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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이와 같이 하라
누가복음 10:25-37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우리 교회가 예배드릴 공간을 구하고 있다. 마침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물을 찾았는데, 시간을 두고 기다린다. 먼저 주인의 마음을 두드리고 있다. 그곳에 산책을 나가보았다. 주변 아파트 단지도 둘러보고, 대중교통편도 살펴보고, 인근 주차 공간도 찾아보았다.
우리는 심야기도회에서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수 14:6-15)라고 찬양한다. 그만큼 간절함이 있다.
이 말씀의 배경은 가나안을 차지한 후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요청하는 내용이다. 두 사람은 모세가 광야에서 선발한 12명의 가나안 정탐꾼이었다. 부정적인 보고를 한 열 명의 정탐꾼과 달리 두 사람은 용기 있고, 희망 있는 응답을 하였기에 마지막까지 가나안에 참여할 수 있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과 행동에 있어서 모범교사였다.
얼마 전 분당 백현동에 있는 어느 교회가 성전을 신축하고 은행 빚에 몰려서 그 건물을 경매로 내놓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려 감정가가 526억 원이라고 한다. 본래 이 교회는 20여 년 전에 서울 일원동에서 출발하였는데, 분당으로 이전하여 3년 전에 현재의 교회를 신축하고 입당하였다. 대형건물을 신축하면서 새 신자가 많이 유입될 것으로 기대하고 과도하게 투자했는데, 예상이 어긋났고 결국 금융부담에 따른 경매위기를 겪게 되었을 것이다.
그들 역시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기도하고, 찬양했을 것이다. 빚에 몰리면서 더욱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다. 결국 그들은 소원을 이루지 못하였다. 왜 그랬을까?
다시 교회가 경제적인 이유로 구설수에 오르게 된 것 같아 유감이다. 사실 교회를 크게 지으면 교인이 채워지리란 기대는 그야말로 자본의 논리가 아닌가? 여기에 신앙의 논리가 자리 잡기는 어렵다.
우리처럼 단칸방 하나 없는 교회가 무슨 할 말이 있는가? 아니다. 우리처럼 단칸방조차 없는 교회이기에 더 할 말에 충실해야 한다.
예수님은 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믿음, 보이지 않는 기도, 보이지 않는 용서를 더욱 중요하게 여기셨다.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 4:21).
예배는 ‘이 산 또는 예루살렘’과 같은 공간에 머물지 않는다. 더욱이 소유의 공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비판한 까닭은 건축의 종교, 장소의 종교, 보이는 종교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요 4:23).
예수님의 말씀에 기초한 그리스도교는 역사의 종교, 영의 종교, 보이지 않는 종교로 시작하였다.
오늘의 교회가 건물이 작아서, 소유가 적어서 세상의 조롱을 받는 것이 아니다. 행여 교회가 자기 유지를 위해 건물을 확장하고, 소유를 위해 투자할수록 하나님의 정의와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오늘의 교회는 복음의 핵심을 외면하고, 가난한 삶의 자리를 잃은 결과, 능력 없는 교회가 되었다.
중세기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 시대의 교회에 대해 이렇게 성찰하였다.
“초대 교회에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교회는 금으로 기둥을 만들고, 대리석으로 바닥을 깔아, 하나님의 집을 지었다. 은과 금은 이제 우리에게 너무 많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을 잃었다”.
복음과 이웃을 잃어버리고, 물질과 소유를 우선 한 결과, 예수님의 비판과 부정을 받았던 제사장과 레위 인의 종교로 전락하게 되었다.
1)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이다.
강도만난 어떤 사람이 있었다. 제사장과 레위 인이 그 길을 지나가면서 외면하였다. 두 사람은 강도만난 그를 돌봐주어야 할 율법적 의무가 있었지만, 정작 그럴 상황은 피해서 돌아갔다. 그런데 율법의 의무로부터 자유로운 사마리아 사람은 그런 정황을 보고 내 일, 남의 일 따지지 않고, 깊이 개입하였다. 그의 행동과 참여는 대단히 구체적이다.
먼저, 강도만난 사람의 처지를 불쌍히 여겼다(동정심).
또한, 가까이 다가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었다(응급조치).
다음,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밤새도록 돌보아 주었다(최선).
계속, 다음 날에 여관 주인에게 이틀 치 품삯인 두 데나리온을 미리 지불하며 강도만난 사람을 계속 돌보아 줄 것을 부탁하고, 추가 비용은 돌아올 때에 갚겠다고 약속하였다(끝까지 책임).
우리는 비유의 전개과정과 정답을 잘 알고 있다. 문제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에 오히려 고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수님은 물음을 던지셨는데, 정작 내게 물음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예수님의 말씀은 듣는 사람에게 고민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근심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실 교회는 이웃의 문제에 대해 오래도록 토론해 왔다. 초대교회의 교부 오리겐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해 이런 해석을 시도하였다.
어떤 사람은 아담(인간)이고, 예루살렘은 낙원(하늘나라)이며, 여리고는 세상(유한성)이다. 강도들은 어두움의 지배자들(원수 마귀, 그의 사자들)이고, 상처는 온갖 나쁜 것(공포, 정욕, 거짓, 불순종, 죄 등)이며, 제사장은 율법, 레위인 예언자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이다. 거의 죽게 된 것은 죄 때문에 영적으로 죽었으나 하나님 지식 때문에 절반은 살아있다는 식이다.
이런 방식을 알레고리적 해석이라고 한다. 성경공부는 흥미진진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웃이 설 땅은 없다. 교회 안에서 이런 해석이 반복되면서 복음은 점점 현장을 외면하고 만다.
2)
예수님이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배경에는 먼저 율법교사의 질문이 있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25).
그의 질문은 영생에 대한 아주 근본적인 물음에 대해 예수님과 토론하려는 것이지, 누가 이웃이냐는 예수님의 대답을 들으려는 것은 아니었다. 율법교사는 예수님과 율법지식에 대해 경쟁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갈릴리 출신의 시골 랍비라고 여겨 그의 실력을 테스트해보려는 것이다.
처음 율법교사의 속보이는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고도의 수사법으로 되받아 친다. 질문하는 자에게 질문으로 응수하셨다. ‘율법에는 무엇이라고 기록되었고, 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율법교사의 질문이 추상적이라면, 예수님의 재질문은 구체적이다. 율법교사가 정의(定意)를 내리려는 질문이라면, 예수님은 자기 고백을 요구하는 물음이었다.
첫 시험에서 율법교사와 예수님은 적어도 율법이 말하고 있는 정의에 있어서 일치하였다. 정답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
이 두 가지는 613개에 이르는 모든 율법의 요약이고, 핵심이었다. 그런데 율법교사는 진도를 더 나갔다.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29).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선한(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이다. 비유를 세세히 말씀 하신 후에 예수님은 물으신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36).
제2라운드에서 율법교사의 질문은 계속 이웃에 대한 정의에 머문다. 이웃이란 존재가 누구인지 계속 토론하려는 것이다. 그 때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질문을 위한 질문 대신 실제적인 이야기를 말씀하시면서 정곡을 찌르신다.
이웃이 누구인가를 따지고, 토론하고, 결론을 내린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냐는 것이다. 지식의 축적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과연 고통당하는 그 이웃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다면 그런 토론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결론이다. 고통당하는 이웃은 결코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 다만 그의 이웃이 되는 일이 시급하다.
“너도 이와 같이 하라”(37).
사도 야고보는 그의 편지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더 구체적으로 행동에 옮길 것을 권면한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5-17).
하나님의 사랑은 탁상공론에 그치지 않는다.
3)
예수님의 말씀은 아주 단순, 명쾌하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36).
율법교사는 먼저 질문을 던졌지만, 이젠 물음에 대답을 해야 하는 입장에 놓였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꼴이다. 그러나 대답을 거부할 수 없었다. 예수님의 비유가 그만큼 완벽했기 때문이다.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37).
율법해석의 자격을 지닌 그 교사를 향해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37).
네가 정녕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라면 네 가르침을 행동으로 보이라는 것이다. 네가 정녕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구체적인 상황을 외면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대체로 믿음을 단지 교리를 고백하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물론 믿음의 내용을 고백하는 일은 중요하다. 만약 그리스도교가 그 사회에서 소수이고, 신생종교일 때에는 믿음을 고백하는 일 그 자체로도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지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예를 들어 북한 같은 곳에서는 믿음을 고백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위험한 문제일 수 있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교가 지배적인 종교가 되면 문제가 달라진다. 지금 한국에서 그리스도교는 소수가 아니고, 교리수호가 최우선일 만큼 신흥종교도 아니게 되었다. 교회는 우리 사회에서 힘 있는 세력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의 변화는 더 성숙한 모습의 믿음을 보여줄 것을 요구한다. 교리에 대한 고백을 넘어서서 구체적으로 행동하는 믿음을 요청하는 하는 것이다.
교리 고백적 믿음에서 생활이 변화하는 믿음으로 나가야 하는 이유이다. 생활 속에서 실천이 없는 믿음으로는 결코 세상의 신뢰를 받지 못한다.
그러기에 토론하는 대상으로서 이웃이 아니라 내 곁에 존재하는 이웃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 “너도 이와 같이 하라”(37).
구티에레즈는 이렇게 말한다. “이웃이란 내가 내 길을 가다가 만나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이 가는 길로 찾아가서 만나는 사람, 내가 가까이 다가가서 적극적으로 찾아야 할 사람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외면한 채 어떻게 구원과 영생에 대해 고백할 수 있는가?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말씀에 순종해야 우리는 병든 믿음, 병든 교회, 병든 사회를 고칠 수 있을 것이다. 늘 현실을 핑계 삼고, 세상과 타협해 가다보면 세상의 그럴듯한 일부분은 될지언정 세상을 변화시키는 겨자씨도, 누룩도, 소금도 되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는 점점 이야기를 확대하고, 구체화한다. 독일교회는 이렇게 해석하였다.
1930년대 중반, 프랑크푸르트에서 베를린으로 나치당 집회에 참석하려고 떠난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났다. 그 길을 지나던 나치당 간부가 이를 보고 말하였다. “우리 당에서는 저런 자들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알고 있지”. 이어서 지나던 루터교 목사도 말한다. “세상의 악이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그런데 어떤 유대인이 피신하던 중에 그를 발견하고 다가가 도와주었다.
원래 ‘선한(착한)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전통적인 제목은 충격적인 메시지다. 예수님 시대에 ‘선한’이란 형용사와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명사를 나란히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사마리아 사람은 악이고, 원수였다.
마찬가지로 1930년대의 독일사회에서 ‘선한’이란 형용사와 ‘유대인’이라는 명사를 나란히 사용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유대인은 소멸시켜야할 악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물으신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36).
복음은 우리의 상식과 멀리 있지 않다. 예수님은 두꺼운 지식과 말에 그치는 이론으로 요리저리 사랑의 의무를 외면하고, 피해가던 당시 유대교를 향해 본질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다. 네가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선택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주님은 누구보다 먼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셨다.
바라기는 우리 교회가 무엇을 선택할 때, 그리스도인인 내가 결단의 기로에 있을 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순종하기를 바란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구원의 길이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은혜가 늘 우리와 함께 하셔서,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자녀요, 제자의 길을 걷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