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장군의 영원한 반려자, 김아려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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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려 여사와 가족
유언에서 ‘인간 안중근’을 보다
3월 26일은 하얼빈 의거의 주역 안중근 의사가 차디찬뤼순감옥에서 순국한 날로, 최소한 한국인이라면 꼭 기억해야 하는 날이다. 1910년 그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 그가 부인에게 남긴 유언은 ‘인간 안중근’의 진정한 면모를 보여준다.
안중근은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도 감히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의연한 자세를 유지했다. 장남 분도를 꼭 신부로 키우라는 완곡한 부탁도 한다. 어머니께 효도하고 형제들과 화목한 생활을 강조하는 평범한 남편이었다. 이승에서 못다 이룬 꿈은 천당에서 자세히 이야기하자는 맹세도 잊지 않았다. 그가 진정 무엇을 위하여 하얼빈 의거를 결행했는지 보여주는 눈물겨운 대목이다. 가슴 뭉클하면서도 담담하게 써내려간 편지는 읽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안중근의 반려자가 되다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인 중 상당수는 안중근 부인이 김아려(金亞麗)라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기록도 단편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과연 그녀는 어떠한 인물인가. 1878년 황해도 재령군 향반(嚮班)인 김홍섭 딸로 태어난 김아려는 일찍이 천주교를 수용하는 등 비교적 자유분방한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1894년 1살 연하인 안중근과 백년가약을 맺어 슬하에 1녀 2남을 두었다.
시집살이는 만만치 않았다. 시아버지 안태훈과 남편은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출전했다. 살림살이는 고스란히 시어머니 조마리아와 그녀의 몫이었다. 독실한 신앙생활은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는 정신적인 지주였으며, 시어머니의 따뜻한 인정과 배려는 그녀가 자신감·자긍심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다.
남편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다
남편 안중근은 항상 새로운 변화에 부응하려는 다양한 활동에 앞장섰다. 파격적인 행보로 천주교단이나 외국인 신부와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진남포로 이사하고는 삼흥학교를 설립, 돈의학교를 인수·운영하는 등 교육구국운동에 노력했다. 삼흥학교가 재정난에 직면했을 때는 처남인 김능권(金能權)이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던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국내는 물론 국외 한인사회로 급속하게 파급되었다. 안중근은 가족들에게도 참여를 권장하였다. 민족자본 육성을 위해 그의 경제활동은 이러한 인식과 무관하지 않았다. 시어머니, 동서와 함께 김아려도 시집오면서 가져온 폐물을 내놓을만큼 열성적으로 나섰다.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에서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안중근은 망명길에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1909년 10월 26일 오전,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두에서 저격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때부터 김아려는 자식들 양육은 물론 가족들 생계까지 책임지는 숙명을 맞이했다. 결국 이듬해 3월 26일 뤼순감옥에서 안중근은 순국했다.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하는 참담한 현실이었다.
2월 14일을 기억해야 할 이유
이후로도 일제의 추적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집요했다. 김아려와 가족들은 러시아와 중국 곳곳으로 옮겨 다니며 추적을 피하는 ‘하루살이’ 같은 삶을 살았다. 그 가운데 장남이 일제에 독살되는 등 가슴에 사무치는 아픔을 겪었지만 그럼에도 피난살이는 계속 이어졌다.
더욱이 작은 아들은 강제로 국내에 압송되어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분키치에게 아버지의 죄를 사죄하고 ‘의형제’를 맺는 퍼포먼스에 속수무책으로 동원되었다. 당시 언론은 이를 특종으로 보도하는 등 각색·연출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김아려는 이 비극적인 소식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늘 냉철한 지혜를 발휘하는 ‘어머니’였다.
1945년 8월 가슴 벅찬 광복이 찾아왔다. 그러나 김아려는 귀국하지 못한 채 이듬해 중국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남편과 함께 무덤조차 확인되지 못하고 영영고혼(孤魂)으로 남고 만 것이다.
지난 2월 14일 많은 청춘남녀들이 이날을 ‘발렌타인 데이’라며 서로에게 사랑의 눈길을 보냈을 것이다. 이 같은 현실을 비난하거나 탓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107년 전 그날은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고 아내에게 애틋한 유언을 남겼던 날이라는 것 또한 기억했으면 한다.
[출처: 독립기념관 글: 김형목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