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비행사 김경오선생 490호 [사람들] (1998-09-04)
*여성에게 비행기 조종석이 허락되지 않았던
당시금기를 깬 김경오선생.현재도 여전히 일
정시간 비행을 한다.
세라복, 봉긋이 힘을 준 독특한 머리 스타일로 잘 알려
진 김경오 선생. 선생이 부총재로 있는 여의도 대한항공
협회로 찾아간 날에도 어김없이 그 모습 그대로였다. 김
경오 선생은 우리나라 여성 비행사 1호로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인물이다.
지금은 육사, 공사, 해사 할 것 없이 군대가 여성에게 문
을 활짝 열어 놓고 있지만, 선생이 처음 공군에 입대할
당시에만 해도 철저한 금녀의 집이었다. 선생은 그런 불
모지에서 고된 훈련과정을 이겨내 여성 1호 비행사가 되
었다. 그리고 이후 한국여성항공협회 회장과 국제존타
서울클럽 회장직 등을 맡아 오다 88년부터 94년까지 한
국여성단체협의회에서 회장을 연임하며 활발한 활동을
해왔다.
내 고향은 이북이다. 신안주, 구안주로 나뉘어 있던 평
안남도 안주에서 아버지는 신안주에서 성장하셨고, 어머
니는 구안주에서 태어나 성장하셨다. 아버지의 원래 고
향은 충청도 단양으로 할머니를 어려서 여의고 할아버지
와 함께 안주로 이주를 하셨다고 한다. 안주에서 외할아
버지가 오산중학교 한학 선생으로 계셨는데, 그때 아버
지도 오산중학교를 다니며 외할아버지께 공부를 배우다
가 외할아버지 눈에 띄셨다고 한다. 그래서 훗날 외할아
버지의 유언에 따라 어머니와 혼인을 하셨다.
그후 안주에서 강계로 옮겨 정착을 하고 우리 3남 5녀
형제들을 그곳에서 모두 낳으셨다(그 중에서 나는 셋째
딸이다). 강계에서도 읍이 아닌 산골 마을이라 산천이
무척 좋은 곳이었는데, 산이 굉장히 높고 병풍처럼 둘러
쳐 있어서 빨리 어둡고, 빨리 추워지고 더워지고 하던
곳이었다. 그리고 가구가 여남은 채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로 하도 외진 곳이라 동물들을 조심해야 했다. 지금
은 교통사고가 제일 위험하다지만 그때에는 밤에 승냥이
가 내려와서 가축을 잡아먹고 할 정도로 동물이 무서운
시절이었다. 그러니까 언니, 오빠, 어린애 들 할 것 없이
그곳 열 몇 채 안 되는 집의 아이들이 단체로 학교를 가
고 오고 하면서 한 식구처럼 살았다.
내가 세 살 되던 해 내 밑으로 동생이 또 태어났다. 아
버지께서 애들은 점점 많아지는데 학교도 마땅치 않아
고민하시다가 우리들을 공부시키려고 평안북도 도청소재
지가 있는 신의주로 이사를 하셨다. 강계에 있을 때는
농업을 생업으로 하시다가 신의주로 와서는 말하자면 지
금의 호텔 같은 것을 경영하셨다. 우리집에 풍금이 있던
기억이 나고 별 어려움 없이 살았던 걸 보면 그래도 살
림은 넉넉했던 것 같다.
고향 이북에서 해방후 서울로 이주
내가 여섯 살 되던 해, 아버지께서는 나를 압록강 건너
안동에 있는 중국인터내셔날학교에 입학을 시키셨다. 압
록강에서 뗏목을 타고 학교를 다니고 압록강 다리를 뛰
어다니고 하던 생각이 지금도 난다. 그런데 그 학교는
중국학교였기 때문에 중국옷을 입고, 머리도 중국애처럼
하고 중국말만 했다. 그러다 내가 3학년때쯤 됐을 때, 이
집 아이는 뭣 때문에 옆에 있는 학교를 놔두고 중국까지
다니냐며 일본사람들의 탄압이 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하는 수 없이 나를 다시 일본학교로 보내
셨다. 그후 얼마 안 돼서 우리나라는 8.15해방을 맞게 되
었다. 해방된 지 두 달도 안 돼서 우리 가족은 모두 38
선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렇게 해방후 소련이 북
쪽에 들어오기 전에 내려왔기 때문에 우리는 소련사람
얼굴도 구경하지 못했고, 천만 다행으로 이산가족도 없
었다.
서울에 맨손으로 넘어온 우리가족은 그야말로 피난민이
나 다름없었다. 당시 큰 오빠와 작은 오빠가 서울에 있
는 연희전문학교를 다니며 기숙사에 있었는데, 학생이었
기 때문에 오빠들이 가족한테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없
었다. 해방이 막 되었던 때라 돈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
도 전혀 화폐가치가 없어서 별 소용도 없었다. 가족이
38선 넘다가 지뢰 밟지 않고 몸만이라도 무사히 살아온
게 고맙다는 생각이 우선이었지만 살 길이 당장 막막했
다. 그나마 다행스럽게 수중에 아버지께서 금을 조금 가
지고 계셨는데 그걸 팔아서 살 집은 마련할 수 있었다.
한학을 공부하셔서 교육열이 대단히 높으셨던 아버지께
서는 말 만한 처녀들이 집에 있으면 안 된다시며 학교에
보내려고 하셨다. 당시 서울에 있는 학교는 해방된 후라
일본 아이들이 다 빠져 나가는 바람에 인원이 많이 비어
있어서 가고 싶은 학교에 골라서 갈 수 있었다. 하루는
아버지께서 신문을 보시다가 한성여학교라는 곳을 보시
고 수도가 한성이니까 좋은 학교일 거라 생각하셔서우리
를 그 곳에 입학시키기로 하셨다. 큰 언니가 우리를 데
리고 돈암동에 있는 학교에 갔는데 당시엔 학생이 귀할
때라 나이 어린 우리 모두를 받아 줬다. 나라를 되찾은
학교에선 “소, 소나무, 아버지, 우리 아버지”와 같은
우리말과 글도 비로소 가르쳐 주었다.
과학과목에 소질 정구대회 챔피언도
내가 한성여학교 4학년을 다니던 해, 그때까지는 4년제
였던 학제가 6년제로 바뀌면서 한성여학교와 자매학교였
던 동덕고녀로 학생들이 진학을 하게 되었다. 동덕고녀
2학년때는 정구선수를 하며 전국남녀 대회에도 나가 전
국챔피언에도 올랐다. 정구는 예쁜 유니폼을 입고, 서브
를 넣는 것도 너무 멋있어 보여 시작하게 되었다. 대회
장에 가면 남학생들도 환호하고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 정구선수도 하며 학교생활을 재밌게 보낼 수 있
기까지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고, 어려움도 많았다.
처음 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이북에서 내려 온 애는 어
떻게 생겼느냐며 아이들이 구경하고 따돌려 놀림감이 되
기 일쑤였다. “덩거장, 번떡번떡”하며 이북사투리를 놀
려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초라해지고 학교에도
가기 싫었다. 그래서 집에다 학교 안 간다며 떼도 쓰고
했는데, 그때마다 어머니께서는 “괜찮다, 다른 사람들은
만월이라서 날이 갈수록 다 질 테지만 우리 경오는 이제
초생달이라서 날이 갈수록 밝아지니까 다른 아이들이 놀
리더래도 기죽지 말아라”하시며 기운을 북돋아 주셨다.
언제나 힘들 때마다 어머니께서 기죽지 말라시며 해주신
그 말씀을 생각했다.
집에선 사각모 쓴 오빠에서부터 언니들까지 든든한 형
제들이 많아서 전혀 기죽을 게 없었다. 그러나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 처지라 미군정에서 주는 밀가루 배급으로
겨우 끼니를 때웠기 때문에 학교에 점심을 싸 가지 못했
다. 당시에 그나마 밀가루배급도 없었으면 다 굶어 죽을
정도로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모두 딱한 처지였다.
밀가루 배급은 가족대로 다 줄 수 없어서 열 여섯,일곱
이상 된 사람만 줬는데, 다섯 사람분을 타 와도 삼인분
밖에 안 될 정도로 양이 적어서 사람들은 자꾸 유령인구
를 늘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집도 마찬가지로 증조, 고조
할머니까지 대며 배급을 탔지만 항상 부족했다. 학교에
서 점심때만 되면 혼자 운동장 우물가에 가서 점심시간
이 끝날 때를 기다렸는데 아이들이 점심 먹고 우물에 물
을 마시러 와서 이북데기라서 점심도 없지 하면서 놀리
곤 했다.
그렇게 이방인 취급을 당하며 학교생활을 겨우겨우 하
다가 나는 새로이 마음을 먹었다. 공부로 다른 아이들을
이기리라 생각했다. 그때까지 성적은 그리 좋지 못했다.
과목 중에서도 국어, 역사, 지리, 음악 등은 정말 한심한
점수를 받았지만 수학, 기하학, 물리 등의 과목은 재미를
느꼈고 점수도 높았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공부를 잘 하
게 되니까 선생님들에게도 인정을 받고, 전교자치회 활
동도 하면서 적극적으로 학교생활을 했다. 그리고 정구
를 시작한 후 전국대회에 나가 챔피언을 따내 학교를 빛
내기도 했다.
국외 홍보사절 여성비행사로 선발돼
여학교시절의 꿈은 성악가가 돼 카네기홀에서 오페라공
연을 한번 해 보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장래
희망을 물어보시는 선생님 질문에 대부분의 아이들이 간
호사나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대답했던 반면, 나는 앞으
로 나가 칠판에다 ‘밀림의 여왕 ’이라고 당당하게 썼
다. 선생님이 어리둥절해 하시며 밀림의 여왕이 뭐냐고
물으셨는데, 난 그냥 순진하게 “밀림의 여왕은 밀림의
여왕이예요”라고 대답했다. 그 당시 동화를 많이 읽어
서 온갖 무서운 동물들이 사는 밀림 속에서 그 무서운
동물들을 다 지배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아
무튼 나는 언제나 세상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해주는 게
꿈이었다. 여성으로서 최초 파일럿이 되면서 세상사람들
을 놀라게 했으니 나의 꿈은 정확히 이뤄진 셈이다.
학창시절에 키웠던 성악가의 꿈은 음악시간에 ‘보고
파’를 너무 저음으로 부르는 바람에 선생님께 핀잔을
듣고 그만 접게 되었다. 대신 과학을 잘했기 때문에 어
머니의 권유대로 퀴리부인처럼 훌륭한 과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서울대 물리대 원자료학과에 진학할
계획이었는데, 어느날 나의 운명의 지침을 바꿔 놓는 사
건이 생겼다.
학교 운동장에서 이화고녀와 정구 결승시합이 있던 날,
갑자기 교내방송에서 강당으로 전교생 모두 집합하라고
알렸다. 강당에 갔더니 웬 여자 한 사람이 얼굴을 반쯤
가리는 선글라스를 끼고, 비행복을 입고, 무릎까지 오는
가죽장화를 신고 단 위로 올라왔다. 그때까지 그런 사람
을 본 일이 없었는데, 그 여성이 바로 이정희 여사로 일
제시대때 숙명고녀를 다니다가 일본 다찌가와 비행학교
를 나온 분이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여성비행사 문
화사절단을 선발하라는 지시에 의해 각 학교를 돌며 홍
보를 하는 순회강연을 위해 온 것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높은 하늘에 오르면 바가지로 구름을 퍼서 비행기 하나
가득 싣고 내려와 그걸 베고 잠을 잔다는, 지금 생각하
면 너무도 황당한 얘기였는데도 그때는 환상적인 그 강
연에 감동을 받았다. 그런 하늘에 대한 동경과 감상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비행사의 길로 나를 이끈 동기가
되었다.
*56년 공군 대위 시절
1948년 건국 후 전세계에 독립국가임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당시 변변한 통신장비도 없던 때라 이승만 대통령이 생각해 낸 것이
비행기였다. 빠른 건 비행기밖에 없으니 비행기에 태극기를 붙이고,
전세계를 다니며 독립을 만방에 알리는 문화사절로 쓰기 위해 여성
비행사를 선발하자는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안호상 문교부장관과
신성모 국방부장관에게 여자 비행사 15명을 선발하라고 지시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제시한 여성비행사 자격조건으로는 키162센티, 이
공계 학과 85점 이상, 완벽한 건강과 준수한 용모를 가진 사람이었
다. 문교부장관이 각 학교에 우리 나라 최초 여성 공군조종사 선발
목적으로 자격조건에 맞는 여학생을 추천해 줄 것을 요구했다. 각
학교에서 추천한 8천2백 명의 여학생 지원자가 모이게 되었다. 1차
서류심사로 2-3백 명만이 남았는데 그때부터 철저한 시험을 거쳤
다. 수학, 기하학, 물리, 국어 등의 시험과목이 있었는데 그리 어렵지
않게 시험을 치른 덕분에 최종 선발인원인 15명 안에 들게 되었다.
그때 15명 동기생 중에는 현재 한국소비자연맹 회장 정광모 씨도 있
었다. 그 친구는 나중에 기자가 되기 위해 중도에서 그만두었지만
지금까지 연락되는 유일한 동기다.
공군에 정식입대,일년 뒤 6.25 발발
열대여섯 살밖에 안 된 나이로 집을 떠나 온 우리들은 대한민국
공군이 뭔지, 사관학교가 뭔지, 우리의 임무가 뭔지도 잘 몰랐다. 학
교 교장선생님의 추천으로 화신백화점에 가서 시험을 치렀고, 합격
을 했을 뿐이었다. 시험합격 후 신체검사를 하는데 어린 소녀들을
산부인과까지 거치게 할 정도로 완벽하게 건강한 사람만을 뽑았다.
1949년 2월 15일, 눈이 많이 내리던 날 화신백화점에서 공군사관학
교 1기생과 같이 시험을 치르고, 같이 트럭을 타고 김포비행장에 입
대를 했다. 트럭은 휑한 비행장에 우리를 내려 놓았다. 우리가 온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마중 나오는 사람도 없었다. 얼마 후
이발사가 오더니 15명을 차례로 의자에 앉혀 놓고 머리를 완전히 밀
어 버렸다. 그때 길게 양쪽으로 땋은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라 나도 모르게 엉엉 울어 버렸다. 맞지도 않는 군
복을 입고 그 날부터 힘든 내무반 생활이 시작됐다. 다들 어린 학생
들이라 밤마다 울어서 기합도 받고 매도 많이 맞았다. 한 석달간 군
사훈련을 마치고 정식입대를 하기 위해 우리는 이 대통령 앞에 가
서, “이 나라 여성 조종사로서 일류 공중 지휘관이 될 것이며 국
가와 민족을 위해서 언제든지 하늘의 수호신이 되겠습니다”라는 선
서식을 했다. 대통령은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흐뭇해 하면서 꼭 성
공시켜서 문화사절로 쓰고자 했다.
‘우리는 군인이다, 군인은 뭐냐, 나라에서 요구할 땐 목숨을 던져서
애국하는 게 군인이다’이렇게 군사훈련을 받으면서 비행교육을 하
루에 8시간씩 받았다. 여자가 사관학교에 못 들어가는 시대였지만
우리는 공군 1기생하고 똑같이 교육을 받았다. 6.25 가 일어나기 전
까지 우리는 학과공부를 다 끝마쳐서 더 이상 배울 게 없었다. 그
러나 비행훈련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대한민국 공군엔 겨우
경비행기 5대만 있을 때라 도저히 훈련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런 여
건으로 6.25 전쟁을 맞았으니 북쪽과 전력의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정비, 통신, 기상, 역학 등
이론 공부는 완벽하게 했지만 ‘비행기를 타면 기분이 어떻다’라는
걸 알 정도의 관습비행만 했을 뿐 조종대 한번 잡아보지 못했다. 막
상 6.25전쟁이 발발해 북한의 미그전투기가 와서 기총 소사하고, 폭
탄을 투하하고 하니까 금새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그 와중에 15명
중 한 아이가 폭탄에 맞아 전사했고, 몇몇은 행방불명이 되고 하면
서 우리는 남쪽으로 후퇴를 했다. 그래도 나중에 다행히 11명이 부
대를 찾아 왔다.
‘여자’라고 막상 비행조종은 안 시켜
51년이 되자 미국에서 비행기 원조를 받았다. 남자 공군들은 조종
사로 속성 양성이 돼 전투에 참가하기도 하고 미국에 가서 전투기
훈련을 받고 오기도 했다. 나는 전투기는 커녕 비행기조차 타 보지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전시상황이라 수많은 전사자가 속출하니까
군대에서는 여자 비행사가 있다는 것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
때까지 똑똑하다는 소리만 듣고 컸는데 여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비행기를 태우지 않는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이렇게 있다가는 비
행기 한번 못 타보고 끝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51년 2
월 참모총장이 장교 임명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 입대할 당시 똑같
은 조건으로 한 날, 한 시에 들어 온 우리들이었지만 그 중에 단 2
명만이 장교가 될 수 있었고, 나머지는 하사관, 1등 상사, 2등 중사
밖에 될 수 없었다. 나는 장교로 임관되는 행운을 얻었지만, 장교임
관에서 탈락한 나머지 동료들은 다른 삶을 찾아 제대 후 대학으로
진학을 하였다. 나와 단 둘만 남은 장교 한 명도 1년이 채 안 돼 결
혼을 해버려서 결국 나 혼자만 남게 되었다. 내가 여성 문제에 점차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부대에서 여자는 나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밤에는 나를 지키기
위해 헌병이 배치되는 등 여러 가지로 불편한 점이 많았다. 하지만
대통령이 지시한 사항이니 참모총장도 함부로 나를 내보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남자들 사이에서 생활하다 보니까 어느새 나도 남자가
돼 버리는 것 같았다. 군복도 남자랑 똑같이 입고, 머리도 똑같이
빡빡 깎고, 얼굴도 남자처럼 면도할 정도로 타성이 생기면서 적응해
갔다. 그러나 유일한 여성장교로 늘 외로움을 느꼈다. 아무리 기다
려도 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는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
지만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식의 사고를 그대로 가지고 있을
때니까 여자가 공군에 들어온 건 정책일 뿐이지 일반장교들은 이해
가 가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모든 학과공부를 마치고 비행기 탈 날만 기다리는데, 다른 남자비
행사들이 빨간 마후라를 매고 전투에 출격하는 걸 보면 그렇게 부러
울 수가 없었다. 나도 전투에 나가서 남자들처럼 나라를 위해 값진
전사를 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랬다.
그러다가 제1회 항공의 날을 맞게 되었다. 이 대통령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왔는데 대통령이 노쇠한 터라 전쟁중에 자신이 여자
비행사를 모집하고 선발해 놨던 것을 잊어 버리고 있던 참이었다.
기회는 이때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나의 존재를 대통령에게 상기시키
기로 마음먹었다. 대통령 앞으로 인사를 하러 나가자 대통령은 내가
남자 같은데 생김새가 여자처럼 곱상하니까 나를 보고, 그 특유의
목소리로 “젊은 장교”하고 불렀다. 나는 이때다 싶어,
“대통령 각하, 저는 아무날 아무시에 대통령 각하의 지시에 따라서
선발된 여성장교입니다. 그런데 여성이라고 해서 저는 비행기를 타
지 못하고 있습니다”하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옆에 있던 참모총
장이며 모두들 난처해져서 말이 아니었다. 그때서야 대통령이 기억
해 내고 나의 상황을 알게 되었다. 옆에 프란체스카 여사도 함께 이
야기를 들었다. 대통령의 명령이 있고 나서 그 이튿날 참모총장 특
명 1호로 나는 사천비행장으로 전출을 명령받게 되었다.
여자 하나가 조종훈련을 받으러 오니까 공군장병들이 다들 맘에 들
어 하지 않았다. 내가 활주로 옆을 지나갈 때 “여자가 지나가서
재수 없으니 오늘 비행기 타지 말아야겠다”는 말을 수없이 들으면
서도 인내를 해야 했다. 당시 47킬로그램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
하고 나보다 더 무거운 낙하산를 메고 장거리를 뛰었다가 돌아오고
하는 고된 훈련과 기합을 남자들과 똑같이 받았다. 남자들도 힘이
들어서 퍽퍽 넘어질 정도였다. 그래도 보란 듯이 끝까지 하고 돌아
오면 숨이 턱까지 차올라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렇게 힘든 훈련을 끝까지 하는 것을 보고 남자교관들이 상부에
보고를 했고, 참모총장은 나를 대구로 불러올려서 참모총장 전용기
의 전용조종사 임무를 맡겼다. 대구에서는 좋은 환경에서 교육을 받
을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조종훈련을 받게 되니까 지상에서 받았
던 교육과는 너무 달랐다. 고도가 올라갈수록 체질의 변화도 오고
이론과 실제의 차이를 실감할 수 있었다. 남자들은 25시간 교육 후
에는 단독비행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는데 나는 50시간 교육 후
에도 단독비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완전무결할 때까지
단독비행을 시키지 말라’는 대통령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
다.
단독비행 성공,미국 유학길에 올라
1952년 5월 12일에 드디어 처음 단독비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날이 바로 대한민국 건국 후 최초 여성비행사가 탄생하는 날이었다.
전쟁중이라 사람들이 배고픔에 허덕일 때였는데도 여자 비행사가
탄생한다니까 비행장에 구경인파가 하얗게 몰려들었다. 그 만인
앞에서 지금까지 배운 걸 1000피트 상공에서 전부 보여주고 1시간
20분만에 내려오는데 사진기자들의 후레쉬가 터지고, 꽃다발이 주어
졌다. 그때부터 나에게 한국 최초여성비행사라는 대명사가 붙게 되
었다.
단독 비행 후로도 많은 훈련이 필요했는데, 지상에서 서울은 어떻
게 가며, 강릉은 어떻게 가는지 하는 항로와 항법을 익혀야 했다. 그
런데 그 방면에 소질이 있었는지 1년 내로 완벽하게 마치고 임무수
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대통령은 내가 하나밖에 없는 여성비행
사라고 해서 상부에 바람도 없고 구름도 없는 맑은 날에만 임무를
맡기라고 지시했다. 그때부터 나는 후방에서 연락기 조종사로서 비
밀문서 등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53년 정전될 때까지 나는 3
백12시간 비행을 했다. 그 당시 계급은 소위였는데, 53년에 중위,
55년에 대위로 진급을 하게 되었다. 대위가 될 때까지 훈장도 6개쯤
수여할 정도로 임무수행도 잘 완수하자, 어느날 대통령이 나를 불렀
다. 이제는 전쟁이 끝났으니 군인으로서 임무는 그만하고, 미국에 가
서 미국 민간항공 훈련을 다시 받고 오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57년에 국가보조로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
*58년 '국제여성비행사총회'에 가입,지금까지
한국대표를 맡아오고 있다.
57년 10월 15일 서울을 떠나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길포드대학에 입
학을 했다. 학적은 길포드대학 영문학과에 두고, 부근 비행장에서 민
간비행 교육을 받았다. 한국에선 공군 비행기만을 조종했지 민간비
행기는 한 번도 타보지 못했기 때문에 비행교육을 다시 받으며 민간
비행에 관한 공부를 시작했다.
한국 유일한 여자비행사로 유명세 치러
미국에서 한국은 전쟁으로 잘 알려져 있을 때였다. 그런데 한국 공
군의 유일한 여자비행사가 미국에 유학 와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여기저기서 찾는 곳이 많았다. NBC방송의 한 유명한 프로그램에서
도 출연요청이 왔는데, 그 프로그램의 내용은 여러 명의 출연자 가
운데 진짜 주인공을 찾아내는 오락프로그램이었다. 나는 출연요청에
응해 비행기를 타고 뉴욕에 가서 그 프로그램에 출연을 했다. 일
본인, 중국인 여성 2명을 나와 똑같이 화장을 시켜 놓고서 우리 3명
중에 한국의 유일한 여성 비행사이자 공군 대위로 6.25전쟁에 참전
한 나를 10분 안에 찾아내야 하는 게임이었는데, 결국 아무도 알아
맞추지 못했다. 공군비행사라고 하면 덩치도 있고 할 줄 알았는데,
정작 주인공인 나는 삐쩍 마르고 가냘퍼서 사람들이 전혀 나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발레리나 아니냐고 질문할 정도였다. 패널들이 못 맞
춘 덕분에 나는 상금 1000달러를 타게 되었다. 미 50주에서 모두 보
는 황금시간대 프로그램이여서 한국대사관에서도 보고 미국에 유학
온 한국학생들도 모두 봤을 정도였다. 상금 1000달러 외에 자동차,
에어컨, 냉장고 등 수만 불 어치의 부상이 나왔는데, 나한테는 필요
없는 거라 생각해서 주미 한국대사관에 다 기증하고 현금 1000달러
만 내가 가졌다.
그 이튿날 난 그 돈을 가지고 뉴욕의 유명한 티파니 거리에 있는
다이아몬드회사에 갔다. 학교 기숙사에서 늘 잡지를 보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다이아몬드 상점이라고 광고가 난 것을 보곤 했기 때문
에 한번 꼭 가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 앞에 서 있던 사설 경관이 쪼
그만 동양 여자가 운동화에 양쪽으로 묶은 머리를 하고 오는 걸 보
고서 가로 막고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그러다가 어젯밤에 텔레비전
에 나왔던 그 사람 아니냐며 나를 알아보고 들여 보내 주었다. 그래
서 나는 통크게도 1000달러를 척 내고 7부 3리 짜리 다이아몬드를
샀다. 그후 학교에 가보니 전교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하고 난리가
났다. 개교 130년 역사에 그 프로그램에 나간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교내 신문에 나고 유명세를 톡톡히 치렀다.
그때까지 한국에서 가져 간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4백80달러 한
학기 등록금을 내고 나면 시간 나는 대로 나가서 접시도 닦고, 잡초
도 뽑고, 도서관에서 일하면서 고학을 해야 했다. 돈 벌면서 비행기
훈련을 한다는 게 정말 고달픈 생활이었다. 아침에 학교 기숙사에서
빵 두 조각에 달걀 두 개, 우유 한 잔이 나오는데, 그나마 빵 두 조
각 중 하나는 남겨뒀다가 낮에 커피와 함께 점심을 때워야 했다. 하
루는 훈련을 마치고 비행기에서 내려 오는데 갑자기 눈 앞이 캄캄해
지면서 어지럼증이 났다. 검사 결과 영양실조라고 했고, 그 날부터
훈련중지 명령이 내려졌다. 기숙사에 누워 떠나올 당시 김포공항에
서 태극기를 흔들며 꼭 성공하라며 성원하던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
렸다. ‘내가 성공해서 가려면 우선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난 그날
부터 돈을 아끼지 않고 먹는 것은 꼬박꼬박 챙겨먹으며 기운을 다시
차렸다.
국제 여자비행사총회 가입 테스트 통과해
미국에서 난 점점 더 알려져서 뉴스위크,뉴욕타임즈 등에서 인터뷰
요청이 계속해서 들어왔고, 인터뷰를 할 때마다 사례비도 적지 않게
받을 수 있어서 형편도 조금씩 나아졌다. 그렇게 미국에서 대외적인
인지도를 갖게 되자 어느날 국제여자비행사총회 총재가 학교로 찾아
왔다. 그리고 내가 동양에서는 얼마 안 되는 여자비행사이기 때문에
총회에 나를 가입시키겠노라고 했다. 그런데 그 전에 나는 테네시까
지 갔다가 그 다음날 돌아오는 테스트를 거쳐야 했다. 대한민국이야
지도 없이도 날았고, 예를 들어 설악산은 고도 몇 피트로 날으면 된
다 하는 게 있었지만 미국이라는 데는 산도 없고 대부분 평야로 나
무도 많아서 항법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래서 단 30분
동안 지도를 놓고 재고, 고도도 1천피트 이하를 유지할 수있도록 연
구를 했다. 그리고 “테네시라는 곳은 말이 많은 데라 지상을 내다
봤을 때 산에 말이 많으면 네가 테네시주에 들어왔다는 것”이라는
내 룸메이트의 유일한 정보만 가지고 비행기에 올랐다. 그런데 가도
가도 끝이 없이 나무들만 보였고,‘내가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하
고 불안해 지기 시작했다. 시간상 4시간 20분 비행인데, 두세 시간을
그렇게 계속 가다 보니 졸리기까지 했다. 4시간쯤 경과됐을 때 아래
를 아무리 내려다 봐도 말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하는
수 없이 계속 비행을 하는데 어느 순간 말이 한 마리, 두 마리 보이
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말들이 떼지어 풀을 뜯고 있는 것이 보였다.
타워에 연락을 해 보니 2킬로 지점에 와 있으니 미국 공군 기지에
착륙하라고 송신이 왔다. 그때가 58년 2월이라 눈이 오고 얼음이 어
는 겨울날씨였는데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산에서는 말들이 푸른 풀을
뜯고 있는 대조적인 광경이 인상적이었다.
무사히 활주로에 착륙을 하고 보니 동양여자가 비행을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것에 대해 신기해 하며 많은 기자들이 취재를 하기 위해
모여 있었다. 그렇게 난 국제여자비행사총회의 테스트에 무난히 통
과해서 회원이 되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긴데, 이 사실이 신문에 크
게 보도가 되자 당시 소수였던 우리나라 유학생들이 그 기사를 보며
같은 한국인으로서 기뻐하고, 뿌듯한 마음들을 가졌다고 한다.
경비행기 구입 위해 순회강연, 모금활동 펼쳐
차차 나는 고국에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내가 돌아가더라도
비행기 하나 없이 한국에서 뭐 하겠나 싶은 생각에 그때부터 비행기
를 마련할 계획을 세웠다. 그때만 해도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시기였기 때문에 미국사람들에게 한국전쟁에 관한 순회강연은 인
기가 많았다. 그렇게 순회강연을 다니다 보니 미국 50주 여자비행사
들과도 친분을 맺게 되었고, 그들은 내가 고국에 돌아갈 때 비행기
를 마련해 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일이 달러도
아닌 비행기를 마련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고, 순회강연 사례
금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러던 어느날 백화점에서 현금계산을 하고
잔돈은 스탬프로 대신 주는 걸 보고서 불현듯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종이 한 장에 스탬프 1천2백장을 부치면 1달러 25센트의 가치가 있
었는데 그걸 주부들이 와서 물건으로 바꿔가면 되는 거였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그걸 전국적으로 모으면 큰 돈이 되겠다는 생각
을 한 것이다. 그래서 미국 여자비행사협회 모임에 나가서 그 이야
기를 하고 그들의 협조를 얻었다. 미국 뉴욕 뉴저지 티다브로 비행
장에 “We help for captain Kim”이라는 프랭카드를 내걸고 김
경오 대위를 돕자는 모금운동이 시작되었다. 미국 여자 비행사들의
후원으로 순회강연도 본격적으로 이뤄지고, 요청도 쇄도하게 되었다.
또 미국 여자비행사들은 나를 위해 하루에 30명씩 자원봉사를 하며
강연 문의와 접수를 받고, 그들의 비행기로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나를 데려다 주면서 헌신적으로 도와주었다.
강연에 가면 한국전쟁에 대한 얘기서부터 우리나라 경주 불국사에
대한 소개에 이르기까지 청중이 원하는 내용의 강연을 하곤 했다.
원래 한 시간 강연에 대한 사례는 1백50달러 정도였지만 모두들 나
이 어린 나를 보고 감격하면서 500달러씩 성금 형식으로 사례하곤
했다. 그리고 미국의 존타클럽에 가서도 강연을 하게 됐는데, 그때는
존타클럽이 뭔지도 몰랐다. 존타클럽은 대서양 단독 횡단 비행에 성
공한 미국 최초 여자비행사로서 37년에 태평양 비행 도중 행방불명
된 아밀리아 이어 하트를 기리기 위한 사업을 하는 각 분야 전문직
여성모임이었다. 존타 클럽 강연회에서 나이 지긋한 할머니들이
2000달러를 수표로 끊어주는 등 가장 큰 도움을 받았다. 그러면서
그들은 대신 내가 성공해서 우리 나라로 돌아가면 ‘존타’를 만들
고, 아밀리아 이어 하트 장학회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 인
연으로 해서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와 존타 서울클럽을 창립하게 되
었고, 84년부터 88년까지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일반 주부들로부터 온 스탬프도 3백만 장이 되었다. 당시에 여러곳
에서 스탬프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주부들이 ‘그린
스탬프’라는 것을 주로 보내는 바람에 회사홍보도 돼서 회사로부터
도 몇 만달러의 사례금도 받게 되었다.
나의 처음 계획은 2년 목표로 해서 내가 원하는 교육용 비행기를 사
는 것이었는데, 그런 여러 사람들의 도움과 성원으로 석 달 열 이레
만에 많은 돈이 모금돼서 목표를 빨리 앞당기게 되었다. 드디어 미
국 케네디 비행장에서 한국대사, 유엔대사, 미8군사령관 등이 참석한
비행기 기증식을 가졌다. 그런데 그 비행기를 한국까지 가져오는 것
이 또 문제가 되었다. 경비행기라 태평양을 횡단 비행할 수가 없었
다. 다행히 미군에서 군함에 싣고 인천항까지 운반해 주었고, 인천에
서 여의도 비행장까지 긴 콘테이너에 실어 와서 여의도에서 조립을
해서 63년 10월 30일에 시험비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때 미국을 갔다가 유학생활을 마치고 63년에 귀국을
해 보니 어느새 정권이 바뀌어 군사정권이 들어서 있었다. 너무도
낯설었지만 공군에서도 내 얘기를 많이 들은 터라 반갑게 환영을 해
주었고, 정부와 나라를 위해서 많은 일을 해달라며 오히려 부탁을
했다. 내 비행기도 대통령 전용기 옆에 두고서 정비를 거기서 맡아
서 해주었다.
*92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장을 할 당시.
63년에 돌아와 미국에서 마련해온 경비행기를 가지고 여자후배 조
종사들을 키워낼 계획을 세웠다. 그 후 65년에 대학 3학년 재학 이
상 여대생을 대상으로 조종사를 모집해서 비행훈련을 시작했다. 60
년대까지만 해도 보릿고개라는 말이 있을 때라 하루에 세 끼 먹을
수 있다는 건 형편이 좋은 편에 속할 때였다. 그래서 돈도 받지 않
고 내 사재를 털어 학생들을 가르치기로 했다. 그 당시 스무 명을
모집해서 가르쳤는데 지상과 기압 차이 때문에 비행후 구토증세를
보이는 학생들도 많았고, 대부분 적성에 맞지 않다고 중도에 그만두
었다. 결국 단 두 명만이 단독비행에 성공했는데, 그들 마저도 그후
에는 잘 나오지 않았다. 이유를 물어보니 집안에서 반대하고, 결혼
을 앞두고 약혼자와 시댁에서 반대를 하는 등 주위에서 다들 반대가
심하기 때문에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자전거 한 대
움직이기 힘든 60년대 경비행기를 가지고 있으니 부자인 줄 알고 걸
핏하면 강도가 우리집을 털어가기까지 하면서 당시 힘든 상황을 맞
게 되었다. 그래서 69년에 비행기를 나라에 헌납하기로 하고 했고,
다시 정부에서는 그 비행기를 항공대학에 기증했다.
그때까지 항공대학에서는 비행기 한 대가 없어서 학생들이 4년 내
내 비행훈련을 제대로 못 했는데 그제서야 훈련을 할 수 있었다. 지
금은 몇 십년 지나 낡아서 지상교육용으로만 쓰고 있지만, 바로 그
비행기로 훈련을 받아 71년도에 ‘함광란’이 항공대학에서 여성조
종사로 탄생하기도 했다. 함광란이 내 뒤를 이어주길 기대했지만 외
아들과 결혼하면서 시집의 반대로 현재 아들 둘을 낳고 잘 살고 있
다.
31세에 같은 항공인과 결혼
52년부터 조종사가 되기 위해 오로지 그길에만 몰두하다 보니 결혼
은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래서 65년에 뒤늦게 결혼을 했는데, 그
때 내 나이가 서른 한 살이었다. 당시엔 그 나이에 결혼을 한다고
하면 구경을 온다고 할 정도였다. 16살부터 군대에 들어가 줄곧 집
에서 나와 있었기 때문에 부모님들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와서 시
집 가라는 재촉같은 걸 받아 본 적이 없다. 사실 공군에 입대하면서
부터 집안망신이라며 아버지의 반대가 심해 거의 내 놓은 자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내 보호자 역할도 국회의장을 하시던 신익희
선생님이 해 주셨다.
그렇게 외롭게 조종사의 길만 외곬으로 걸어오다가 남편을 만났다.
첫 대면을 한 건 63년 미국 귀국 후 당시 내무부경찰 항공대장으로
남편이 있을 때였다. 같이 비행훈련을 하기도 했지만 그때는 말 한
마디 주고받지 못한 채 그냥 스쳐지나 버렸다. 그후 다시 65년에 주
위분의 권유로 선을 보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 나온 사람이 바로 남
편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남편은 8년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고, 혼
자서 짝사랑을 해 오고 있었다고 한다. 남편은 나와 같은 항공인이
었지만 육군에 속해 있었고, 훗날 경찰항공대학을 창설하기도 했다.
지금은 항공일에서 은퇴하고 사업을 하고 있다.
65년에 결혼한 뒤 66년에 첫딸을 낳았다. 첫딸을 낳고 그 애가 6
개월 됐을 때 일본과 친선비행을 하게 됐다. 출산한 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비행에 나선다는 것도 그랬지만 횡단비행이 100% 성공한
다는 보장도 없었기 때문에 다들 만류했다. 남편도 말렸지만 책임감
에 비행에 나섰다.
66년 6월 10일 김포에서 출발, 일본으로 향했다. 부산을 잠시 경유
다시 재정비를 하고 현해탄에 들어섰다. 바다를 건너며 출렁이는 파
도를 내려다 보는데 ‘윤심덕이 바로 저곳에서 몸을 던졌구나’ 하
는 생각이 들자 좀 무섭기도 했다.
일본 후쿠오카에 도착하니까 아사히신문사에서 에스코트를 나와 하
늘에서 공중촬영을 하고 착륙을 했다. 비행장에는 한국교포들이 태
극기를 흔들면서 눈물을 흘리며 “우리는 못 살아서 이 나라에서 고
생하고 있지만 우리나라 여성 중에 이런 여성이 있다니 자랑스러운
일”이라고들 기뻐하며 환영했다. 동경에 가서 공식행사를 하고 있
는데 정부에서 신랑된 사람이 얼마나 불안하겠느냐며 남편을 동경으
로 보내주며 배려해 주었다.
66년 일본과 친선비행시 목숨 잃을 뻔
친선비행 행사를 동경에서 마치고 오사카를 경유해서 돌아오기로
했다. 그런데 비행기를 몰고 오사카를 가던 도중, 6개월 된 딸 아이
를 집에 떼어 놓고 온 게 자꾸 눈에 밟혀서 잠깐 그 생각을 한 순간
눈 앞에 구름이 잔뜩 시야를 가로막아 버렸다. 짙은 구름 사이에서
길을 잃어 버렸고, 아무리 빠져나가려고 해도 길을 찾을 수가 없었
다. 게다가 구름에 파묻혀 버리면 구름이라는 게 수증기라 계기가
정상가동을 할 수 없게 돼 버린다. 한 치 앞도 안 보이고 내가 지금
있는 위치도 도저히 알 수 없는 극한 상황으로 치닫게 되자‘이렇게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약 5분 뒤면 모든 게 끝날 상황이었
고, 난 다른 사람들에게 비참한 내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바다
를 찾았다. 그러나 전혀 위치 파악이 안 되는 상태라 바다가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좀전에 지나왔던 것으로 감을 잡아 현해탄
이 어디쯤 있을 거라는 걸 생각하며 그리로 비행기를 몰았다. 그순
간 내가 느낀 것은 “난 결혼을 안 해야 될 사람이 결혼을 했다”라
는 것이었다. 남편은 둘째 치고 아이가 자라면서 엄마 없이 얼마나
서글플까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이와 남편한테 너무도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마지막으로 비
행기를 몰아가는데 갑자기 구름 숲에서 파란 하늘이 싹 스쳐지나가
는 게 보였다. 아무생각도 못하고 그 쪽을 향해 무조건 급상승을 했
다. 비행기가 실속할 상태까지 급상승을 하자 구름을 벗어난 그 위
에는 파아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그때 비로소 타워와 통신이 되
었고, 몇 분 전이라는 걸 이야기해 주자 내 현재 위치를 알려 주었
다. 오사카비행장 바로 1킬로미터 지점에 와서 내가 구름속에 파묻
혀 길을 헤맨 것이었다. 에스코트 하는 비행기가 올라와 나는 무사
히 지상에 착륙할 수 있었다. 아마 1분 50초만 늦었어도 다시는 땅
을 밟을 수 없었을 것이다.
비행기에서 내려서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오사카에 마련된 기자회
견 참석을 위해 거울을 보니 동경에서 떠날 때 기자회견을 위해 예
쁘게 화장을 해놓은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고 눈은 퉁퉁 부어서
엉망진창 꼴을 하고 있었다. 대충 분을 칠하고 립스틱을 바르고 선
글라스를 낀 채 지상활주로에서 들어오는데 모두들 박수를 쳐주고
격려를 해 주었다. 그날 사고로 비행기 왼쪽엔진이 완전히 고장난
상태여서 일본항공사에서 정비를 하기 위해 그날밤 그곳에서 묶었
다.
그 이튿날 포항을 거쳐 서울로 돌아와 김포비행장에 내렸는데 공항
에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분홍색 나일론 아기포대기만 눈에
들어 왔다. 남편이 아기를 안고 서있는 게 멀리서 보이자 또다시 눈
물이 났다. 그때 나는 비행기를 다시는 타지 않겠노라고 마음까지
먹었다. 포대기로 꽁꽁 싼 애기 얼굴을 들여다 보니 안에서 애기가
희죽 웃어 보였다. 그때 그 일은 내 비행인생에서 가장 잊을 수 없
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딸들에 대한 소중함과 함께 더 강
한 모성애가 생겼다.
비행전엔 두 딸 위해 항상 유서준비
비행중에는 절대 다른 상념에 빠져서는 안 된다. 비행수칙 제1이
“지상에서 있었던 일은 바로 1분 전에 있었던 일이라도 잊어 버려
야 한다”는 것이다. 자칫 딴 생각을 하면 그것이 생명과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하늘에서 배운 게 있다면‘망각의 미
덕’이다. 모든 걸 훌훌 잊어 버리고, 무엇에도 연연해 하지않는 것,
욕심으로부터 초연해 질 수 있는 것, 그것을 배웠다.
66년에 그 일이 있은 후로는 오히려 아이들을 생각하며 철저한 안
전비행을 했고,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 모든 상념을 떨쳐 버릴 수 있
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언제, 어느 나라, 어느 상공에서 불의의 객
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서 비행에 오를 때마다 유서를 써 놓곤
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없더라도 잘 지낼 수 있도록
애들과 남편에게 남기는 편지를 써 놓고 항상 마음의 준비를 했다.
나는 비행을 할 때 ‘아이들이 초등학교때까지만이라도 내가 무사해
야 한다, 그 다음에는 중학교까지만이라도, 그리고는 결혼할 때까지
는 내가 살아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매번 비행에 임했다.
지금은 두 딸들이 모두 잘 자라주었다. 모두 영어를 전공해 큰 딸
보영이(31)는 TV방송 모닝스페셜에도 출연하면서 현재 이화여대 언
어교육원에서 영어강사일을 하고 있고, 둘째 딸 지영이(28)는 교육방
송에서 일하고 있다. 큰딸애는 여섯살 된 딸애가 하나가 있고, 작은
딸은 16개월 된 아들 하나를 낳아 모두 어엿한 엄마가 되었다. 이제
는 도리어 내가 누구의 어머니라고 나올 정도로 딸들이 더 바쁘고
유명해졌다.
가끔 남들이 아들이 없어서 섭섭하지 않느냐고 물을 때가 있는데,
솔직하게 말하지만 두 딸 모두 잘 커줘서 아들이 전혀 부럽지 않다.
사실 사위가 더 다정하게 해주고, 딸들도 잘 하기 때문에 아들이 별
개 있을까 싶을 정도다. 그리고 내 주변에는 아들타령하는 사람이
없었다. 집안에서도 내가 서울 토박이 장손 며느리였지만 딸만 낳
았다고 남편도 그렇고 나도 전혀 문제가 될 게 없었다. 딸 둘 낳은
후 더 낳을까도 생각해 봤지만 남편이 말렸다. 21세기에는 아들, 딸
이 문제되지 않고 여성이 더 전문분야에 진출하기 좋은 시대가 올
거라고 했다. 시댁도 남편이 집안에서 가정 정치를 잘 한 탓에, 아마
딸 둘 낳았어도 폼 재고 사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라고 주위에서
말들 할 정도로 큰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내가 여성운동을 하니까
딸만 있는 게 이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 있다. 내 주변에도 이
상하게 딸만 있는 집이 더 많은 것 같다.
'정리·이김 정희 기자'
첫댓글 자랑스런 이름이군 오랜만에 보는 여성 비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