事)는 신기범선생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 교장 직제로 되기 전에 학교 책임자를 주사(主事)라고 일컬었다. 그런데 엄밀한 의미에서는 초대주사가 따로 있었다. 이것은 윤병석(4회)의 회고담 이다. 8.15 해방이 되자 당시 경성사범학교의 보통과가 서울사범대학 부속중학교로 변경되면서 당시 경성사범학교에 재직하던 ‘김택원’이라는 사람을 남자부의 제1대 학교 책임자(주사)로 임명했다. 그러나 불과 몇달 후에 행방불명이 되었다. 이북으로 넘어 갔다고 한다. 그래서 곧 당시 사대학장이었던 장이욱박사(서울대 총장 및 문교부장관 역임)가 사대 부학장으로 있던 신기범선생을 남자부 주사로, 여자부 주사로는 김연영선생(초대교장)을 임명하였다.
신기범선생과 김창화선생의 순직에 대해서는 모교의 참고서적에나 어느 기록에도 그 이상으로는 기술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모교의 치욕의 역사이므로 그 치부를 외부에 들어 내지 않으려고 하는 의도에서 한 일이리라. 그러나 이미 반세기 이상이 지난 일이고 또한 구전(口傳)으로 동문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실이므로 이제와서 쉬 쉬 할 일이 아니다. 필자가 1학년 2학기 때인, 1947년 11월 21일 밤, 대학(사대)에서 야간 강의를 마치고 귀가하던 신기범선생이 자택에 가까운 골목에서 괴한들의 습격을 받아서 운명하셨다. 그 다음 날 유달리 늦게 시작된 각 학급 조회시간에 학생들이 담임선생을 통하여 이 비보를 들었고 필자의 한반 (1학년 2반) 급우인 신국재가 할아버지의 비보를 듣고 황급히 조퇴했던 광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얼마 안 있다가 범인들이 일망타진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본교의 좌익 학생들이었다.
그리고 채 3년도 지나지 않던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미명(未明:먼등이 트기전, 즉 새벽)에 이북괴뢰군(그렇게 불렀다)의 남침으로 불과 사흘 뒤에는 대한민국 수도가 괴뢰군에게 짓 밟혔는데, 피난을 가지를 않고 교직원 관사이던 기숙사에서 기거하면서 24시간 교사를 순회하면서 학교를 사수하던 김창화선생(수학)이 역시 좌익학생들에게 뒷산 청량대로 끌려가서 순직하셨다.
8.15 광복후 신의주 반공의거의 주모자로서 월남후의 김창화선생의 투철한 반공정신은 전교에서 유명했는데 우리 5회가 1947년 입학한 해에 1학년 1반을 담임했다. 이날 좌담회에서 새로이 알게된 사실. 1949년에 당시 문교부령으로 각 중학교 및 여자중학교에 학도호국단이 조직 설치되어 국방부에서 군사교관을 차출 훈련한 후 각 학교로 배속장교로 파견했고 본교에도 황수엽 육군소위가 부임했는데, 학도호국단 연대장이 당시 6학년이던 김여순(남, 2회), 남자 대대장에 역시 6학년이던 김원희(남, 2회, Irvine 거주), 그리고 여자 대대장에 6학년 유춘실(2회)이 맡았었는데, 위의 김창화선생이 좌익학생들에게 뒷산으로 끌려 오던 때 집에 칩거했던 유춘실도 같은 학생들에게 붙잡혀 와서 김창화선생과 함께 학살을 당했다는 이인영(3회)의 이야기 이다. 참으로 잊을래야 잊을수 없는 치욕의 모교역사이다.
황수엽 교관(배속장교)에 얽힌 이야기, 윤정현(6회)의 회고담이다. 윤정현이 학도호국단 제1대대 제5중대 대원이었을 때 (간단히 이야기 하자면 중학교 2학년 때) 교정에서의 조회시간에 규율이 문란하다고 전체 연대원들(남녀 전교생)을 황수엽 교관이 “엎드려 뻗쳐!”를 시켰다. 한참 후에 제2대대원들(전체 여학생)을 수업으로 들여 보내고 나서 남자 중대장들에게 무도(武道)실에 가서 한 웅큼씩 ‘나기나따(なぎなた 薙刀)’ 를 가져 오게 했다. 몇년 전인 일정시대에는 굴지의 명문 여학교인 경성여자사범학교에서는 무도시간에는 ‘나기나따’ 교습시간이 있었다. 경성사범학교에서 검도 시간이 있었던 것과 같다. 검도시간에는 목검과 죽검을 사용했듯이, ‘나기나따’ 시간에는 참나무로 만든 목검을 사용하였다. 여학생 실습용이었으므로 가늘고 가벼웠으나 참나무로 만든 장검이었으므로 체벌을 가할 때에는 이보다 좋은 도구는 없었으리라. 6척거구의 황교관이 제1중대(6학년)의 맨 앞 대원부터 시작하여 한사람도 빼 놓지도 않고 ‘엎드려 뻗쳐’ 의 엉덩이를 세게(정말 세게) 한 차례씩 때리는데 몇사람만에 ‘나기나따’가 부러지면 다시 새것을 집어들고 계속, 그렇게 해서 4중대, 5중대, 6중대로 차례가 돌아가기 전에 바지에 오줌을 싸버린 하급생들도 많았으리라 짐작된다. 이윽고 6중대원(1학년)까지 모두 체벌이 끝났을 때에는 산적해 있던 ‘나기나따’ 전부가 산산조각이 되어 있었다. 필자가 4중대 대원(중학교 3학년) 이었을 때다. 나도 맞았냐고? 물론이지, 그러나 맹세코 바지에 오줌은 안 쌌다. 얼마 후에 ’문 교관’이라고 하는 배속장교가 부임했는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교관은 아니었고 아마 1, 2, 3학년의 교련(敎鍊)을 담당, 황교관은 4, 5, 6학년의 교련을 담당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문 교관을 ‘문 바보’라고 별명 지었던 것은 기억에 남는다. 특별히 ‘바보’라고 불리는 연유는 없었으나 황교관은 우람한 거구와 중후한 목소리에다가 미남형이었던 것에 비하여 역으로 학생들 눈에 문교관이 초라하게 비쳐서 그런 별명이 부쳐졌을 게다. 역대 교직원 명단에 ‘교과목 미상, 부임/퇴임일자 미상’으로 되어 있는 ‘문희도’ 란 선생이 이 교관임에 틀림없다.
너무 선배들만 이야기에 열중하였기에 화제를 김옥주(18회)에게 넘겼다. 김옥주는 이곳 남녀 20 여명 되는 18회 동기회의 내년도 동기회장으로 과감하게 도전하여 화기애애한 가운데에서 무사히 당권 아닌 회권을 쟁취한 여걸이다. 쉽게 말하자면 금년까지 회장으로 수고한 노찬용 남자동문을 봐주는 뜻에서 흔연히 중책을 짊어진 것이다.
기억에 남는 선생으로 구인환(국어), 장기영(여3회, 영어), 유영상(여5회, 화학) 등 선생이 있었다고 했다. 구인환? 구인환? 많이 듣던 이름인데... 그랬더니 유명한 작가 구인환(丘仁煥) 서울대 명예교수가 맞단다. 장기영 선생(영어)은 이인영(3회)의 클라스메이트이다. 김옥주가 중학생때 담임이었던 유영상 선생(화학)은 필자와 입학 동기생이고 앞에 나왔던 이정애(5회)의 클라스메이트 이다. 중학교 1학년때 부터 천재소녀 소리를 들으면서 두각을 나타냈고 문자 그대로 팔방미인에다가 재원중의 재원이었다. 부중에서 교편을 잡은 후 동국대학교에서 평생 교수로 있다가 정년 퇴임을 했는데 만일 그녀가 약학을 전공하지를 않고 인문계로 나갔었더라면, 후배 인인호(여 7회, 러시아대사 역임)와 버금 가는 아니 더 이상의 실력을 발휘 할 수도 있었던 참으로 아까운 인재이다.
이번에는 화제를 이주화(여, 23회)에게로 넘겼다. 고등학교때 담임이 이보열선생(물리)이었는데 물리 공부가 너무 어려웠단다. 아마 그 반작용으로 였는지 화학반에서 활동했다고 했고 그때의 소양대로 약학을 전공 했나보다. 지금도 약사로 현직에 있다. 우리 동창회보의 편집위원으로 활약하고 있는데 가장 골치 아픈 ‘회원동정’과 ‘동기회소식’을 담당하고 있다. 아마 석달마다 돌아 오는 회보 마감 시일이 가까워 오면 발 바닥이 저려 올 것임에 틀림 없다. 이주화가 맡은 일은 미리 미리 알아 둘 수도 없고 또 창작을 할 수도 없는 내용인 반면 마감 시간과의 다툼이기 때문이다. 부군은 21회 동기회 회장을 맡고 있는 박영훈 동문이다. 전번 제3회 좌담회에서 많은 화제를 제공했다.
지난번 회에서는 ‘25회 졸업반의 동맹휴학’을 특종으로 다뤘는데, 그 특종을 제공했던 차학송(25회)이 실은 동맹휴학 주모자중의 한 사람으로 정학을 당했던 당사자중의 한 사람 이라고 이번 좌담회에서 실토했다. 왜 전번에 그렇게 말 안했나? 오히려 이런 '별'은 여러개 달수록 광이 나는 건데... 그런데 이 이야기는 딱히 게재할 마땅한 곳이 없어서 막간을 이용해서 여기에 보태 썼다.
특출한 동문
이길주(16회)가 요즈음 이곳 중앙일보에 매일 연재되는 조장희(7회)의 수기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 뇌속을 손금 보듯’ 으로 화제를 돌렸다. 조장희는 부고 7회 졸업후 서울공대 전자과를 나오고 스웨덴으로 유학 가서 오래 머물면서 이학박사 학위 취득후 이곳 UCLA, Columbia University, UC Irvine, UC San Diego 등에서 교수로 있으면서 연구를 계속하여 CT, PET, MRI 기기 개발 공로자로서 현존하는 한국인 (한국계 포함) 과학자중에서 노벨상에 가장 근접한 사람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현재 고국에서 가천의과학대부설 뇌과학 연구소 소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중앙일보 연재수기 초반에 그가 서울사대부중고 이야기를 자상하게 썼고 재학시절 그리고 은사들의 이야기로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다. 일부러라도 하기 힘든 모교 자랑을 한 껏 해 준 것이었다. 그래서 이 좌담회에서 이길주가 토픽으로 이야기를 깨낸 것이다.
그런데 실은 조장희 이야기와 관련하여 ‘오프 더 래코드’였던 ‘감춰진 진실’ 이야기 보따리를 필자가 드디어 풀어 놓고자 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김진구(1회)도 이미 유명을 달리했고 또 그 시대도 이미 35년을 더 지났으므로 이제는 우리 동문들이 알아도 무방하리라는 판단에서 이다.
때는 바야흐로 고국에서는 박대통령에 의하여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었던 1972년의 일이었다. 당시 이곳의 우리 동창회에서는 필자가 초대회장의 임기 2년을 대과 없이 마치고 장기열(7회)이 2대회장으로 있었던 때 였다. 그 얼마 전에 한국에서는 ‘윤필용 쿠테타 기도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었던 윤필용소장이 주동이 된 쿠테타 기도 사건이라고 했다. 이 윤필용소장은 김진구(1회)소장과 김종필 국무총리와는 육사 8기 동기들이다.
김진구가 이 사건에 연루되어 ‘남산 지하실’로 잡혀 갔는데 이곳에 일단 잡혀 들어 가면 반병신이 되어 나오거나 고문후유증으로 오래 못 산다고 하는 악명 높았던 소굴이다. 김진구가 이곳에 잡혀 들어 가서 홀딱 벗기고 고문 받기 직전에 계급장을 뗀 고문 담당 육군하사관이 김진구 귀에다 대고 “선배님 저 부고 x회 아무개입니다. 제가 몽둥이를 내려 칠 때 마다 무조건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십시요" 그리고선 “네 이놈! 이래도 안 불테냐!” 그러면 “아야야야...” 하는 김진구의 숨 넘어가는 비명 소리. 그렇게 해서 몸을 다치지 않고 나왔다고 한다. 그 진위(眞僞)는 모른다. 그러나 김진구와 안면이 있던 사람들간에 은밀하게 퍼진 이야기 였다.
그 직후, 그 당시 모국의 총동창회 회장이던 신원식(2회)이 김진구의 해외(미국) 망명길을 호위하고 LA 에 도착했다. 당시 피코와 크린셔에 있던 ‘함흥회관’ 특실에서 이 두선배의 환영식이 있었다. 약 30 여명의 동문들이 참석했다. 신원식 총회장이 서울에서 준비해 온 감사패를 초대회장이었던 필자와 당시회장 장기열(7회)에게 수여한후, 맥주잔이 한 순배 두 순배 돌아가면서 좌중의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게 무르익어 갔다. 그때 조장희(7회)가 필자 근처에 앉아 있었고 맞은 편에 최아무개(8회)가 앉아 있었는데 이 최아무개는 현역군인으로서 ‘중정’ 에서 LA 영사관에 영사로 파견된 동문이었다. 직간접으로 한국과 관계가 있었던 교포사회에서는 그의 권력이 무소불능(無所不能)의 힘을 발휘하고 있었음은 불문가지(不問可之)의 사실이다. 자연히 참석했던 동문들이 그에게 경외심(敬畏心)을 나타낸 것은 인간의 본능이고 이런 분위기에 최아무개가 우쑥대고 거들먹 거렸던 것도 사실이다. 건너편에서 이런 최아무개의 일거수(一擧手) 일투족(一投足)을 관망하던 조장희가 드디어 침묵을 깨고 최아무개에게 말을 던졌다.
“이봐! 최영사!”
“넷! 선배님”
흔히들 중고교선배는 10년 선배보다 바로 위였던 1년 선배가 더 무섭고 어렵다고들 한다.
“자네, 유신(維新)헌법이 뭔지 한번 설명해봐! 그리고 또 유정회(維政會)란 뭣하는 데야?”
순간에 좌중이 물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이윽고 최아무개가 목청을 가다 듬고 차근 차근 설명해 나갔다.
“야! 누가 그런 걸 몰라? 그런 개수작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어! 요는 군사독재정권을 연장하겠다는 게 아냐!”
"....."
그 당시 국외에 나와 있던 한국인으로서는 아예 한국으로 들어 가지 않기로 작정했거나 그야말로 ‘배때기에 댓빵(鉄板 てっぱん)을 깔아’ 놓지 않고서는 감히 입밖에 낼 수도 없는 엄청난 말 들이었고 또 사실 그런 시대였다. 주빈(主賓)인 두 선배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이내 어색해진 분위기를 필자와 장기열이 얼른 수습하긴 했으나 참 난감한 순간이었다.
조장희는 이렇게 성품이 곧고 오히려 고지식하기조차 했던 전형적인 과학자였다. 그의 연재수기에서도 조장희 자신 젊은 시절 자기의 그런 성격으로 해서 지나온 연구생활에서도 본의 아니게 많은 불이익을 초래했었다는 회고가 여러번 나온다. 어쨌던 우리의 자랑스러운 동문이다. 이곳 LA 근교 La Mirada에 사는 동문 조창희(5회)는 그의 친형이다.
필자의 후일담 (2009. 8. 15)
이곳 남가주동창회 산악회주관으로 작년에 설악산등반/동해안/경주/안동하회마을 관광여행 참가 때, 당시 권중건회장이 우리 회보에 게재됐던 4회의 연재 '모교의 발자취' 만을 발췌하여 100부를 만들어서 그중에서 80부를 한국의 동문들에게 나누어준 적이 있다고 어디선가 최근에 필자가 썼던 기억이 있는데... 그 당시 이 연재물을 읽었던 의학자인 한 동문이 바로 며칠후 어떤 모임에서 '조장희'에 대한 한국에서의 현황과 그에 대한 의학계의 비판(부정적인) 이야기들을 간략하게 설명해 준 적이 있다.
오랫동안 고국을 떠나 있었고 비록 그 동안 잠간씩 잛은 세월을 한국의 몇 대학 강단에서 강의했던 적도 있었지만, 여하간에 법적으로는 외국인임에는 틀림없고 그리고 그는 과학자이지 결코 의약계에 관련했거나 종사 또는 연구를 했던 의학자는 아니다. 천문학적인 사재를 털어서 이길여(李吉女) 이사장(총장)이 그를 위해 뇌과학연구소를 창설하고 마음껏 운영하도록 한 그 이길여총장도 여걸 이상의 여걸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문제는 의학자가 아닌 조장희가 한국에서도 유명한 의학자 그것도 쟁쟁한 서울대(의대) 선후배들을 수하에 거느리면서 아무리 조직의 수장으로 모든 권한이 부여된 위치에 있었다고 해도 자기 전공이 아닌 의학분야 더우기 뇌의학 분야에는 '뇌과학' 이외로는 일체를 그 의학자들에게 맡겨야 한다. 그의 사생활에 대한 소문도 나왔지만 그것은 어디가지나 그의 프라이버시에 속하는 문제이고, 동문으로서 간절히 바라는 것은 '벼 이삭의 교훈' 을 항시 떠 올리며, '황우석교수' 의 전철을 밟지 않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야기를 해준 바로 그 동문도 똑같은 바램의 이야기를 하였다. 사실 황우석교수는 아주 훌륭한 수의학자이다. 그의 공적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단지 그의 과오는 전공인 '수의학'에 국한하지를 않고 '인간생명공학'에 감히 손을 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덩달아서 언론이 부추기고 정계에서 여당 야당이 서로 자기네 국회의원으로 만들려고 아우성 치고, 국가에서도 관련기관들이 서로 다투어 무한정의 지원을 약속했다. 이러한 상항에서 헷가닥 안하는 사람이 비단 황우석교수 뿐이겠는가. 우리 사랑하고 존경하는 '조장희' 후배님, 자기 수기에서도 회고했듯이 젊었을 때의 옹고집, 비타협적인 성격, 독선적인 과오로 인해 많은 손상을 입었던 경험을 다시금 회고하여, 많은 의학자, 한국민, 국내외에 퍼져 있는우리 동문들의 '롤 모델'이 되어 주기를 충심으로 바라고 또 그렇게 기대한다.
그 밖에도...
서기현(15회)이 13회 선배들의 우수했던 인재들, 전번 기획연재(제2회)에서 누락이 되었던 김도언(체육부차관등 역임)과 홍사덕 등 여러 동문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나 비단 13회 뿐이랴. 선후배 모든 회기에 걸쳐서 우수했던 우리 동문들을 일일히 열거할 수 없다.
다만, 현금의 모국의 한심한 교육현실, 예컨대 학구제 실시, 고교 평준화, 대학 입시에 내신성적 반영 등 등 한국의 현실에 부합이 되지도 않는 선진국의 교육제도 일부를 무조건 모방하려는 철부지 학자와 함량미달의 문교행정 관리들의 조령모개(朝令暮改: 아침에 법령을 만들고 저녁에 뜯어 고침)식 교육행정으로 인하여, 천재(天才) 수재(秀才) 영재(英才) 재원(才媛)등이 증발하고 범재(凡才)와 둔재(鈍才)의 양산(量産)이 우려되는 모국의 안타까운 교육현실이다.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영웅호걸(英雄豪傑)이 배출된다고 했다. 한국의 명문교(名門校)의 과거의 명성이 한낱 과거 역사의 사실(史實)만으로 남지 않기를 우리 모든 동문들이 충심(衷心)으로 바라는 바이다.
본 기획을 마치면서...
4회에 걸친 ‘모교의 발자취’ 연재를 마치면서 좌담회를 주재하고 연재를 집필(執筆)한 필자로서 한마디 안 할 수는 없습니다. 이 한 해 동안 앞에서 이끌어 주고 뒤에서 밀어준 권중건 회장님, 이길주 이사장님, 이중희 발행인님, 여러 임원님과 편집위원님들, 그리고 좌담회에 참석하여 귀중한 증언을 해주신 여러 선배 동기 후배님들, 그리고 이 연재를 읽어 주시고 격려해주신 우리 500 여 동문님들이 안계셨더라면 이런 연재를 애초에 기획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모교에 얽힌 이야기들은 앞으로도 계속 발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고 이러한 사실들이 우리 동창회의 존재 의의(意義)와 가치(價値)를 더 해 준다는 새로운 발견 입니다.
4번에 걸친 이야기들이 모교의 초창기 시절 그리고 윗 선배들의 회고담(懷古談)으로 치중(置重)이 된 경향도 있습니다. 그러나 연로한 선배들의 회고담을 듣는 기회는 한정이 되어 있는 반면, 아랫 후배들의 이야기는 앞으로도 많은 시간을 가지면서 발굴이 되고 소개가 될 것입니다. 내년부터는 새로운 구상과 기획으로 여러분들을 다시 뵙겠습니다.
우리 천하 부중 부고 만세! 우리 서울사대 부중고동창회 만만세!
(제5회 최종회 끝)
■ 김호중 註: 이 글은 이완규 선배님께서 부고USA 에 기고하신 아래 5편중 마지막 다섯번째의 글입니다.
모교의 발자취 1: 머리말 - 기획연재를 시작하면서
모교의 발자취 2: 1949년(1회)부터 1954년(6회)까지
모교의 발자취 3: 1955년(7회)부터 1965년(17회)까지
모교의 발자취 4: 1966년(18회)이후
모교의 발자취 5: 기획연재를 마감하면서
출처: http://www.bugoUSA.org 모교_동문_링크
첫댓글 이 글로서 우리 '모교의 발자취 5편'의 글을 모두 다 올렸습니다.
부고 동문들은 누구나 꼭 알아야 될 얘기 같아서 소개를 했습니다만
읽으시는데 지루한 부담을 드리지 않았을까 한편 죄송스럽기도 하군요.
이 글을 작성하신 6회 이완규 선배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모교의 발자취 5편'부터 읽게 되었군요. 우리 모교의 역사! 시간이 날 때마다 1편부터 읽겠습니다.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승자씨 말씀 잘 압니다. 댓글 고마워요.
이 글들은 부고USA [모교_동문_링크] 란에 2009-08-13 일자로 실린 이래
지금까지 최소 941명, 최다 978명이나 읽었으니
많은 분들이 이미 읽었기때문에 지금 현재로는 흥미가 없겠지요.
그러나 아직 안 읽은 분들에게는 꼭 필요한 내용이고
또 이미 읽은 사람들도 차근차근 다시 읽고
마음 깊이 생각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져서
귀찮은 것 생각지 않고 실었습니다.
누군가는 이런 일을 해야할 것 같아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