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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왕위계승의 원리.
부르봉(Bourbons) 왕조 (1589-1848).
부르봉 집안이 프랑스 왕가에 편입되기 시작한 것은 카페티엥(Capetiens) 왕조 때였다. 루이9세의 막내 아들이었던 로베르(Robert)는 부르봉 집안의 베아트리스(Beatrice de Bourbons)와 혼인하여 부르봉 집안의 사위가 되었고, 로베르의 후손들이 모계의 부르봉 집안을 이어왔다. 프랑스 왕가에서 보잘 것 없었던 부르봉 집안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은 로베르의 8대 후손인 앙투완느(Antoine)가 나바르의 잔느 달브레(Jeanne d'Albret)와 혼인하여 부르봉 집안을 다시 일으키게 된 것과 앙투완느의 아들인 앙리4세가 마그리트 드 발로아(Marguerite de Valois)와 혼인함으로서 발로아 집안의 사위가 되었고, 따라서 왕위계승권을 획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표 1. 혼인과 혈통의 상호작용을 통한 부르봉 집안의 형성>
부르봉 집안이 집안으로서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은 혼인결연(alliance de mariage)을 통해서 왕가인 발로아 집안과 하나로 통합되었기 때문이다. 즉 집안이 발생하기 시작하는 것은 부계혈통(filiation patrilineaire)에 대한 중요성이 감소되는 반면 혼인결연에 대한 중요성이 부각되는 시기이다.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는 이것을 물신으로서의 집안(maison comme une fetiche)이라고 한다. 물신으로서의 집안이 그 기반을 굳히게 되면 부계혈통이 강조되고, 그 집안은 부계가족의 연속선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것을 제도로서의 집안(maison comme une institution)이라고 한다. 결국 집안은 물신으로서의 집안과 제도로서의 집안이 번갈아 가면서 교체되는 형태를 보이게 된다.
앙리4세의 왕비인 마그리트 드 발로아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 그래서 마그리트 드 발로아는 폐위되었고, 앙리4세는 메디치(Medici) 집안의 토스칸느(Toscane) 영주의 딸 마리 드 메디치(Marie de Medici)와 재혼했다. 마리 드 메디치는 아들 루이13세(LouisⅩⅢ)와 딸 엘리자베드와 앙리에타 마리를 두었다. 앙리4세에 대해 18번의 암살기도가 있었고, 1610년 앙리4세는 끝내 암살되었다.
앙리4세의 사후 그의 아들 루이13세(1610-1643)가 8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고, 어머니 마리 드 메디치가 섭정이 되었다. 마리 드 메디치는 루이13세를 합스부르크(Habsbourg) 집안의 안느 도트리쉬(Anne d'Autriche)와 결혼시켰다. 안느 도트리쉬는 에스파니아 국왕 필리페3세(PhilippeⅢ)의 딸이다. 루이13세와 안느 도트리쉬는 루이14세(LouisⅩⅣ)와 필립(Philippe de France) 두 아들을 두었다.
<도표 2. 부르봉 집안의 왕위계승>
루이13세의 누이인 엘리자베드는 에스파니아 국왕인 합스부르크 집안의 필리페4세(PhilippeⅣ)에게 시집을 갔고, 딸 마리 테레즈(Marie-Therese)를 낳았다. 루이13세의 또 다른 누이 앙리에타 마리는 스튜어트 집안의 영국 국왕 찰스1세와 혼인하였다.
루이13세는 甥姪女인 마리 테레즈를 며느리로 맞아 들였다. 마리 테레즈는 루이14세의 고종사촌이므로 루이14세와 마리 테레즈의 혼인은 부측교차사촌혼이다. 루이14세의 동생인 필립은 큰집에서 분파하여 작은집인 부르봉 오를레앙(Bourbons Orleans) 집안을 형성하였다.
1661년 루이13세가 사망하였고, 그의 아들 루이14세(1643-1715) 가 5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어머니 안느 도트리쉬가 섭정이 되었다. 루이14세의 왕비가 된 필리페4세의 딸 마리 테레즈는 에스파니아의 왕위계승권을 포기하는 대신 50만 에퀴의 지참금을 가져오기로 했다. 그러나 에스파니아가 지참금을 지불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르봉 집안은 에스파니아의 왕위계승권을 계속 주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에스파니아 국왕 필리페4세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부르봉 집안은 에스파니아의 왕위를 계승하거나 적어도 영토의 일부를 상속받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
1665년 에스파니아의 필리페4세가 사망했다. 필리페4세가 사망하자 에스파니아의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전쟁이 발발했다. 필리페4세의 사후 그의 후처에게서 난 아들 카를로스2세(CarlosⅡ)가 에스파니아의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루이14세는 자기 아내인 마리 테레즈에게 상속의 우선권이 있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사위의 자격으로 에스파니아 영토의 일부를 유산으로 요구했고, 유산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플랑드르(Flandre) 지방을 무력으로 점령했다.
프랑스가 플랑드르 지방을 점령하자 네덜란드와 영국이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네덜란드는 오렌지(Orange) 공 윌리엄(Wiliam)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프랑스에 대항하였다. 1677년 오렌지 공 윌리엄과 영국의 왕위계승권자인 메어리(Mary)가 결혼하여 네덜란드와 영국은 혼인동맹을 맺었다. 그래서 프랑스는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1678년 프랑스는 니메그에서 조약을 맺고 마리 테레즈의 상속분으로 플랑드르 지방의 일부와 프랑쉬 콩트(Franche-Comte) 지방을 인정받는 선에서 그치게 되었다.
루이14세는 왕비 마리 테레즈에게서 아들 루이 드 프랑스(Louis de France)와 딸 프랑소아즈 마리(Francoise-Marie)를 낳았다. 프랑소아즈 마리는 작은집인 부르봉 오를레앙 집안의 필립 르 레장(Philippe le Regent)과 결혼하여 아들 루이 오를레앙을 낳았다. 왕세자인 루이 드 프랑스는 바비에르(Baviere) 집안의 마리 안느(Marie-Anne de Baviere)와 혼인하였고, 부르고뉴 공작 루이(Duc de Bourgogne Louis)와 앙주 공작 필립(Duc d'Anjou Philippe) 그리고 베리 공작 샤를르(Duc de Berry Charles), 세 아들을 두었다.
<도표 3. 부르봉 집안과 에스파니아 왕위계승 전쟁>
맏손자인 부르고뉴 공작 루이도 세 아들을 두었다. 맏아들이 브레타뉴 공작 루이(Duc de Bretagne Louis)이고, 둘째가 루이15세(LouisⅩⅤ), 그리고 막내도 루이(Louis)였다. 작은집인 부르봉 오를레앙 집안은 필립(Philippe de France)에서 필립 르 레장(Philippe le Regent), 루이 도를레앙(Louis d'Orleans), 루이 필립(Louis Philippe) 순으로 아버지에서 아들로 순차적으로 계승되었다.
1700년 에스파니아 국왕 카를로스2세가 후사도 없이 사망했다. 카를로스2세의 사후 에스파니아의 왕위를 요구할 수 있는 집안은 프랑스 왕가와 독일 왕가, 두 집이었다. 에스파니아는 루이14세의 손자들인 앙주 공작 필립(Duc d'Anjou Philippe)이나 베리 공작 샤를르(Duc de Berry Charles) 중 한명이 에스파니아의 왕위를 계승하도록 지명했다.
에스파니아의 왕위계승권을 모계혈통으로 계승하도록 한 것이다. 즉 필리페4세에서 그의 딸 마리 테레즈로, 마리 테레즈의 아들 루이 드 프랑스로, 루이 드 프랑스의 아들 앙주 공작 필립 또는 베리 공작 샤를르로 에스파니아의 왕위계승권이 이어진다. 그리고 앙주 공작 필립과 베리 공작 샤를르가 왕위를 거부하면 독일황제의 아들로 대치하도록 했다.
이에 루이14세는 둘째 손자인 앙주 공작 필립을 에스파니아 국왕 필리페5세(PhilippeⅤ)로서 마드리드로 보냈다. 그리고 앙주 공작 필립의 프랑스 왕위계승에 대한 권리는 포기되었다.
에스파니아의 왕위가 부르봉 집안으로 넘어가자 영국이 위협받게 되었다. 그래서 에스파니아 왕위계승 전쟁이 다시 발발하였다. 영국의 윌리엄3세(WilliamⅢ)로 즉위한 네덜란드의 오렌지공 윌리엄은 독일황제와 동맹협상을 시작했고, 에스파니아 왕위계승 전쟁은 1713년까지 계속되었다.
에스파니아 왕위계승 전쟁이 끝나갈 무렵 부르봉 집안에서 왕위계승권자들이 연이어 사망하는 불행이 닥쳤다. 1704년 루이14세의 맏증손자인 브레타뉴 공작 루이가 사망했고, 1711년 루이14세의 아들인 왕세자 루이 드 프랑스가 사망했다. 왕세자의 사망 후 루이14세의 맏손자인 부르고뉴 공작 루이가 왕세자가 되었으나 1년 뒤 인 1712년 그도 사망했다. 같은 해 루이14세의 막내 증손자인 루이도 사망했다. 그리고 2년 뒤인 1714년 루이14세의 막내 손자인 베리 공작 샤를르도 사망했다. 왕위계승권자 중 루이14세의 둘째 증손자인 루이15세만 살아 남았다.
루이14세의 사후 루이15세(1715-1774)가 증조할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루이15세는 5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으므로 섭정이 필요했고, 섭정의 권리는 국왕과 혈연적으로 가장 가까운 친척에게 있었다. 루이15세의 가장 가까운 친척은 숙부인 앙주 공작 필립이었다. 그러나 그는 에스파니아 국왕 필리페5세로 즉위하면서 프랑스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했기 때문에 섭정의 권리는 루이15세의 再從祖父이면서 동시에 大姑母夫되는 부르봉 오를레앙 집안의 필립 르 레장이 맡게 되었다.
루이15세는 폴란드의 폐왕의 딸 마리 레친스카(Marie Leczinska)와 혼인하여 아들 루이 르 도팽(Louis le Dauphin)을 낳았다. 그리고 루이 르 도팽은 루이16세(LouisⅩⅥ), 루이18세(LouisⅧ), 샤를르10세(CharlesⅩ), 세 아들을 두었다.
한편 합스부르크 집안의 오스트리아 국왕인 칼6세(Karl Ⅵ: 1711-1740)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딸 마리 테레즈(Marie-Therese)만 있었다. 1738년 합스부르크 집안과 부르봉 집안은 비인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의 내용은 합스부르크 집안의 마리 테레즈가 로렌(Lorraine)의 영주 프랑소아(Francois)와 혼인하고, 프랑소아의 영지인 로렌 지방은 루이15세의 장인되는 스타니슬라스 레친스키(Stanislas Leczinski)가 인계받으며, 스타니슬라스 레친스키가 사망하면 사위인 루이15세가 로렌 지방을 차지하고, 그대신 프랑스는 마리 테레즈의 오스트리아 왕위계승권을 승인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해서 부르봉 집안은 프랑스의 영토를 로렌 지방까지 확대시킬 수 있게 되었다. 1740년 오스트리아 국왕 칼6세가 사망하자 그의 딸 마리 테레즈가 왕위를 계승했다.
<도표 4. 부르봉 집안과 합스부르크 집안의 혼인결연>
루이15세는 맏손자인 루이 카페(Louis Capet)를 오스트리아 국왕 마리 테레즈의 맏딸 마리 앙트와네트(Marie antoinette)와 결혼시켰다. 이로서 부르봉 집안과 합스부르크 집안의 혼인결연이 강화되었다.
1774년 루이15세의 뒤를 이어 맏손자인 루이 카페가 루이16세(1774-1792)로서 프랑스 국왕에 즉위하였다. 루이16세와 마리 앙트와네트는 아들 루이17세(LouisⅩⅦ)와 딸 마리 테레즈(Marie-Therese)를 낳았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되었다. 1795년 국민공회는 루이16세를 단두대에서 처형하였고, 루이 16세의 아들인 루이 17세도 감옥에서 사망했다. 루이 16세의 동생들인 루이18세와 샤를르10세는 영국으로 망명했다. 1814년 나폴레옹의 엘바 섬 유배 후 부르봉 집안이 다시 프랑스 왕가로 복귀했다. 왕위계승의 우선권은 처형된 루이16세의 동생인 루이18세에게 있었고, 1814년 루이18세(1814-1824)는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루이18세는 자식이 없었으나 동생인 샤를르10세는 두 아들 루이 앙트완느(Louis-Antoine)와 샤를르 페르디낭(Charles-Ferdinand)을 두고 있었다. 루이 앙트완느는 루이16세의 딸 마리 테레즈와 혼인하여 루이16세의 사위가 되었다.
<도표 5. 부르봉 집안에서 부르봉 오를레앙 집안으로 왕위계승>
1820년 샤를르 페르디낭은 보나파르트파에 의해 암살되었고, 그 부인은 7개월 후 유복자로 앙리5세(HenriⅤ)를 낳았다. 1824년 루이18세가 사망하고 동생인 샤를르10세(1824-1830)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1830년 반동정치를 펴던 샤를르10세는 프랑스 국민들에 의해 폐위되었다. 샤를르10세는 자기 손자인 앙리5세가 왕위를 계승하고 작은집인 부르봉 오를레앙 집안의 루이 필립1세(Louis-PhilippeⅠ)가 섭정이 되면 부르봉 왕가를 보존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루이 필립1세는 섭정이 아니라 왕위를 노리고 있었다. 샤를르10세는 결국 가족들과 함께 영국으로 망명했다. 1830년 프랑스 의회는 루이 필립1세와 맏아들로 이어지는 그의 후손들이 '프랑스 국왕'이 아니라 '프랑스인들의 왕'이 된다는 것을 의결했다. 이에 따라 프랑스 국왕이 전통적으로 대관식을 거행해온 랭스(Reims) 대성당이 아니라 국회의사당(Palais Bourbon)에서 루이 필립1세(1830-1848)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프랑스의 왕위는 부르봉 집안에서 부르봉 오를레앙 집안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1842년 부르봉 오를레앙 집안의 왕위계승 1순위였던 페르디낭 필립(Ferdinand- Philippe)이 마차사고로 사망했다. 그래서 당시 4살의 어린이였던 페르디낭 필립의 아들 루이 필립(Louis-Philippe)이 왕위계승권자가 되었다. 1844년 루이 필립1세는 어려워진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손자인 루이 필립에게 양위하려 했다.
그러나 프랑스 국민들은 더 이상 왕정을 원하지 않았다. 1848년의 혁명으로 공화정이 선포되었고, 부르봉 오를레앙 집안의 루이 필립1세를 끝으로 프랑스의 왕정은 영원히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