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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내 마음의 고향" 제5장 잊을 수 없는 사람들 - 과단과 선견지명
● 28 노구치 씨와 쿠도 군 -1-
나는 다이쇼 11년(1922년)부터 15년(1926년)까지 오노다 시멘트의 평양 공장에 있었지만, 14년인가 15년에 쿠도 히로노리(工藤宏規) 군이 찾이 왔습니다. 쿠도 군은 대학에서 한 학년 위였지만, 같은 오이타현 출신이라 예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오오이시 타케오(大石武夫) 군과 함께 다이쇼 10년(1921년) 졸업이지만, 쿠도 군은 다이쇼 9년(1920년) 졸업이었습니다.
그러나 출생일은 나보다 늦었습니다. 나는 메이지 30년(1897년) 1월생인데, 그는 같은 30년 4월생이어서 원래라면 나보다 먼저 입학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시골이란 게 그렇지요. “들어가겠다”고 우겨서 무리하게 중학교에 들어간 겁니다. 그래서 한 학년 위가 되어 있었습니다. 학제상으로 말하자면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겠지요. 아무튼 서로 꽤 가까운 사이였는데, 그 쿠도 군이 어느 날 불쑥 찾아왔습니다.
그 무렵 일본질소비료는 흥남 공장을 세우려는 구상을 하고 있었고, 부전강(赴戦江)을 개발해서 그 전력으로 흥남 공장을 건설하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쿠도 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쪽에서는 이번에 공장을 하나 지을 거야. 꽤 큰 공장이 될 거지. 전력은 대략 20만 킬로와트야. 우선은 황산암모늄을 할 생각이야. 그 황산암모늄 공장은 일본 제일이 될 거고, 일본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여기서 만들게 될 거야.” 라고.
그리고 그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흥남에는 사택을 잔뜩 지을 생각이야. 삼천 호나 사천 호쯤 될 거야. 자네네는 증기 난방을 하고 있다길래, 그걸 좀 보러 왔지.” 그리고 증기 난방 설비를 둘러본 뒤에 그는 말했습니다. “이런 건 비경제적이야. 우리 쪽은 이층이나 삼층짜리 집단주택으로 하고, 그걸 집단 난방으로 돌릴 거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말이야, 자네, 도저히 수지가 맞질 않아.” 과연 그 말이 옳았습니다.
구도 군이 들려주는 흥남 공장 구상은, 아무래도 이야기의 규모가 너무 커서, 정말 그런 일이 가능할까 하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던 것이지요. 다이쇼 14~15년(1926년)무렵에, 20만 킬로와트의 전력을 하나의 공장에 사용한다는 것은, 그런 규모의 설비는 있을 수 없다고 여겨지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쿠도 군의 말을 반신반의하면서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 내 마음의 고향" 제5장 잊을 수 없는 사람들 - 과단과 선견지명
● 28 노구치 씨와 쿠도 군 - 2
쿠도 군은 여러 가지를 아주 꼼꼼히 조사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흥남공장을 세웠는데, 노구치 시타가우(野口 遵 1873~1944) 씨를 처음 뵌 것은 그로부터 2년쯤 뒤, 아마 쇼와 2년(1927년) 무렵이었을 겁니다. 노구치 씨가 대학을 졸업한 것은 메이지 29년(1896년) 이지요. 나이 차이가 꽤 나서 서로 면식도 없었고, 어떤 분인지도 잘 알지 못했지만, 다만 대단히 자유분방한 분이라는 이야기는 어렴풋이 듣고 있었습니다.
노구치 씨는 다이쇼 말기에서 쇼와 초기에 걸쳐 가끔 한국에 오셨습니다. 저는 다이쇼 11년(1922년) 5월부터 한국에 건너가, 그 뒤 쇼와 22년(1947년) 7월까지 꼬박 25년을 그곳에서 지냈습니다. 노구치 씨나 구보타 유타카(保田 豊 1880~1953) 씨(일본공영 회장), 모리타(森田) 씨가 한국에 오신 것은, 제가 조선에 간 뒤로 대체로 비슷한 시기였을 것입니다.
노구치 씨를 직접 만나 뵙고 보니, 소문 이상으로 참으로 자유분방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쪽의 가사이 신조 사장이라는 분은 노구치 씨와는 정반대로, 매사에 빈틈없이 정돈된 분이었습니다. 두 분 다 두뇌는 뛰어났지만, 가사이 사장 역시 대단히 총명한 분으로, 뮌헨 대학 화학과 특별우등생이었습니다. 그래서 비스마르크 80세 축하 행사 때, 뮌헨 대학 학생 총대표로 축하 사절로 가서 비스마르크와 악수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그 무렵 나가오카 한타로(長岡半太郎1865~ 1950 이론물리학자) 선생도 뮌헨 대학에 계셨지만, 총대표는 되지 못하고 가사이 씨가 맡았던 것이니, 가사이 신조라는 사람이 얼마나 뛰어난 인물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두뇌 명석하고 엄격한 분이었지만, 말과 행동 모든 면에서 노구치 씨와는 정반대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그런 사장을 모시고 있었던 터라, 노구치 씨를 처음 뵈었을 때, “이분은 또 얼마나 자유분방한 분인가” 하고 크게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노구치 씨는 결코 거드름을 피우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전혀 잘난 체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말투는 꽤 거친 편이었지만, 거만하게 상대를 깔보는 태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때 그런 인상을 받았습니다. 처음 뵙는 자리였으니, 아마도 저를 풋내기 녀석쯤으로 보셨겠지요. 어쨌든 저보다 무려 스물네 살이나 연상이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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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노구치 씨와 쿠도 군 - 3
그 뒤 부전강(赴戦江: 함흥시 북쪽 부전강댐) 공사가 진행되면서, 그곳에서는 시멘트가 대량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때인가 시멘트에 팽창성 균열이 생긴다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저는 “균열이라 해도, 이것은 이른바 건열(乾裂)로서 품질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건열이 있어도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라고 노구치 씨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노구치 씨는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뭘로 아느냐. 나는 옛날부터 거울 공장도 지어온 사람이다. 시멘트에 대해서는 네놈보다 훨씬 잘 안다. 나를 상대로 설교를 하다니 무슨 소리냐.” 어쩔 수 없어서 “아, 그렇습니까” 하고 따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노구치 씨는 그때는 그렇게 말씀하셔도, 나중에 직접 조사해 보셨는지, 결국 ‘과연 네 말이 맞다’며 전혀 화를 내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런 분이었지요.
한 번은 호되게 꾸짖으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돌아가라”는 말까지 들었지만, 그래도 이상하게 정이 느껴지는 분이었습니다. 그런 기운을 주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저도 ‘이 고집 센 늙은이’ 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참 재미있는 사람도 있구나 하고 돌아왔지요. 저는 어쩐지 노구치 씨에게 마음에 들어 있었다는 느낌이 계속 들었습니다. 여러 사정으로 보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장진강(長津江: 부전강 서쪽)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곳에 발전기 기초를 만드는 과정에서, 시멘트가 좀처럼 굳지 않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저도 여러 차례 현장에 갔고, 화학기술자도 다섯 명이나 투입해 필사적으로 조사했지만, 도무지 원인을 알 수 없었습니다.
노구치 씨는 몹시 화가 나서 “이번엔 저 시멘트가 문제다”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그럴 리는 없었지만, 상황이 그러니 여러 방면으로 다시 조사했습니다.
콘크리트에 쓰는 모래가 문제일 가능성을 살폈습니다. 그 모래는 정말 훌륭한 것이어서, 눈으로 보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 모래는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모래가 문제일 리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지요.
다른 재료들을 아무리 조사해도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좋은 모래를 의심하는 건 좀 이상하지만, 그래도 한번 의심해 보자’는 생각으로, 한 달이나 시간을 들여 그 모래를 철저히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모래 속에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미세한 균열이 있고, 그 균열 속에 유기물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흔히 말하는 후민산이 섞여 있었던 것입니다.
약품으로 씻어내면 되긴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처리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모래를 사용했더니, 즉시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너무나 좋은 모래였기 때문에, 다른 모래를 쓰기가 오히려 망설여졌던 것이지요. 그만큼 훌륭한 모래였습니다.
이 이야기가 구보타 씨를 통해 노구치 씨에게 전해지자, “안도도 그리 허튼소리를 하는 사람은 아니구나” 하고 신뢰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시멘트는 오노다(小野田) 것이 최고다. 안도가 만든 것이 좋으니 그것을 사라.”
이렇게 되어, 시멘트는 전부 우리 회사 제품을 쓰게 되었습니다.
대략 전력 1킬로와트를 생산하는 데 시멘트 1톤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150만 킬로와트의 전력을 생산했으니, 시멘트도 150만 톤을 쓴 셈입니다. 게다가 전력 이외의 용도로도 사용했으니, 결국 200만 톤 이상은 사용했을 것입니다. 당시 수년 사이에 시멘트를 200만 톤이나 사용한다는 것은, 시멘트 산업 개척 이래 전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런 예는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신뢰를 받아 시멘트를 납품했으니, 제 입장에서는 노구치 씨는 대단한 은인입니다. 그 뒤 본궁(本宮: 함흥시 흥남공업지구)에 대규모 카바이드 공장을 짓겠다는 계획이 나왔습니다. 카바이드에 물을 부어 아세틸렌 가스를 얻고, 그 아세틸렌으로 여러 유기화학 제품을 만들겠다는 구상이지요.
10만 킬로 규모의 거대한 카바이드 공장을 짓는 것입니다. 석회석은 조선질소가 보유한, 북청(北青) 근처의 산에서 채굴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쪽 천내리(川内里)에서 본궁까지의 거리가 훨씬 가깝고, 돌의 질도 훨씬 좋았습니다. 저는 조선질소가 가진 돌의 상태를 조사해 보았는데, 북청 쪽 돌은 질이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노골적으로 돌이 나쁘다고 말하지는 않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 배나 먼 곳에서 가져올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 쪽에는 가까운 곳에 무연탄도 있습니다. 무연탄으로 현지에서 석회를 만들면 운반 무게가 절반으로 줄고, 거리도 절반이니 비용이 쌀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꼭 그렇게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 말을 노구치 씨에게도 했고, 당시 책임자였던 오이시 군에게도 전했습니다.
하지만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자기네 산에서 캐겠다는 결론이 나왔지요. 저도 ‘자기 산이 있는데 남의 것을 쓸 필요는 없다는 생각도 있겠구나’ 하고 이해는 했습니다.
이윽고 본궁 공장의 석회 제조 설비가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아마 백만 엔 정도는 들었을 겁니다. 그 무렵 광산 쪽을 맡고 있던 가게야마 노부요시(景山信義) 군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문상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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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노구치 씨와 쿠도 군 - 4
가게야마(景山) 군은 5고(五高)에서 나보다 두 해 아래 후배였고, 내가 기숙사 사감을 맡고 있을 때 같은 기숙사에 함께 지냈습니다. 키가 육 척이나 되는 건장한 대장부로, 유도를 했고 보트 선수이기도 했습니다. 성격은 호방하고 시원시원했으며, 또 대단히 친절한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말솜씨를 지닌 인물이었지요. 부전고원(赴戦高原: 함경도 소재)을 아내를 업고 올라갔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경성에서 규석(硅石)광구 출원 문제로 그의 의견을 들었을 때, “그럼 평양으로 돌아가서 절차를 밟도록 합시다”라고 말하자, 그는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광구 출원은 시간을 다투는 일이니, 지금 당장 하셔야 합니다”라고 하면서, 그가 직접 서류를 만들어 주었고, 저는 도장만 찍어 출원한 적이 있습니다. 광구 출원에서는 시간의 중요성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그때 배웠는데, 이것이 나중에 대단히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부전강(赴戦江)의 터널을 파는 공사에서, 수직 갱도를 파서 공사를 진행하는 방식을 채택한 것도 그의 아이디어였던 것 같습니다.
그 가게야마 군의 장례를 조문하러 갔을 때, 흥남의 클럽에 들렀더니 노구치 씨가 와 있었습니다. “왔느냐” 하는 식의 인사를 나눈 뒤, 제가 오는 길에 석회 가마가 거의 완성된 것을 보고 왔기 때문에, 노구치 씨에게 “석회 가마가 다 되었더군요” 라고 말하자, 그는 “오, 다 되었나” 라고 하셨습니다.
“거의 다 되어 있었습니다. 다만 저것은 말입니다, 천내리(川内里)에서 석회로 만들어 보내는 편이 훨씬 나았을 텐데요. 그런데 결국 저걸 지으셨군요” 하고, 저는 혼잣말하듯 말했습니다. 그러자 노구치 씨가 “뭐라고?” 하고 되물었습니다. 제가 그 이유를 설명하자, 그는
“그건 자네 말이 맞다. 지금 짓고 있는 것은 당장 중지하겠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렇게 말씀하셔도, 이미 저만큼이나 지어 놓은 것을…” 이라고 말하고,
“그건 오이시(大石) 군이 맡아서 만들고 있는 일이니, 그렇게 말하면 오이시 군을 나쁘게 말하는 꼴이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하자, 노구치 씨는 “아니야, 자네 말이 맞다. 자네 얼굴을 보니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더라” 라고 하더니, 그 자리에서 곧바로 오이시 군에게 전화를 걸어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관련된 간부들을 대여섯 명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런 다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건 말이다, 만들라고 한 내가 잘못이었다. 안도가 말한 게 옳으니, 안도네 쪽에서 만들게 하라.” 그래서 제가 “그건 곤란합니다. 이미 지어 놓은 건 어떻게 합니까” 라고 하자, 그는 “뭐, 이미 된 건 생석회 저장용으로 쓰면 되지 않나. 이런저런 말 하지 말고, 당장 실행해.” 라고 하며, 관계자 전원에게 전화를 걸어 공사를 중지시켜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이 일은 자네 쪽에서 하게 할 테니, 당장 설계해서 곧바로 시작해라” 라고 말하기에, 제가 “그건 좀…” 하고 머뭇거리자, “ ‘좀’ 같은 소리 하지 마라. 내가 말했으면 틀림없다. 그렇게 할 테니 쓸데없는 생각 말고, 당장 설계해.” 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어쩔 수 없이 곧바로 돌아가 설계를 시작했습니다. 설계는 이미 머릿속에 다 들어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도면을 만들어 가지고 갔습니다.
노구치 씨가 “지금까지 얼마가 들었나?” 하고 묻자, 오이시 군이 대답했는지 누가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35만 엔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금액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노구치 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 35만 엔 정도야 별것 아니야. 그건 버렸다고 치면 되지. 아니, 생석회 창고로 쓰면 되니까, 버린 것도 아니지.”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우리 쪽은 처음부터 새로 시작했기 때문에 7~80만 엔을 들여 하루 400톤 규모의 석회 소성로를 만들었습니다. 거기서 생석회를 생산해 카바이드의 원료로 납품했던 겁니다.
본궁(本宮) 공장은 상당한 이익을 낸 건 틀림없습니다. 35만 엔 정도는 금세 회수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1년에 14~15만 톤이나 사용했으니까요.
톤당 10엔만 차이가 나도 140만~150만 엔의 차이가 납니다. 35만 엔쯤이야 금방 회수했겠지요. 게다가 무엇보다도 돌(석회석)의 품질이 훨씬 더 좋았습니다. 노구치 씨는 이런 결단을 아주 단칼에 내려버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좀처럼 못 할 일이지요. 저도 솔직히 깜짝 놀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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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노구치 씨와 쿠도 군 -5-
그 후 천내리(川内里)에 석회요(石灰窯)가 완성되자, 자신이 보러 가겠다고 하며 노구치 씨가 오시게 되었습니다. 노구치 씨가 오신다고 해서, 점심 때였지만, 멜론을 준비했습니다. 그 무렵 멜론은 원산엔 없어서 경성에 전화해서 몇 개 주문하여 점심 때 내게 했는데, 오이 초무침이 나왔어요. 노구치 씨가 먼저 그 초무침을 드시는데, 웬걸, 그게 멜론이었어요.
그 무렵 원산의 요리사들은 멜론 먹는 법을 몰랐던 겁니다. 오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서, 오이처럼 썰어 초무침(酢瓜)으로 내놓은 거죠. 노구치 씨는 무척 좋아하시면서 “안도 군, 자네 참 대단하군. 나는 멜론 초무침은 처음이야. 이런 진귀한 걸 내놓을 사람은 자네 말고는 없겠어” 하며 농담 섞어 놀리셨습니다.
그 뒤로 만날 때마다 그는 그 이야기를 자주 꺼내며 “자네네 집에 가면 멜론 초무침을 먹을 수 있어?. 그런 호화롭고 재미있는 건 난 평생 처음 먹어봤어” 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럴 만도 하지요. 오이 대신 멜론을 쓴 것이니까요. 노구치 씨는 이런 식의, 어딘가 좀 엉뚱한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경성에서 병을 앓았을 때의 일입니다. 노구치 씨의 심부름이라며, 누군가가 아주 훌륭한 과일 바구니를 들고 병문안을 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멜론을 비롯해 온갖 과일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노구치 씨라는 사람은 돈 계산을 하는 타입이 아니기도 했지만, 그렇게 근사한 과일 바구니는 본 적도, 받아 본 적도 없었습니다.
나는 노구치 씨에게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뭔가 근사한 것을 드려야겠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훌륭한 물건을 떠올려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만큼 대단한 것이었지요.
경성에서는 노구치 씨의 애인을 종종 만났습니다. 그 애인― 사토 요시(佐藤よし)라는 사람이었는데―의 집에 가 본 적은 없고, 다만 기라쿠(喜楽)라는 곳에는 자주 갔습니다. 어느 날 노구치 씨의 자리에 불려 갔더니, 그 사토 요시 씨가 와 있었습니다.
노구치 씨는 그런 일을 전혀 거리끼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 아나?” 하고 묻기에
“아니요, 모릅니다” 하고 대답했더니, “그럼 소개를 해야지” 하면서 “이쪽은 내 아내는 아니지만, 아내 노릇을 해 주는 사람이야. 잘 부탁하네” 라고 말하는 겁니다. 노구치 씨에게는 기회만 있으면 얻어먹기도 했고, 저도 초대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때 주문을 받았던 일에 대한 감사 인사도 겸해 사무실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마침 아침 일찍 임원회의 시점과 딱 맞아 버렸습니다. 그러자 노구치 씨가 “이제 말이야, 내가 임원회의에 가야 하니까 자네도 따라와” 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건 좀 곤란합니다. 임원회의에 제가 따라간다니, 대체 어느 회사 임원회의입니까?” 하고 묻자, “그야 뻔하지 않나. 조선질소 임원회의지” 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그건 안 됩니다” 라고 하자, “오라면 오는 거야” 라며 그대로 끌고 가 버리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따라갔더니, 노구치 씨가 자기 옆자리를 가리키며 “여기 앉아” 하고 앉히는 겁니다. 저는 “아, 예…” 하고 마지못해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쿠도(工藤) 군이 1~2분쯤 늦게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노구치 씨가 “어이, 빈곤신
(貧乏神: 재물복이 없는 사람)이 왔구나. 이 사람 말이야, 안도 군. 쿠도라는 놈은 평생 한 번도 돈 벌어 본 적이 없어. 손해만 보는 녀석이야. 빈곤신은 안 붙어도 되는데 말이야” 라고 말했습니다.
쿠도 군도 전혀 개의치 않고 “빈곤신이라도, 가끔은 돈 벌 때가 있습니다요” 라고 하며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런 식으로 험담을 하면서도, 사실은 노구치 씨가 쿠도 군을 몹시 아끼고, 사랑하고 있었다는 걸 저는 느꼈습니다. 그렇게 노구치 씨는, 이걸 재능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에 대한 애정을 몸에 지닌 사람이었고, ‘아, 참 좋은 사장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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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노구치 씨와 쿠도 군 -6-
그때도 노구치 씨가 제게 “자네도 뭐라도 의견을 말해 봐” 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말씀드릴 의견이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자, “뭐 하나쯤은 의견이 있기 마련이야” 라고 하시는 바람에, 저는 어쩔 수 없이 의견 비슷한 말을 한마디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앞으로도 너는 이 이사회에 계속 나와라. 명령이니까 나와”
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아, 예…” 라고 대답은 했지만, 결국 한 번도 나간 적은 없습니다.
나갈 수 있을 리가 없지요. 그런 식으로, 저는 노구치 씨에게 호감을 받고 있었다고 느꼈습니다. 미움을 받았던 건 아니라는 느낌이었지요.
거기에는 분명 하나의 애정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노구치 씨를 두고 ‘일의 귀신이다’, ‘자유분방한 사람이다’, ‘앞뒤 안 가리고 일에 매달리는 사람이다’ 라고들 쉽게 말하지만, 그보다 앞서 이런 직원들에 대한 애정이 있었고, 그 점이 사람을 끌어당겼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영웅이지요. 정말로요.
그만큼 큰 일을, 지금 당장 하라고 해도 해낼 수 없을 겁니다. 요즘은 원자력발전소 하나만 지어도 수천억 엔이 필요하고, 출력 천만 킬로와트짜리 발전소를 짓는 사람도 있지만, 당시 노구치 씨가 건설한 이백오십만 킬로와트 발전소와 오늘날의 천만 킬로와트 원자력발전소는
그 의미와 중요성이 전혀 다릅니다. 지금이라면 5천만 킬로와트나 만든다면, 거기에 해당하겠죠.
하지만 지금에 와서 오천만 킬로와트를 만든다는 사람은 없지요. 그만큼 큰 일을 했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그는 전력을 생산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전력을 모두 직접 사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전력을 만들어낸 것과 비교하면, 그 가치는 다섯 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용하는 쪽에는 에너지도 다섯 배가 필요하고, 자금도 세 배에서 다섯 배는 더 들어갔을 겁니다. 그런 일을 해냈다는 건데, 지금으로서는 그런 발상 자체가 어렵습니다.
얼마 전에도 잠깐 언급했지만, 현재의 이백만 킬로와트 발전소와 그 당시의 이백만 킬로와트를 비교할 때는, 절대적인 수치만 볼 게 아니라
그 시대의 사회·산업적 조건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당시 일본 전체 산업 수준은 지금의 10분의 1에서 30분의 1 정도였으니까요. 그 시절에 이백만 킬로와트를 만들었다는 것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이천만에서 육천만 킬로와트를 만든 것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일이었고, 게다가 그 전력을 실제로 사용해 산업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더더욱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 산업이라는 것도
당시 기준으로 보면 최첨단 산업이었고, 지금에 비유하자면 컴퓨터를 처음 만들어낸 것과 같은 수준이었습니다. 그런 화학공업의 최전선을 개척했으니, 스케일 자체가 차원이 다르다고 할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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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노구치 씨와 쿠도 군 -7-
쿠도(工藤) 군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추도문집이 나왔습니다. 저도 그 안에 한 편을 썼는데, 제가 보기에 쿠도라는 사람은 어떤 인물이었느냐 하면, 현미경과 망원경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망원경으로는 백 리 밖의 미래를 훤히 내다볼 줄 알았고, 현미경으로는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 중간 과정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중간 단계는 누군가가 대신 해주어야 했지요. 그래서 그런 역할을 맡아줄 사람이 있을 때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그런 사람이 없을 경우에는 조금은 일을 그르칠 위험도 있었습니다. 저는 쿠도 군을 그렇게 보았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중간을 맡아줄 사람이 곁에 있었기 때문에, 결국은 커다란 사업을 제대로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처럼 사업 규모가 크고 웅장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완전히 완성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이 너무 빨리 끝나는 바람에, 그 훌륭한 사업들이 정식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드러난 것은 흥남 공장 하나뿐이었지요. 만약 그가 살아 있었다면, 정말로 대단한 인물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판단으로는, 노구치 씨는 쿠도 군을 누구보다도 사랑했습니다. 그를 가장 아꼈다고 봐야겠지요. 저는 여러 사람을 대하는 노구치 씨의 태도를 대체로 지켜보아 왔기 때문에 알 수 있습니다. 노구치 씨가 쿠도 군에게 그 정도까지 말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각별한 관계였다는 증거입니다. 속마음까지 훤히 내보일 정도였으니까요.
쿠도(工藤) 군은 목소리가 대단히 좋았습니다.
말하는 소리가 정말로 좋았지요. 말투에는 극히 여유가 있었고, 어딘가 호걸이나 영웅을 연상시키는 화법이었습니다. 이건 저와 이야기할 때만 그런 게 아니라, 제가 부탁해서 함께 총독부에 동행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보아도 쿠도 군은 참으로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노구치 씨처럼 마치 세계를 지배하는 듯한 기질을 지닌 인물에게는, 쿠도 군의 그런 말솜씨가 내용이 좋으냐 나쁘냐를 떠나서 아주 잘 어울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이건 결국 ‘좋아한다, 싫어한다’는 감정과도 연결되는 문제겠지요.
노구치 씨가 그토록 큰 사업을 해낼 수 있었던 이면에는, 역시 쿠도 군이라는 존재가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노구치 씨처럼 마치 세계를 지배하는 듯한 기질을 지닌 인물에게는, 쿠도 군의 그 말솜씨가
내용이 좋으냐 나쁘냐를 떠나서 대단히 잘 어울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이건 결국 ‘좋아한다, 싫어한다’는 감정과도 맞닿아 있는 문제입니다. 노구치 씨가 그토록 큰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그 이면에는, 역시 쿠도 군이라는 존재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곁에는 구보타 씨가 있고, 시라이시 씨가 있고, 오이시 군도 있었지만, 거대한 구상과 비전에 관해서는 쿠도 군이 전면적으로 밀착해 있었던 게 아닐까, 저는 바깥에서 그렇게 보았습니다. 말하자면 쿠도, 구보타, 시라이시, 오이시 이 네 사람은 모두 일류 인물이었습니다. 그 밖에도 여러 외부 인사들이 있었지만, 노구치 씨가 직접 키운 훌륭한 측근 인재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노구치 씨라는 사람은 정말로 특별한 인물이었지요. 이런 분은 다시는 나타나기 어려울 겁니다.
지금 같은 시대에 노구치 씨가 다시 등장한다면, 옛날에 그가 해냈던 것과 같은 정도의 일을 할 수 있었을지, 아니면 지금의 시대에는 맞지 않았을지, 그건 솔직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의 노구치 씨는, 말 그대로 영웅이 시대의 기운을 제대로 탄 경우, 비유하자면 용이 구름을 붙잡은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다만 거기에는 조선이라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손이 닿는 곳에 그만한 자원이 있었던 것이지요. 게다가 조선총독이 노구치 씨를 잘 이해했고, 또 총독의 부하들 또한 그를 도와주었다는 점이 그와 같은 대사업을 가능하게 한 중요한 요인이었을 것입니다.
"한국 내 마음의 고향" 제5장 잊을 수 없는 사람들 - 과단과 선견지명
● 28 노구치 씨와 쿠도 군 -8-
노구치 선생은 음담(猥談)을 아주 잘하는 분이었습니다. 성(性)에 관한 이야기가 정말로 재미있었지요. 젊은 사람들 앞에서는 차마 들려줄 수 없는 말도 아무렇지 않게 하곤 했습니다.
나 같은 경우도 자주 “이제 어디 놀러 가는 거냐. 그렇게 비실비실해서는 안 되지.” 라는 말을 듣곤 했습니다.
쇼와 18년(1943년) 여름이었을까, 노구치 선생을 니라야마(静岡県田方郡韮山町)로 문병 갔습니다. 그 무렵에는 자주 우시던 때라, 훌쩍훌쩍 눈물을 흘리셔서 곤란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곁에서 간호하던 사토 요시 씨가 “울어도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눈물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한 시간쯤 머물다 자리를 뜨고 돌아왔는데,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제 쪽의 가사이 신조 사장도 노구치 선생보다 두 해 앞선 쇼와 17년(1942년)에 별세하셨지만, 두 분은 참으로 대조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두 분 모두 저보다 스물네 살이나 연상이었으니, 지금까지 살아 계셨다면 백열두 살이 되었겠지요. 저는 이제 여든여덟입니다. (1984년 글 쓸 당시)
(野口 遵 のぐち したがう1873~1944)
(笠井 真三かさいしんぞう1873~1942)
(安藤豊祿あんどうとよろく1897~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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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쇼팽을 생각하다 (304p)
쇼와 44년(1969년) 9월, 나는 게이단렌(経団連)에서 파견한 경제사절단의 일원으로 폴란드, 스웨덴, 네덜란드 등 여러 나라를 순방했다. 9월 21일 일요일은 별다른 공식 일정이 없었는데, 도코(土光) 씨를 단장으로 한 약 스무 명의 일행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 교외, 서쪽으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젤라조바 볼라에 있는 쇼팽의 생가를 방문했다. 그날은 아침부터 날씨가 심상치 않았고, 이따금 내리는 비가 초가을 바르샤바 교외의 푸른 녹음을 조용히 적시고 있었다.
쇼팽의 생가에 도착한 것은 아마 오전 열 시 반쯤이었을 것이다. 마침 그날은 바르바라 헤세-푸코프스카 여사가 쇼팽의 피아노 곡을 연주하는 날이었다. 그녀는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수석으로 입상한 연주자로, 그 연주는 실로 우아했고, 마치 쇼팽을 연주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 해도 좋을 만한 풍격(風格)을 지니고 있었다.
실내에는 우리 일행을 포함해 오륙십 명 정도가 있었고, 밖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우산을 쓴 채 연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곡은 아마도 '빗방울 전주곡' 이었을 것이다. 마요르카 섬에서 조르주 상드와 함께했던 일화를 떠올리며, 이 위대한 음악가의 생가에서, 그것도 비 오는 날에 이 곡을 들을 수 있다는 행복감에 젖은 채, 나는 쇼팽의 아름다운 우민(憂悶-근심과 번민)을 귀 기울여 들었다.(*마요르카: 지중해에 있는 섬. 조르주 상드: 프랑스의 여류 소설가1804–1876 / 쇼팽 1810~1849)
연주를 마친 여사는 비에 젖은 창밖의 정원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보았다. 무언가에 생각을 잠긴 듯한 그녀의 옆모습은 실로 인상적이었다. 그로부터 이미 열두 해가 지난 지금도, 나는 그때의 장면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글 쓴 연도 1981년)
젤라조바 볼라를 떠난 차 안에서, 나는 방금 맛본 감동을 적어 보겠다며 칠언절구 흉내를 내어 보았다.
田園続所楽聖家 (田園の続く所楽聖の家)
전원이 이어진 깊은 곳, 음악 성인의 집
秋雨頻至湿庭花 (秋雨頻に至りて庭花を湿おす) 가을비 잦아 뜰의 꽃을 적시고
弹人措手静仰天 (弾ずる人手を措きて静かに天を仰ぐ)연주자는 손을 멈추어 고요히 하늘을 우러르니
四家内外悉忘我 (四窓の内外悉く我を忘る) 사방 창 안팎의, 모두를 무아에 빠지게 한다
나는 때때로 서재에 틀어박혀 쇼팽이나 모차르트, 혹은 베토벤을 들으며 밤 시간을 보내곤 한다. 모차르트에게서는 끝없이 밝은, 하늘에서 내려온 듯한 묘음을 듣고, 베토벤에게서는 혼을 뒤흔들 만큼의 용기를 얻으며, 쇼팽에게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고요한 평안을 얻는다.
사람을 만드는 것은 사상(思想) 보다는 오히려 체질이 더 중요하다고들 한다. 쇼팽 연주가로 명성이 높았던 코르토는 “피아노를 잘 치는 것 자체는 많은 사람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은 체질의 문제다” 라고 단언했다.
그런데 쇼팽은 매우 여린 체구였고, 젊은 나이에 폐병을 앓아 병과 싸우다 결국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채, 겨우 서른아홉 살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런 체질의 그가 육체적 건강을 얼마나 간절히 바랐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팽의 음악을 들을 때면, 그의 병약함이 떠오르는 일은 조금도 없고, 오히려 건강한 나 자신이 그의 음악을 통해 삶의 위안을 얻는다.
생각해 보면, 그의 내면에 깃든 ‘음악’에 대한 순수하면서도 비정상적일 만큼 강인한 힘은, 보통 사람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을 것이다. 바로 그 강인함이, 듣는 우리에게 평안을 주는 것이 아닐까. 나는 오늘도 비교적 건강한 몸으로, 이따금 이렇게 쇼팽을 들으며 음악의 존귀함을 음미하고, 마음 따뜻해지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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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니시나 요시오 선생님을 기리다
니시나 요시오(仁科芳雄1890~1951) 선생은 일본 물리학계의 태두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교육자이기도 했다. 그의 문하에는 유카와
(湯川)박사, 도모나가(朝永)박사 등 노벨상을 받은 대가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뛰어난 인재들이 배출되었기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이 니시나 선생은 내가 입학하기 3년 전인 다이쇼 7년(1918년)의 도쿄대 졸업생이어서, 내 대학 보증인으로 삼기에는 상식적으로 너무 젊었다.
사실 내가 도쿄대 응용화학과에 입학할 당시, 보증인으로는 아버지가 이미 내정해 두었던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당시 정계에서 유명한 기노시타 의원(木下代議士)이었다. 그러나 젊었던 나는 그에 대해 반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보증인을 젊은 사람으로 세우려면 학업이 매우 뛰어나지 않고서는 아버지가 반대할 것이 분명했으므로, 나는 매형 히라야마(平山)의 지인인 니시나(仁科芳雄1890~1951) 선생을 선택했다.
그러나 부탁은 내가 직접 가서 해야 한다고 했다. 할 수 없이 붉은 기와의 공학부 교실 지하 실험실로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은 “나 같은 젊은 사람이 보증인이 될 수는 없어”라며 즉각 거절하셨다. 백방으로 간청했지만 끝내 들어주시지 않았다.
그때 당시의 나로서는 좀처럼 마련하기 힘든 3엔이라는 거금을 들여 오카노 에이센(岡埜栄泉)의 양갱을 사가지고 가서, 어쨌든 이것만은 두고 가자며 억지로 내밀고 돌아서려는데, 선생님이 나를 불러 세우시며 “어쩔 수 없군. 그럼 보증인이 되어 주지.” 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하여 젊은 보증인을 얻게 된 나는 크게 기뻐하였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선생님은 둘도 없는 양갱 애호가였다고 한다. 역시나 그 선생님조차도 이 양갱의 매력 앞에서는 결심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나는 그 점이 참으로 흐뭇하게 느껴졌다.
그로부터 1년쯤 지나 대학에서 보증인 날인이 필요한 서류가 보내져 왔다. 선생님을 찾아갔더니, 선생님은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아마도 2~3년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무책임한 보증인이라 생각되기도 했지만, 대학에 사정을 설명해 부탁한 끝에 내 아버지의 도장만으로 처리해 주게 되었다.
아마도 쇼와 15년(1940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일본 학회의 회장 자격으로 당시 조선의 경성에 오신다고 했다. 그리고는 금강산을 보고 싶다고 하셨다. 나는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어, 선생님과 같은 제6고등학교(六高: 岡山市소재) 출신인 하마무라 기술사(浜村技師)가 대신 선생님을 안내해 드렸다. 전쟁은 점점 격화되어 정세가 일본에 매우 불리해져 가던 때였다.
내가 상경했을 때 선생님을 이화학연구소(理化学研究所: 東京소재)로 찾아뵈었더니, 선생님은 몹시 열중하여, 지금 말하자면 원자폭탄에 해당하는 연구를 하고 계셨던 듯하다. 그때는 그런 이야기를 직접 들려주시지는 않았지만, 전후에 전해 들은 바로는 연구도 거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러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의 원자폭탄보다 먼저 미국이 이를 완성하여, 그것이 곧 쇼와 20년 8월 6일의 히로시마 원자폭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선생님은 이 일을 일본 연구자 집단의 부덕(不德)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기시고, 정말로 할복까지 각오하고 계셨다고 하니 이는 참으로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실상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신 뒤, 원자력 학자가 아니고서는 피폭지의 수습은 도저히 해낼 수 없다고 생각하시어 뜻을 바꾸고, 패배를 받아들이되 끝내 할복은 하지 않으셨다고 전해 들었다.
나는 쇼와 22년(1947년) 여름, 북조선에서의 억류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이후 오노다 시멘트의 사장이 되어 은행 업무로 다니다가 선생님을 뵙게 된 적이 있었다. 그후 어느 날, 일본은행에서 고향 선배인 이치마다 총재를 찾아뵙고자 3층 복도에 서 있었는데, 그곳에 니시나 선생님이 계셨다. 선생님은 “이치마다(一万田尚登 いちまだ ひさと1893~1984) 총재를 만나려고 여섯 번이나 찾아왔지만 만나 주지 않아 오늘이 일곱 번째라고 말씀하셨다.
이치마다 씨는 평소부터 같은 고향·같은 학교 출신인 나에게는 비서실 등의 소개는 필요 없으니, 그냥 문을 두드리고 바로 들어오라고 했기 때문에 이때만큼은 그 말대로 실행하여, 니시나 선생님을 모시고 총재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야기는 불과 몇 분 만에 정리되었고, 당시로서는 상당한 액수의 융자가 이화학연구소에 이루어졌다. 선생님도 몹시 기뻐하셨다.
이런 일도 계기가 되어 니시나 선생님과의 교분은 더욱 깊어졌으나, 선생님은 쇼와 26년(1951년) 1월에 별세하셨고, 나로서도 참으로 가슴 아프게 슬퍼했던 기억이 있다. 그 뒤 선생님의 둘째 아들인 니나시 고지로(仁科 浩二郎) 군도 오노다 시멘트에 입사했지만, 요청을 받아 대학 교수로 전향하여, 현재는 도쿄공업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니시나 선생님은 적어도 앞으로 10년은 더 살아 계셨어야 할 분이었다.
"한국 내 마음의 고향" 제5장 잊을 수 없는 사람들 - 과단과 선견지명
● 31 "시게미츠 외무상"의 알려지지 않은 일면
시게미츠(重光 葵 しげみつまもる1887~ 1957) 외상은 나보다 아홉 살 연상이었던 분이다. 외교관으로서도, 정치가로서도 세상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인물이었다. 내 아버지가 열일곱‧열여덟 살 무렵, 고향인 시게오카촌(重岡村)의 조역(助役)을 맡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당시 군청 소재지였던 오이타현 오노군 미에쵸(大分県大野郡三重町)에 있는 군청에 자주 출입하셨다고 한다.
그 시절 시골에서는 바둑을 두는 사람이 드물었던 모양이라, 군수 관사로 불려가 군수의 바둑 상대를 맡곤 했다고 한다. 그때가 메이지 22년(1889년) 무렵이었는데, 바둑을 두고 있는 도중에 옆방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그렇게 세상에 태어난 아이가 바로 시게미츠 씨였다는 것이다.
그런 인연으로 아버지는 시게미츠(重光) 씨를 대단히 편애하셨고, 시게미츠 씨가 점차 출세해 가는 모습을 신문 기사에서 보실 때마다 마치 자신의 일인 양 기뻐하셨다. 그 영향으로 나 역시 어쩐지 시게미츠 씨를 존경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어딘가 같은 집안 사람인 듯한 친근함까지 느끼고 있었다.
전후에 시게미츠 씨가 정계에 진출해 활약하시게 되었을 무렵에는, 내가 이미 오노다 시멘트의 사장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때로는 그분 댁을 찾아뵙기도 하고, 때로는 시게미츠 씨 본인께서도 나의 누추한 집을 찾아오시기도 하여, 비교적 친밀한 교분을 나누게 되었다.
시게미츠(重光) 씨가 민정당(民政党) 총재가 되었을 무렵의 일이다. 간사장이던 오마(大麻) 씨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훌륭한 총재이시긴 한데, 아무래도 당원이나 의원(代議士)들에게 너무 무뚝뚝하셔서 곤란합니다.” 라는 상당히 고민이 깊어 보이는 말투였다. 마침 그 당시 의원이면서 시게미츠 씨의 비서 역할도 맡고 있었고, 최근에 별세한 소노다 스나오(園田 直そのだすなお1913~1984) 외상 역시 이 ‘무뚝뚝함’을 어떻게든 내가 직접 말씀드려 달라고 부탁해 왔다.
하지만 나로서도 대선배인 시게미츠 씨에게 그런 이야기를 차마 할 수가 없어,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차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미 고인이 된 한 거물 정치인의 부인의 장례식에 나도 조문을 갔는데, 막 퇴장하려는 즈음에 다른 대신들도 마침 돌아가는 때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정치가다운 상냥한 표정을 지으며 퇴장해 나갔다.
그 사이에 시게미츠(重光) 씨도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예전과 다름없이 벌레 씹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어, 그의 무뚝뚝함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얼마쯤 지난 뒤, 어떤 자리에서 시게미츠 씨와 나 둘만이 함께하게 되는 기회가 있었다. 그때 마침 함께 있던 한 여성에게는 시게미츠 씨가 의외로 상당히 상냥한 태도를 보였기에, 나로서는 ‘아, 이분도 이런 때가 있긴 있구나’ 하고 속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후 문득 소노다(園田) 씨에게서 부탁받았던 일이 떠올라, 시게미츠 씨를 뵈었을 때 이렇게 직언했다. “사람들로부터 선생님은 대단히 무뚝뚝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만, 지난번 장례식에서 퇴장하실 때의 무뚝뚝함은 특히 두드러졌습니다.” 그러자 시게미츠 씨는 다소 불쾌한 기색을 띠며, “그건 내 타고난 성격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라고 단호하게 말하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선생님께서 며칠 전 제 앞에서 한 여성에게 보여 주신 그 상냥한 태도는 참으로 훌륭했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시게미츠(重光) 씨도 완전히 한 수 접은 듯,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노다(園田) 씨를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시게미츠 씨의 무뚝뚝함이 정말 많이 좋아졌습니다.”
라며 과분할 정도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도 했다.
시게미츠 씨라는 인물은 말하자면 당시 외교관의 전형이라 할 만한 사람으로, 일거수일투족에서 언제나 외교관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외교관으로서의 공적(功績)은 말할 것도 없고, 글재주 또한 뛰어나 문필에 능했으며, 한시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의 저서 '쇼와의 동란(昭和の動乱)' 은 한 시대를 대표하는 명저라 해도 손색이 없다. 그처럼 큰 뜻을 품은 채 너무도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은, 참으로 일본에게 커다란 손실이라 생각된다.
(*重光 葵 しげみつ まもる1887~ 1957)
"한국 내 마음의 고향" 제5장 잊을 수 없는 사람들 - 과단과 선견지명
● 32. 과묵의 "후타바야마(双葉山)”
[*双葉山(ふたばやま): 일본 스모 역사에서 전설적인 요코즈나. 본명: 定次 龝吉 (さだじ あきよし) 1912~1968 大分県 宇佐市 출생. 타츠나미(辰巳) 도장소속. 제35대 요코즈나. 연승기록 1936년 1월 7일~1939년 1월 3일 약3년 간 69연승]
나는 쇼와 27년(1952년)부터 약 5년 동안 도키쓰카제(時津風) 도장의 후원회장을 맡아 활동했다. 도키쓰카제란, 한때 69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명력사(名力士) 후타바야마(双葉山)를 말하는데,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였다. 당시의 도키쓰카제 도장은 마쿠우치(幕内: 상위등급 스모선수) 역사가(力士) 8명, 주료(十両: 스모시합에 출전 가능등급) 역사(力士)가 여러명이나 되는 등, 전체 인원이 110명에 가까운 스모계(角界)에서도 손꼽히는 대규모 도장이었다.
나는 본래 스모(角力)에는 완전히 문외한이었지만, 그렇다고 스모 경기를 보는 것을 싫어한 적은 없다. 특히 나의 아버지는 오이타현 우메마치(宇目町)라는 시골 마을에서 손꼽히는 씨름꾼이었기 때문에, 때로는 집 앞마당에서 동네의 장사들과 씨름을 벌이는 아버지의 모습을 본 기억도 있다. 도키쓰카제는 나와 같은 오이타현 출신이어서, 예로부터 고향 사람이 후원회장을 맡는 것이 일종의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 후타바야마, 즉 도키쓰카제라는 사람은 대단히 말수가 적은 인물이었다. 가끔씩 미소를 지을 뿐, 좀처럼 입을 여는 법이 없었다. 물론 도장의 훈련에는 대단히 열심이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내 연습장에는 나와 있었지만, 훈련 그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간섭을 하지 않았다. 비평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생각나는 대로 “사범님, 그렇게 계속 말없이 계시지 말고, 때로는 지도를 해 주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하고 감히 의견을 말한 적이 있다. 그러자 사범의 대답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아니요, 스모라는 것은 가르쳐 준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 깨닫는 것 말고는 실력을 늘릴 방법이 없습니다.” 그는 그렇게 단언하곤 했다.
우리와는 달리 미타라이 다쓰오(御手洗辰雄1895~1975)라는 대신문 기자가 있었는데, 이 사람 역시 오이타현 출신으로 후타바야마 세키(双葉山関)와는 젊은 시절부터 친분이 있었고, 스모 도장에도 자주 드나들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 사람 또한 도키쓰카제(時津風)에게 여러모로 충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점에 관해서만큼은 그는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時津風=후타바야마의 은퇴 후 지도자 시절의 이름. 時津風部屋=후타바야마가 이끌던 스모 도장)
어느 날 도키쓰카제는 나를 향해, 머지않아 도키쓰카제 도장을 신축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계획이라는 것이 당시로서는 실로 터무니없이 큰 규모로, 오늘날 지을 수 있는 대형 도장들과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의 규모였다. 그 시절의 세상 형편을 고려해 보면, 나로서는 도저히 찬성하기 어려운 규모였다.
내가 크게 난색을 표하자, 그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아니요, 괜찮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하고 태연하게 단언했다. 자세히 들어 보니, 훨씬 이전부터 직접 후원자와 거래처들을 찾아다니며 건축비에 대해서는 이미 정확한 재정적 계산을 세워 두고 있었다. 게다가 목재는 어디서 조달할지, 철물은 어디서 구할지, 토목 공사와 장인들의 지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절차를 빈틈없이 짜 둔 뒤에 꺼낸 이야기였다.
우리로서는 더 이상 의견을 보탤 여지가 전혀 없을 만큼, 모든 준비를 완벽히 마친 후의 ‘상담’이었던 것이다. 후타바야마라는 사람은 그렇게나 말수가 적었지만, 두뇌의 작동은 참으로 눈물겹게도 빼어났으며, 명력사(名力士)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을 새삼 절감할 수 있었다.
69연승이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당시에는 한 차례의 경기가 10일간이었고, 게다가 연 3회 개최하던 시대였으니, 거의 2년 가까이 계속해서 이겨야만 가능한 기록이었다. 오늘날의 연승과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게다가 그에게는 왼쪽 눈 실명이라는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 온 그 실명을 안고서 이뤄낸 69연승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점에 대해서만큼은 적어도 나에게 단 한마디도 내비친 적이 없었다. 그가 실명이라는 사실조차도, 나중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처음 알았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해서 도키쓰카제 오야카타(親方)가 전혀 정 없는 사람인가 하면, 또 그렇지도 않다. 연회 자리에서 술이 한 잔 돌기 시작하면, 꽤나 운치 있는 농담을 툭툭 던지곤 했다. 무엇인가를 베개 삼아 들고 이리저리 끌며 추는 춤 같은 것도, 참으로 솜씨가 몸에 밴 모습이었다.
자광존(慈光尊)에 귀의하던 무렵, 후타바야마는 한때 정신적으로 깊이 빠졌던 시기가 있었다. 이때 그에게 격려의 말을 보내 준 야스오카(安岡) 선생에 대해, 그는 “아직 참된 평정·완성의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라는 뜻의 말을 전했고, 야스오카 선생에게서 배운 경구(警句)를 전보로 보내 유명해진 일이 있다. 내가 그를 오래 접하며 받은 인상 또한, 이 경구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한국, 내 마음의 고향" 제6장 외전 · 안도 도요로쿠 (外伝・安藤豊禄) -317p-
※ 일본적 경영자의 전형 (신시대를 이끄는 일본적 경영자의 전형, '인물왕래(人物往来)' 1957년 12월호), 도요로쿠 씨의 한국론 '경제왕래사 사장 시모무라 료이치(経済住来社長・下村亮一) 평론> 미수(米寿)의 기개 <원서방 사장 나루미 야스시 평론(原書房社長, 成美恭評)> -316p-
"한국 내 마음의 고향" 제6장 외전・안도 토요로쿠 - 일본적 경영자의 전형
● 33 일본적 경영자의 전형
안도 도요로쿠는 작년(쇼와 37년, 1962년) 가을부터 연말에 이르기까지의 짧은 기간 동안 두 차례나 한국을 방문했다. 처음에는 우에무라 고고로(植村甲午郎1894~1978)를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의 부단장 자격으로였고, 귀국한 뒤에는 이번에는 스스로 단장이 되어, 연말도 임박한 시점에 서울로 날아갔다. 이 사실만 보아도, 그가 한일 경제 협력에 대해 남다른 관심과 열의를 품고 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한국에 특별한 흥미를 갖는 것도, 일견 쉽게 수긍할 수 있는 일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청춘 시절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의 수많은 추억이 그곳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다이쇼 10년(1921년) 도쿄대학 응용화학과를 졸업하자마자 오노다(小野田)에 입사했는데, 독일 유학에서 귀국한 직후, 자회사인 조선 오노다로 파견되어 종전 이후까지 조선에 머물러 있었다.
일본 경제가 전시 체제로 이행하기 전까지, 오노다는 경쟁사인 아사노 시멘트(浅野セメント)를 축으로 한 카르텔 바깥에 고립되어, 그 카르텔과 치열한 공방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 오노다(朝鮮小野田)는 모회사에게 있어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도 했다. 즉, 오노다는 통제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조선 오노다의 제품을 일본으로 반입하여, 카르텔 측의 가격을 무너뜨리려 했던 것이다.
이에 맞서 반격을 위해, 카르텔 측은 제품을 조선으로 반입해 덤핑 판매를 감행함으로써, 조선 오노다의 기반을 위협했다. 이와 같은 격렬한 공방이 이어지는 와중에, 안도는 경영자로서의 인간 형성기를 보내게 되었다. 조선은 안도에게 있어 참으로 옛 인연이 깃든 땅이었으며, 그가 그곳에 향수에 가까운 감정을 품고 있다 해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한국 내 마음의 고향" 제6장 외전・안도 토요로쿠 - 일본적 경영자의 전형
● 33-1 조선에서 혹독하게 단련된 근성과 배짱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조선은 쓴 체험의 땅이기도 하다. 그는 종전 직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북조선군에게 붙잡혀 억류되는 신세가 되었다. 당시 그가 조선 오노다의 전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시절을 회고하며 “사람은 한 번 결심을 하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도저히 안 되겠다고 판단되면, 오히려 그 뒤로는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기간 동안 그는 여러 차례 생명의 위험에 직면했던 것이다.
또한 조선 오노다의 공장들은 모두 접수되었고, 이로 인해 오노다는 월산 능력 고작 7만 톤에 불과한 소기업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당시 오노다 왕국의 부활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젊은 열정을 걸고 회사의 발전에 모든 것을 쏟아부어 왔던 안도에게 이것은 틀림없이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와 같은 종류의 충격은, 그것을 겪은 사람의 인생관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만큼 심각한 것이며, 특히 경영 철학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전전(戰前), 해외(外地)에서 제조업을 경영하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아마도 두 번 다시 외지에서 거액의 고정 투자를 필요로 하는 사업에는 손을 대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리고 국제 정세에 대한 지식을 조금만이라도 갖추고 있다면, 최저 수준의 저개발국이나 신흥국에서 외국계 기업이 맞게 되는 운명을 곧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조선에서 뼈속까지 새겨질 만큼의 뼈아픈 체험을 한 안도가, 이제 와서 다시 한일 협력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어쩌면 다소 기이한 인상을 줄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것은 일반적인 경영자의 계산이나 상식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동기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안도 특유의 ‘옵티미즘(optimism, 낙관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한국 내 마음의 고향" 제6장 외전 안도 토요로쿠 - 일본적 경영자의 전형
● 33-2. 생사일여 인식에서 비롯된 낙관주의
안도의 주변에는 언제나 밝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고, 그것은 때로 그를 유머러스한 인물로 인식하게 만들 정도였다. 이를테면 팔방미인(八面玲瓏)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분위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는 안도의 타고난 기질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소년 시절에 두 차례나 죽을 뻔했던 비정상적인 체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고향인 오이타의 시골에서 자랐다. 생가 옆으로 강이 흘러 그의 놀이터가 되었는데, 어느 해 여름 홍수 뒤에 부모가 엄하게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흙탕물로 불어난 급류에 뛰어들었다가 순식간에 떠내려가고 말았다. 그때 그는 한 번은 체념한 듯 눈을 감았지만, 다시 눈을 떠보니 가슴께에 강가의 나뭇가지가 걸려 있었고, 그것에 매달려 아슬아슬한 순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이듬해 여름이었다. 같은 강에서 수영을 하던 중 다리에 경련이 일어나 급류 한가운데서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역시 죽음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다행히도 구조되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 두 번의 체험을 통해 그가 도달한 결론은, 그의 말대로 옮기자면 “죽는다는 것은, 어쩐지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즉 인간에게 있어 최대의 공포인 ‘죽음’의 정체를 그는 이미 철저히 확인해 버린 셈이다. 이는 ‘죽음’과 결별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삶’과 한층 더 친숙해지는 낙관주의가 생겨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는 종교가 취하는 방식과는 정반대이며, 더 중요한 점은 그 귀결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삶’의 정체를 꿰뚫어봄으로써 '사생일여(死生一如)'의 경지에 이르려는 노력이 종교의 방법이고, 그 귀결이 일종의 무상감이라면, 안도가 얻은 것은 낙천주의였기 때문이다. 그 직관적인 낙천주의는 중년에 이르러 북조선군에게 붙잡히는 체험을 거치면서 마침내 확신으로 굳어졌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는 그의 경영 철학에도 반드시 투영되어 있을 터이다. 즉 삶의 영위란 덧없는 것이지만, 덧없기 때문에야말로 오히려 더욱 힘을 다해 노력하게 된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한때 조선에서 가장 혹독한 체험을 겪었던 그가, 지금에 와서 한일 협력에 누구보다도 큰 열의를 보이고 있는 비밀은, 실은 바로 거기에 있다.
한국의 정치 정세가 불안정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설령 정부의 지원이 있다 하더라도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진출 의욕이 쉽게 생기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오히려 상식적인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정을 충분히 인식한 상태에서, 현시점의 요구에 근거해 전력을 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한일 경제 협력에 대한 그의 심정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설령 만일의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대국적으로 보았을 때 그것은 한국 민족에게 플러스가 될 것이라는 것이 그의 사고방식일 것이다. 이 점에서 정부의 재정 지출에 기대어 한일 협력을 떠들썩하게 부추기는 다른 재계 인사들이나, 소비재 수출로 한몫 잡으려는 계산을 굴리고 있는 한국 로비스트들과는 그의 동기는 전혀 다르다.
"한국 내 마음의 고향" 제6장 외전 안도 토요로쿠 - 일본적 경영자의 전형
● 33-3. "인간 존중"의 경영자
안도는 예전부터 후진국 원조, 혹은 개발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쇼와 32년(1957년) 여름에도 뉴욕에서 열린 '저개발국 공업경영회의' 에 재계를 대표하여 참석한 바 있다. 이 역시 안도 개인의 관심과는 별도로, 외무성과 통산성 양 부처가 인선에 고심한 끝에 그에게 백우(白羽)의 화살을 꽂은 결과였다. [*白羽の矢(しらはのや)を立てる : 여러 후보 가운데서 특정 인물을 골라 지명하다라는 뜻으로, 옛날에는 제물이나 희생자를 고를 때 그 집 문 앞에 '흰 깃이 달린 화살(白羽の矢)을 세워 표시했다고 함]
그 이유는, 저개발국과의 경제 협력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관계와 유사한 측면을 지니고 있는데, 오노다(小野田)는 60개 사(현재는 백여 개 사)에 이르는 중소 자회사를 거느리면서도 그 운영이 극히 원활하다는 점에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주목되어야 할 것은, 전후 오노다가 보여준 눈부신 부흥은 근본적으로 후진국의 경제개발 방식을 그대로 적용한 데 그 핵심이 있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오노다는 해외에 보유하고 있던 시설을 모두 상실하여, 전성기 생산능력의 3분의 1, 즉 월산 7만 톤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게다가 해외 철수(귀환)가 시작되자 직원들이 속속 귀국하면서 인원은 늘어나기만 했다. 귀국 후 사장에 취임한 안도는 특유의 낙관주의로, 이러한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귀환 직원 가운데 단 한 사람도 해고하지 않고 모두 끌어안는 결단을 내렸다.
그러나 사람이 남아도는 이상, 사업을 확대하지 않고서는 먹고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맹렬하고 과감한 적극 경영 방침이 내세워졌다. 먼저 안도는 시멘트 기업에 숨겨진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 타사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대규모 연구진을 정비했다. 그리고 안도가 예상한 대로, 이 연구진 속에서 훗날 개량 소성법을 비롯한 수많은 발명과 특허가 탄생하여, 오노다 발전의 강력한 추진력이 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18년 후, 오노다의 생산능력은 전전(戰前)의 약 2.5배, 연산 600만 톤에 이르렀다. 종전 시점과 비교하면 약 7배 이상으로 불어난 셈이다. 그뿐만 아니라, 유력 기업인 오노다비료를 비롯해 60개에 달하는 자회사를 거느리게 되어, 문자 그대로 ‘오노다 기업집단'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본업인 시멘트 사업만 놓고 보아도 세계 일류 기업이라 할 만하지만, 이들 산하 사업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미·영에도 이만한 기업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그 발전의 기동력(起動力)은, 노동력이 남아돌았기 때문에 사업을 확장하거나 새로운 사업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에 있었다.
즉, 이는 현재의 후진국이 처한 상황과 정확히 들어맞는 조건이었던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 미국으로부터 이른바 실용주의를 토대로 한 ‘경영학'이라는 것이 수입되어, 일본에서도 크게 유행하고 있지만, 아마 그 교과서를 아무리 뒤져봐도 ‘안도 방식’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경영학'이라는 것의 본질은, '낡아빠진 자본주의'에 ‘뉴 모드’라는 포장만 씌워 다시 내다 파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는 기업이나 경영자가 지녀야 할 사명감이 완전히 파뭍혀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착취주의의 미화’에 지나지 않으며, 기껏해야 ‘옛 자본가 기질에 대한 추종’ 정도의 것일 뿐이다.
"한국 내 마음의 고향" 제6장 외전・안도 토요로쿠 - 일본적 경영자의 전형
● 33-4 행동을 떠받치는 사명감
일본 경제계는 자유화의 완료와 OECD 가입을 통해 새로운 차원에 도달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후진국 원조의 성패가 일본의 경영발전에 있어 중요한 모멘트가 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일본 재계에 이러한 새로운 현실에 대응해 나갈 만큼의 능력과 정신을 갖춘 인물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일시적인 착상이나 성공이 지나치게 떠받들어지고, 여기에 경영학의 몇 가지 규칙이 덧붙여져 스스로 자만하게 되는 풍토 속에서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인물을 길러내기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은 경계할 만하다. 그런 분위기는 국내에서는 통할지 몰라도, 대외적으로는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미국의 대외 원조가 그처럼 막대한 달러를 투입하고도 거의 성과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미국 재계의 풍토 자체에도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경영학이나 골프 같은 ‘멋들어진’ 아메리칸 무드 속에서는, 다른 민족의 장래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더 나아가 무(無)에서 유(有)를 창출해 내는 창조적인 경영자가 탄생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이 아닐까.
한일 경제협력은 국교 문제와 얽혀 있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이 OECD에 가입한 이후 처음으로 맞는 본격적인 대외 경제협력이자 후진국 원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한국의 경제 구조를 근대화하고 고도화할 수 있을지 여부는, 결국 일본 경제의 발전이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안도와 같은 인물이 한일 협력에 열의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든든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해 온 바와 같이, 그는 한국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재계 인물이며, 또한 앞에서 말한 의미에서의 낙관론자인 동시에, 현대 기업의 존재 방식으로 보아 거의 엄격론자에 가깝다고 할 만큼 강한 사명감을 지닌 인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전후 자사의 발전 전략으로 신흥국 방식을 채택하여, 마침내 눈부신 성공을 거둔 인물이기도 하다.
아니, 한일 협력에만 국한될 것이 아니라, 후진국과의 경제 협력 전반에 있어 앞으로 그가 더욱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리라는 점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안도는 오노다 중흥의 원조라 할 만한 존재로, 당분간은 그의 시대(쇼와 38년:1963년)가 계속될 것이 확실하지만, 새로운 단계에 접어든 재계가 그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려는 시대가 본격적으로 막을 올렸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요시미 아키라 평론가의 평론. 吉見阜評, 評論家)
[일본적 경영자의 전형 (신시대를 이끄는 일본적 경영자의 전형, '인물왕래(人物往来)' 1957년 12월호]
"한국 내 마음의 고향" 제6장 외전•안도 토요로쿠" (外伝・安藤豊禄)
● 34 토요로쿠(豊祿) 씨의 한국론
요즘의 한국 정세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드물다. (쇼와 55년 : 1980년) 신문을 읽어 보아도 도무지 요령을 잡을 수 없고, 무엇이 진실인지 파악하기가 극히 어렵다. 하물며 외무성 고위 관료나 관방 관계자들의 발언에 이르면, 그 일본어 표현 자체가 난해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서 나름대로 어떻게든 결론을 내려 보았다.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김대중이라는 인물은 세간에서 떠들어대는 것만큼의 거물 정치가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다만 그가 이른바 반체제 인사로 불리는 것은 반군(反軍)이라는 의미이지, 반자유주의자는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단언컨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결코 반미(反美) 성향의 인물은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
이상이 내가 나름대로 도출한 결론이다. 어차피 한국의 권력자들의 사정에 따라 좌우될 문제이니, 일본 측이 지나치게 끼어들 경우 국제 관계상 내정 간섭이 되는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언론인으로서라면 적어도 이 사건에 대해 올바른 평가와 인식만큼은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문득 떠오른 사람이, 한국에 반생(半生) 25년을 바친 재계의 원로 안도 도요로쿠(安藤豊禄 1897~1990) 씨였다.
안도 씨는 대학을 졸업한 뒤 전 생애를 오노다 시멘트에 바친 인물이다.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고 전성기를 누리던 다이쇼 11년(1922년) 부터, 패전 후 쇼와 22년(1947년)까지의 4분의 1세기를 한국인들과 함께 살아온 사람으로, 이 사람이 들려주는 한국 이야기는 그만한 무게를 지닌다. 더구나 이 사람만큼 한국인을 몸으로 사랑해 온 일본인도 드물다. 일본인이 한국인을 멸시하던 시대에 있어서 말이다.
이 안도 씨가 최근에 '이외(理外)의 이치' 라는 제목으로, 구스모토 겐키치(楠本憲吉1919~ 1988) 씨와의 대담집을 냈다는 사실을 알고, 나는 도저히 이것을 읽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알고자 했던 김대중에 대한 평가는 이 책 안에는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담집은 곳곳에 구슬처럼 빛나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과 안도 씨 특유의 엄정한 인물론이, 마치 무의식중에 흘러나오듯이 담겨 있어, 단숨에 끝까지 읽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만들었다. 재계인 안도 씨와 나는 최근 십여 년 동안은 친밀하게 접하지 못해 왔다.
그러나 내게 남아 있는 인상만으로도, 이 정도로 폭넓은 식견 위에서 사업을 해 온 사람은 드물다고 느끼고 있었고, 기술자이면서도 언제나 국가적 판단이 사적 이해관계보다 우선한다는, 요즘 사람들에게서는 보기 힘든 국사(國士)적 풍격을 지닌 인물로 이해하고 있었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언제나 속된 논의에는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발언은 늘 독특하게 눈에 띄었는데, 그것은 대단히 음미할 만하고, 귀 기울여 들을 가치가 있는 말들이었다.
안도 씨는 그 저서 곳곳에서 한국인의 우수성을 역설하고 있다. 일본이 통치하던 시대에는 분명히 열심히 일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독립 이후의 한국은, 적어도 일본인보다 우수하며, 게다가 게으른 사람이 없다고 단언한다. 섬유 제품이나 세밀한 수작업 분야에서는 이미 일본이 뒤처지고 있고, 더 나아가 조선업 등에서도 엔진 같은 핵심을 제외하면, 값싸게 만드는 점에서는 일본이 패배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안도 씨는 최근에는 작년(*1979년)에 한국을 방문했다. 이때는 메이지의 원훈(元勲: 주 공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 10 16~ 1909 10 26)를 하얼빈 역두에서 사살한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의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 초청받아 간 것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 당시 이토 공은 67세였고, 물론 이토 역시 위대한 인물이었지만, 그를 저격한 서른 살의 안중근 쪽이 훨씬 상급의 인물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는 분명한 근거가 있어서 하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이토 공이 변을 당했을 당시, 이토 공을 수행하며 안내와 통역을 겸했던 사람이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清次郎)라는 인물이었다. 이 사람은 안중근의 저격 당시에도 이토 공 곁에 있었는데, 안의 총탄 세 발이 이토 공의 급소에 명중했고, 한 발은 다나카 씨의 다리에도 맞았다. 따라서 다나카 씨에게 안중근은 당연히 증오해야 할 인물일 터였다.
그러나 이 다나카 씨는 “세상에서 누가 가장 위대한 인간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언제나 망설임 없이 안중근이라고 대답하곤 했다고 한다. 다나카 세이지로라는 인물은 젊은 시절, 러일전쟁 당시 발트 함대의 위치를 이론적으로 추적해 밝혀내 이를 일본 해군에 알려준 뛰어난 인재였으며, 서른 살 무렵에는 이미 미쓰이물산 홍콩지점장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이후 그는 고토 신페이(後藤新平1857~ 1929)가 남만주철도(満鉄) 총재가 되자 초빙을 받아 만철 이사가 되었고, 나중에는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조사기관인 만철조사부(満鉄調査部)를 창설한 인물이기도 하다. 안도 씨는 이 다나카 씨로부터 오랫동안 사랑과 신임을 받았으며, 본인 또한 그를 깊이 존경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나카 씨의 안중근에 대한 평가는, 불과 2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에 형성된 것이었음에도 그만큼 강렬한 인상을 받은 결과였던 것이다. 또한 다나카 씨는 만철 시절 수많은 세계적 인물들과 접했지만, 끝내 안중근에 대한 평가만은 바꾸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안도 씨이기에 박 대통령(*朴正熙 1917 ~1979)과도 자주 만났다고 한다. 물론 일본의 총리들과도 교분이 깊어, 이케다(*池田勇人 いけだ はやと1899~1965), 기시(*岸信介 きし のぶすけ : 1896~1987), 사토(*佐藤栄作 さとう えいさく: 1901~1975년) 등과 특히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어떤 일본 총리와 비교해 보더라도 박 대통령 쪽이 훨씬 더 훌륭한 인물이었다고 그는 증언하고 있다. 특히 사토 총리에게는 “당신보다 박 대통령이 위입니다” 라고 거리낌 없이 직언했다고 하는데, 참으로 안도 씨다운 말이다.
이 박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최근 신문 지면에서 전두환의 말로 잠깐 언급된 바 있다. 그것은
“박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정권이 지나치게 장기화되었다” 라는 한마디였다. 이 말이 새 대통령상을 지향하는 전 씨 자신의 자기 경계의 말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박 정권 하에서의 여러 부패 사례를 비판한 것으로 보아야 할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어느 쪽이든, 자신이 한때 존경했던 지도자에 대해 던진 비판의 말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는 매우 깊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알고자 했던 김대중(金大中1924~ 2009)에 대한 인식은 이 저서 속에서는 끝내 알 수 없었다. 그것은 김대중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굳이 언급하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혹은 안도 씨의 시야 안에서는 그만큼 중요하게 평가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처럼 당시의 반역자였던 안중근을 독립의 아버지로, 또 위대한 인물의 전형으로서 찬미해 마지않던 사람이, 당대의 인물인 김대중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평가조차 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의식적으로 언급을 피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그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지금의 나로서는 아직 한국의 정치 상황을 완전히 풀어내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 안도 씨를 직접 찾아가,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묻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시모무라 료이치 평, '경제왕래' 사장)
[도요로쿠 씨의 한국론 '경제왕래사 사장 시모무라 료이치(経済住来社長・下村亮一) 평론]
"한국 내 마음의 고향" 제6장 외전 안도 토요로쿠 (外伝・安藤豊禄)
● 35 미수의 기개(米寿の気概)
안도 도요로쿠(安藤豊禄) 씨를 만난 것은 올해(*1984년) 5월 1일과 2일, 이틀간이었다. 인터뷰를 각각 두 시간씩 진행하고, 그 뒤의 회식 자리에서 나눈 대화를 포함하면 모두 여덟 시간에 이르는 동안, 나는 안도 씨의 인물됨의 크기와 나이를 초월한 젊은 기개에 일종의 기분 좋은 압도감을 느끼며, 시간 가는 줄도 잊고 있었다.
안도 씨는 다이쇼 11년(1922년) 봄부터 쇼와 22년(1947년) 여름까지 25년간을 한국에서의 회사 경영에 전념했으며, 종전 후에도 오노다의 재건에 힘을 쏟는 한편, 쇼와 51년(1976년)까지 한일경제협회의 부회장을 지냈다. 그에게 한국이란 제2의 조국이었다. 마음의 고향을 한국으로 삼은 이처럼 보기 드문 실업인의 육성을 직접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기록자로서 더없이 큰 행운이었다.
나는 올해 3월 멕시코와 미국을 여행하고 돌아온 직후였는데, 일멕(日墨), 일미(日米) 관계의 틀 속에서 멕시코를 올바르게 평가하려면 한국과의 비교가 하나의 지름길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해 왔다. 한국과 멕시코는 모두 신흥 공업국이며, 현재 막대한 대외 부채를 안고 악전고투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닮아 있다. 또한 한국은 북쪽의 소련·북한과, 멕시코는 북쪽의 거인 미국과 대치하고 있다는 점도 유사하다.
대통령의 권한이 막강한 관료 주도형 국가라는 점, 1인당 국민소득이 비슷하다는 점, 인구가 각국의 수도에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다는 점도 서로 닮아 있다.
다른 점이라면, 한국은 단일민족 국가인 반면 멕시코는 다민족 국가라는 점, 멕시코는 천연자원이 풍부하여 석유 생산 세계 7위, 은 생산은 세계 1위인 데 비해 한국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천연자원이 풍부하지 않다는 점이다.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 보면, 같은 유교 문화권에 속해 있고 단일민족이며, 근면한 노동력과 지적 능력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 있다는 점 등―이사 갈 수도 없는 이웃으로서의 숙명 속에 놓여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바로 이런 시점에 안도 씨와의 인터뷰가 이루어졌다. 60여 년에 걸쳐 한국과 인연을 맺어온 그가, 전쟁 전 한국에서의 자신의 체험을 어떻게 이야기하고, 일한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어떤 식견을 풀어놓을 것인가에 대해 나 자신도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다이쇼 11년(1922년), 불과 스물다섯의 나이에 오노다 시멘트 평양 공장에 부임한 안도 씨가 처음으로 생각한 것은 “조선을 어떻게 하면 훌륭한 나라로 만들 수 있을까”라는 문제였다고 한다. 이는 ‘만세 사건’(1919년 3·1 독립운동)이 일어난 이후이자, 한편으로는 관동대지진(1923 09 01) 당시의 조선인 학살 사건이 발생하기 전의 시기였다.
이후 25년 동안 그는 조선 오노다 시멘트를 일류 기업으로 키우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많은 한국인을 고용하는 과정에서 일본인과 차별 대우하는 데에 모순을 느끼고, 최소한 오노다만이라도 일한 직원의 수당을 동일한 수준으로 하자는 생각으로 끝까지 버텼다고 한다. 이 문제는 사내 규정 일부의 개정에 그쳤고 충분히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이 강직한 인물은 당시 조선총독부가 ‘창씨개명’이나 ‘황국신민서사 봉창(皇国臣民の誓詞奉唱)’ 등 한국의 풍속과 관습을 무시한 황국신민화 정책을 발표했을 때, 자신의 신변을 돌보지 않고 당국에 항의와 건의를 계속했다.
그렇다고 해서 안도 씨가 단순한 친한파였던 것은 아니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 통감 이래 일본 역대 총독의 업적을 무조건 비난하는 단순한 반무단파(反武断派)에 머문 인물도 아니었다. 압록강 수력 발전의 수풍댐 건설 공사로 대표되는 여러 행운을 배경으로, 오노다 시멘트의 비약적인 발전에 기여했고, 총력전 체제를 최전선의 현장에서 추진한 전사이기도 했다. 동시에 가장 깊은 차원에서 한국인의 마음과 접촉했던, 진정한 ‘지한파’라 부를 만한 선각자였다.
이와 같은 식견은 전후 한국의 독립과 부흥에 대해서도 일관되게 뜨거운 성원을 보내는 형태로 이어졌고, 윤(보선)·박(정희)·전(두환)각 대통령에게도, 일본의 요로에 대해서도 그때그때 거리낌 없이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오늘날 한국 국민의 기적적인 융기를 진심으로 기뻐하며, 그 비결은 민족적 자질의 우수성과 교육의 충실함에 있다고 단언한다.
氏は戦前の日本政府の硬直的対韓政策の中からは、心からなる協力がえられなかったけれども、 今こそ日韓の相互補完は可能であり、それが日本の繁栄につながるのだと明言する。八十八歳の米寿を迎えた現在も現役の気概にあふれ、先見性に満ちた経営論を展開する安藤氏。 その国士的相貌からは、夜の更けるのも忘れる程の尽きない知見が送り出るのであった。(一九八四年六月,原書房社長成瀬恭)
그는 전전(戰前) 일본 정부의 경직된 대(對)한국 정책 속에서는 진정한 협력을 얻을 수 없었지만, 지금이야말로 일한 상호 보완이 가능하며, 그것이 곧 일본의 번영으로 이어진다고 분명히 말한다. 여든여덟의 미수를 맞은 지금도 여전히 현역의 기개로 가득 차, 선견지명이 넘치는 경영론을 펼치는 안도 씨. 그 국사(國士)적인 풍모에서는 밤이 깊어가는 것도 잊을 만큼 끝없는 통찰이 쏟아져 나왔다. (1984년 6월, 원서방 사장 나루미 야스시 평론: 原書房 社長, 成美恭評)
[미수(米寿)의 기개 <원서방 사장 나루미 야스시 평론(原書房社長, 成美恭評) ]
36 〔약년표〕 〈안도 도요로쿠 · 오노다 시멘트 · 시대 상황〉
● 메이지 30년(1897년) 1월:부(父)히데요시, 모(母)지와의 장남으로 오이타현에서 출생 6월:교토제국대학 설립 10월: 금본위제 실시
● 메이지 36년(1903년) 4월: 오이타현 시게오카 심상소학교 입학 소학교 국정교과서 제도 확립 11월: 평민사 설립, '평민신문' 발간(비전론 주장)
● 메이지 43년(1910년) 4월: 오이타현 우스키 중학교 입학 3월: 입헌국민당 결성 5월: 대역사건 검거 개시 8월: 한일병합조약 조인(한국 병합), 조선총독부 설치
● 다이쇼 3년(1914년) 9월: 오이타현 사이키 중학교로 전학 1월: 중의원에서 시멘트 사건(시멘스 사건) 추궁 8월: 대독 선전포고(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 11월: 파나마 운하 개통
● 다이쇼4년(1915년) 4월:오이타 중학교졸업
9월: 구마모토 제5고등학교 입학 1월: 일본 정부, 위안스카이(袁世凱) 총통에게 대중국 21개조 요구 제시 12월: 주식시장 폭등 아인슈타인, 일반상대성이론 발표
● 다이쇼 7년(1918년) 7월: 구마모토 제5고등학교 졸업 9월: 도쿄제국대학 공학부 입학
2월: 오노다 시멘트, 직공 안교(安教) 시설로 공제회 제도 설치 4월: 군수공업동원법 공포
8월: 도야마현에서 쌀 소동(米騒動) 발생, 전국으로 확산 9월: 하라 다카시 내각 성립
● 다이쇼 8년(1919년) (도쿄제국대학 재학 중, 아사노 시멘트 견학) 11월: 오노다 시멘트 평양 지사 공장 완공 3월: 만세 사건 발생(3·1 독립운동) 6월: 베르사유 조약 조인
● 다이쇼 9년(1920년) (구 오이타 시멘트, 현 오노다 시멘트 쓰쿠미 공장에서 실습) 5월: 오노다 시멘트 전 공장 8시간 근무제 실시
3월: 니콜라옙스크 사건(尼港事件) 발생. 전후 공황 발생(제1차 세계대전 이후).이치카와 후사에 등, 신부인협회 설립 5월: 도쿄 우에노에서 일본 최초의 메이데이 개최 10월: 제1회 국세조사 실시 (총인구 7,689만 8,379명 / 내지 인구 5,596만 3,053명)
● 다이쇼 10년(1921년) 4월: 도쿄제국대학 공학부 졸업, 오노다 시멘트 입사 12월: 히라야마 쓰루코와 결혼 10월: 대일본노동총동맹 우애회를 ‘일본노동총동맹’으로 개칭 11월: 하라 다카시 총리 피살 12월: 중국공산당 결성
● 다이쇼 11년(1922년) 5월: 평양지사 근무(조선) 장남 히데이치 출생 12월: 안중근 의사의 생가 방문 2월: 해군 군비 제한 조약 성립 3월: 전국수평사 창립 4월: 일본농민조합 결성
● 다이쇼 12년(1923년) 9월: 간토 대지진 발생. 사망자 9만 명, 행방불명 4만 명. 도쿄에 계엄령 선포, 모라토리엄 실시. 조선인 학살 시작. 간토 대지진 복구를 위해 스미다강의 6개 교량에 오노다 시멘트 평양지사 제품 사용
● 쇼와 3년(1928년) 12월: 평양지사 가와우치 공장장 취임. 조선 오노다 시멘트 가와우치 공장, 유낙스(UNAX)식 소성로 완공. 2월: 제1회 대중(對中) 파견 실시 6월: 장작림 폭살 사건 발생. 7월: 미설치 전 현(縣)에 특고경찰 설치
● 쇼와 5년(1930년) 2월: 독일 유학(2년간) 5월: 베를린 공과대학에서 연구 4월: 런던 해군 군축조약 조인 통수권 간범 문제 발생 11월: 하마구치 오사치 총리 피격 쇼와 공황 격화
● 쇼와 6년(1931년) 5월: 오노다 시멘트 제조 창립 50주년 맞이
● 쇼와 7년(1932년) 1월: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름 (베를린→미국 경유) 2월: 이노우에 준노스케 피살 3월: ‘만주국’ 건국 선언, 단 다쿠마 피살 5월: 육·해군 장교들이 총리 관저 등을 습격,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 피살(5·15 사건) ‘만주국’ 승인(의정서 조인)
● 쇼와 10년(1935년) 6월: 조선 오노다 시멘트 제조 가와우치 공장장 취임 2월: 귀족원에서 미노베 다쓰키치의 ‘천황기관설’ 문제화 8월: 중국 공산당, 항일 선언(8·1 선언)
● 쇼와 14년(1939년) 9월: 조선 오노다 시멘트 제조 이사 취임 4월: 미곡배급통제법 공포
5월: 노몬한 사건 발생 7월: 국민징용령 공포
10월: 가격등통제령 공포 독일, 폴란드 침공→제2차 세계대전 발발
● 쇼와 15년(1940년) 6월: 오노다 시멘트 제조 평양지사 지배인, 조선 오노다 시멘트 제조 상무이사, 본점 지배인 취임 4월: 쌀·된장·간장·설탕·성냥 등 배급표(쿠폰) 제도 채택 결정. 7월: 제2차 고노에 내각 성립 9월: 일·독·이 삼국동맹 체결 10월: 대정익찬회 발족 11월: 대일본산업보국회 창립
● 쇼와 19년(1944년) 1월: 오노다 시멘트 제조 이사 취임 7월: 조선 오노다 시멘트 제조 전무이사 취임. 6월: 마리아나 해전 대패. 7월: 사이판섬 일본군 전멸, 도조 내각 총사퇴. 8월: 학동 소산(疎開) 실시, 가미카제 특공대 첫 출격. 11월: 마리아나 기지 미군 B-29 폭격기, 일본 본토 공습 개시
● 쇼와 20년(1945년) 8월: 조선에서 종전 맞음 (이후 2년간 북한에서 억류 생활) 4월: 미군 오키나와 상륙 (오키나와 수비대 전멸, 전사자 9만 명, 민간인 사망자 9만 명) 7월: 포츠담 선언 발표.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 포츠담 선언 수락. 11월: 재벌 해체 지령. 12월: 노동조합법 공포, 제1차 농지개혁 실시
● 쇼와 21년(1946년) 3월: 북조선 승호리 공업전문학교 교사로 근무 이 무렵부터 알루미나 시멘트 제조 시도. 1월: 천황 인간선언, GHQ 군국주의자 공직 추방령. 4월: 연합국 대일이사회 제1회 회합. 8월: 일본노동조합총동맹 결성. 10월: 제2차 농지개혁 관련 제 법령 공포
● 쇼와 22년(1947년) 4월: 알루미나 시멘트 연탄으로 급행열차 운행에 성공(북조선) 7월: 귀국 (평양 승호리에서 사원과 가족 19명과 함께 일본으로 귀환) 11월: 전무이사 겸 경영대표자 취임(사장 공석) 12월: 천황 폐하, 아치에쓰(阿哲) 공장 시찰. 3월: 교육기본법·학교교육법 공포. 4월: 6·3·3·4제 시행. 5월: 신헌법 시행. 8월: 최고재판소 발족. 10월: 국가공무원법 공포. 12월: 개정 민법 공포
● 쇼와 23년(1948년) 8월: 오노다 시멘트 제조 사장 취임. 6월: 쇼와덴코 사건 발생. 11월: 극동군사재판 판결(도쿄 재판) 12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 쇼와 27년(1952년) 3월: 시멘트협회 제3대 회장 취임. 4월: 오노다 시멘트 자본금 8억 엔→16억 엔 증자(쇼와 6년에 사명에서 ‘제조’ 두 글자를 삭제하여 사명 변경) 대일강화조약 발효. 5월: 메이데이 사건 발생
● 쇼와 28년(1953년) 9월: 통상산업성 수출입거래심의회 위원 위촉(쇼와 38년 8월까지)
2월: 오노다 시멘트 자본금 증자(32억 엔)
● 쇼와 31년(1956년) 8월: 시멘트협회 제5대 회장 취임. 4월: 천황·황후 양폐하, 오노다(小野田) 공장 시찰. 12월: 일·소 국교 회복, 일본의 유엔 가입이 공식 결정
● 쇼와 32년(1957년) 9월: 유엔 저개발국 개발회의 참석, 의장도 역임. 오노다 시멘트 자본금 증자(80억 엔) 8월: 미·일 안전보장위원회 발족
● 쇼와 34년(1959년) 일본화학회 회장 취임
4월: 통산성 공장입지조사심의회 위원(쇼와 42년 2월까지) 5월: 재경 오이타현인회 회장(쇼와 36년 4월까지) 12월: 오노다 시멘트 '도쿄연구소'를 중앙연구소로 개칭. 9월: 이세만 태풍으로 도카이 지방 대피해. 중·소 이념 대립 격화
● 쇼와 35년(1960년) 3월: 시멘트협회 제7대 회장 취임. 5월: 국토개발 간선자동차도 건설심의회 위원. 2월: 오노다 시멘트 자본금 증자(120억 엔) 5월: 미·일 안보투쟁, 대중운동 격화. 6월: 신 안보조약 자연 성립. 정부, 국민소득 배증계획(고도성장 정책) 결정. 훈장: 남수포장(藍綬褒章) 수훈
● 쇼와 36년(1961년) 7월: 일한경제협회 회장 취임(쇼와 52년 12월까지) 12월: 도쿄상공회의소 산업교육위원회 위원장(쇼와 45년 11월까지) 케네디 미국 대통령 취임. 한국에서 군사 쿠데타 발생
● 쇼와 37년(1962년) 12월: 제2차 한국경제시찰단 단장으로 방한(9월 제1차 방한 이후, 이후 2년마다 경제대표로 방한) 5월: 오노다 시멘트, 주식배당으로 자본금 160억 4천만 엔. 10월: 무역 자유화 진전. 11월: 일·중 LT무역 개시
● 쇼와 38년(1963년) 3월: 운수성 항만심의회 위원(쇼와 43년 6월까지) 9월: 일본상공회의소 일한경제특별위원회 위원장(쇼와 45년 3월까지) 12월: 오노다 시멘트 자본금 증자(200억 엔) 9월: 최고재판소, 마쓰카와 사건 상고 기각→ 피고 전원 무죄 확정. 한국 대통령에 박정희 당선. 케네디 미국 대통령 암살
● 쇼와 39년(1964년) 3월: 일본생산성본부 고문. 4월: 오노다 시멘트, 아테쓰(阿哲) 공장에서 중유 점적식 석회로 완성. 7월: 야하타 공장, 플라이애시 시멘트 제조 개시. 10월: 도카이도 신칸센 개통→도쿄 올림픽 개최. 11월: 공명당 결성. 12월: 제7차 한일회담 재개
● 쇼와 42년(1967년) 4월: 세계경제협의회 국제경영협력위원회 상임이사(쇼와 53년 3월까지) 건설성 건축심의회 위원(쇼와 46년 3월까지) 5월: 일본경제센터 이사·부회장. 6월: 오노다 시멘트, 현미경 관찰에 의한 클링커 소성 조건 및 시멘트 강도의 신속 추정법 완성. 1월: 총선에서 자민당, 득표율 기준 과반 미달(보수·혁신 세력 백중) 2월: 최초의 ‘건국기념일’ 시행
10월: 요시다 시게루 전 총리 사망, 전후 최초의 국장
● 쇼와 43년(1968년) 9월: 동유럽 경제시찰단으로 바르샤바 경제협력회의 참석 자카르타를 경제사절단으로 방문. 12월: 오노다 시멘트, 오후나토 공장 제5호 킬른 완성. 3월: 도쿄대 의학부 분규 표면화→이 해 전국 110개 대학으로 학생운동 확산. 10월: 가와바타 야스나리, 노벨문학상 수상
● 쇼와 44년(1969년) 4월: 훈2등 서보장(瑞宝章) 수훈. 9월: 일·네덜란드 경제회의 참석
2월: 오노다 시멘트 오노다 공장 내 ‘도쿠리 가마’, 야마구치현 지정 사적으로 지정. 1월: 도쿄대 분규, 야스다 강당에서 대규모 충돌. 11월: 사토 총리 방미, 미·일 공동성명(오키나와 1972년 반환 합의)
● 쇼와 45년(1970년) 2월: 건설성 도로심의회 위원(쇼와 53년 7월까지) 4월: 통산성 산업구조심의회 주택·도시산업부회 위원(쇼와 44년 9월까지) 6월: 운수성 운수정책심의회 위원
(쇼와 53년 12월까지) 4월: 오노다 시멘트, 일본 최초 콘크리트 파일 완성. 3월: 야하타제철·후지제철 합병→신일본제철 발족. 오사카 만국박람회(EXPO ’70) 개최. 6월: 미·일 안보조약 자동 연장. 이 해 공해 문제가 사회문제로 심각화
● 쇼와 46년(1971년) 5월: 무쓰·오가와라 개발회사 초대 사장(쇼와 50년 10월부터 이사·상담역) 11월: 오노다 시멘트,팽창 시멘트 ‘엑스판(Expan)’ 제조 개시. 6월: 오키나와 반환 협정 조인. 7월: 환경청 발족. 전일본공수 항공기, 이와테 상공에서 자위대기와 충돌 추락
(사망 162명) 8월: 미국의 달러 방위 정책으로 주가 폭락→일본 정부, 변동환율제 채택
● 쇼와 47년(1972년) 12월: 한국으로부터 수교훈장 흥인장 수훈. 8월: 오노다 시멘트, 제트 시멘트에 의한 주형 성형 기술 완성. 2월: 삿포로 동계올림픽 개최. 5월: 오키나와 조국 복귀 실현. 9월: 다나카 총리 방중, 일·중 공동성명 발표 → 국교 정상화
● 쇼와 54년(1979년) 6월: 한국경제인회의 참석. 9월: 안중근 의사 탄생 100주년 기념식으로 한국 초청. 11월: 훈1등 서보장 수훈. 1월: 더글러스–그루먼 사건 발각(미 항공사의 대일 로비에 일본 고위 관료 개입) 6월: 도쿄 정상회의(제5차 주요 선진국 정상회의) 9월: ‘공비 천국’ 문제 폭로→정부 기관·특수법인의 부정 회계 실태 드러남. 10월: 박정희 한국 대통령 암살→제2차 오히라 내각 성립
● 쇼와 58년(1983년) 12월: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 등과 함께 전두환 한국 대통령과 회담
5월: 일본해 중부 지진 발생→쓰나미로 사망자 104명. 7월: 사형수 재심 사건에서 멘다 사카에 무죄 판결. 9월: 대한항공기 격추 사건
10월: 록히드 사건으로 다나카 전 총리 실형 판결. 11월: 제2차 나카소네 내각 성립
● 쇼와 59년(1984년) 1월: 일본공업구락부 평의원회 회장. 4월: 일한협력위원회 감사
■ 저자 약력 : 안도 도요로쿠(安藤豊禄)
안도 도요로쿠는 메이지 30년(1897년) 오이타현에서 태어났다. 다이쇼 10년(1921년) 도쿄제국대학 공학부를 졸업함과 동시에 오노다 시멘트에 입사하였다. 이듬해인 다이쇼 11년(1922년) 오노다 시멘트 평양지사로 부임하였으며, 쇼와 15년(1940년) 조선 오노다 시멘트의 전무이사로 취임하였다. 쇼와 20년(1945년) 종전을 조선에서 맞이하였고, 이후 2년간 북한에 억류되었다. 쇼와 22년(1947년) 귀국 후, 사장 공석 상태에서의 전무이사(경영 대표)로 취임하였으며, 이듬해인 쇼와 23년(1948년) 사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약 20년에 걸친 장기 집권 경영을 담당하였다. 현재는 오노다 시멘트 상담역(고문)으로 재직 중이며, 올해 미수(米寿, 88세)를 맞이하였다.
■ 저서 정보
서명: 재계인의 쇼와사『한국, 나의 마음속 고향』저자: 안도 도요로쿠(安藤豊禄)
정가: 2,200엔
■ 발행·인쇄 정보
초판 1쇄: 1984년 7월 30일
초판 2쇄: 1984년 9월 17일
발행인: 나루세 다다시(成瀬恭)
인쇄소: 대일본법령인쇄(大日本法令印刷)
발행소: 주식회사 하라쇼보(原書房)
주소: 도쿄도 신주쿠구 신주쿠 1-35-13
우편이체: 도쿄 51151594
전화: 03-354-0685
① 인물 평가 요약 (평전·회고록용 문장)
이 인물은 전후 일본 시멘트·화학 산업을 대표하는 기술 관료형 기업인으로, 산업 기술 혁신과 국가 인프라 정책을 동시에 이끈 드문 사례에 속한다. 특히 시멘트 제조 기술의 고도화, 연구소 체제 정비, 대규모 자본 확충을 통해 일본의 고도성장기 건설 산업을 물적·기술적으로 뒷받침했으며, 동시에 각종 정부 심의회·자문기구에서 활동하며 민간과 국가 정책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일한경제협회 회장, 한국 경제시찰단 단장, 안중근 의사 탄생 100주년 행사 참석 등에서 보이듯, 단순한 경제 교류를 넘어 전후 한일 관계에서 민간 외교의 핵심 인물로 기능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기술자·경영자·정책 조언자·국제 협력가라는 네 역할이 한 인물 안에서 동시에 작동한, 전후 일본 산업계의 전형이자 예외적 존재라 평가할 수 있다.
② 한국 관련 활동만 발췌한 연표
●쇼와 36년(1961) 일한경제협회 회장 취임 (쇼와 52년 12월까지)
●쇼와 37년(1962) 제1차 한국 방문. 제2차 한국경제시찰단 단장으로 방한. 이후 2년마다 경제대표 자격으로 방한 정례화
●쇼와 38년(1963) 일본상공회의소 일한경제특별위원회 위원장
●쇼와 47년(1972) 한국 정부로부터 수교훈장 흥인장 수훈
●쇼와 54년(1979) 한국경제인회의 참석
안중근 의사 탄생 100주년 기념식으로 한국 초청
●쇼와 58년(1983)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 등과 함께 전두환 한국 대통령과 회담.
*정리하면 경제 교류 → 제도적 협력 → 역사·상징 외교로 활동 성격이 확장됩니다.
③ 일본어 원문에 밀착한 직역판 (학술·자료용)
■ 昭和42年 4월: 세계경제협의회 국제경영협력위원회 상임이사(쇼와 53년 3월까지)
건설성 건축심의회 위원(쇼와 46년 3월까지)
5월: 일본경제센터 이사·부회장 6월: 오노다 시멘트, 현미경 관찰에 의한 클링커 소성 조건 및 시멘트 강도의 신속 추정법 완성 1월: 총선에서 자민당, 득표수 기준 과반 미달(보수·혁신 백중) 2월: 최초의 건국기념일
10월: 요시다 시게루 전 총리 사망, 전후 최초의 국장
■ 昭和43年 9월: 동유럽 경제시찰단으로 바르샤바 경제협력회의 참석. 자카르타를 경제사절단으로 방문. 12월: 오노다 시멘트, 오후나토 공장 제5호 킬른 완성. 3월: 도쿄대 의학부 분규 표면화. 이 해 전국 110개 대학으로 대학 분규 확대. 10월: 가와바타 야스나리, 노벨문학상 수상
■ 昭和44年. 4월: 훈2등 서보장 수훈. 9월: 일·네덜란드 경제회의 참석. 2월: 오노다 공장 내 도쿠리 가마, 야마구치현 지정 사적. 1월: 도쿄대 분규, 야스다 강당 충돌. 11월: 사토 총리 방미, 미·일 공동성명(오키나와 1972년 반환)
■ 昭和45年. 2월: 건설성 도로심의회 위원
4월: 통산성 산업구조심의회 주택·도시산업부회 위원. 6월: 운수성 운수정책심의회 위원
4월: 오노다 시멘트, 콘크리트 파일 완성. 3월: 신일본제철 발족. 오사카 만국박람회 개최. 6월: 미·일 안보조약 자동연장. 공해문제 심각화
■ 昭和46年 5월: 무쓰·오가와라 개발회사 창립 사장. 11월: 팽창 시멘트 ‘엑스판’ 제조 개시
6월: 오키나와 반환 협정. 7월: 환경청 발족. 8월: 변동환율제 채택
■ 昭和47年 12월: 한국 정부로부터 수교훈장 흥인장 수훈. 9월: 일·중 국교 정상화
■ 昭和54年 9월: 안중근 의사 탄생 100주년 행사로 한국 초청. 11월: 훈1등 서보장 수훈
■ 昭和58~59年 전두환 대통령 회담. 일본공업구락부 평의원회 회장. 일한협력위원회 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