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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절집 신원사
계룡산은 동학사, 갑사, 신원사 등 천년을 넘어서는 고찰들이 지금에 이르고 있는 명산으로도 유명하다. 그 중 신원사는 고즈넉한 절집의 정취가 유독히 느껴지는 곳이다. 동학사 갑사와는 상대적으로 외진 곳에 자리하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일상을 벗어나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고자 한다면 신원사 만한 곳도 없다. 관광객의 수가 적은 탓도 있지만 아담하게 꾸며놓은 경내의 풍경이 절집의 분위기를 고요하게 끌어가기 때문이다.
신원사에 가면 망중한을 즐겨보자. 절 마당을 사이에 두고 대웅전과 마주한 자리에서 자라고 있는 고목아래 앉으면 그러기에 알맞은 곳임을 알아챌 수 있다. 대웅전과 일직선 상 마당의 중앙에 오층석탑을 세우고 석탑 양옆으로 석등을 배치한 풍경. 바닥에 잔디를 심고 징검다리 놓듯 정성스럽게 다듬은 돌을 직선으로 놓아 동선을 삼은 풍경이 어딘지 모르게 절제미가 느껴지고 볼수록 마음이 안정됨을 느끼게 한다.
신원사의 봄. 철쭉 화사한 신원사의 봄 풍경은 화사하면서도 경박스럽지 않다.
신원사 경내가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고목나무 아래에 앉아있자면 절집의 그윽한 풍경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잔디 깔린 바닥에 징검다리 놓듯 정성스럽게 다듬은 돌을 직선으로 놓아 동선을 삼은 풍경, 절재미가 느껴진다.
매표소에서 신원사까지 0.25km. 짧은 거리를 어느 시골마을의 고샅길을 걷듯 한적한 거리를 걷게 된다. 길가 대부분의 집들은 마을사람들의 살림집이고 식당을 운영하는 집은 서너 집 정도. 된장찌개에서부터 손두부, 도토리묵, 파전, 닭요리에 이르기까지 메뉴는 단출하면서도 토속적이다.
매표소를 지나 신원사 가는 길은 어느 시골 동네를 걷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길 양편의 상가와 식당 건물들은 모두가 단층이어서 주변을 살피는 시야는 시원스럽기까지 하다. 고향집 울안 같은 가게 앞 공터의 텃밭과 건물들의 소박함은 어쩌면 신원사의 아담한 뜰과 닮지 않았을까.
갑사매표소를 지나면 어느 마을의 좁다란 고샅길을 걷는 기분이 든다.
주민들이 길가 민가를 개조하여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신원사 길은 마을 주민들이 가꾸는 텃밭과 시골집 마당도 들여다 볼 수 있어 정감 넘친다.
신원사의 사천왕문은 하늘에 닿아있는 듯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어느 절집의 사천왕문이 저다지 높이 솟아 있을까? 지형상의 문제라면 완만히 돌아가는 뒷길도 있으니 그만은 아닌 것 같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며 마음을 정하게 하라는 무언의 가르침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계단을 오르며 시야가 낮아질 즈음 바로 앞이 절 마당이려니 생각 했는데 사천왕문에서 약 50여 미터 길다란 복도 같은 진입로가 또다시 이어진다. 진입로에 한단 높이 닦여져 있는 신원사 마당에 들어서면 온 마당이 잔디로 덮혀 있어 마치 마당 넓은 집의 정원에 서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사천왕문의 막바지 계단에서 바라본 사천왕문
계단을 다 오르면 사천왕문 사이로 경내가 보인다.
사천왕문을 나서면 50m 가량 더 들어가야 절 마당에 들어선다.
정원처럼 꾸며놓은 경내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불심이 느껴진다.
신원사는 백제 의자왕 11년(651)에 보덕화상이 창건하고, 그 뒤에 여러 번의 중창을 거쳐 1876년 보련화상이 고쳐 지었고 1946년 만허화상이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신원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옮겨지은 것으로 전한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대웅전의 우측에 독성각이 좌측에는 영원전이 있다. 대웅전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80호, 5층석탑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1호로 신라말, 고려 초기의 석탑양식을 하고 있다.
갑사 대웅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5호로 앞면 5칸, 옆면 3칸 규모의 맞배집. 공포는 조선시대의 불당건축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다포계 집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당우가 영원정. 이름이 특이한 이 당우는 다른 사찰의 명부전에 해당한다.
절의 중심에 세워져 있는 신원사 오층석탑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된 고려시대 탑이다.
대웅전 오른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전각이 지어졌다.
신원사의 볼거리 중 중악단을 빼 놓을 수 없다. 대웅전에서 약 50여m 거리에 한국산악신앙의 제단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계룡산중악단'은 보물 제1293호다. 태조 3년(1394)에 왕실에서 묘향산의 상악과 지리산의 하악과 더불어 계룡산의 중악을 삼악으로 숭배하면서 세운 중악단은 매년 봄과 가을에 계룡산 신에게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지금의 중악단은 고종 16년에 중수된 것이다.
중악단의 앞면. 겉으로는 민가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외삼문과 내삼문이 설치되어 있다.
내삼문을 지나면 다포계 겹처마 팔작집의 중악단이 육중하게 자리 잡고 있다.
국가가 운영하는 제단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자료출처 : 공주시청
논산 관촉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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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드릴 곳은 논산 8경중에 하나인 관촉사입니다.
관촉사는 충남 논산시 은진면 관촉리 반야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논산역에서 버스로 10분 정도면 갈 수 있을 정도로 논산 시내에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데요
저와 같이 자가용이 없는 일명 “뚜벅이”도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그런 곳 이었습니다.
버스정류장에 내리면 채 100미터가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일주문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주말을 맞이하여 부모님과 함께 문화재탐방을 온 학생들을 볼 수 있었는데요
“알았데이~!!”하는 말투를 보니 멀리 경상도에서 온 분들이란 것을 알 수 있었죠!
일주문을 지난 후 조금 걸어가면 천왕문이 나옵니다.
천왕문은 사찰의 삼문인 일주문과 해탈문 사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곳 천왕문 앞에는 천왕문에 모셔진 금강역사보다 더욱 무서운 분,
바로 관촉사의 매표원이 지키고 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다문천왕(좌)과 지국천왕(우)
증장천왕(좌)과 광목천왕(우)
천왕문에 모셔진 사대천왕은 사찰을 지키고 악귀를 쫓아내는 등 불법을 수호하고 수행자들의
번뇌를 바로잡아 용맹정진 할 수 있도록 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있다고 합니다.
사천왕문을 통과하면 이제 본당으로 이르는 계단을 오르게됩니다.
관촉사는 마곡사의 말사로 968년 고려 광종 19년에 창건되었습니다.
관촉사에는 논산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제218호), 관촉사석등(보물 제232호) 등
두점의 보물을 비롯하여 충남유형문화제 제53호 배례석, 충남 문화재자료 제79호 석문 등
여러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계단을 모두 오르면 드디어 부처의 나라인 불국토에 이릅니다.
관촉사에 있던 목조건축물들은 전란에 의해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현재 경내에 있는 건물들은 비교적 최근에 지은 건물들이지만 조형미는
옛 것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논산 관촉사
관촉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유물은 뭐니뭐니해도 석조미륵보살입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높이 18.2m로 국내 최대의 석조입상으로 고려 970년 혜명스님이 공사를 시작하여
무려 36년 후인 1006년에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관촉사석조미륵보살은 은진미륵이라 불립니다.
이 은진미륵에 얽힌 많은 설화가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려시대 한 아낙이 이 곳 반야산에서 나물을 꺾다가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려 가보니
그 곳에서 큰 바위가 땅속에서 솟아났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이 바위로 불상을 만들라고 혜명에게 그 일을 맡겼다고 합니다.
불상이 세워지자 하늘에서는 비를 내려 불상의 몸을 씻어주었고
양미간에 박혀있는 옥호에서 발한 빛이 사방을 비추었다고 합니다.
지안이라는 중국 승려는 그 빛을 좇아와 이곳에 이르렀는데 그 광명의 빛이 촛불과 같다고 하여
이때부터 절 이름을 관촉사라 불렀다고 합니다.
불상은 원래부터 이렇게 높게 세워진 것이 아니라 눕혀져 있는 상태로 조성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커다란 석불을 세우기 위해 고민하던 혜명스님은 동자 두명이 등분된 진흙 불상을 만들며 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은진미륵을 등분하여 하단부를 세운 후 흙으로 덮어 경사로를 조성하여
상단부를 올리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고 합니다.
은진미륵 허리 부분을 보면 상단부와 하단부의 경계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답니다.
은진미륵 정면에는 커다란 석등이 놓여 있습니다. 은진미륵과 같은 시기에 조성된 이 석등은
고려시대 석등양식을 볼 수 있는 좋은 예로 석등의 받침에 새겨진 연꽃무늬 모양 등을 통해
신라 석등과의 차이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석등 앞쪽에는 배례석이라고 불리는 커다란 돌이 놓여져 있습니다.
배례석은 부처님께 예를 올리던 곳에 놓은 받침돌로서 조각되어진 연꽃문양을 통해
고려시대 석조기술의 진수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관촉사를 모두 둘러본 후 목을 축이기 위해 감로수 한잔을 마셔봅니다.
졸졸 흐르는 물이 다 채워질 때 까지 기다리는 것과 같이 느릿느릿한 것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여행이
이번 논산 여행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은진미륵이 품고 있는 자애로운 미소는 한동안 제 머릿속에서 맴돌 것 같습니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고려의 미소를 보러 관촉사로 겨울여행을 떠나보시는건 어떨까요?
완주 대둔산 안심사 답사기
전분 완주군 운주면 왕창리 대둔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안심사는
신라 선덕여왕 7년(서기638)에 지장율사에의해 창건되었다고
사적비에 기록되어 있고, 그 뒤 도선국사에 의해 중창 되었으며,
지장율사가 삼칠일을 기도하던 중 부처님이 나타나 열반성지
안심입명처로 가라는 말씀에 이곳으로와 정진하는데
그렇게 편할 수가 없어 안심사라 정하였다고 쓰여져 있다.
대둔산
세월의 무상함을 일깨워 주듯 안심사는 6.25 전쟁 이전만 해도 30여채가
넘는 전각과 13개의 암자가 있었던 웅장한 사찰이었는데 아군에 의해
불타 버린 후 지금은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고, 다만 부처님 진신사리와
치아사리를 모신 적멸보궁 부도와 안심사의 역사를 말해주는 안심사
비문을 통해 옛적의 안심사 규모와 역사의 흔적을
겨우 더듬을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안심사 안내 표지석
안심사 사적비
사진 위로부터
안심사 요사채(육화당)
안심사 석등
안심사 계단 원경
안심사 계단 근경
사진 위로부터
안심사 일주문
안심사적광전
안심사 수조
적광전 내부 불상과 안심사에 뜬 무지개
산신각 오르는 계단
사진 위로부터
산신각 문
산신각
산신각에서 본 적광전 뒷모습
사진 위로 부터
안심사 칠성각
부도전위의 바위
안심사 계단 원경
석가모니불상과 지장보살상
암심사 동종은 일제시대 전쟁무기용으로 공출되어 전국에서
수집된 고철들과 함께 대전역부근에 있다가 다행이 일제의
패망으로 화를 면하여 그동안 안심사의 본사인 보석사에
안치하고 있는 것을 60여년 만에 손상없는 완전한 형태로
제자리인 안심사로 돌아왔다.
60여년 만에 돌아온 동종
종신의 보살상과 안심사에서 제조했다는 명문
경내에 있는 안심사 계단은 17세기 중반 이후 1759년 이전에 조성된
부처의 치아사리(齒牙舍利)와 의습(衣襲)을 봉안한 불사리탑으로 중앙의
석종형 사리탑(높이 176cm)이나, 사방 네 곳의 신장상(높이110cm-133cm
무인상으로 칼을 땅에 대고 읍하고 있다), 그리고 넓은 기단을 형성한
방형단의 석조 조형물들은 그 조형 수법이 탁월하여 미술사적 연구
자료로 매우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단층 계단 면석의 연화문과
격자 문양 등의 조각수법은 장식성과 섬세함이 부각되어 매우 우수한
조형미를 표현하고 있으며, 매우 세련되고 풍부한 양감을 표현하고 있다.
이 석조 계단은 서기 1613년의 대구 용연사 석조계단과 친연성(親緣)을
지니고 있으나 조각수법은 훨씬 뛰어나며, 조선중기 불교 조각상의 이해와
불사리 석조 계단의 계보를 파악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고 한다.
신장상과 갑옷
불사리탑
불교에서 말하는 계(戒)라는 것은 일상생활에 있어서 악을 짓지 말며
선한 것을 받들어 행하며, 몸의 육체적 쾌감을 조절하고 억제하여
적은 죄라도 두려움을 아는 불교 실천도의 기초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신(身)·구(口)·의(意) 삼업으로 악을 짓지 말고 잘 수행해서
사람에게나 물질을 대함에 있어서 해를 끼치지 말며 자신이 스스로
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계는 보통 계율(戒律)이라고 하여, 5계·8계·10계·250계·348계 등을
세워서 그것을 지켜서 가지는 대상을 재가의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와 출가자인 사미(沙彌), 사미니(沙彌尼),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등으로 구별하고 있다.
*보물 제1434호 안심사계단(安心寺戒壇)
안심사계단은 17세기 중반 이후 1759년 이전에 조성된 부처의
치아사리(齒牙舍利)와 의습(衣襲)을 봉안한 불사리탑으로,
중앙의 불사리탑(높이 176㎝)이나 네 구의 신장상(높이 110㎝∼133㎝),
그리고 넓은 기단을 형성한 방단의 석조 조형물들은 그 조형 수법이
매우 뛰어나다.
안심사 계단 전경
안심사 불사리탑
적멸보궁에서 내다 본 계단
특히 단층 계단 면석의 연화문과 격자 문양 등의 조각수법은 장식성과
섬세함이 부각되어 매우 우수한 조형미를 표현하고 있으며, 신장상의
조각 또한 갑옷과 신체의 세부 표현에 있어 매우 세련되고 풍부한 양감을
표현하고 있다.
안심사계단은 인근에 위치한 안심사사적비(전라북도유형문화재제110호)에
그 조성 기록이 남아 있으며, 전라북도 유형문화제 제109호(1984지정)
“안심사계단 및 승탑군”에서 “안심사계단”만 분리되어 보물로 승격되었다.
*시도유형문화재 제109호 (완주군)승탑군(僧塔群)
계단은 부처의 사리 봉안 및 계율의식이 행해진 곳이고, 승탑군은
승려의 사리를 모신 승탑이 모여 있는 곳이다.
승탑군은 옛부터 이 절에 전해오던 부처님의 치아 한 개와 사리 열 개를
모시기 위해 지은 것으로, 세조가 직접 글을 짓고, 글씨까지 보내주어
이를 보관해 둘 ‘어서각(御書閣)’을 함께 지어두었다 하나
이 역시 불에 타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승탑군은 앞면과 옆면에 돌을 길게 깔아 직사각형 모양의 축대를
이루게 하고, 그 위로 비슷한 크기의 판돌을 한줄로 길게 쌓아 놓았다.
특히 이 판돌은 아래에 연꽃무늬를, 윗부분에는 ‘회(回)’자 무늬를
두어 장식하고 있다. 네 모퉁이에는 갑옷을 입고 무장을 한 사람모양의
석상이 안쪽을 향해 서 있다. 절내에 남아있는 사적비를 통해,
조선 영조 35년(1759)에 만든 것임을 알게 되었다.
※
및 부도전에서 안심사 계단 및 승탑군으로 명칭변경됨.
*시도유형문화재 제110호 (완주군) 안심사 사적비
사적비란 어떠한 사건에 관련된 사실이나 자취를 기록해 놓은 것으로,
이 비는 안심사 내에 자리하여 절의 사적에 관하여 적고 있다.
비는 자연암석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갖추고 있는 모습인데,
특히 지붕돌은 조선 후기에 흔히 나타나는 형식이다. 비문은 4면에
고루 새겼으며, 기록된 내용을 통해 이 절에는 대웅전과 약사전을
비롯한 30여 채의 건물과, 석대암 ·문수전 등의 12개의 암자가 딸려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비문 탁본
조선 영조 35년(1759)에 세운 비로, 비문은 그보다 100년전
즈음인 효종 9년(1658) 이 절의 주지였던 처능의 부탁으로
우의정
지내던
(출처: 다음카페 그리운 길동무)
첫댓글 어휴~~ 자료들이 어디로 날아가버렸지?
애써 올려 놓은 자료들이 사라져 버렸네요~~ㅎㅎ
관촉사, 안심사 다시 올려 놓겠습니다~~()
산중인님께서 도와주셔서 사라진 자료가 다시 찾아 왔습니다~~ㅎㅎ
참고 하시고 유익한 순례 되시길 발원합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
많은 공부가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