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05년 11월 22일 화요일이다. 서울의 누님 집에서 하루 밤을 자고 아침에 신문을 펼쳐들었더니 제1면에 황우석 교수의 기사가 대문짝 만하게 기록되어 있다. 난자 채취와 관련된 생명윤리 문제로 그동안 소문으로만 떠돌던 사실들이 관련자들의 기자회견을 통해 사실로 확인되어 황교수와 이를 지원한 정부도 이미지에 있어서 큰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거의 확정적이었던 노벨상 수상 기회도 박탈 될 수 있다고 한다. 온 국민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아왔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다른 면에는 도청사건과 연루된 국정원의 전직 고위 관리가 수사를 피해 자살했다는 내용이 크게 실려 있었다.
무심코 신문을 더 읽고 있는데 황교수에 관한 기사 바로 옆에 “SR 라운드 태풍이 온다”라는 기사가 눈에 들어와 자세히 읽어 보았다. 내용인즉 우루과이라운드, 도하라운드에 이어 사회적 책임 (Social Responsibility)의 약자인 SR 라운드를 세계적 무역 기준으로 제시하려는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으며 이미 선진국들은 이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제부터는 한 국가나 회사의 투명성을 지수화하여 국제거래의 지표로 활용한다는 것이 그 골자이다. 즉 청렴도 (부패의 정도) 환경보호 노력, 노동환경의 보호, 인권보호 등과 같은 분야에 있어서 어느 정도 긍정적 공헌을 하고 있는 국가와 기업인가가 세계적 표준으로 지수화되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단순히 경제적 논리로만 한 국가나 기업을 평가하지 않고 사회적 책임을 얼마나 성실히 그리고 정직하게 수행하고 있는지 그 점수를 세계적인 기준으로 매겨서 그 실적을 공개입찰이나 수출입시에 반영하겠다는 내용이다. 이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초보적 수준에 지나지 않으며 이문제를 소흘히 다루면 또 하나의 높은 무역장벽에 가로막힐 수가 있다는 지적이었다. 앞으로는 아무리 우수하고 훌륭한 제품을 개발하고 생산하여도 사회적 책임 지수가 낮은 기업은 수출을 거부당하거나 공개입찰에서 제외될 수도 있기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사회적 책임 지수를 높여야 국가도 기업도 살아남게 되는데 어떻게 그 일을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가 있을까? 어떻게 거세게 밀려오는 SR 라운드 파도를 지혜롭게 극복해 나갈 수가 있을까? 안타깝게도 신문의 기사는 문제제기로 끝이나고 말았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야 살 수 있는데 누가 어떻게 방울을 달아야 하는지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독자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든다. 이제부터 철저히 준비해야만 한다고……..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 보면 이는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사회적 책임지수란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 사회나 기업의 도덕성, 윤리성 더 나아가 정직성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간단하지 않은 것은 단순히 좋은 제품을 만들거나 경쟁력을 제고해서 해결될 수 없는 윤리적, 도덕적 과제가 그 배경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즉 사회적 책임지수를 높이는 일은 얼마나 우리가 얼마나 정의롭고 정직한 사회나 기업을 이루어갈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뇌물도, 환경보호도, 성차별이나 어린이나 노동자들의 노동력 착취도 그 저변에는 도덕성과 정직성이 깔려있다. 결코 법이나 제도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그러므로 이는 단순히 정치나 경제나 사회적 논리로만 해결 될 수는 없는 문제이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과제 즉 얼마나 사회의 각 분야에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정직하게 투명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종교적 과제요 신앙적 영역에 속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제야말로 한국의 교회가 이 사회에 무언가 공헌할 수 있는 절호의 호기를 맞이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 땅의 왕성한 기독교 교회는 “이 때를 위함”이라고 스스로 자처하고 무엇보다도 정직한 삶의 모습을 삼천리 방방곡곡에 세워가야만 하는 중차대한 과제를 부여받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 교회가 영성을 회복하는 일이 시급하다. 오늘날 영성이란 용어만큼 자주, 많이 회자되는 내용이 또 어디에 있을까? 혹자는 영성을 크게 기도하거나 부흥회의 현대적 대체용어로 왜곡하여 받아들이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누군가 크게 기도하고 많이 기도하면 영적이라 생각한다. 또 열정적으로 큰 목소리로 확신있게 설교하면 영적이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더 나아가 가장 공감을 자아내는 모습은 큰 교회나 많은 예산 그리고 영향력 있는 프로그램이나 효과적인 제도가 곧 영성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한 단체나 개인의 영성을 측정하는 중요한 지표가운데 하나는 솔직성(honesty)이다. 이는 성경의 거듭되는 주제이기도 하다. 정직한 자가 여호와의 성산에 오르며, 여호와는 정직한 자를 보호하신다. 예수님도 “예, 아니오”라고 단순하고 솔직하게 말하라고 요청하셨다. 예수님과 그처럼 강력하게 부딪혔던 바리새인들은 결코 그들이 종교적 열심이나 성경에 관한 태만이나 무지 때문이 아니라 솔직하지 않음 때문이었다. 그래서 “회칠한 무덤들아, 독사의 자식들아……..”라는 심한 책망을 들어야만 했다. 그들 스스로는 가장 신앙이 좋고 의롭다고 즉 자칭 영성의 대가들이라고 자처하고 있었을지라도…….
이렇게 볼 때, 많이, 열심히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솔직하게 기도하는 사람이 더욱 영성적이다. 조용히 차분히 말하고 설교하더라도 자신의 말과 삶이 다르지 않고 일치하는 솔직한 설교가 더욱 영적이다고 말할 수 있다. 많이 헌금하는 사람이 영적이라기 보다 정직하게 벌고 정직하게 헌금하는 사람이 영적이다. 큰 교회 보다 솔직한 교회가 영적이다. 솔직함이 우리의 영성을 이룬다. 영성은 솔직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에 속한 모든 행위를 재평가할 수가 있어야 한다.
사실 한국 교회는 솔직성에 관한 한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할 수가 없다는데 고민이 있다. 이 사회의 정직을 말하기 전에 먼저 교회가 투명하고 솔직하게 운영되고 있다는 확신을 사회 속에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에 속한 사람들 마다 진정 하나님을 향해, 자신을 향해 더 나아가 이웃을 향해 철저히 솔직할 수 있는 사람들로 자라도록 자극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사명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없이는 우리의 신앙이 아무리 크고 화려한 건물을 지은 것 같아도 조금만 비바람이 불어오면 금방 와르르 무너지고 마는 모래 위에 지은 집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한국교회에 원하시는 가장 든든한 반석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반석이다. 이를 다른 말고 설명하면 말씀과 그 행함에 차이가 나지 않는 즉 위선이 없는 정직성이 우리의 반석이란 의미이다. 이 반석이 아니고는 그 어떤 건물도 외형이 아무리 크고 높고 화려해도 믿을 수가 없다.
우리 사회와 교회가 도덕성을 제고하지 않고는 결코 사회적 책임 지수를 높이기 어려울 것이다. 이는 이미 1990년대에 교육개발원에서 교육학자들이 새천년을 위한 바람직한 한국인상으로 제시한 창의성, 자주성, 도덕성에서 강조된 바가 있다. 이미 예견한 바대로 우리에게 요청되는 가장 바람빅한 한국인상 가운데 하나는 도덕성을 겸비한 인물이다. 그런데 도덕성은 곧 영성에서 비롯되며 영성은 솔직성에 크게 의존되어 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정직함에 있어서 먼저 거듭나야 한다. 그리고 이 사회를 정직한 사회로 이끌어가야할 막중한 책임이 있다. 그렇게 될 때 이 사회는 사회적 책임을 진지하게 감당하는 국가와 기업들로 채워질 것이며 그 때에 진정한 국제적 경쟁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이런 영적인 사명과 과제를 외면해서는 않된다. 이 땅의 그 많은 십자가들이 세워진 것은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반문하면서……….
첫댓글 적극 동의합니다. 영성이 솔직함이라는 말은 저를 향해 던지는 말씀으로 받아 들입니다. 이 국가와 사회, 나아가 세계에 던져진 이 화두를 붙잡고 기독교인들이 앞장서 나서야 할 때가 이때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솔직성과 양심을 속이지 않는 정직성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