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옥은 이용익, 오희순, 최봉준, 이승훈과 함께 조선의 5대 거상으로 불리우는 뛰어난 인물 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삼성 창업자인 이병철, 현대 창업자인 정주영과 비견되는 인물 입니다.
그런데 조선은 사농공상의 나라로 상인을 천시했기 때문에 상업이 발달할 수 없었습니다. 선비들은 유교 경전만 끼고 암송하는 것이 일이었으며 돈을 몰라야 했었습니다. 제 손으로 돈을 만져서도 안 되고, 시전에 나가 물건 값을 물어도 안 되었습니다. 만약 양반이 장사를 하면 그 다음부터는 양반으로 대우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풍토에서 거상이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18세기말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신분사회가 붕괴되기 시작했고, 유교가치가 퇴색하면서 거상이 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임상옥은 인간과 시대 그리고 물화의 흐름을 정확히 포착하고 이의 실체를 간파했던 뛰어난 상재와 정치감각을 지닌, 당시 조선을 대표하는 거상이었다. 이에 대한 스토리 하나를 <백성 편에서 본 조선통사, 왕을 참하라(상, 하)> 책(저자 청장 백지원, 출판사 진명출판사, www.jinmyong.com , 발행인 안광용, 02-3143-1336)에서 갖고 왔습니다. 임상옥의 뛰어난 상재가 돋보이는 글 대목 입니다.
<<<임상옥은 정조 때인 1779년 의주에서 별 볼일이 없었던 소상인인 임봉핵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정조, 순조, 헌종 때를 모두 살다가 철종 때 77세로 죽었다. 임상옥은 인물이 잘 생기고, 턱수염이 아름다웠으며, 구변이 좋은데다 사람을 잘 대했다고 한다.
임상옥이 태어났을 당시 조선의 무역은 일본 상인을 상대하는 동래 왜관과 여진족의 담비 가죽이나 기타 짐승 가죽이 주 매매 대상이던 회령, 경성 지대, 그리고 중국의 국경인 책문후시를 통한 의주 지방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중 무역의 규모는 청나라 상인들을 상대로 무역을 하던 의주가 가장 컸으며, 의주 상인 중 가장 뛰어난 상재를 지닌 장사꾼이 바로 임상옥이었다.
햑
그러나 임상옥 스토리는 정사에 없다. 살신성인을 한 논개도 없고, 조선 중기 한 때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황진이도 없으며, 조선 후기 대상인 인 임상옥에 대한 스토리 역시 한 줄도 없다. 멍청한 양반이란 것들이 저희들 얘기로만 사서를 채우고 양반이 아닌 천한 것들의 이야기는 실록에 싣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야사나 문집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임상옥은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장사를 배웠으나, 28세에 아버지가 죽었을 때 남은 것은 빚 밖에 없었다. 임상옥은 그때까지 완전 깡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38세 때 벌써 조선을 주름잡는 거부가 된다. 스물 여덟까지 완전 깡통이었던 임상옥이
어떻게 단 10년 동안에 거부가 되었던 것일까?
임상옥은 장사꾼으로 크려면 뒤에 <빽>이 있어야 한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진작 터득하고 있었다. 몇년간 열심히 청나라와의 인삼무역에 종사하여 어느 정도 경제적인 안정을 찾을 수 임상옥은 거래 규모를 키우기 위해 가진 돈을 모두 싸들고 한양으로 올라와 빽줄을 물색했다.
그때가 순조 때인 1807년이었다. 임상옥이 한양을 어슬렁거리고 있을 때에 지금으로 말하자면 군사령관인 총융사 박종경의 친상 소식을 접했다. 박종경의 부친은 순조의 외할아버지로 엉여대장과 형조판서를 역임한 당대의 권신이었다. 박종경의 누이가 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였고, 수빈 박씨가 낳은 아들이 바로 순조였다. 박종경은 순조의 외삼촌이었으니 당시 그의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한 것은 당연했다. 박종경의 부친상이 나자 여기저기서 부조금이 엄청나게 쏟아져 들어왔다.
머리를 굴리던 임상옥은 눈을 딱 감고 5000냥 짜리 어음을 끊어서 봉투에 넣고 박종경의 집을 찾았다. 당시 풍년이 들었을 때 쌀 한 섬(두 가미) 값이 겨우 2~3냥이었으니까 5000냥이면 쌀 한석을 3냥으로 계산해도 거의 1700석에 해당하는 막대한 돈이었다. 아무리 뇌물이 들어오고 부조를 후히 한다 해도 이건 너무 큰 돈이었다. 어음을 받고 깜짝 놀란 접수계가 당연히 박종경에게 즉시 알렸고, 얘기를 들은 박종경은 쓰다 달라 아무 말이 없었다. 돈을 지르고 와서 객주에서 느긋하게 연락을 기다리고 있던 임상옥에게 결국 며칠 후 박종경이 집사를 보내 한 번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기다리고 있던 임상옥은 박종경의 집으로 찾아가 그를 만났다. 면담 후 임상옥이 마음에 든 박종경은 임상옥을 위해 의주 상인 다섯 명이 10년간 대 중국 인삼무역을 독점할 수 있는 권리를 내주었다. 무역대금은 박종경이 대기로 했다. 말하자면 둘이 동업을 하게 된 것이었으니, 사실 대표적인 정경유착 케이스였다.
그때부터 임상옥은 돈을 갈퀴로 긁었는데, 당시 인삼무역의 규모는 대략 1년에 3만~4만 근 규모였다. 인삼 1근 가격이 25냥 이었으니, 연간 중국과 인삼 무역을 하는 규모는 대략 100만냥 정도 되었다. 이건 조선 측에서 계산했을 때에 그런 것이다. 이 인삼이 청나라로 가면 1근에 25냥 하던 인삼이 400냥 정도로 15배나 뛰었다. 경비를 반으로 계산해도 700만~800만냥이 되는 무역거래였으니, 도대체 얼마나 많이 남았겠는가.
당시 조정에 비축된 은자 총액이 모두 42만냥이었는데, 임상옥 등 의주상인들이 주무른 돈이 연간 700만냥 정도였으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겠다. 임상옥이 얼마나 많이 벌었는지, 연간 나라에 내는 세금만 쌀 1만3000석 가치에 해당하는 4만냥이 넘었다.
중국에서 고려인삼의 수요가 이렇게 엄청났던 것은 원래 인구가 많기도 하지만 당시는 생산된 인삼을 그대로 수출하는 것이 아니라 홍삼으로 가공해서 수출했는데, 백삼으로 팔 때보다 수익도 높았고, 수요도 엄청 늘었다. 그런데다 짱꼴라들의 한약에는 거의 모두 고려 홍삼이 들어갔다. 조선의 홍삼 개발이 국부로 연결된 것이다.
이렇게 인삼 무역으로 거부가 된 임상옥은 홍경래와 동시대 사람으로 홍경래보다 한살 위였다. 당시 서북의 많은 부자들이 홍경래의 난을 지원한 것과 달리 그 역시 홍경래를 알고는 있었으나 반란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임상옥의 장사꾼 배짱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어느 해 임상옥은 막대한 양의 인삼을 싣고 예년과 마찬가지로 북경으로 갔다. 고려인삼은 국내에서 수집할 때의 가격은 25냥 내외였으나 북경에 가면 그 값이 20배가 되어 400~500냥에 달했다. 그러자 북경사람들이 서로 짰다. 임상옥의 인삼값이 너무 비싸니까 불매운동을 맺어 서로 사지 않겠다고 버텨서 가격을 내리자는 것. 1년에 한번 밖에 없는 기회인데, 제까짓 게 인삼을 도로 가져가겠어? 반값으로 떨어지면 그때 사자. 말 된다.
흥정이 결렬되자, 양쪽은 서로 버티기에 들어갔다. 시일이 흐르고 임상옥 일행이 조선으로 돌아가야 되는 날짜가 다가왔다. 그간 청 상인들과 일체 접촉을 끊고 기루에서 술만 퍼마시며 시간을 죽이고 있던 임상옥은 돌아갈 날짜가 되자 일행을 모두 불러모은 다음, 가져온 인삼을 모조리 마당에 쌓아놓게 하고는 불을 싸질렀다.
그간 몰래 사람을 시켜 임상옥의 거동을 확인하고 있던 청상들은 임상옥이 가져온 인삼을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는 얘기를 듣고 얼굴이 새파랗게 된 채 급히 달려왔다. 인삼이 다 타버리면 그들은 1년을 공칠 뿐더러 거래처에 약속한 인삼 물량을 단 한 개도 대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달려온 청상들은 임상옥에게 불을 끄라고 호소했고, 임상옥은 결국 원하던 가격보다 더 비싼 값으로 인삼을 팔아넘겼다. 그런데 임상옥이 태운 인삼이 정말 인삼이었을까? 이런 때를 대비해 임상옥은 다량의 도라지를 갖고 다녔다는데, 확인된 바는 없다.
이 예화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임상옥은 대단한 배짱을 지닌 장사꾼이었으며 이런 배짱과 사태를 정확하게 읽는 눈이 있었기에 그는 거상이 될 수 있었다.
임상옥은 박종경이 실세하자 재빨리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가문에 다시 줄을 대고 인삼무역을 계속 했으며, 큰 홍수가 들어 백성들이 굶주릴 때 큰 돈을 희사하여 빈민을 도운 공로로 곽산군수로 임명되었다. 임상옥은 비록 정경유착으로 돈을 벌었으나 거상 답게 그 돈을 가난한 빈민들을 위해서 썼기 때문에 칭송을 받았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