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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9일(토) 오전 10시 지하철 3호선 원당역 3번 출구 출발, 고양 누리길 (제 4코스 일부) 성라산 낮으막한 숲길인 마을 뒷산의 푸근함을 자연스럽게 살 려낸 자연공원속에서 산행하였습니다. 오후 1시 일산 마두역으로 이동, '동해루’ (수타면을 잘 하는집)에서 새우 튀김, 탕수육, 짜장면 등 여름 별비를 맛있게 들었 습니다. 6월 산행 점심은 임종윤친구가 찬조하였습니다. 비교적 일찍 점심시간이 끝나자 커피집을 들렀다가 해산하였으며, 일산 친구들과 情理가 많은 친구들은 끝까지 남아 가는 봄을 아쉬워 하며 ‘호수공원’을 아주 느리 게 거닐었습니다. 친구가 가끔씩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눈을 감을 수 밖에 없 는 그러한 마음을 잘 묘사한 ‘호수’라는 정지용의 시(‘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푹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감을 밖에‘)가 새겨진 詩碑를 또다시 만났습니다. ---------------------------------------------------------------------------------------------- ◆ 성라산 둘레길 ◆ 음식점 동해루
◆ COFFEE 한잔씩을 시켜놓고! ◆ 호수공원
--------------------------------------------------------------------------------------------------------------------- ◆ 회화나무는 선비와 학문을 상징하는 나무. 마두역에서 호수공원으로 가던중 호수마을을 통과하면서 주변 가로수는 회화나무가 주종임을 발견했다. 고목 큰 회화나무는 호수공원에서도 눈에 띈다. 회화나무는 조경&정원공부를 하면 서 익히 잘 알고 있는 나무다. 잎이 아카시아 흡사하여 혼돈 할 수도 있다. 5월이면 아카시아 는 피는데 7,8월여름이 되어서야 연노랑 꽃을 피우는게 회화나무다. 연노랑의 꽃이 피고 우수 수 떨어져 바닥을 노랗게 물들인다.
예로부터 회화나무는 학자수(學者樹)라 하여 중국에서는 집에 회화나무를 심으면 큰 학자나 인물이 나온다고 여겼다. 베이징의 국자감(조선의 성균관)과 공자 모신 사당인 공묘(孔廟)에 회화나무가 물결을 이루고 있다한다. 이 관념은 우리나리까지 전파되어 궁궐의 마당, 서원이 나 향교 등 학생들이 공부하는 곳에 즐겨 심었다. 서양에서도 회화나무를 ‘Scholar Tree’로 부른다. 아래 사진은 호수공원 회화나무 광장에 있는 200살짜리 老巨樹다. 200년을 살았는데도 여전 히 꽃을 왕성하게 피운다고 한다. -----------------------------------------------------------------------------------------
호 수 정지용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
1연 : 손바닥으로 가려지는 얼굴2연 : 호수만큼 깊은 보고픈 마음이 시의 특징그리운 사람에 대한 간절 한 마음을 여섯 행으로 압축해서 표현하였다.마지막 행에서 문장을 종결하지 않아 독자로 하여금 다양 한 해석을 하게 한다.보고픈 마음을 호수에 비유함으로써, 그리움을 더욱 간절히 나타내었다. 각 행을 다섯 글자로 통일하여, 음수율을 이루고 있다. '그리움의 목소리'시인들이 사람 사이의 아쉬운 헤어짐과 그리움, 그리고 이에 따르는 괴로움을 많이 노 래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또, 만나는 즐거움보다는 헤어지는 슬픔이 더 많이 시에서 노래되는 일 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삶의 과정 속에서 헤어짐 못지않게 만남의 기회도 많이 있겠지만, 우 리에게 더 깊이 기억을 남기고 쉽게 떨쳐 버릴 수 없는 충격을 주는 것은 역시 헤어짐일 터이기 때문이 다. 삶의 즐거움은 그것 자체로서 활활 타오를 뿐, 괴로움처럼 긴 그림자와 함께 사람들을 따라다니지 않는다.그러나 삶의 어둠에 관한 성찰이 사람들을 보다 성숙하게 하듯이, 만남의 기쁨보다는 헤어짐으 로 인한 그리움과 아픔이 더 많은 것을 깊이 느끼고 생각하게 한다. 공기와 물이 모자랄 때 그 절실한 필요를 새삼스럽게 깨닫듯이, 우리와 더불어 있는 사람들도 그들이 없을 때 소중함을 안다는 것은 사람 들이 가진 어리석음의 탓이겠지만, 그리움을 되새기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누를 수 없는 사랑의 힘을 다시금 확인하는 일은 또한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이유이다. 정지용(鄭芝溶) 의 신경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이상을 비롯하여 조지훈, 박목월 등과 같은 청록파 시인들을 등장 시키기도 한 시인이었다. 1902년 음력 5월 15일 충북 옥천읍에서 좀 떨어진 구읍의 청석교 바로 옆 촌가 에서 한약상을 경영하던 영일 정씨 태국(泰國)을 아버지로 하동정씨 미하(美河)를 어머니로 탄생한 그는 그 당시 풍습에 따라 12살 때(1913) 동갑의 부인 송재숙과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 처가에서 결혼하였다. 이 부인 사이에 3남 1녀가 태어났으며, 그 가운데 차남과 3남은 6.25사변중에 행방불명 되었고, 현재 장남 구관과 장녀 구원만 생존해 있다. 그는 휘문고보 재학 시절 <서광> 창간호에 소설 「삼인」을 발표하였으 며, 일본 유학시절에느 대표작의 하나인 「향수」를 썼다. 1930년에 시문학 동인으로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전개하였고, 구인회를 결성하기도 하였으며 문장지의 추천위원으로 활동했다. 해방이 되서는 경향신문의 주간으로 일하고, 이화여대와 서울대에 출강하여 시론, 수필, 평문을 발표하였다.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이후 행적은 알지 못하나 북한이 최근 발간한 조선대백과사전에 1950년 9월 25일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요 저서로는 『정지용 시집』『백록담』『지용문학독본』등이 있다. 그의 고향 충북 옥천에서는 매년 5월에 지용제를 개최하고 있으며, 1989년부터는 시와 시학사에서 정지용문학 상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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