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환 시인의 마리서사(茉莉書舍) _ 맹문재
1.
마리서사는 박인환 시인이 1945년 8․15해방이 되자 평양의학전문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와 차린 서점입니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해방이 된 해를 넘기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2년 남짓 경영하다가 1948년(22세) 입춘을 전후해 문을 닫았습니다.
박인환은 아버지한테 3만 원을 얻고 이모한테 2만 원을 얻어 종로3가 2번지, 즉 낙원동 입구에 서점을 차렸습니다. 그 옆에는 이모부의 포목점이 있었습니다. 김수영 시인은 「마리서사」라는 산문에서 그 위치를 “낙원동 골목에서 동대문 쪽으로 조금 내려온 곳에― 요즘에는 공립약방이라나 하는 간판이 붙어 있는 집이다”라고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박인환이 서점을 차린 가장 큰 이유는 책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기를 바랐을 뿐이고 실제로는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읽고 시를 쓰기 위한 것이었죠. 그가 시와 영화 등에 빠져 경기중학교 2학년 때 자퇴한 사실을 보면 이와 같은 면은 충분히 유추됩니다.
양병식 시인의 회고에 따르면 마리서사에는 마치 외국 서점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책들이 비치되어 있었습니다. 가령 앙드레 브르통의 책, 폴 엘뤼아르의 시집, 마리 로랑생 시집, 콕토 시집, 일본 고오세이가꾸에서 나온 현대의 예술과 비평 총서, 하루야마 유키오가 편찬한 시와 시론, 가마쿠라 문고에서 나온 세계 문화, 일본의 유명한 시잡지인 오르페온, 판테온, 신영토, 황지 등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박인환이 소장하고 있던 장서들을 내다 놓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정도로 그는 책을 좋아했던 것이죠.
2.
박인환 시인이 마리서사를 차린 또 다른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시인을 비롯한 예술가들을 만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가 서점을 차린 때는 스무 살로 한창 새로운 사상과 문물에 관심을 가질 나이였습니다. 그리하여 박인환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 새로운 세계를 배웠고 또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김수영 시인이 “인환이가 제일 기분을 낸 때가 그때였고, 그가 죽은 뒤에도 살아 있을 동안에도 나는 그 책가게를 빼놓고는 인환이나 인환의 시를 생각할 수가 없었다”라고 증언한 것을 보면 박인환의 활발함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서사에 드나들었던 사람들은 길영주(화가), 김광균, 김기림, 김병욱, 김수영, 박영준, 박일영, 배인철, 설정식, 송기태, 송지영, 양병식, 오장환, 이봉구, 이시우, 이한직, 이흡, 임호권, 조우식, 최재덕(화가) 등이었습니다. 물론 뒷날 부인이 된 이정숙 여사도 빼놓을 수 없죠. 이정숙과는 1948년 4월에 결혼해 세형, 세화, 세곤 등 두 아들과 딸을 두었습니다. 박인환은 그들과 어울려 시와 예술을 논하고 동인을 구상하고 마침내 시인이 되었습니다.
마리서사에 드나들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가까운 이는 박일영(朴一英)이었습니다. 그는 초현실주의 화가로 마리서사의 간판부터 내부 시설에 이르기까지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정숙 여사의 증언에 의하면 박일영은 임호권 시인의 동네인 재동 근처에 살았는데, 화가로서 입신하기보다는 영화관의 광고 간판을 그리며 살아갔습니다. 박인환보다 대여섯 살 위였습니다. 김수영 시인의 아내인 김현경 여사의 증언은 더 구체적입니다. 박일영의 본명은 박준경이었고 사람들이 ‘복상’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복상이란 일본말로 박 씨라는 뜻입니다. 그는 종로3가 쪽 와룡동에서 살았는데 몸이 약하고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주로 극장의 간판을 그리거나 무대 장치를 하는 일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박인환이나 김수영은 박일영과 아주 가깝게 지냈는데, 그가 예술가로서 철저한 은자(隱者)였기 때문에 좋아했습니다. 박일영은 단순히 간판을 그리는 화가가 아니라 콕토, 자코브, 도고 세이지, 브르통, 트리스탄 차라 등 전위 시인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박인환이 모더니즘의 세계에 눈뜨는 데 도움을 주었고, 김수영에게는 예술가의 양심과 세상의 허위를 가르쳐주었습니다.
마리서사에 드나들었던 사람들 중에서 김수영 시인 역시 주목됩니다. 김수영은 자신의 헌책을 팔려고 그곳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그러는 동안 박인환을 통해 미기시 세츠코, 안자이 후유에, 기타조노 가츠에, 곤도 아즈마같이 난해한 시를 쓰는 일본의 시인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박인환의 습작시들을 의무적(?)으로 읽어보게 되었죠. 그럴 때마다 박인환이 일본말이 서툴고 조선말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면서도 자신이 모르는 식물, 동물, 기계, 정치, 경제, 수학, 철학, 천문학, 종교 분야에 사용하는 언어들을 적극적으로 시에 활용하는 것을 보고 큰 자극을 받았습니다. 김수영이 4․19혁명 이후 시어를 주체적이면서도 폭넓게 사용한 데는 이렇듯 박인환의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서점의 이름이 ‘마리서사(茉莉書舍)’인 데는 두 가지의 견해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김수영 시인이 「마리서사」라는 산문에서 밝혔듯이 일본의 모더니즘 시인인 안자이 후유에(安西冬衛, 1898~1965)의 첫 시집 군함말리(軍艦茉莉)에서 따왔다는 것입니다. 당시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의 시인들에게 관심을 받았던 안자이 후유에는 1929년 시집을 간행했는데, 군함말리(軍艦茉莉)의 발음이 ‘군칸마리’였기 때문에 빌려왔다는 것입니다.
다른 견해는 박인환 시인의 아내인 이정숙 여사가 증언한 것으로 프랑스의 화가이자 시인인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3~1956)에서 따왔다는 것입니다. 이정숙 여사는 박인환 시인이 마리 로랑생을 좋아해 그녀의 이름을 서점에 붙였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마리 로랑생은 프랑스 모더니즘 시의 선구자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9)의 연인으로 자유로운 상상력과 감정을 표현한 화가입니다. 마리 로랑생과 아폴리네르는 서로의 생애와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주고받은 사이였습니다.
이 두 가지의 견해 중에서 마리 로랑생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쪽이 보다 설득력을 갖습니다. 우선 이정숙 여사의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리서사를 배경으로 임호권 시인과 찍은 사진을 보면 서점의 출입문 유리에 불어로 쓴 광고들이 많이 붙은 것으로 보아 마리 로랑생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지요. 박인환 시인은 마리 로랑생 같은 여성을 자신의 시세계에 영감을 주는 연인이자 이상향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박인환이 ‘마리’의 한자 표기를 고민하다가 군함말리에서 빌려왔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초현실주의 화가인 박일영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의 주선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따라서 두 가지의 견해 모두 마리서사의 이름을 짓는 데 영향을 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4.
마리서사가 한국 문단사 혹은 한국 문학사에 남긴 의의는 김수영 시인의 진단에서 여실히 볼 수 있습니다. 김수영은 “마리서사를 빌려서 우리 문단에도 해방 이후에 짧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가장 자유로웠던, 좌우의 구별이 없던, 몽마르트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그 당시만 해도 글 쓰는 사람과 예술하는 사람들과 저널리스트들과 그 밖의 레이맨들이 인간성을 중심으로 결합될 수 있는 여유 있는 시절이었다. 그 당시는 문명(文名)이 있는 소설가 아무개보다는 복쌍 같은 아웃사이더들이 더 무게를 가졌던 시절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김광균 시인이 회고한 대로 마리서사는 20평이 채 되지 않는 작은 서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수입보다 지출이 많아 서점이 제대로 운영될 리 없었습니다. 마리서사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책을 사거나 파는 이들이 아니라 대부분 문학청년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마리서사는 그들이 모여 예술을 이야기하며 노는 소굴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만남이 있었기에 좌우의 이념 대립이 격화되던 시대에도 정치에 함몰되지 않는 예술이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마리서사는 해방기의 모더니즘 시 운동을 낳은 아지트였습니다. 박인환 시인은 마리서사를 폐업하고 나서 곧바로 김경희, 김경린, 김병욱, 임호권 등과 함께 신시론 제1집을 간행했습니다. 이전 시대의 모더니즘 시 운동이 김기림 등에 의해 개별적인 차원에서 추구된 것에 비해 ‘신시론’ 동인은 보다 조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시대 상황을 적극적으로 반영했습니다. 그리하여 해방기 이후 모더니즘 시 운동의 확산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의 간행은 물론 ‘후반기’ 동인의 활동이 그 산물입니다. 그 중심에는 마리서사의 주인인 박인환 시인이 있었습니다.
* 사진 설명
1947년 3월 마리서사 앞에서 임호권 시인과 함께
2015년_12월(마리서사, 아카이빙 북)교정.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