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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민(稚民)과 호민(豪民)*
박귀주 2015.11.28.
작년 여름의 일이다. 초록 카페트가 깔린 들녘에 작은 새들이 종종걸음을 하며 연신 고갯짓을 하고 있었다. 곰서방이 영신의 마른 논에서 철쭉을 캐내고 있는데, 이웃한 밭가에서 김칠규가 인부 한 사람을 데리고 철망 펜스를 치고 있었다. 그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면서도 고무판을 깔아 휠체어를 굴려가면서 경계에 철망 펜스를 치는 솜씨가 당차고 거침이 없었다. 멀리서 지켜보던 영신이
“아이구야, 저 사람 아주 독새네, 독새”라고 말하자 곁에 인부들도 그 재간에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경계에 철망 펜스를 치면서 서쪽 밭 경계에 이르렀을 때 갈등을 일으켰다. 붉은 측량 말뚝을 살펴보면서 농로로 손실된 땅의 넓이가 꽤 넓어 아깝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측량 결과 길 쪽으로 나가 있는 땅이 무려 13평이나 되었다. 일단 그는 기존의 농로를 남기고 사면의 경계에 철망 펜스를 쳤다. 그리고 주민들의 반응을 살필 생각으로 농로의 입구 양쪽에 쇠말뚝을 박고 철고리를 매달아 놓았다.
이튿날, 영신은 자신의 논으로 들어가다 말고 입구에서 걸음을 멈췄다. 농로 입구 양쪽에 쇠말뚝이 박히고 쇠사슬이 늘어진 채 가로질러 있는 것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철망 펜스는 붉은 말뚝과 말뚝을 경계로 온 밭을 두르고 있었다. 다행히, 서쪽 영신의 논과 경계를 이루는 지점에서는 농로를 침범하지 않고 그만큼 물러서 펜스를 쳐 놓았다. 그런데 농로 입구에 이 쇠말뚝과 쇠고리는 무엇이란 말인가? 잃어버린 자기의 땅에 대한 아쉬움이 남아 이 곳까지 자기 소유임을 알리려는 심산일 텐데, 쇠고리를 느슨하게 땅에 깔아 놓기는 하였으나 맘만 내키면 자기 땅이니 출입을 통제하겠다는 경고이기도 했다.
‘이 독새같은 놈이’ 영신이 이마를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곳을 지날 때마다 영신은 불편한 심기를 달래며 ‘막기만 해봐라 한 마디 단단히 하리라’하며 되뇌이었다. 그러나 작년 가을이 다 지나고 새 봄이 돌아올 때까지만 해도 농로 입구에 설치한 쇠말뚝과 철고리는 장식물에 불과했다. 오가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의구심에 찬 눈길로 내려다 보며 쑥덕거리다 나중에는 그마저도 의식하지 않고 지나다녔다. 비록 철고리가 양쪽 말뚝에 매달려 있었지만 땅에 납작 엎드려 있었고, 손수레나 경운기가 지난 농사철에 하루가 멀다하고 지나다니며 철고리를 흙 속에 파묻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 곳에 논을 둔 농가들은 쇠말뚝 사이로 늘어진 쇠고리를 통과할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지만 그 누구도 먼저 나서서 독새에게 이의를 제기하지는 못하였다. 혹시나 자신의 말이 빌미가 되어 문제를 더 악화시키면 어쩌나 노심초사하여 오히려 그에게 아부하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이곳에 가장 많은 땅을 지닌 무좌수 서덕만은 경운기를 끌고 좌우의 쇠말뚝 사이를 지날 때마다 김칠규에게 미안한 표정과 비굴한 목소리로
“어허 비싸게 산 땅인디 참 감사하요잉. 그런디 어쩔 것이요 이곳이 아니면 들어갈디가 없는디”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영신은 그의 태도가 객쩍고 밉살스러웠다. 오늘만 하여도 서덕만이 경운기를 몰고와 쇠말뚝 사이를 건너다 말고 한껏 비굴한 웃음을 지어 독새에게 인사하는 모습이 보였다.
‘어휴, 그냥, 저것도 사내라고,’
하며 그녀는 부아가 치밀어 못견디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농로는 3미터 폭에 40여미터 쯤, 경운기 바퀴 자국에 황토빛이 선연한데 지난 해에 박힌 붉은 말뚝이 여기저기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농로의 입구는 칠규의 땅이지만 그 다음으로 이어진 길 대부분은 영신의 논을 차지하고 지나가다 끝에 가서 좌우로 다른 사람들의 땅이 젖줄을 물듯 입언저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영신이 느끼기에는 농로를 이용하는 덕만이네나 선호네나 금로는 오직 독새에게만 미안해 하고 양해를 구할 뿐 더 많은 영신의 땅을 밟고 다니면서도 그것을 의식하지도 않는 듯하였다. 그녀는 독새가 떠나자마자 덕만에게 불평스런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오빠, 독새한테 미안하기는 뭐가 미안해? 그럼 나한테도 미안해야지.”
덕만은 경운기에서 거름 푸대를 잡아 끌다 말고 영신을 쳐다보더니
“어허, 너까지 왜 그러냐. 비싼 돈주고 사서 그나마 길을 막지 않고 길 밖으로 울타리를 쳐서 고마운 거지”
다시 샐쭉한 표정으로 영신이 대꾸했다.
“그럼 깨끗이 농로길을 그대로 두어야지, 왜 입구에다 말뚝을 박아두고 사람 마음을 불편하게 하느냐고요? 다음에 길땅을 뺏겠다는 심보지.”
잠시 말이 없던 덕만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래서 말인디 우리가 돈을 모아 독새한데 입구 땅을 사들이면 어쩌겄냐?”
그말에 뿔이 잔뜩난 표정으로 영신이 대꾸하였다.
“입구를 빼면 길로 내 땅이 더 많이 들어갔는데 날더러 또 돈까지 내라고?”
“아니아니, 그렁께 말이여 엊그제 선호랑 얘기했는디, 니네 땅을 포함해서 사 들이자고 했어. 그리고 그 경비는 자기가 지닌 논 평수대로 부담하자고 허드라.”
그러자, 영신의 목소리가 한껏 누그러졌다.
“그래요, 그럼 나도 좋지 뭐. 그런데 독새가 땅을 판다고 그래요?”
“많이 주라고 그러는 거겠지 어찌 길이야 막겄냐?”
“그럼 내 땅도 그 가격에 줄거야?”
“야야, 너 이 바람에 부자될래. 그럼 못 써”
“아이구야, 나한테만 왜 그러우. 이러쿵저러쿵 할 것없이 동네 사람들이 나서서 저 말뚝을 싹 뽑아버리면 되잖아. 그럼 나도 내 땅 그대로 내 놓을께”
“야, 주인 있는 땅을 어떻게 공짜로 뺏을거냐? 어떻게든 구슬려서 팔게 해야지”
“내 땅은 주인이 없고?” 영신이 흘겨보며 말하였다.
“아따, 니는 이길로 다니지만 저그는 자기하고는 상관없는 길이잖냐?”
“오빠가 독새 대변인이요?. 제일 아쉬운 사람이 누군데”
“그렁께 내가 사정해 볼라고 그란다.”
“아무튼 오빠가 서둘러서 독새한테 저 말뚝 좀 치우라고 허시오, 그러고 땅금을 쳐줄라면 내 땅값도 제대로 쳐주시오.”
‘그래, 그래, 내가 선호한테 말해 볼란다.“
그녀의 땅이라야 세 마지기 논으로, 노쇠하여 거동이 불편하신 친정 부모님을 위하여 매월 용돈을 보내주는 대신 그녀 앞으로 이전한 논이었다. 고향 가까운 S시에서 주말마다 찾아와 농사 짓기도 어렵지만 매월 30만원씩 부쳐드리는 용돈이 버겁기도 한데 이웃한 밭을 사들어온 독새가 갑자기 출입로를 막는 바람에 어쩐지 애물단지를 물려받은 느낌이 들었다. 딸만 둘인 부모가 동생 내외에게는 집짓기에 딱 좋아보이는 양지 바른 길가 밭을 물려준 데 비해 자신은 시세가 없는 무논에 출입로마저 불안정하다 보니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문제가 되는 농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양지 마을에 사는 네 가구의 농가가 자신의 논으로 들어가는 통로로 사용하여 왔다. 농로는 등기부상에 도로로 나 있지 않고 칠규네 밭과 영신의 논을 점유하고 가운데는 콘크리트 수로가 나 있었다. 좁다란 밭둑길이 점차 경운기가 드나들 정도로 넓어질 때마다 자꾸 영신의 논도 잠입되었지만 원래 밭주인이었던 한샌이나 영신의 아버지나 농사철이면 드나드는 농기계를 어쩔 수 없었다. 오직 한길 쪽 밭은 삼각형으로 입구를 막고 있었고 영신의 논은 밭쪽으로 불룩하니 튀어나가 있어 입구쪽에서 양보하면 영신의 집에서도 길을 내줄 수 밖에 없었다. 그 인심 좋던 한샌은 죽고 서울로 떠난 자식들은 농토를 팔아갔다.
김칠규는 G시 아파트에 살면서 주말 농장으로 이용하겠다며 2년 전에 이 밭을 시세보다 꽤 높은 평당 35만원씩 주고 사들여 왔다. 그는 장애인인데도 휠체어에 앉아 밭을 영매스럽게 잘 가꾸었다. 동네 사람들은 참 용하다며 두 부부에게 종자도 가져다 주고 꽃나무도 가져다 주며 친절히 대하였다. 그는 50대 후반이어서 곰삭아 늙은 노인네 뿐인 동네 사람들은 그나마 젊은 축에 끼는 사람이 왔다고 좋아하였다, 또, 마을 앞의 땅을 비싼 값에 사 들이니 자기들의 논밭이 제값을 톡톡히 받은 것 같아 으쓱해지는 기분이 들기도 하였다.
그가 처음에는 농로에 수시로 드나드는 경운기나 트럭을 무심한 듯 내버려 두었다. 그저 두 부부가 온갖 채소와 곡물을 다양하게 심어놓고 주말이 멀다하고 밭에 다녀갔다. 그러다 작년 초여름, 그가 이 곳에 황토방을 지으면서부터 농로를 사이에 두고 서먹한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이 밭의 한 모서리가 마을 진입로이자 문전 옥답을 가르는 큰길과 길게 접하였는데 그가 황토방을 짓고 나서 경계에 철망 펜스를 친 것이 문제였다. 사실 농로라는 것이 농사철이면 농기계가 드나들기 위해 하루 아침에 생겼다가도 오후에 그곳에 곡식을 심으면 없어지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담장을 쳐버리면 급할 때라도 아예 농기계를 들일 수 없게 된다. 탁트인 농토 입구에 철망 펜스는 마치 밥속의 모래알처럼 신경이 쓰이게 마련이다.
김칠규는 농사는 처음이지만 도회지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었다. 지난 한 해동안 그의 눈에 비친 농로 사용자들은 순박한 무지랭이들이거나 기껏해야 무좌수들이었다. 그 중 시내에서 아파트 관리소장을 한다는 선호가 좀 신경이 쓰일 뿐, 농투성이인 덕만은 물론이려니와 시내에서 장사한다는 과부 아낙이나, 장가도 들지 못하고 늙은 어미를 도와 농사를 짓으며 헤벌쭉 웃기를 잘하는 금로나 모두 만만하였다. 작년부터 말뚝을 박고 고리를 달아 놓은 지 열 달째 접어들었지만 누구도 이의를 달기는 커녕 눈치만 슬슬보며 처분만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담장 안쪽의 아내를 향하여 중얼거리듯 말하였다.
“ 이게 열세 평이나 된단 말이야”
그의 처가 고추 모종을 심을 두덕을 만들다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가 무슨 자선 사업가야. 비싼 땅을 남에게 거저 내놓게. 우리 땅 그냥 찾아요.”
부루퉁한 표정이 영락없는 서울깍쟁이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 되면 땅값이라도 톡톡이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미치자 이참에 아예 담장을 넓히기로 작정을 하고 시기를 가늠하였다.
그러던 차에 서덕만이 황토방에 들렸다. 손에는 서향 나무 두 그루가 들려 있었다. 작년부터 둘은 수인사를 나누고 몇 차례 이야기도 나눈 처지이다. 덕만이 그보다 두 살이 더 많았지만 칠규의 기세에 눌려 맞상대하지 못하고 어쩐지 어려워 하였다. 칠규가 휠체어를 돌려 그를 알아보고 짐짓 반가운 척 맞이한다.
“ 아니 이거, 서형이 웬일이우?”
덕만은 나무를 평상 아래 내려놓으며 엉거주춤 서서
“아 긍께 이 나무가 꽃이 피면 향기가 천리나 간다는 서향이여. 한 번 심어보라고 가져왔구만.”
“어허, 뭘 이런 걸. 이리 앉으시오”하며 그는 평상을 한 손으로 투덕이었다.
덕만은 평상에 걸터앉아 이제 금방 쳐놓은 밭이랑을 바라보며
“어매, 참, 이쁘게 두덕을 잘 쳤네. 언제 농살 지어봤으까잉.”
“흐흥, 그래요. 서형이 무슨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어서 해보시오”
“아 그렁께 그것이, 저 우리가 사용하는 길 말인디.....” 덕만은 뭐라고 해야할 지 말끝을 흐렸다.
“말씀 하세요.”
“아니, 저 김샌이 어떻게 하실라고 그란지....”
“어떻게 하기는요. 내 땅이니까 찾아야지요.” 덕만의 느린 말투가 답답하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뒷머리를 한참 긁다 말고 덕만은 문득 생각이 난듯
“그러지 말고 우리한테 파시게랑”
“그래요. 얼마에요?”
“이미 길로 사용하고 있는 땅이고 그렁께 좀 작게 받아야 안 쓰것소잉”하며 덕만은 호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밀었다.
“어허, 그래 이게 얼마요?”
“3백만원이오. 좀 작지만 받아주시오.”
칠규는 순간 화가 치밀었지만 지긋이 참고 봉투를 다시 덕만의 앞으로 내밀며
“서형 생각이오. 다른 사람들 생각이오.”
“우리들이 모다 모여 생각한 것인디 어째 좀 작아서 그러요?”
칠규는 코웃음이 나왔지만 순박한 덕만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며
“내가 이 돈 몇푼 받으라고 이런 줄 아시오. 그냥 가져가시오”
“아니 그러지 말고.....” 하며 덕만이 다시 봉투를 내밀자 난데없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 그냥, 가라니까요.” 째려보는 눈꼬리가 영신의 말대로 영락없이 독새였다.
덕만은 쫓기듯 돌아서 나왔지만 화를 내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돈이 작다는 것인지, 아냐, 아냐. 그보다는 돈 생각없이 그냥 내놓았는데 그 마음을 몰라주니까 화를 냈을거야. 갖은 생각에 고개를 갸우뚱갸우뚱하였다.
선호는 사무실에서 무심히 신문을 펼치다 한 곳에 눈이 꽂혀 있었다. ‘유서대필 강기훈(51) 23년만에 혐의 벗다’ 선명한 제목에 부재로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 씌어 있었다. K 신문의 활자를 읽어가며 어느덧 젊은날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노태우 정권 당시 강경대 사건에 항의하는 데모대에 끼어 있었다. 당시 예비역으로 같은 M대학에 다니던 그는 쇠파이프로 후배를 난자하여 죽인 백골단을 증오했다. 그리고 뒤늦게나마 데모대에 합류하였다. 이런 와중에 ‘살인 정권 물러가라’를 외치며 김기설 씨가 분신 자살을 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데모대는 가장 비도덕적인 집단으로 매도되었다. 당시 S대 모 총장은 ‘죽음을 부추기는 세력이 있다.’고 말하였고 모든 언론기관은 연일 이를 대서특필하는 가운데 당시 전민련 간부였던 김 씨의 유서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바로 김 씨의 가장 가까운 동지였던 강기훈 씨가 구속 기소됐다. 혐의는 김기설 씨 대신 유서를 써주고 자살을 방조했다는 것. 뭔가 조작됐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국립과학수사대에서 필적감정 결과 대필한 것이 맞다고 발표하였다. 방송은 연일 강기훈은 목적을 위해 친구의 생명도 수단으로 삼는 급진 좌익 세력의 표상이라고 보도하였다. 선호도 당시 혼란스러웠지만 검찰의 수사 발표 이후 데모대로부터 점차 멀어져 갔다.
세월이 흘러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자 독재 정권하에서 조작된 의혹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발족하였다. 그러자 감옥에서 출소하여 암투병 중이던 강기훈은 위원회에 자신이 결코 유서를 쓰지 않았다고 억울함을 호소하며 여러 증거를 다시 제시하였다. 결국 대법원은 2년 후 재심 심리를 시작해 마침내 23년이 지난 올해에 당시 공권력에 의해 조작된 사건으로 무죄임을 확정 판결하였다.
선호는 새삼스럽게 세상이 무섭다는 생각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얼마전 모교를 방문하여 담장 아래 강경대 열사의 기념비 곁에 잠시 서 있었다. 지나는 젊은이들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하고 황량히 방치되어 있음을 느꼈다. 선호는 쓸쓸히 돌아서며 우리나라 민주화를 위해 희생된 고귀한 삶이 자꾸 잊혀져 가는 것이 안타까웠다. 보수 정권이 들어선 뒤로는 그와같은 흔적 지우기가 일상화되고 있음에도 고단한 삶에 지친 국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민주화의 가치마저 도외시되는 염량세태(炎凉世態)가 젊은날의 추억마저 암울하게 채색하였다. 주변 모두가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마저 부담스러워하는 현실이 서글플 뿐이다.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의 전화벨이 울렸다.
서덕만이었다. 3백만원을 전달하지 못하고 다시 가져왔다고 전하는 내용이었다.
“아니, 형은 마련해준 돈도 전달 못해. 그걸 그냥 도로 가져오면 어떻게 해”
“야, 받으라고 막 했지이. 그런데 돌려 주면서 소리를 꽥 지르는데 내 손이 부끄럽더라”
“그럼 어쩌겠다는 것이야?”
“ 아니, 지금처럼 그냥 다닐 수 있게 해줄 텐데 우리가 돈을 가지고 가서 땅을 넘기라고 하니까 성질낸 거 아닐까?‘
“글쎄, 나나 영신이 생각은 달라. 아마 돈을 더 많이 달라는 걸거야.”
“ 뭐? 이 돈도 어렵게 마련했는데 그건 아니지. 네가 좀 나서봐라.”
“예, 언제 시간이 되면 내가 한 번 만나볼게요”
“그래 그래, 네가 좀 만나봐라. 영신이 고것이 거시기, 뭐냐, 지 논값도 내놓으라고 할 것인디...”
“그러겠죠. 이참에 어떻게 하든지 아예 반듯하게 길을 내 봅시다.”
전화를 끊고 곧장 그는 영신에게 전화를 걸었다. 동갑내기 동창으로 한동네에서 자랐는데 부모에게 각기 물려받은 논마저 위 아래로 이웃하였다. 어렸을 때는 남녀간에 따로 놀았지만 나이가 드니 동창끼리 모이면 남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이제는 허물이 없다. 저쪽에서 영신의 되바라진 소리가 들려왔다.
“그 독새가 분명 길을 막으라고 그럴 것이여”
“설마 길이야 막겠냐.”
“오메, 니도 덕만이 오빠 같은 소리를 허냐. 두고 봐라마는 그 독새가 길을 다 잡아먹을 것이구마.”
“누가 그러면 가만이 있다냐. 일단 좀 기다려 보자. 그러고 이왕에 이렇게 된 것, 이번에 아예 번듯한 길을 낼라고 그러니까 니도 좀 협조해라.”
“나는 알았다잖아, 독새한테 협조하라고 그래. 이런 것을 역차별이라고 하는 거야.”
선호는 두 사람과 전화 통화를 한 후 사무실 벽에 걸린 일정표를 보았다. 김칠규를 만나 담판을 짓겟다는 생각으로 보았지만 이번 주는 일정이 빼곡하다. 내일이면 공석이 된 아파트 자치회장이 선출된다. 지난 자치회장과는 손발이 잘 맞았다. 그는 자신을 비롯해 관리소 직원에게 친절하였고 명절이 되면 작은 선물이라도 챙기며 소외되지 않도록 늘 배려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대표로 뽑힐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 맘에 걸렸다. 선거 뒷바라지를 하면서 느낀 거지만 깐깐한데다가 권위적이었다.
그는 주말까지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 일단 차차 생각하기로 하고 투표함과 선거인 명부 등 내일 준비해야할 일들을 하나씩 점검하기 시작하였다.
자치회장에는 예상대로였으며 그는 퇴역 장교 출신이었다. 그가 당선 된 후 관리소장인 선호가 맨 처음 맞닥뜨린 일은 모든 관리소 직원들을 집합시켜 놓고 브리핑을 하게 한 것이다. 500세대가 사는 아파트에 관리소 직원이라야 자신을 포함하여 경리 1명, 기계실 3명, 경비원 5명 등 모두 10명이었다. 그나마 다른 아파트보다는 그래도 규모에 비해 많은 편이었다. 기계실 1명 경비원 1명을 줄이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선호가 누구를 그만두게 할수 없다고 간곡히 말하였고 전 회장이 잘 방어하여 그대로 근무할 수 있었다.
새로운 회장은 20대의 경리에서 70대의 경비원까지 2열 횡대로 세워 두고 주민에게 항상 웃고 친절하게 서비스하라고 당부하였다. 특히 인사 잘하기를 생활화하자며 주민을 보면 뻣뻣이 서서 쳐다만 볼 것이 아니라 먼저 인사를 하는 것이 올바른 근무자세라고 재삼 강조하였다. 모두들 시무룩하여 있는데 경비원 중 나이가 가장 많은 70대 정씨가 말을 마치자마자 박수를 크게 치며 큰 소리로
“예, 대령님,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하고 외쳤다. 몇몇 사람은 따라서 박수를 치고 몇몇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자치회장은 빙긋이 웃음을 짓다말고 정색을 하며 말하였다.
“우리 정씨 아저씨가 있어서 든든합니다. 오늘부터 인사 잘하기 운동 총대장으로 정씨 아저씨를 임명하니 실천방안을 마련하여 차질이 없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씨는 턱없이 큰 목소리로 다시
“예”라고 대답하였다.
이튿날 선호가 출근하여 보니 정씨 아저씨를 필두로 5명의 경비원이 정문 앞에 줄줄이 서서 출근하는 주민들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있었다. 특히 정씨는 맨 앞에 나서 자동차나 주민이 지나갈 때마다 무조건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웃으며 손을 흔들거나 같이 허리를 굽혀 인사했지만 교복을 입은 여학생 몇몇은 겸연쩍어하며 빠른 걸음으로 총총히 지나가기도 하였다.
주말이 되어서야 선호는 김칠규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 우리가 농사를 짓기 위해서 꼭 필요한 길입니다. 농로 부분을 우리가 보상할 터이니 파십시오.”
그도 간명하게 말하였다.
“평당 70만원씩 주면 팔지요”
선호는 뒷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 어찔하였다. 이어서 분노가 치밀어 그를 노려보았다.
“이런 식으로 길을 막으면 불법이란 걸 모르시오?”
그러자 칠규는 코웃음을 치며
“남의 땅을 함부로 침범하는 것이 불법이지 자기 땅 찾겠다는 사람이 무슨 불법이오?”
그 뻔뻔함에 선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럼 법대로 한 번 해 봅시다”
“그러세요” 독새 장애인이 돌아서는 선호에게 비웃듯 말하였다.
다음날 김칠규는 포클레인을 불렀다. 그리고 길 안쪽의 펜스를 뜯어내고 딱딱하게 굳은 농로를 파헤쳐 밭으로 편입하고 경계의 끝까지 철망 펜스를 쳤다. 그러나 길 입구 모서리 밭두렁에 이르러서 문제가 되었다 쐐기처럼 생긴 모서리 부분을 펜스로 치기에는 너무 고의성이 짙어보였다. 만일 정말 문제가 되어 현장 답사라도 나온다면 보는 사람의 감정이 예사롭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자 반 평쯤 되는 밭두둑은 남겨두고 펜스를 쳤다. 그리고 지난 봄에 영신의 밭에서 캐가고 남겨, 몇 그루 얻어두었던 꽃나무를 담장 안으로 편입한 땅에 줄을 맞추어 심어 놓았다. 일은 반나절이 지나지 않아 그야말로 순식간에 마무리 되었다. 멀리서 이 마을 농부들이 지켜보았지만 근처에까지 와서 항의하는 사람은 없었다.
선호를 중심으로 덕만과 영신, 금로가 처음으로 한 데 모였다.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탄원서를 만들고 동네 사람들의 서명을 받아 면사무소에 탄원을 하였다. 그러나 면사무소에서는 권한밖의 일이라며 시청 도로과에 접수하라고 내밀며 서류를 받아 주지 않았다. 다시 시청에 탄원서를 접수하였더니 도로과 직원이 이것은 행정적으로 어떻게 규제할 방안이 없다고 하였다. 선호는 화가 치밀어 담당 직원에게 강한 어투로 항의를 하였다.
“아니, 뭐하라는 시청이오. 불법 건물을 짓고 담장을 쳐서 농로를 막아 농사를 못짓게 하는 사람을 지도하지 못한다면 도대체 시청이 무엇때문에 존재한단 말이오?”
담당 직원이 말하였다.
“불법 건물이라니오.”
영신이 말하였다.
“아니 농지 한가운데 황토방을 지은 지가 언젠데 시청에서 그것도 몰라요.”
그러자 저만치 지켜보던 과장이 다가와
“불법 건물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시에서 지도할 내용입니다. 건축과에서 담당하니 그 쪽으로 가서 말씀하십시오.”
덕만이가 말하였다.
“면사무소에서는 시청으로 가라. 시청에 오니 이곳으로 가라 저곳으로 가라. 쫓아다니다가 지쳤소. 또 어딜 가란 말이오.?”
벌겋게 달아오른 세 사람의 기세에 시청 과장이 건축 담당 직원을 불러 주었다. 건축과 공무원은 두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딱하게 되었다고 위로해 주며 불법건물이라면 조처하겠다고 하였다.
영신이 말하였다.
“저희는 건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길이란 말입니다. 농살 지을 수 있도록 해 주세요”
건축과 직원은 길을 막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으나 이런 문제는 시청에서 관여할 수 없고 시 경찰서로 가서 신고하면 길이 있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선호는 그의 말에서 진정성이 느껴졌다. 그리고 형법을 위반하였다면 더 쉽게 해결될 수 있다는 희망에 영신에게 말하였다.
“영신아, 그만 가자. 형사건이 된다면 당연히 경찰서에 고발해야지”
선호는 영신을 데리고 나오며 건축과 직원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였다.
선호는 탄원서를 고발장으로 바꾸어 영신과 함께 G경찰서로 갔다. 덕만과 금로는 경찰서라는 말만 들어도 싫다며 자신들은 한사코 나서지 않겠다고 하였다. 민원 담당 경찰관이 고발장을 읽어보더니 선호와 영신을 빤히 보며 말했다.
“ 두 분 다 농사 짓는 분이 맞아요?”
선호가 대답하였다.
“예, 다른 직장이 있지만 농사를 짓다 늙으신 부모님께 물려 받아 직접 짓든 남을 시켜서 짓든 그 땅만큼은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영신이 덧붙여 말했다.
“오늘 바빠서 오지는 않았지만 고발자 중에 서덕만씨와 이금로씨는 진짜로 농사만 짓는 사람들이어요”
그는 다시 한 번 내용을 훑어보더니 심문하듯 말했다.
“이 농로가 등기부상에 길로 돼 있습니까”
선호가 말했다.
“아니요”
그럼 포장이 되어있습니까?‘
“아니요”
경찰관이 차갑게 말을 했다.
“그러면 형사건이 되지 않습니다. 민사로 하십시오.”
선호가 어처구니가 없어 할 때 영신이 사정조로 말하였다.
“올 해 수확을 해야하는 데 민사 소송을 하면 농사를 망치라는 이야기 밖에 안되잖아요. 좀 해결해 주세요.”
“사정이 딱하지만 형사건이 아니고 민사건이라니까요”
그러자 선호가 강한 어조로 말하였다.
“아닙니다. 제가 변호사 사무실을 거쳐 왔습니다. 이것은 형사건입니다. 접수해 주십시오.”
경찰관이 멈칫 바라보더니
“어느 변호사님이 그러던가요”
“예. 법원 앞에 김학래 변호사요.” 선호의 말이 단호하였다. 잠시 머뭇거리다 경찰관이 말했다.
“알았어요. 일단 접수하고 다음에 부르겠습니다. 고발자 중 누구를 대표로 할까요”
두 사람 모두 얼굴을 쳐다보다 영신이 말하였다.
“굳이 대표가 필요합니까? 우리 네 사람 모두가 고발한 걸요”
“알았습니다 그럼 두 사람을 제출자라 해두고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선호와 영신은 이름을 밝히고 밖으로 나왔다.
김칠규는 동문 후배가 경영하는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비록 휠체어에 의지한 몸이지만 일식집 우미가제에는 종종 들렸다. 주인이 동문 후배인데다 자신이 이 지역 회장으로 있을 때 총무를 보는 등 자못 절친한 관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지금 G시 경찰서에 근무하는 또 다른 후배 조 경위를 이곳에 불러내었다.
그는 농로를 막아 땅을 찾았지만 집단으로 대처하고 덤벼들려는 조짐에 내심 걱정이 되었다. 자칫 사건이 알려지면 치졸한 인간으로 내보일 수도 있었다. 그는 전직이 경찰이었고 한밤 중에 순찰차로 범인을 쫓다 가드레일을 받고 크게 부상을 당하여 명예퇴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동료들이 사고 현장에 도착하여 그를 발견하였을 때 그는 만취 상태였다. 비록 퇴임하여 전임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G시에 정착하였지만 연고는 이곳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김칠규가 조경위에게 그간 사정을 말하였다. 그는 자신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선호와 영신을 한껏 나쁜 인간으로 매도하였다.
조경위가 다 듣고 나서 별거 아니라는 투로 가볍게 말하였다.
“형님, 염려마십시오. 완전 조무래기들이구만.”
세 사람이 함께 술잔을 부딪히며 너털웃음을 웃었다.
김칠규가 술을 마시다 말고 여자를 불렀다. 잠시 후에 문이 열리고 속살이 다 비치는 옷을 걸친 여자 둘이 들어왔다.
“아야, 너 이 곁으로 앉아” 김칠규는 그 중 젊고 예뻐보이는 여자의 팔을 끌어 조경위의 곁에 앉혔다. 그리고 5만원 권 지폐를 꺼내어 맥주잔을 감아 여자에게 내밀었다.
“어머나, 김사장님, 황송하게, 아이 뭘 ”
아양을 떨며 그녀는 두 손으로 받아 쥔다.
고발자에 대한 사전 조사라는 사유로 금로에 이어 맨 마지막으로 서덕만이 경찰서에 불려갔다. 그는 경찰서 문을 지나 조사 담당 경찰관을 만나기도 전에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사건을 겪은 후 경찰서 문턱을 밟아 본 적은 처음이다. 그는 면사무소에 탄원서를 낼 때만 해도 적극적이었다. 동네 사람들의 서명도 돌아다니며 직접 받아 선호에게 넘겼고 시청에 들릴 때도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선호와 영신의 뒤를 묵묵히 따랐다. 그러나 경찰서만은 아니다. 어린 시절은 그에게 다시는 되돌아가서는 안되는 절망의 늪이었고 당시 경찰서와 소년원은 순수했던 그의 영혼에 영원히 아물지 않을 만큼의 깊은 상처를 남겼다. 집단 폭력 사건의 주모자로 그만이 소년원에 넘겨졌을 때, 뒤늦게 자신이 희생양이 된 것을 알고 친구들이 원망스럽고 너무나 억울하여 차라리 죽고 싶었다.
그가 민원실 앞 안내 데스크에서 자기를 부른 K 경사을 찾자 경찰서 안쪽 조사실로 들어가 보라고 하였다. 그는 가슴이 쿵쾅쿵쾅 두근거리고 얼굴이 창백해지며 어지러움증을 느껴 바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가까스로 참고 가리킨 조사실로 들어섰다. 마침 입구 쪽에 서 있던 여경이 누구를 찾아왔냐고 물었다. 그는 더듬 거리며 K 경사을 이야기하자 바로 건너편에 있던 그가 이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 서덕만씨 이 쪽으로 오세요”
책상 맞은 편에 앉아 자신을 지긋이 눌러보는 듯한 K경사를 보자 다시 한 번 심하게 가슴이 요동쳤다.
저쪽에서 매우 사무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산면 양지리에 사시는 서덕만씨 맞지요?”
“아, 예,예”
고발장을 잠시 보더니
“이 농로가 언제부터 나 있었어요?”
“아주 오래 되었지요”
K경사가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였다.
“서덕만씨, 이 곳에서 농사를 언제부터 짓기 시작했나요?”
“예에, 처음부터요.”
“아, 그 처음이 언제냐구요?” 경사가 퉁명스럽게 이야기하자 덕만이 다급하게 말하였다.
“주- 중학교 졸업하고 지금까지 지었는디요.”
“그럼 그 때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넓은 길이 있었다는 말입니까?”
“아, 아니요, 그 때는 논두렁 길로 아주 좁았지요.”
“그럼 누가 이 길을 이렇게 넓혀 놓았어요?”
“아, 아니 그것이....”
“ 이 길, 포장되어 있어요? 안 돼 있어요?”
“안, 안되어 있습니다.”
“이 길을 이용하는 사람 중, 누구 농지가 제일 많습니까?”
“그 그건 저, 접니다.”
“서덕만씨, 경운기나 트럭 있어요?”
“예 경운기 있습니다.”
“경운기가 논으로 들어갈 때 어느 길로 들어갑니까?”
“이 이 길로요.”
“그럼 서덕만씨가 이 길을 이렇게 넓혀 놓았다고 봐도 되겠네요?”
“아, 아니 저만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다 이 길을 사용하는데요.” 당황하여 그가 소리쳤다.
“허지만 서덕만씨가 제일 많이 사용하잖아요”
“예 그렇기는 합니다만........”
“이게 국가 땅도 아니고 엄연히 소유주가 있는 땅을 서덕만씨가 제 멋대로 길을 내 사용하고 내것이다 하면 땅임자가 내 놓겠습니까? 오히려 소유권 침해죄로 크게 걸립니다.”
“......”
“거기다 이렇게 고발장까지 접수하면 무고죄로 걸려요. 무고죄로 걸리면 최대 5년까지 징역을 살게 됩니다.”
서덕만의 두 손이 바르르 떨렸다. 그리고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뭐, 뭐라고요. 그, 그게 아니고....”
K 경사가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였다.
“다른 사람들이야 외지에 사는 사람들도 있고, 당신한테 핑계를 대고 빠져나갈 수도 있겠지만 소유주가 서덕만씨를 걸고 넘어지면 자칫 모든 혐의를 혼자 뒤집어 쓸 수 있어요.”
“ 그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옆에서 부추기는 말 듣지 말고 소유주와 협의해서 좋게 해결하세요. 저쪽에서도 맞고소하게 되면 싸워서 좋을 게 없어요.”
“아, 예, 예”
“내가 그냥 사건처리하지 않고 고발장을 돌려줄 터이니 가지고 돌아가세요.”
하며 경사는 서류를 봉투에 다시 넣어 서덕만에게 내밀었다.
그는 엉겹결에 받아쥐고
“가 감사합니다” 고개를 연신 숙여 인사를 하고 황급히 경찰서를 빠져 나왔다.
“아니 도대체 경찰서에서 형에게 뭐라고 하였관대 이걸 받아왔어요. 다시 갔다줘요.”
“선호야, 제발, 제발, 너, 이러지 마라.”
선호는 서류를 돌려받아 건네주는 덕만을 딱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는 한사코 고발하지 말고 땅을 달라고도 하지 말고 차라리 입구가 좀 비탈지고 틀어지더라고 동네 사람인 종삼이네 밭을 사들이고 기존에 사용하는 영신이네 땅을 좀 더 넓혀 길을 만들자고 하였다. 논밭을 이웃한 사람끼리 원수져서 좋을 일 없다며 좋게좋게 하자고 사정하듯 말하였다. 선호는 자신보다 나이가 너댓살이나 많은, 선량한 덕만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대신 종삼이 형 땅 문제는 덕만이 형이 알아서 얻어내시오”
“으응, 그래 그래, 내 종삼이하고 친하잖냐. 염려마라”
덕만이 얼굴에 희색을 띄며 말하였다.
그러고 나서 며칠이 지났다. 다행이 종삼이네 집에서 땅을 내 주겠다고 하였지만 영신이 선호에게 투덜거리며 불만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 아이고, 길 모양이 초생달처럼 휘어지고 틀어져 무슨 꼴이 될런지 모르겠다. 사내들이 왜 그리 물러터졌어.”
“그래, 미안하다. 그나마 믿을 것은 너밖에 없다. 네가 마다하면 우리 모두 파농해야지 어쩌겄냐?
“몰라 몰라, 알아서 떼어 쓰고 쓴만큼 논 값은 톡톡히 쳐서 내 놔.”
선호는 영신을 달래서 평당 20만원씩 땅값을 주기로 하고 경비는 길을 사용하는 네 집에서 각기 지닌 농토의 면적에 따라 분담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길을 새로 내고 나서 공사가 끝나는 대로 선호가 사설 측량사를 불러 길로 들어간 땅을 보상해 주기로 하였다.
드디어 공사하는 날이 되었다.
네 집뿐만 아니라 독새도 나와 있었다. 그는 휠체어에 앉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포클레인이 종삼이네 밭과 영신의 논 사이의 언덕을 헐어내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영신은 그 뻔뻔한 모습에 치가 떨려 외면하였지만 덕만은 그의 인사를 받고 허리까지 굽히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포클레인이 작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길의 형태가 만들어졌다. 문제는 입구 쪽이었다. 선호는 쐐기처럼 길목 입구에 삐져 나온 독새 장애인의 땅이 아직 반 평쯤 길에 붙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가 이것마저 찾기를 주장한다면 길의 모양은 더욱 꺾이고 비틀어지게 된다. 특히 그 끝이 시멘트 콘크리트로 되어 있는 수로까지 닿아있어 그가 방해를 하고 나선다면 공사의 범위가 자못 커질 수 밖에 없었다. 만약 그가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다면 치욕스럽지만 몸을 굽혀 사정을 해야하나 생각이 복잡하였다.
포클레인이 길을 고르고 정비하다 수로와 연결된 배수관을 발견하였다. PVC 파이프였다. 한쪽은 영신의 논에서 연결한 것이고 한쪽은 김칠규의 밭에서 연결한 것이었다.포클레인 기사가 이 쪽을 향하여 들어내면 되느냐고 큰 소리로 물었다. 모두 영신과 독새 장애인을 번갈아 보았다. 어차피 영신의 논으로 연결된 관은 짧아서 파내고 다시 묻어야 했다. 영신은 곁에 있다가 큰소리로 외쳤다.
“예, 파내고 다시 긴 것으로 묻어줘야죠.”
그리고 그녀는 포클레인 쪽으로 다가서며 김칠규의 밭에서 연결한 배수관을 가리키고 큰 소리로 또 외쳤다.
“그리고 저 파이프는 파내 버리세요”
돌발적인 그녀의 행동에 곁에서 지켜보던 김칠규가 손을 내저으며 저지하였다.
“그대로 둬요. 이 길에 내 땅도 들어가 있어.”
영신은 골이 잔뜩 나서 김칠규를 향하여 외쳤다.
“그깐 파리똥만한 땅 말이에요. 찾아가세요, 당신이 이 길을 무슨 권리로 사용해요? ”
그녀의 목소리는 그동안 억눌렸던 감정을 토해 내고 있었다.
포크레인 기사가 잠시 시동을 멈추었다.
잠시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선호가 포클레인 기사에게 말했다.
“저 쪽 배수관을 그대로 두십시오.”
그리고 이어서 김칠규에게 말했다.
“대신 입구에 땅만큼은 양보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는 말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좋소. 그렇게 합시다.”
그는 거만한 투로 말을 마치자 휠체어를 돌려 황토방을 향하여 그 자리를 떠났다.
씩씩거리는 영신을 선호는 위로하듯 조용한 말투로 달래었다.
영신의 논은 올해 농로 다툼으로 농사를 짓지 못해 잡풀만 무성하였다. 삼 년 전에 이 논배미에서 동생의 남편인 곰서방이 철쭉 농사를 지어 쌀 농사보다는 배나 남겼다. 대신 영신에게는 200만원의 임대료를 지불하였다. 그래서 매달 부모님께 드리는 30만원이 아깝지 않았다. 그러나 올해는 그 돈을 받기가 어렵게 되었다. 김철규가 길을 막고 나서는 바람에 트럭이 자유롭게 다닐 수 없게 될 것을 우려해 곰서방이 다른 땅을 얻어 꽃농사를 지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길이 트이자 영신은 다시 곰서방에게 논을 부탁하였다.
논은 크게 두 배미로 나뉘어져 있었다. 좀더 큰 아랫배미는 훵하니 비어 있었지만 윗배미의 한 켠에는 해를 넘긴 곰서방의 철쭉이 아직 자라고 있었다. 길이 트이자 오늘 출하 작업을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른 점심때에 곰서방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저편에서 곰서방 특유의 어눌하고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다급하다는 듯 들려왔다.
“처형 저,저 전데요. 지금 거, 거 덕석 바위 앞 황토집 주인이 자기 땅 찾겠다고 길을 마-막고 있어요.”
순간 영신은 이맛살을 찌부리며
“도대체 무슨 말이어요? 그 사람이 어느 길을 막는다는 말이어요?”
“아, 그 그 처형 논으로 들어가는 길 말이에요”
“뭐라구요. 왜 그 길을 막아요?”
“그 그 저 황토방을 불법이라고 누가 신고를 해서 자기가 벌금으로 백오십만원을 냈다면서, 길까지 양보했는데 누가 자기한테 해코지를 했는지 안다면서요. 그 그래서 길로 양보한 부분을 다시 찾아가겠대요. 지금 길에다가 쇠말뚝을 박고 담장을 밖으로 내서 설치하고 있어요.
영신은 가슴이 꽉 막혔다. 문제가 되는 길로 인하여 올 봄부터 여름까지 곤욕을 겪으며 겨우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새길을 만들어 놓았는데 설마 반평이나 되는 땅을 가지고 다시 길을 막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그 독새가 어디를 막아요? 어디를?”
그녀가 악에 바쳐 소리쳤다.
“쪼-쪼금이요. 입구 쪽에 아주 작은데요, 쐐기처럼 나온 한 반평이나 되는 땅이구만요.”
“그건 그사람이 길을 조성할 때 뻔히 지켜보면서 양보하였어요. 대신 그 집도 새 농로 안의 수로로 배수관을 연결하도록 허락했잖아요”
“그-금로 엄니가 그 말을 하였지만 소용없어요. 그냥, 쇠막대를 박고 철망을 치고 있어요”
“그럼 통로가 얼마나 막혀요”
“쪼-쪼빗하니 나와가지고 경운기도 들어가기 어려운데요”
“그럼 그걸 그대로 둬요. 곰서방이 힘이 좋으니 좀 뽑아 버려요.”
“아이구, 처형 여기는 내 땅하고는 관련도 없는데 내가 어 어떻게 그렇게 해요.”영신은 그 장면이라도 찍어두어야 어디에 호소할 수 있다는 생각에 다급하게 다시 말했다.
“그럼 지금 제 멋대로 길에 철망을 치는 장면이라도 핸드폰 사진으로 찍어두세요.”
“아 안돼요, 그렇찮아도 내가 처형땅을 붙이니까 황토방을 신고한 사람이 아닌가 의심하면서 흘겨보더라고요. 저는 못해요”
영신은 다시 가슴이 꽉 막혀 힘이 쭉 빨려나가는 목소리로
“알았어요” 하고 전화를 끊고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저런 독새 같은 놈이.“
그런데 누가 황토방을 불법건축물로 고발했을까 생각하다 예전에 선호와 같이 시청에서 거세게 항의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는 선호에게 전화하였다. 선호도 충격을 받았는지
“ 어휴, 그 자식을 휠체어 채, 또랑에 처박아버리고 싶구만. ”
그리고 나서 영신이 불법 건축물 고발에 대해 물었더니
“그거 정말 오래 전인데. 우리가 시청에 가서 항의할 때 너하고 같이 이야기 했잖아. 며칠 뒤에 나에게 전화가 와서 정식으로 고발할 것이냐고 하더라고. 그때야 그걸 빌미로 독새에게 양보라도 받아낼려고 그런다고 하였지. 그러고는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그럼, 그때 고발한 것이 이제야 처리된 거야.”
“그래 그런 것 같은데”
“어이구 일하는 속도하고는.... 문제가 다 해결된 바람에 시청은 이제와서 긁어 부스럼이냐?”
선호는 영신을 데리고 법률구조공단에 들렸다. 번호표를 받고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3번 데스크에서 불렀다. 상담관은 이야기를 듣고 그동안 시청과 경찰서에 제출한 서류를 검토하고 나서 말하였다.
“이것을 G경찰서에 제출하니까 뭐라고 하던가요?”
“형사건이 안 되니 민사소송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뭐요? G 경찰서가 도대체 왜 그랬죠. 이건 분명히 형사처리할 사안인데”
선호가 힘을 얻어 말하였다.
“경찰서에서 피의자는 조사도 하지 않고 고발자인 우리만 조사하고 나서 바로 서류를 돌려 보냈습니다.”
상담관은 선호와 영신을 번갈아 보더니
“농사짓는 분 맞아요?”
“예, 네 사람 중 두사람은 완전한 농민이고요. 저희 둘은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땅이라 직접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는 법률 사전을 뒤적여 한 곳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여기 형법에 있잖아요. 비록 개인 소유의 땅이라 할지라도 사람, 우마를 포함해서 다니는 길을 막으면 형사 입건되는 겁니다. 여기 농로도 마찬가지라도 적혀 있잖습니까. 소유주는 막아서는 안되고 지료는 청구할 수 있어요”
선호와 영신이 기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말하였다.
“ G경찰서에 다시 정식으로 고발장을 내십시오.”
선호의 표정이 어두워지며 말했다.
“제출해도 받아주지 않고 되돌려 주는데요”
“으음, 그래요. 잠시 기다리십시오.”
그는 메모지에 번호를 붙여 제목을 써내려 갔다. 그리고 그 메모지를 선호에게 건네었다.
“이 서류를 떼 가지고 다시 들리십시오. 내가 직접 문서를 작성하여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호와 영신은 구세주라도 만난 기분이었다. 거듭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밖으로 나와 메모지를 살펴보았다. 다른 서류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하나가 문제가 되었다.
‘농협 조합원 증명서’
이게 선호와 영신에게는 없었다. 그러나 영신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둘은 없지만 덕만이 오빠와 금로는 가지고 있을 꺼야. 이건 하늘이 돕는 거야. 이 독새 놈, 니 혼 좀 나봐라.”
“그래 내가 알아볼게.”
둘은 의기투합하여 문제를 해결하기로 하고 밝은 표정으로 헤어졌다.
선호가 이튿날 아침 일찍 사무실에 출근하니 경비원 정씨가 밤근무를 마치고 귀가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요즘 그의 늙은 얼굴이 더욱 주름져 보였다. 이미 후문 쪽 경비원은 3교대에서 2교대로 바뀌어 2명이 근무하고 있고 이제까지 3교대하던 정문도 2교대로 바꾸겠다고 자치회장이 통보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경비원 5명 중 1명을 감축하게 되면 그가 물러나야할 것이 거의 확실했다.
지난 번 자치 회장으로 부터 인사 잘하기 운동 대장이란 감투를 쓰고 나름 잘 해보려고 노력하였으나 의외의 곳에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 곳에 사는 한 여고생이 출퇴근 시간에 주민에게 90도로 절하는 그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인터넷에 올렸기 때문이다. 물론 늙은 경비원의 편에 서서 그렇게 시킨 어른들을 질타하는 글 속에 첨부된 사진이었다. 삽시간에 누리꾼의 댓글이 줄줄이 달리고 ‘갑질’ 논란에 휩싸이자 신문 기자들이 몰려와 자치 회장의 면담을 요청하는 등 홍역을 겪었다.
자치회장은 사건이 벌어지자마자 예전의 2열 횡대를 앞에 세워 놓고 심하게 꾸짖었다.
“내가 언제 출퇴근 시간에 일렬로 서서 아무에게나 90도 각도로 인살 하라고 지시했습니까? 도대체 누구의 머리에서 그런 생각이 나왔어요”
모두 정씨 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정씨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
“회장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 생각이 짧아 이렇게 됐습니다.”
자치회장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이왕지사 이렇게 된 것 어쩔 수 없지요. 그러나 아파트 이미지가 크게 실추되지 않도록 수습을 잘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번 사건은 자치회장과는 상관없이 일부 경비원이 백화점 점원들이 하는 것을 보고 모방하여 과잉 친절을 베푼 해프닝으로 설명하도록 입을 맞추었다. 달포쯤 지나자 사건이 잠잠해졌고, 이제 그런 일이 언제 있어냐는 것처럼 평상시로 돌아올 때 쯤, 자치회장은 아파트 관리 사무실의 인원 감축을 발표했다. 예전부터 관리비를 낮추자는 주민의 뜻도 있고 하니 기계실 3명을 2명으로 줄이고 정문쪽 경비도 2명으로 줄여 10명을 8명으로 줄이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모두 3교대가 2교대로 바뀌어 기계실도 경비원도 12시간씩 근무해야 한다. 미끼로 남은 사람들의 임금은 좀 더 올려주겠다고 하였으나 선호는 누구를 내보낼 지 난감하였다. 그러나 자치회장은 정씨를 비롯해 두 사람을 정하여 선호에게 넘기며 무리없이 잘 처리하라고 지시한 터였다.
책상 위 모니터의 그립에는 법원 상담관이 써준 메모지가 꽂혀 있었다. 두통이 잠시 쳤다. 머리가 지긋하였지만 ‘앗싸 넌 죽었다’ 투지에 불타 외치던 영신을 떠올리며 빙긋이 웃었다. 영신의 예상대로 덕만이 형과 금로네 어머니한테는 농협 조합원 자격이 있었다.
선호는 덕만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덕만은 김칠규를 찾아가 사정한 내막을 줄줄이 풀어놓는다. 그러나 독새는 그의 사정은 들은 채도 하지 않고 누가 황토방을 불법 건물로 고발했는지에 대해서만 추궁하며 영신을 의심하더란다. 끝에 가서는 만약 쇠말뚝과 철망을 조금이라도 훼손하면 재물손괴죄로 고발하겠다고 말하였다며 한숨을 내쉰다. 다 듣고 나서 차분한 목소리로 선호가 덕만에게 물었다.
“형은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어휴 나도 모르겠다. 김씨가 엄청 화가 난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떤 새끼가 황토방을 고발한 거야?”
“형, 최근에 그런 사람 없고. 올 봄에 시청에 항의하러 갔을 때 우리가 말한 거야.”
“아, 나는 모른 일이다. 그런데 그게 왜 이제야 벌금을 물리고 그런다냐?”
“나도 모르겠어. 시청에서 일 처리가 그렇게 늦은 모양이야”
잠시 뜸을 들인 후 선호는 말했다
“그런데 좋은 방법이 있어. 단지 형이 좀 도와줘야겠어”
“그게 뭔대?”
“형, 농협 조합원증 있지. 그걸 좀 떼어 나한테 줘”
“아니 그걸 어디다 쓰려고?”
“응, 내가 법률구조공단에 갔다왔는데 농로로 사용하는 길을 막는 것은 형사 입건이 가능하댔어. 농협 조합원 자격증만 가져다 주면 모든 서류 작성을 다해 주겠다고 하는데 우리는 조합원 자격이 없잖아.”
순간 그의 뇌리에 중 3때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기 혼자 살자고, 나는 안 때렸다, 그렇게 말하면 우리 모두 죽어. 그러니 모두 같이 때렸다고 말해야 돼. 덕만아 너 알았지’
그래서 그는 때렸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지켜보고만 서 있던 그가 오히려 주모자가 되어 혼자서 보호 관찰소에 갇혀 악몽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한편으로 K형사의 말소리도 들려왔다.
‘당신이 남의 땅에 제 멋대로 길을 냈구만’
그는 선호에게 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법률이고 뭐고 나는 몰라. 경찰서에 고발, 그딴거 하지마, 할라면 너희들이라 하라고”
전화가 툭 끊겼다.
선호는 머리가 하얗게 세는 느낌이었다. 온몸에 피로가 몰려왔다. 의자에 기대어 한참을 눈을 감고 있었더니 TV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TV에서는 데모대와 경찰간의 치열한 공방전을 생중개하고 있었다. 중국과의 FTA를 반대하는 농민, 노동 유연화 정책을 반대하는 노동자, 국사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시민 단체 등 50여 군소 단체들이 연합한 데모대가 경찰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데모대는 깃발을 들고 광화문 대로에서 앞으로 나아가려 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한 경찰 진압부대는 진압용 버스로 차폐막을 만들어 놓고 그 너머에서 소방차로 시위대를 향하여 물대포를 쏘아대고 있었다. 비옷을 입었으나 세찬 물대포를 맞고 휘청거리거나 쓰러지는 시위대를 보며 젊은날 거리에서 주먹을 불끈 쥐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네 놈 뒤에 누가 있는지 끝까지 가서 맞서 보자.’
그는 어금니를 지긋이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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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시산에 소설가님 대단하십니다.
적절한 긴장감과 탄력적인 구성으로 짜진
단편소설을 단숨에 읽다 보니....내년에 2탄이 이어지길 고대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