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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1/ 왜 불교를 배우고 선을 공부하려 하는가?
<서장>은 중국 남송시대 대혜 종고 선사가 그의 문하와 거사 및 유학자들의 질문에 답한 간화선의 요지를 설명한 편지글이다. 대혜 선사가 42인에게 60여 차례 답장한 편지로서, 총 62편의 서신 중에서 59편은 관료 사대부들과 주고받은 것이다.
<서장>은 제자 혜연이 기록하고 정지와 거사 황문창이 중편했으며, <대혜서>, <대혜서문>, <대혜보각선사서> 등으로도 불리며, <벽암록>과 더불어 간화선의 뛰어난 교과서로 불린다.
대혜 선사는 호가 운문이고, 임제종 양기파에 속했으며, 묵조선을 배격하고 간화선을 제창했다.
따라서 간화선의 전통을 이은 한국불교에서는 가장 중요한 인물의 한 사람이다. 대혜 선사의 방대한 어록 가운데 <서장>은 묵조선의 배격과 간화선의 제창을 그 내용에 담고 있기 때문에 특히 중요시되며, 조계종 강원에서는 오래 전부터 필수과목이 돼 있다.
임제선사의 선사상을 오조법연, 원오극근 등이 잇고, 그 다음에 대혜 선사가 이어 받아서 <서장>을 통해 간화선을 주창했다. 그런 법을 한국 불교가 그대로 고스란히 이어 받았다. 그리하여 <서장>을 한국 불교에서 교과서로 쓴 것은 무려 800년이란 세월이 된다.
선을 공부하는 지침서로서의 <서장>은 조사선과 간화선의 본질을 잘 밝히고 있다. 그리고 <서장>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깨달음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체험되는가’라는 주제에 대한 다양한 각도에서의 설명이다. 이 점에서 <서장>은 종교를 초월해 깨달음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올바른 길을 안내해 준다.
2010년 8월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라는 국제학술대회가 동국대학에서 개최됐었다.
이 대회에서 미국의 버클리대 로버트 샤프 교수는 간화선이 재가자를 위해 창안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샤프 교수는 “간화선은 대혜 선사가 편지를 이용해 불교적인 지식이 부족했던 재가자인 문인들을 위해 간소화된 선을 고안한 것”이라 주장했다고 한다.
또한 하버드대의 나타샤 헬러 박사도 샤프 교수와 동일한 입장을 보여 줬는데, 그녀는 “대혜 종고 선사의 가르침은 재가불교의 수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간화선은 재가신자들의 요구에 맞도록 적응시킨 수행법”이라고 밝혔다.
이와 같이 <서장>에서 대혜 선사의 상대로 등장하는 인물은 주로 출가자가 아닌 재가자였다. 그들은 세속에 활동하던 당대의 관료 지식인이었다. 당시 소식, 왕안석 등 당대에 뛰어난 문장가들은 선의 최고 경지인 깨달음을 통해 그들의 삶을 완성시키려 했었고, 또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려고 애썼다. 수많은 낙 거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을 즐거움으로 삼은 지식인들이 추구한 참 가치는 바로 명예와 물질을 초탈한 삶에 있었다.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세세한 가르침을 담은 책이 <서장>이었다.
그들이 궁금한 사항을 대혜 선사에게 묻고, 이에 대혜 선사가 답변하는 형식으로 꾸며진 것이 <서장>이다. 이처럼 재가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기에 양귀비와 안록산의 일화를 예를 들어 설명한 것이 삽입돼 있으리라 보인다.
그만큼 당시 유학자들도 불교에 조예 깊은 분들이 많았고, 또한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사회처럼 숭유억불정책 같은 것은 없었던 것이다.
「공부의 지침서로서의 <서장>의 큰 장점은 그 가르침이 매우 구체적이고 상세하다는 것이다. 대혜의 안목이 그만큼 깊고 정확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옳지 않은 견해와 잘못된 공부의 여러 사례를 열거해 그 문제점을 정확히 지적하고, 동시에 올바른 견해와 공부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
건강한 육체란 질병만 치료해 없애면 될 뿐 새로 얻어야 할 건강이 따로 있지 않듯이, 깨달음도 잘못된 관념과 습성을 정확히 파악해 바로잡아주면 될 뿐, 따로 깨달아야 할 무엇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마조 선사는 “도는 닦을 것이 없고 다만 오염되지만 않으면 된다”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선 공부에서 무엇보다 우선 요구되는 것은 마음의 질병을 정확히 진단하고 잘못된 치유법의 문제점을 알려주는 것이다. <서장>의 가치는 이 점에서도 매우 훌륭하다.」
1. 증시랑 천유가 질문하는 편지
제가 옛날 장사에 있을 때 원오노사의 편지를 받았는데, 스님에 대하여 칭찬하시기를 ‘늦게 서로 만났으나 얻은 것이 매우 기특하고 훌륭하다’고 하셨습니다. 생각하기를 두 번 세 번 한 지가 이제 8년이 되었으나 직접 법문을 듣지 못한 것을 한탄하면서 오직 간절히 공경하고, 우러러 바라볼 뿐입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마음을 내어 선지식을 참례하고 이 일을 물었으나 약관의 나이가 된 뒤에는 곧 혼인하고 벼슬하는 일에 쫓겨 공부를 하는 것이 순일하지 못했습니다. 그럭저럭 노년에 이르렀으되 들은 것이 없어서 항상 부끄럽고 한탄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뜻을 세우고 원을 세운 것은 실제 얕은 생각에서 한 것이 아닙니다. 깨닫지 못한다면 그만이겠습니다만 깨닫는다면 모름지기 바로 고인이 친히 깨달은 곳에 이르는 것이 바야흐로 크게 쉬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마음은 비록 한 생각도 물러나지 않았으나 공부가 끝내 순일하지 못함을 자각하니 뜻과 원은 크되 힘이 작다고 하겠습니다. 옛날에 원오노사께 매우 간청하였더니 노사께서 법어의 여섯 단을 보이셨습니다. 그 처음은 바로 이 일을 보이시고, 뒤에는 운문, 조주 스님의 방하착과 수미산 두 인연을 들어서 둔한 공부를 내리셨습니다. ‘항상 스스로 성성하게 화두를 들어라. 오래고 오래면 반드시 들어가는 곳이 있게 될 것이다’라고 하신 스님의 간절한 마음이 이와 같았건마는 둔하고 막힌 것이 지극히 심한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지금 다행히 집안의 세속 인연을 다 마치고 한가하게 지내며 다른 일이 없으니 스스로 채찍질해서 처음 뜻을 실행하고자 합니다. 다만 친히 가르침을 얻지 못함을 한탄할 뿐입니다. 일생 동안의 허물을 이미 하나하나 보여 드렸으니, 반드시 제마음을 분명히 아실 것입니다. 자세하게 경계하고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평소 마땅히 어떻게 공부를 해야 다른 길에 빠지지 않고 바로 본지풍광과 서로 계합하겠습니까? 이와 같은 말도 허물이 또한 적지 않습니다만 다만 정성을 바칩니다. 스스로 피하기 어려우니 진실로 가련하여 지극히 묻습니다.
서장 1 -증시랑의 질문 편지
올바른 발심은 ‘어떻게’ ‘무엇을’ ‘왜’ <서장>의 첫머리는 증시랑이 질문하는 편지이다.
여기에서 증시랑은 자신이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 한까닭을 여러 가지 열거하고 대혜의 가르침을 구한다.
증시랑의 글 가운데 공부인의 올바른 자세를 보여주는 부분은 바로 발심에 관한 결의를 보이는 부분이다.
“세운 뜻과 발(發)한 원(願)은 진실로 가벼운 지견(知見)의 사이에 있지 않아서, 깨닫지 못하면 그만이 지만 깨닫는다면 반드시 옛사람이 직접 깨달아 얻었던 곳에 곧바로 당도하여야 비로소 크게 쉴 땅으로 여길 것입니다.”
발심이란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먹는 것이다.
이 마음먹음에는 ‘누가’, ‘언제’, ‘어 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라는 내용이 갖추어질 것이다.
이 가운데 ‘누가’는 물을 필요가 없으며, ‘언제’와 ‘어디서’는 ‘어떻게’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올바른 발심을 위하여 중요한 요소는 ‘무엇을’, ‘ 어떻게’, ‘왜’이다.
왜 불교를 배우고 선을 공부하려 하는가? 재물이나 명예나 지식이나 건강을 얻기 위하여? 집안에 탈이 없기 위하여? 심리적 의지처를 찾기 위하여? 이런 것들을 위하여 불교와 선을 공부한다면 그것은 애초에 동기부터 잘못된 것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복을 구하는 기복(祈福) 행위이다.
불교를 공부하는 목적은 석가모니의 출가 동기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 동기는 현세의 복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현세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궁극적이고 완전한 해결에 있다. 무엇을 선에서 공부 하려 하는가? 지식을 공부하려 하는가? 특별한 기술이나 능력을 배우려 하는가? 선을 공부하는 목적 이 이러한 것들이라면, 이것 역시 현세에서 조금 더 즐거운 삶을 바라는 기복행위에 불과하다.
현세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근원적 해결을 위한 길은 오직 한 길뿐이다.
그것은 깨달음의 길이다.
현세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깨달아 알 때 현세에 있는 모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다.
이것이 석가모니가 간 길이요, 불교를 공부하는 우리가 가야할 길이다.
따라서 선을 공부하겠다고 발심한 사람은 반드시 부처나 조사들과 꼭 같은 깨달음을 얻겠다고 마음먹어야 한다.
위의 증시랑의 말은 바로 이 발심을 나타 내고 있다.
불교나 선을 공부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깨달음은 너무나 먼 길이므로 깨달음에 목적을 두지 말고 더 작은 것에 목적을 두고 공부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불교를 왜곡하고 부처를 비방하는 자들이다.
깨달음이 없으면 그것은 더 이상 불교도 아니요 부처의 가르침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 이들은 깨달음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일 뿐이라고 신비화하지만, 이것 역시 모든 사람이 깨달을 수 있다는 경전의 가르침과는 맞지 않은 말이다.
석가모니는 모든 사람이 깨달음을 얻어 자신과 같이 되기를 원했지, 범부로 남아서 자신의 추종자가 되기를 바라진 않았다. 어떻게 선을 공부할 것인가? 증시랑은 어릴 때 발심하여 일생 동안 공부하였으나 세속의 여러 가지 일들에 매여서 공부에 전념하지 못한까닭에 지금까지 공부에 결실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다.
흔히 공부를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이 공부가 살아서 할 가장 크고 중요한 일임을 말한다.
삶과 죽음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선의 역할이라면 이보다 더 큰 일은 없을 것이다.
가장 크고 중요한 일이므로 당연히 가장 큰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일이다. 그렇다고 일상생활과 직업을 포기하고 모든 시간을 바쳐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가장 큰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라는 것은 선 공부야말로 일생에 해야 할 가장 큰 일이라고 가슴 깊이 새겨두어서, 언제 어디에서든지 공부에 대한 의식이 잠재되도록 하라는 말이다.
즉 명예, 돈, 자존심 등 세속사를 우선순위에 두지 말고 선 공부를 가장 우선순위에 두라는 것이다.
깨달음이라는 일대사는 마치 전쟁에 나간 외아들 생각 하는 홀어머니 심정같이 일부러 생각하지 않아도 늘 염두에 있는 그러한 절실함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