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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가 왜 조선인가 (프롤로그 2 중원을 찾아서 : 실크로드의 악마들) 其二
21세기 세계의 강대국들은 중앙아시아를 주목하고 있다. 러시아, 미국, 중국, 유럽이 카스피해와 아랄해의 천연가스와 석유 채굴권을 놓고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그것이 비단 풍부한 천연자원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유라시아 대륙의 심장에 있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의 군사, 물류, 지리적 중요성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으로 봄이 더 합리적인 해석이 될 것이다.
유라시아 대륙을 육로로 횡단하기 위해서는 이 지역을 통과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또한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튼튼한 거점구축이 필요한데, 중앙아시아지역은 유라시아대륙 전 방위를 소통시키는 사통발달의 군사, 물류의 중심지로 대대로 주목 받아왔다. 단지 력사의 중심지대에서 냉대 받고 철저하게 소외 받았을 뿐이다. 사학자들은 이러한 중요성을 배제한 채 정사에서 말하고 있는 현 중공 중심에서 실크로드와 중원의 력사를 설명하기 때문에 조선사를 반도사, 혹은 더욱더 확장시키더라도 중국동해안 중심에서 벋어나지 못한다. 중국사도 마친가지이다.
중앙아시아 혹은 동서문명교류사 전문가들이 몽골제국의 가장 큰 패망원인을 중앙아시아 지역에 북경이나 카라코룸 같은 제 2의 거점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중앙아시아의 전략적, 경제적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새삼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앞서 필자는 브레진스키의 이론을 들어 중앙아시아가 대륙의 심장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인체의 중심에는 심장이라는 기관이 있는데, 심장의 역할은 혈액을 온몸으로 공급하는 것이다. 의학에서 이 심장이 멈추면 의사는 즉시 사망진단을 내린다. 인간의 신체를 유라시아 대륙으로 비유한다면, 그 중앙에 있는 중앙아시아는 인간의 심장에 대응한다. 즉 중앙아시아는 바로 유라시아 대륙의 거점이자 첨단 소프트웨어를 가진 슈퍼컴퓨터의 기능을 적용시키기에 가장 적합한 지리적 환경이자, 군사, 물류의 요충지인 셈이다. 또한 이 슈퍼컴퓨터는 조선사에서의 중앙조정과 같다고 보면 될 것이다. 또한 이 심장이 멈추면, 대륙의 소통 또한 마비되고 만다.
따라서 실크로드 아니,Imperial Hiwayh는 단순한 교역로가 아닌, 제후들이 중앙조정의 선진기술을 전수 받고 그 대가로 조세를 부여하는 것으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 일찍이 사마르칸드를 다녀간 여행가 이븐 할둔은 사마르칸드를 방문하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중앙아의 패자 티무르는 이 도시를 세계를 소통시키는 전략적 거점으로 만들었다. 또한 그리스의 력사 학자 헤로도투스는 아프가니스탄을 중앙아시아의 빵공장이라고 표현할 만큼 이곳은 매우 부유한 곳이었다.
지리적, 경제적으로 또한 군사적으로 세계사의 중심이었던 중앙아시아에 대해 우리는 너무 나도 무지하다. 국내에는 중앙아시아 전문가는 손에 꼽을 정도이고, 중앙아시아 사전을 편찬하려면, 차라리 중공에서 번역되어 있는 사전을 번역하라고 할 정도이다.
서세동점의 시기에 중앙아시아에는 전쟁이 빈번하였고, 영국과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이 파미르와 페샤와르 지방을 중심으로 유물 쟁탈전과, 정보전을 펼쳤다. 제국주의 열강중의 양대 산맥이라는 러시아, 영국은 중앙아시아의 독립 영주들과의 전쟁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하는데, 영국은 아프칸과 3차 전쟁 끝에 물러났으며, 러시아는 서 투르키스탄을 장악하는 데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왜 그랬을까? 당시에 조선중앙정부가 중앙아시아 악전고투하면서 사방에서 밀려드는 왜적을 막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나폴레옹이 유럽을 장악한 이유는 포병전을 적극 활용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 현대전의 전술이 획기적으로 변화하였고 전투에 있어서 포병전술이 더욱이 강조되었다. 나폴레옹의 포병전술 또한 아미르 티무르의 포병전술을 발전시켰다는 견해를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막강한 화력과 코사크기병대를 갖춘 러시아와 해가지지 않는 대영제국, 그리고 동쪽의 정체불명의 국가 청을 상대할 만한 정부가 중앙아시아에 당시 존재하였는가? 현재의 해설은 작은 독립영주들이나 부족들이 존재했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그들은 이들을 상대하기에 역부족이다. 일찍이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기 이전부터 강력한 화포가 있었으며, 최정예 조총부대로 러시아를 여러 번 물리친 바 있다.
그렇다면 러시아와 영국이라는 신흥제국을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동아시아에서 상대한 적수는 조선의 중앙정부가 아니었을까? 정복하려는 자와 대륙의 심장을 지키려는 수호자와의 수십년간 전쟁은 옥토의 중앙아시아를 황폐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아프간 - 영국 전쟁
※1838년말 1차 아프칸, 영국 전쟁이 발발,
①영국군 사슈자를 허수아비 왕으로 옹립 헤라트를 거쳐 카불로 진격, 전 국왕 도스트 무함마드는 탈출하여 힌두쿠시 산맥을 넘고 다시 아무다리아이북 부하라 영주에게 의탁
②1841년.1월,12일일 주민폭동, 도스트 무함마드 카불공략, 실패 후 영국군에로 투항.
아들 악바르 칸 카불공략,
③영국과 휴전회담중 악바르 선물받은 권총으로 영국 총사령관 멕노텐 사살,
④1842년, 1월6일 카불 동 쪽 160km 떨어진 잘라라바드 길목 흰두쿠시 계곡에서 아프칸군의 매목습격으로 영국군 전멸.
※1878~81년,2차 전쟁: 영국전쟁에서 대패 , 영국 외교권만 장악하고 철수
※1919년 3차 전쟁: 아프간 독립
제정러시아 중앙아시아 카프카스진출
<아제르바이잔: 1813년 고레스탄조약, 1828년 차이조약에 의해 아제르바이잔의 북방 지역이 러시아에 의해 점령.>
중앙아시아 병합 (1865~1876): 코칸드, 부하라, 히바등의 소국정복, 1881년에는 카스피해를 넘어 영역을 확장
①키르기즈스탄: 1860년대에 러시아에 병합, 우즈벡키스탄은 1868년 보호령
②카자흐스탄: 18세기 후반 제정러시아가 진출, 1860년대에 전 카자흐스탄 지역이 러시아경제에 편입, 시베리아철도 부설(1891~1904년)
1916년 대러시아 반란, 1917년 반소 폭동 1918년 소련은 이 지역을 무력으로 완전히 장악
③투르크메니스탄: 1860년 카스피해로부터 침입한 제정 러시아군에게 항복한 이래 1917,10월 혁명 이전까지 계속 지배받음
청의 신강 지배
①자항기르 반란 (1826-35)
②신강 무슬림 혁명 야꿉벡 정권(1864-77)
③혼란기 (1840-1911)
이상이 당시 강대국이였던 영, 러, 청이 중앙아시아에서 벌인 전쟁들이다.
각기 다른지역에서 벌어진 이 사건들의 공통점은 18세기 초에 시작되어 1860년을 정점으로 1940년대까지 혼란의 연속이라는 점이다. 학자들은 그것을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이라 부른다. 그레이트 게임에서 중앙아시아의 주인들은 마치 투명인간처럼 무시되거나, 골칫덩이 정도로 취급되고 있다. 조선정부의 흔적을 지우고 다른 인물들을 삽입한 것으로 보인다.
1860년대를 기점으로 아시아에 대 혼란기가 찾아오는데(1863년에 철종이 승하한다.)
-현 중공의 운남을 중심으로 남경을 정복한 홍수전의 태평천국(太平天国 / 太平天國, 1851년~1864년)
-1860년 최제우 동학창설, 1863년 사형당함
-동학 농민 운동(東學農民運動): 1893년~1895
특히 1882년에 정점에 치닫는다.
1882년: 청(淸) 덕종 광서제(德宗 光緖帝) 8년 조선(朝鮮) 고종(高宗) 19년
5월 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
6월 - 영국 군함 플라잉피시호가 인천 제물포항에 입항.
7월 19일 - 임오군란 (음력 6월 5일).
8월 30일 - 조선이 일본과 임오군란의 뒷처리를 위한 제물포 조약체결.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 삼국 동맹.
섬서성과 감숙성의 회족반란을 진압하고 신강으로 진군해 들어온 좌종당 휘하의 청군과의 전투에서 야꿉 벡 패배 급사. 신강성 청으로 편입.
신강하미(哈密:합밀)회족 봉기
1882년, 조선은 사방의 적에게 철저히 유린당한다. 임오군란으로 군대가 해산되고 일본과 미국과 굴욕적인 불평등 조약을 맺게 된다. 바로 러,영,청과의 장기간 전쟁으로 국가재정은 파산상태에 이르렀고, 중앙정부의 군대가 해산지경까지 간 것이다.
군대가 없는 나라는 언제든지 식민지국이 될 준비가 되어있다는 뜻이다.
임오군란 2년후
1884 갑신정변이 김옥균 주도로
1885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하여 조선의 멸망이 멀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1894 갑오농민전쟁, 청일전쟁
1895 을미사변, 단발령, 을미의병
1901 의화단의 난, 제주민란
1904 일본 여순 함락 러일전쟁, 한일의정서 체결, 경부선 완공, 일러전쟁
1905 을사조약 체결, 을사의병
포츠머스조약 체결로 러시아 만주에서 철수, 히비야 방화사건, 가쓰라-태프트 밀약
1909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사살,
1911 신해혁명, 105인 사건
1912 청나라 멸망, 중화민국 건국, 임병찬이 대한독립의군부 조직
1914 1차 세계대전 발발
1916 원세개의 죽음으로 군벌 난립
1919 중국 오사운동 2·8 독립선언, 고종 붕어, 삼일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의열단 조직
일본: 베르사이유 조약에 전승국으로 참여, 일본노동당 창립
1925 손문이 죽고 장개석 계승, 조선공산당 결성, 일소기본조약 체결
1926 국민당북벌 시작 ,순종 붕어, 6·10 만세운동
1927 상하이 참변으로 중국국공내전 시작, 난창 봉기 신간회 결성
1928 북경 탈환과 만주군벌 장학량 항복으로 북벌 종료 ,원산 총파업, 한글날 제정
1929 광주학생운동, 국민부 조직, 경제대공황 시작
실크로드의 악마들은 위에 열거한 연표의 시기에 시작되어 종지부를 찍는다. 본서의 내용을 보면, 조선정부가 파미르 이동으로 밀려났음을 암시하며, 신강, 감숙의 치안은 마비상태이고 외국인 도굴꾼들과 스파이들로 넘쳐나게 된다.
타클라마칸의 원주민들 사이에는 사막아래에 묻힌 고대도시들에 대한 오랜 전설이 대대로 전해진다고 한다. 사막에 금은보화가 널려있다는 것이며, 사막에 들어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그것을 얻을 수 있다 한다.
실크로드의 악마들의 저자 피터 홉커스는 그 내용에 대해 이렇게 전하고 있다.
1875년 롭 노르 근처의 소택지에서 양을 치던 한 키르기즈 부족민은 멀리에서 자기 눈으로 직접 보았다는 사라져버린 도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생생한 진술을 하였다.
도시를 가리고 있는 갈대숲 위로 성벽이 솟아 있는 게 보였다. 내가 비록 그 도시 안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성벽은 근처에 있는 사구들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다른 모양이었다. 나는 혹시 수렁에 빠지거나 갈대숲에 사는 독 있는 곤충이나 뱀에 물릴까 두려워 폐허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없었다.……더구나 그곳에 쌓여 있는 금과 보화를 훔치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지 못해 폐허로 들어갔던 사람들이 거의 모두 죽었다는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곳사람들은 모두 내가 말하는 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이 폐허들 가운데 있는 사원에 가서 그곳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러 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한 칼막크 사람들도 수백 명에 이른다. ……불상 주위에 널려진 나무판 위에는 보석과 크고 번쩍이는 진주, 얌부 라고 불리는 금괴나 은괴 등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것을 거기서 가지고 나올 수는 없다. 이런 사실은 롭 주민들 사이에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피터홉커스 지음 김영종 역주 실크로드의 악마들 54~55P》
①도시를 가리고 있는 갈대숲 위로 성벽이 솟아 있는게 보였다. 내가 비록 그 도시 안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성벽은 근처에 있는 사구들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다른 모양이었다.
아주 오래 전 부터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전해 온다는 전설이라면, 도시가 폐허가 된 후 적어도 수세기의 시간이 흘렀을 텐데, 하루에도 모래 폭풍이 끝이지 않는다는 타클라마칸과 롭 사막에 성벽이 돌출되어 있을까? 모래바람에 의해 사구는 끝임 없이 쌓이고 주변을 순식간에 불모지로 만드는 사막의 한 복판에서 사막에 들어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금은보화를 얻을 수 있다는데, 이 키르기즈 유목민은 무언가 죄책감에 두려워하고 있는 듯하다.
②이 폐허들 가운데 있는 사원에 가서 그곳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러 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한 칼막크 사람들도 수백 명에 이른다. ……불상 주위에 널려진 나무판 위에는 보석과 크고 번쩍이는 진주, 얌부 라고 불리는 금괴나 은괴 등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 폐허들의 사원은 불교사원이다. 불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렇다면 그 곳의 신은 부처이고 불공을 드리러 간 것이 된다. 칼막크 키르기즈 유목민들은 즉 불교도라는 이야기가 된다. 이곳은 무슬림 지역으로 알려져 있지 않은가? 또한 ①의 본문에서 유목민은 사원에 가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불상 주위에 널려진 나무판 위에는 보석과 크고 번쩍이는 진주, 얌부 라고 불리는 금괴나 은괴 등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라고 자신이 직접 본 것 처럼 이야기 하고 있다. 저 사원에서 살아나오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외부의 침입자에 의해 살해 당한 불교도들은 아닐까?
르콕이 카라호자의 마니교 사원을 도굴했을 때이다. 저자는 르콕의 말을 이렇게 전한다.
그 서고의 입구에 피로 얼룩진 법의를 걸친 채 살해된 불교승의 바싹 마른 시체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로 보아 이곳에는 불교와 마니교가 공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르콕이 카라호자에서 본 피살자의 시체는 단 그 승려만이 아니었다. “ 남쪽에 있는 돔 형태의 건물 한 채에서……우리가 발견한 것은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 고 르콕은 썼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최소한 1백구는 되는 불교승의 시체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많은 시체가 살해당할 당시의 끔찍한 부상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어떤 두개골은 일격에 정수리에서 위턱까지 쪼개져 있었다. 르콕은 1천년전의 이 대학살을 중국이 자행한 종교 탄압으로 보았다. <위의 책 176~177p>
사람이 죽게 될 경우 의복에 그 혈액이 묻게 될 경우에는 산화가 급속히 진행되어 1천년이 지났을 경우에는 거의 알아볼 수 없을 것인데, 르콕은 피로 얼룩진 법의라고 말한다. 이것은 죽은지 얼마 되지 않은 시체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르콕은 공포스러웠다고 말하는 것이다. 정수리에서 위턱까지 쪼개져 있는 시체들. 르콕은 1904년 11월 18일에 바르투스와 함께 방문했다. 카라호자는 투르판 동쪽, 현재의 고창고성을 말한다. 이 근처에 하미가 있다.
1864년 6월 4일 밤 오늘날의 중화인민공화국 신강 위구르 자치구의 쿠차라는 도시에서 퉁간, 즉 이슬람을 믿는 한인(漢人)들이 일으킨 반청(反淸) 봉기를 계기로 신강 전 지역을 휩쓴 무슬림들의 거대한 봉기, 뒤이어 벌어진 내전이 일어난다. 물론 감숙과 영하 섬서지역까지 확산된 거대 민란이다. 『근대 이슬람 혁명과 좌절』은 김호동 교수의 저서이자 박사학위 논문이며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1864년부터 1877년 까지 야쿱 벡 정권이 청군을 몰아내고 위구르 정권을 세운다. 이 시기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수많은 민간인과 승려들이 학살당했을 것이라는 의구심을 필자는 지울 수 없다. 1877년 좌종당의 군대에게 밀려 야쿱 벡 정권이 무너지고 그의 군대에 의해 타림분지는 인공청소를 당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1875년의 키르기즈인들에 관한 전설도 이 사건과 무관해 보이지는 않는 듯 하다.
이 밖에도 의문사항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전회에 언급했던 문시를 스파이로 훈련시켜 야르칸드에 보낸 몽고메리는 임무에 필요한 장비를 가장 작은 것들을 고르면서 이렇게 말한다.
“길가에 떼지어 출몰하는 키르기즈 유목민”에게 발각될 경우 그것은 곳 죽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문시도 는 물론 그를 보낸 사람들도 너무나 잘알고 있었다. <위의 책59p>
도대체 이 키르기즈 유목민의 정체는 무엇일까? 피터 홉커스는 키르기즈 유목민들이 출몰한다는 그 길이 인도 라다크에서 카라코람을 넘어 야르칸드에 이르는 해골이 여기저기 흩어진 도로라고 한다. 또한 당시의 문시를 죽인 것으로 의심받는 중국인 요원들의 정체는무엇일까?
펀잡의 고위 문관이었던 중앙아시아 권위자 더글라스 포사이스 경이라는 자가 타클라마칸의 사라진 도시들에 관한 논문을 런던 왕립지리학회에 발표했는데 그 제목은 『고비 대사막의 움직이는 사구 속에 파묻힌 도시들에 대하여』( on the Buried city the shifting sands of the Great Desert of Goby)이다.
포사이스는 1870년에 처음 야르칸드에 방문, 1873년에 2차 방문을, 이미7년 전에 문시 (moonshee) 즉 무함마드 하미드의 사인을 조사했던 측량사 월림엄 존슨이 호탄의 사막을 방문했다. 그 중앙아시아 연구에 조그만 이정표를 세운 포사이스가 타클라마칸과 고비를 몰라서 햇갈렸다는 말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1860년을 기점으로 타림분지를 대대적으로 측량하면서 의도적으로 붙인 이름이 타클라마칸: (한 번들어 가면 돌아오지 못한다는 공포의 사막)이 된 것일까?
이러한 논문의 성과가 보고되자 러시아의 니콜라이 프르제발스키 대령이 1876~1877년 롭노르 사막을 탐사, 좌종당이 신강을 점령하고 난 이후인 1879년 러시아 식물학자 알베르트 레겔은 카라호자(고창고성)을 발견한다.
1889년 인도 육군 정보부 장교 바우어 대위(후에 육군 소장 해밀턴 경) 쿠차 천불동 발견,
발견계기는 스코틀랜드 여행자 앤드루 댈 글라이시의 피살 사건을 맡으면서 신강을 샅샅히 수색하였는데 용의자는 야르칸드 출신의 다우드 무함마드라는 아프가니스탄인 이었다. 피살자는 총상을 입고 길거리에 난도질 당해 있었다.
이밖에서 동투르키스탄 러시아 영사 니콜라이 페트로브스키, 1890년에는 프랑스 동양학 학자 뢰유 드렝은 티벳트과 신강에서 고문서를 탈취하다 현지인에게 사살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중앙아 연구의 개척차로 평가 되고 있다.
그리고 유명한 약탈자들 스벤헤딘, 오렐 스타인, 폰 르콕, 폴 펠리오, 랭던워너 오타니 탐험대등등 의 중앙아시아 유물약탈의 전성기 시대가 열린다.
그들의 프로필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스벤 헤딘(Sven Hedin, 1865년 2월 19일 ~ 1952년 11월 26일)스웨덴 출생, 유대인
실크로드 용어의 창시자 폰 리힌트 호벤 교수의 수제자
영국에서 기사작위와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명예박사 학위 취득. 왕립지리학회에서 금훈장 두 개를 수여받음. 러시아 황제, 독일 황제 스웨덴왕, 한덴부르크 대통령, 육군원수 키치너 인도 총독 커즌경 등이 모두 그의 개인적인 친구.
1899년 9월 2차 누란 탐험(스웨덴 국왕 오스카르와 임마누엘 노벨의 후원)
1908년에 이토 히로부미의 초청으로 일본과 서울을 방문, 순종을 만남
오렐 스타인 (마크 아우렐 스타인 경(Marc Aurel Stein, 1862년 11월 26일 ~ 1943년 10월 26일) 헝가리 출신 유대인
영국에서 기사작위와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명예박사 학위 취득. 왕립지리학회에서 금훈장.
돈황 막고굴 장경동 발견, 돈황학 정립, 옥문관 최초 발견 만리장성의 최서단을 직접 확인, 길이 연장공로. 영국으로 귀화 빅토리아 유고시 공식적 영국시민이 아니었음에도.
“ 우리의 여왕폐하 …… 영국이 해외로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한 이래 가장 위대하신 통치자.”그리고 덧붙이기를 “ 내가 데리고 있는 인도인 두 명에게 여왕의 서거 소식을 알려주자 그들도 나와 똑같이 깊은 슬픔에 빠졌다” <실크로드의 악마들 143~144p>
1943년 82세의 나이로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에서 사망 아프가니스탄을 탐험하기 위해서 42년 동안 이 나라 정부에 허가를 요청했던 그는, 허가증이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알베르트 폰 르콕 (1860,9.6~ 1930.4) 독일 베를린 출생
런던, 미국에서 경영학 수업을 받고, 의학공부 병행.
조부가 창설한 포도주회사 A. 르콕을 13년 경영하고 회사를 팔고 베를린의 동양학 학원에서 아랍어, 투르크어, 페르시아어 그리고 피젤박사 밑에서 산스크리트어를 수학.
베를린 박물관 인도 부서 연구원.
독일 황제 지원으로 투르판 베제클릭, 카라호자 발굴, 천불동벽화 절개 독일로 반출.
키질 천불동 발굴, 베를린 박물관 관장 역임.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년 5월 28일 ~ 1945년 10월 26일)
프랑스인 중국학자로 중앙아시아를 탐험하고, 수많은 유적들을 수집하여 프랑스로 반출.
레종 도뇌르 훈장, 22세의 나이에 다시 하노이로 학회의 중국학 교수, 프랑스 대학의 교수로 역임, 돈황 막고굴 장경동 고문서 반출, 1하루에 1000여개의 필사본을 검토.
1차 대전 때 프랑스군 대사로 베이징에서 복역 1945년 암으로 사망.
오타니 고즈이 백작 : 미지의 인물, 교토(京都)西本願寺 주지 ,일본 정토진종의 정신적 지주
1902년 키질 석굴 발견. 타지바나와 영국인 스파이 홉스 고용, (타지바나는 인도에서 스타인의 교지를 받고 당시 18세의 홉스를 조수로 선발.) 영국 왕립지리학회 회원, 일본천황 미카도와 의형제, 헤딘, 스타인과 교류, 조선총동부, 만주의 여순 총독에게 도굴 유물 제공.
랭던 워너(Langdon Warner) 1881-1955. 미국의 동양미술 연구가. 1903년에 허버드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에서 공부하기도 하였다. 보스턴 미술관. 클리블랜드 미술관. 필라델피아 미술관 등에서 일하다. 1923년 허버드대학 부속 민속미술관 조사원을 거쳐 동양부장이 되었다. 그 동안에 때때로 중국 등지를 방문하여 동양 고미술의 조사. 연구에 큰 성과를 올렸다.
1923년 랭던워더는 미국 포그 미술관의 후원으로 카라호토를 방문한다. 펜실베니아 박물관의 호레이스 제인과 함께…… ‘그들은 서안까지 중국군대의 호위를 받았다. 그 이후로는 엽총한자루, 자동권총 한 자루로 무장하고 여행을 한다. 중국 군대의 수레 징발이나 산적때들의 습격을 피하려면, 수레마다 성조기를 다는게 좋을 것이라는 충고를 호의적인 중국 독군(督軍) 한명이 해주었다. ......중략) 그런데 정작 두 사람 모두 자기네 국가에 별이 정확하게 몇 개 그려져 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위의책 303~304p>
그는 지역주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카라호토에서는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결국 돈황으로 이동하여 12개 벽화를 때어내는 데 성공한다. 1923년의 중공 상황은 신해혁명이후 각지에서 군벌이 각자 영지를 가지고 내전이 일어나던 시기인데, 양귀자라 불리는 미국인을 서안까지 호송한다는 것, 그리고 성조기를 달면 안전하다는 것, 또한 랭던 외 다른 탐험자들에도 타림분지와 파미르를 건너야 되는 필 수 품은 라이플 소총으로 무장하는 것이었다. 한편 랭던 워너는 1930년 독일 탐험대가 신강 단단윌릭의 발굴에 고무되어 2차 탐사를 계획한다.(1929 경제대공황 시작)
그리고 포그 미술관을 설득시켜 스타인을 초빙해 남경(南京) 당국으로 동투르키스탄 방문과 발굴을 허가 받는다. 결국 중화민국내의 여론에 의해 저지 당하기는 하지만, 이 당시 지역 정치상황을 보면 발굴권 허가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1925 손문이 죽고 장개석 계승
1928 북경 탈환과 만주군벌 장학량 항복으로 북벌 종료
1925년의 랭던워너의 1차 탐사에 서안까지 그들을 호휘해준 장본인과 1930년 스타인이 남경정부의 승인을 얻기 까지는 국민당 총수인 장개석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다. 펄벅의 『대지』의 시대적 배경이 된다. 그리고 스타인과 펠리오의 돈황 문서 반출 사건의 공범 왕도사(그는 실제로 도교를 믿었다)와 난주 정부의 유물에 대한 무관심. 이 모든 것이 자신들의 조상이 남긴 유산이 아니기에 가능한 일이다. 앞에서 열거한 주요 인물 외에도 수 많은 탐험대가 신강과, 간다라, 돈황을 방문하고 막대한 유물을 반출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당대 최고의 서구열강과 동양사의 고고학, 미술사학의 권위자들이 중화의 중심지라는 한족거주 지역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돈황과, 내몽골의 카라호토, 신강과 간다라의 유물약탈에 집중한 것이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그곳이 수천년동안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의 키르기즈 유목민과 이슬람 혁명의 당사자들, 그리고 중국 독군이 말하는 산적때는 조선의 독립군들이 아니었을까?
여기서 다시 맥킨더의 주장을 상기시켜 보자.
○동유럽을 지배하는 자는 심장부를 지배한다.
○심장부를 지배하는 자는 대륙을 지배한다.
○대륙을 지배하는 자는 세계를 지배한다.
결국 대영제국은 대륙의 심장부를 장악함으로서 세계를 지배하려 했던 것이다. 그 대륙의 심장부는 중앙아시아이며, 유라시아의 물류허브지대였다. 물류를 장악하는 자는 경제를 장악하고 군사적, 지리적 요충지를 차지할 수 있으며. 대륙의 심장부에 최첨단 기술과, 소프트웨어를 심어놓고 각 지역에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조선의 중앙조정, 중국이 담당했던 역참,조공제도, 실크로드의 진정한 역할이었고. 또한 그 지역은 오아시스 크레센트라 불리는 문명의 초승달 지역과 파미르 이동의 신강지역으로 봄이 합리적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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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통상 말하는 왜는 불랑기로 서구로불리는 세력일 것입니다. 동유럽과 지리적으로 가까워야 겠죠, 이들은 홍해를 중심으로 지중해와 페르시아만 일대에서 활동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임란도 이쪽에서 남부 이란이나 인도 서부로
쳐들어 간 것으로 보입니다. 크림전쟁 또한 많이 고민해보았는데 영국과 프랑스 스페인 등등이 북쪽으로 치고 올라가는 과정에서 몽골하고 한판 승부를 보는 전쟁인 것 같습니다. 물론 여기서 몽골은 완전히 무너지고 제정러시아라는 신생국가가 생기는 겁니다. 당시에 대량 학살이 벌어졌을 것이며, 유럽을 쑥대밭이 되었을 것은 자명합니다. 순조는 이들 때문에 골치 꽤나 썩었을 겁니다.
정사의 일면을 이제야 보게 되는군요. 산업혁명이 메이지유신이고 조정이 정치 경제 문화이 중심이였다는 사실은 알려진 역사상의 모든 혁명이 위조란 뜻입니다. 본문에도 말하셨듯이 조선은 왜적의 끊임없는 침입에 재정이 군사비로 충당됨에 따라 국력이 약해진 것 입니다. 서구가 발전된 기술로 산업혁명?을 일으켜서
먹고사니즘을 해결한 것이 아니라, 대륙지배를 위한 끊임없는 전쟁으로 백성을 죽이고, 무지막지한 재정지출은 조선을 약탈하고 온갖 유물과 자원을 빼가는 것으로 충당했을 것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사람을 죽이고 화력으로 국토를 황폐화시킨 후에 재건이란 명목으로 건설업으로 빼먹고 금융자본의 투입으로 돈놀이를
합니다. 중앙아시아의 무한한 자원에 눈독을 들이는 것이지요. 산과 강, 바다를 끼고 있으며 대륙판의 접경지 바로 뒤가 자원과 자연의 저장고입니다. 한반도와 서해안의 석유, 광물자원이나 카자흐, 우즈벡, 아프간의 자원 역시 지질학적으로 비슷한 형성으로 이루어졌으며, 터키와 일본의 불안정한 지층이 지진의 원인
입니다. 과거부터 지중해와 중앙아시아는 지리적 격전지인 것이며, 그 아래 신강과 북쪽의 동유럽, 그리고 아프리카의 북부가 군사적 요충지입니다. 지리상으로도 신강쪽이 뒤에 든든한 배후를 형성합니다. 중국과 동국의 관계는 격전지와 요충지의 형세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현상태님께서 많은 자료를 잘 정리해 주셨네요. 그러나 아쉬운 점은 그러한 여러가지 사건과 현상은 근세기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미국과 소련, 유럽의 해상세력들이 식민지화하기 시작한 이후의 사건들입니다. 또 작금에 와서 이곳이 대륙과 대륙을 잇는 중요한 루트로, 석유자원과 지하자원, 국가간의 영토문제등으로 얽혀있으니,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 지방이 선진화되어 강대국이었다고 해도 그랬을까요. 리비아와 시리아의 현 상태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석유라는 지하자원 대문에, 한국은 건설 수주때문에 달려드는 것입니다. 그것에 석유라는 없었다면.......상황은 또 달라졌겠지요.
우리가 이곳에서 추구하는 것은 옛 조선의 영토문제 곧 조선사입니다. 지금 정리중입니다만 중국지방은 그곳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보고 있는 동방견문록의 앞쪽 중앙아시아 지방의 견문 기록을 보세요. 지형지리, 기후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를......산과 하천과 호수와 특이지형은 수백년, 수천년, 수만년동안 변함없는 것이 많습니다. 또한 중국지방이 유목민들이 사는 곳이었을까요. 중요한 것은 우선적으로 그곳이 중국지방이 될 수 있는, 여건이 가능한 곳인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후 논리적인 해설이 필요한 것이지요. 기회가 닿는다면 그곳지방을 직접 답사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중국지방이 될 수 있는가를....
조선 황실은 철종으로 끝난것 같습니다. 즉 황제의 조공제도가. 그리고 서구열강과 싸운 이들은 독립군 내지는 의병이라고 추측합니다.
1860년대에 중앙아시아 지역에 대규모 핵폭격이 있었다는데 과연 믿을만 한가요? 서구 열강의 과학기술 발달이 상당히 일찍부터 발달했는데 오히려 현대오면서 은폐하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나찌의 불가사의한 기술-히틀러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말도 있어요)
임진왜란은 서구열강이 인도양 해안가에 사는 조선인들을 꾀서 조정을 공격하라고 한것 같습니다.
그건 이미 영국이 무굴(명조선?)을 친 얘기로...정사에 다 나온 겁니다.
그 해석을 우리가 바보같이 해서 우리 스스로 속는 것이져...
선조가 그리 학수고대 했던 천군(명나라,천축국)들은...대륙조선이 지중해에 있었다면...
잉글랜드나 프러시아 군대들이 천축(명나라)군대란 말이 됄까요...?
명은 조선 조정의 조대명이라 하시는 분들 많으시지만...제 생각엔 분명 뿌리는 같았으나...
이방원때 분리돼고...수양때 다 떨어져 나간...이미 남으로 100여년 지난 임진란기 명조선과 동국조선(고려)였다 접 봅니다.
전 이렇게 봅니다.
다 들어서들 질리셨겠지만...중원의 청나라가 곧 청구조선입니다.
영불 군대가 이화원을 털 때가 청니란 이미 천자국 수명이 끝난 때이며...그게 철종대...
홍수전의 태평천국은 초기 동학란... 후기 동학란을...서남아서 초기 동학인 태평천국 탄압한 애들이...
아이러니하게도 그 탈을 뒤짚어 쓴게...처지회 대도회 등...
이들의 섬 원숭이들의 계반위반에 항거해 북경에서 폭동을 일으킨 남명계 대한제국인들이 다수며...
태평천국 란이 진압됁 전후...북경이 1860년 박살나기 전후 조선왕계 아주 먼 족보를 차고 들어온 대원군계들...
그들이 중원 조선역사왜곡의 주접들이라 보겠습니다.
나와바리 확보를 위한.
그리고 지중해 조선선생님들 자꾸 몽골의 시원이 서역이라 하시는데여...
그건 동몽골이 처 들어가 확보한 4한국입니다.
동몰골(북원)은 이미 동국고려와 그를 이은 조선에 다 도태돼어 현 몽골은 조선 함길도에 병합이 돼니...
당연 조선조부터 알타이 한참 서쪽에나 몽골잔당들이 있는 격이요...
당연 그들은 서양 튀기들이니...동역의 조선인들이 보긴 서양인들 닮았다 한 것이지...
동에서 서쪽 타타르&거란을 치고 들어가고(차가태한국)...러시아 치고 들어가고(킾차크한국)...
아랍치고 들어가고(일한국,훌레그한국),알타이와 티벳 제압한 거고...(오구태한국=우태백제자리=왜의 상전들 자리)...
이런 정황은 다 무시하고...
그저 그 당대의 지리적 인종배치만이 첨부터도 마지막과 똑같았다 단정함은...
역으로 대입하면...현재 우리도 한반도에만 격리돼어 살았으니...과거에도 다 그랬을 수 밖엔 없으니....
원래 우린 여기 살고 있었으니 우리 조상들도 다 여기 계셨을 테고..대륙엔 없으셨을 테니...
대륙조선사 연구치 말자~ 이런 논리와 다를봐 없게됀다 봅니다.
제 생각엔여...대륙별로 한 칸씩만 밀린 겁니다.
양이들이 성처대니...오손(오스만)과 돌궐(투르키)과 페르샤계가 동유럽& 북아프리카에서 중앙아로 밀리고...
중앙아&러시아의 진짜 청나라(타타르&호로족)들은...티벳과 신장성 현 몽골로 밀리고...심지언 동남아로도...
인도 북부와 서남아에 있던 무굴잔당 (남명)인들은...중원(청구조선)의 태평청국란 을 기회로...
타타르인들과 합세해 중언에 등장하며...양이들의 총포를 들고 결국 그들의 주구가 됍니다.
중원 청구조선은...당연 북경ㄴ과 만주 산동등지를 경유해...수 많은 수가 한바도로 계속 밀린 현상이며...
허다 못해...현 몽골땅에 있던 함길도인들도...만주를 거처 한반도 북쪽에 꾀나 오셨을 겁니다.
그래 대부분 친일 남명잔당들이 몰려 한바도이들 평균신장이 급격히 쪼그라든 구한말기에...
유독 함길도에서 오셨단 분들은 상대적으로 거인수준였던 겁니다.
한반도에 있던 동국고려&금나라 유민들&도이(島夷,동이)들...
고려인이란 호칭으로...사할린으로...하와이로....멕시코 농장으로...더 남으면...기차에 차곡차곡 쌓아
그 건조해 농사도 어려운 일부 분들이 역설하시는 근세조선이 있었다나...거기 중앙아로 분산...이렇게 됀 구도니...
전부 한 칸씩 남에게 밀려 피해자이면서도...결국은 한 칸씩 남의 땅들을
어쩔 수 없이 차지한 가해자들였기에...아주 수준떨어지는 역사조작질들을 한건데...
유독...왜가 거든 대한뎨국인들이 특출해...아직도 역사 회복이 힘들었다 봅니다.
전쟁 포로들이나 마찬가지였던 이 이동세력들이...뭔 재주들이 좋다고....
아님 침입자 양이들에게 뭐이 그리 특출나게 이뻤거나 미웠다고...
대한뎨국인들만 껑~~~ 충... 뛰어 넘어 지중해서 극동으로 모셔왔단 걸지...답답합니다.
한 칸씩 밀리는게...침입자들이든...망명자들이든 경비도 덜 들고 문화적 안전적 적응이 쉬운 이치인데...
그런 무리수를 구테여 돈 처 들여 누가 했겠냔 의심들도 좀 하셔야 됄 줄로 압니다.
그렇게 멀리 이동시키면...반도말과 영어차이니...제대로 섞이지도 못해 역사왜곡 당연 들통날 텐데여....
그들이 양키들과 왜놈까지
끝까지 동지이자 경쟁자 관계로 중점을 두고 아비규환의 땅싸움을 했던 곳이 어딥니까...?
근세엔 북경인건 증인들도 아직 몇분들은 살아계실텐데여...
근세조선 왕(천자)는 당대엔 북경에 있었던 것이고...그래 양이&왜노들도..거기에 젤 치중했다 봄이
상식적이면서 진실에 가까운 답이라 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