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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한국전쟁사 (10) -모두가 실패한 이상한 전쟁 3- “김 석원이 여기 있다 ! 후퇴하면 쏜다 ! ”
-7월 7일 진천 최전선에서 수도사단장 김 석원 장군의 독전절규-
1.선수 교체! 노병들의 용전분투 당시 우리 국군에는 한 가족이 함께 장교가 된 경우가 많았다. 백선엽 1사단장(대령)과 백인엽 17연대장(대령)이 형제간이고 유승렬 3사단장(대령)은 자기보다 계급이 높은 유재흥 7사단장(준장)의 아버지였다. 이상근 7사단 3연대장(대령: 개전 초에 아깝게 전사)의 형인 이형근 2사단장(준장)은 이응준 5사단장(소장)의 사위였다. 그러나 50대의 ‘장년’ 장교단은 요직에 있지 못했다. 국군의 주력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고참 대위나 신참 소령에 해당하는 나이의 30세 전후의 젊은 장성들이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터지자 이런 구도는 엄청나게 큰 불행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신생국일수록 감정 통제가 가능한 50대의 노련한 지휘관이 있어야 젊은 지휘관들의 혈기 방장함, 그리고 위기시의 공포를 제어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채 병덕, 정일권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지휘관들 모두가 고작해야 중대나 대대를 지휘했어야 마땅할 사람들이 군 최고 고위층을 맡았던 것이다.
이러한 군의 구도는 한국전쟁 내내 한국군 패전의 한 원인이 되었고 중국군에게는 매번 만만한 돌파대상으로, 동맹군인 미군에게는 미덥지 못한 연합군으로 찍히는데 단단히 한몫하게 된다.
당시 국군에도 광복군이나 중국 국부군(국민당군), 일본군에서 고급 지휘관을 지낸 노련하고 경험 많은 장년층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군은 아주 짧은 시간을 제외하고는 이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아 더 많은 희생과 고난을 자초한다.
사람이 없어서 그렇게 새파랗게 젊은 일본군출신 초급장교와 하사관들을 중용했다는 건 그래서 말이 안 되는 허울 좋은 변명에 불과하다.
1-1. 독립군 김 홍일 장군, 전쟁의 흐름을 바꿨지만....
‘선수 교체.’ 서울이 함락되자 산전수전 다 겪은 노병들이 축 처진 ‘젊은 어깨’들을 대신해 최전선에 나온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오성장군’김 홍일과 ‘호랑이’ 김 석원이다. 윤 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 공원 의거 때 도시락폭탄을 제공했던 바로 그 중국군 장교출신의 독립투사 김 홍일이 돌아온 것이다. 이미 중국대륙에서도 수만 명의 정규군을 지휘해본 경험이 있던 진짜 국군 총사령관감인 군인이 뒤늦게 서야 싸움터에 나서게 된다.
6월28일 새벽 수원으로 쫓겨 온 육군본부는 시흥보병학교에 시흥지구전투 사령부를 만들어 중국 국부군에서 중장(2성 장군)을 지낸 김 홍일(당시 51세) 소장을 사령관에 임명해 패잔병 수습에 나선다.
김 홍일 장군은 먼저 영등포 일대로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이 몰려오자 타 부대 패잔병을 모아 ‘혼성 수도사단’을, 노량진 쪽에 7사단 패잔병이 도착하자 같은 방법으로 ‘혼성 7사단’을 편성했다. 김 홍일 장군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1사단과 2사단 7사단 그리고 수도사단의 잔존패잔병들을 수습하고 노량진과 영등포 일대에 성공적으로 한강 방어선을 구축한다. 한강다리가 끊어졌다고는 하나, 인민군의 선발대가 노량진을 넘보고 있는 시점에서 김 홍일장군의 시흥지구 전투사령부는 용전분투했고 그 임무를 기대 이상으로 완수했다.
서울이 함락되던 날 수원에 도착한 미군 수뇌부가 당초 요청했던 3일보다 훨씬 더 긴, 무려 일주일을 버티면서 우리 군이 전열을 재정비하고 미군이 파견될 시간을 벌어줬기 때문이다.
시흥지구 전투사령부의 1주일 분전은 초기 한국전에서 6,8사단의 분전 못지않게 높이 평가해야 할 한국전쟁사 우리 국군의 큰 업적이다. 특히 시흥지구 전투사령부의 예하 병력들이 후일 국군 최초의 군단, 제1군단의 모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이미 망가진 전선을 수습하고 패잔병들을 그러모아 다시 싸울 수 있는 부대로 만든 김 홍일 장군의 전공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그 작전의 총지휘를 바로 독립군 출신의 김 홍일 장군이 맡았다는 사실은 우리 국군의 역사에서 많은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그러나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국군을 기사회생시킨 드높은 전공에도 불구하고 기계전투 실패의 책임을 구실로(그러나, 당시 미고문관 콜터 소장과의 갈등이 주 요인 이라는 게 정설이다) 김 홍일 장군은 1군단장의 자리를 김 백일 준장에게 내놓고 이후 종합학교장등 한직을 떠돌다 결국 51년 중장으로 예편하고 말았으니, 당시 군내의 친일인맥들과 이승만이 얼마나 이 땅의 독립군출신의 정통성 있는 군인사의 맥을 끊어 놓기 위해서 광분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사성장군감이 전시의 급박한 상황에서도 결국 한직으로 내몰려 예편했던 상황에서도 국군에 능력 있는 사람이 부족해서 일본군 출신들을 부득이하게 뽑았다고 변명할 것인가? 당시 김 홍일 군단장의 교체를 김 홍일 장군의 지휘를 받았던 일본군 출신인 김 석원 수도사단장마저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아연실색’이라고.
일본군경력을 가진 장교가 봐도 전선의 상황이 급박한 최악의 상황에서도 노련하고 경험 많은 능력 있는 야전지휘관을 한직으로 내모는 황당한 군대, 나라 망하라고 굿판을 벌이고도 남을 짓을 하던 당시 이승만의 대한민국 정부와 국군수뇌부였다.
1-2. 돌아온 ‘호랑이’ 김석원 장군
일본 육사 27기 대좌출신이었으나, 강직한 성품 때문에 사사건건 채 병덕과 마찰을 빚다가 결국 예편하고 말았던, 예비역 김석원 장군이 분연히 일어나 혼성 수도사단을 이끌겠다고 하자 장병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6월30일 새벽 인민군 3사단 특공대 30명이 목선을 타고 흑석동 강변에 도착해 국군 혼성7사단과 치열한 백병전을 벌였다. 7월1일 새벽에는 인민군 4사단이 여의도로 도하를 시도했으나, 국군 혼성 수도사단이 필사적으로 저지했다.
그러나 7월3일 새벽 인민군은 미처 끊어지지 않은 단선 철교를 통해 혼성 7사단이 있는 노량진으로 단 4대의 전차를 내려 보냈다. 쓸만한 대전차화기가 사실상 전무한 상황에서 이 4대가 어마어마한 공포를 몰고 온다. 결국 영등포에 포진한 혼성 수도사단도 퇴각하고, 한강방어선은 무너져 버렸다.
그러나 이미 모든 중화기를 상실한 상황에서 한강방어선을 일주일이나 지켜낸 원동력에는 노장 김 홍일 장군과 김 석원 장군의 솔선수범과 탁월한 리더십 그리고 강을 건너면서도 소총만은 손에 놓지 않으려고 했던 수많은 장병들의 피와 땀과 노고와 불굴의 투혼이 있었음을 분명히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들의 감투정신과 투혼을 실제로 지켜봤던 맥아더 원수와 미 극동군 사령부의 참모들이 한반도에서 역전의 가능성이 있음을 워싱턴에 보고했던 것 또한 이들의 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진정 나라를 구하고 지켰던 이들은 따로 있었다. 그 후 김 석원 장군은 7월7일 벌어진 충북 진천 전투에서 권총을 뽑아들고 포탄이 떨어지는 최전선에 직접 나서 몸을 아끼지 않고 독전하여 장병들에게 큰 존경을 받게 된다.
시인 고은의 표현대로 그는 수도사단을 한국야전의 중앙으로 만든다. 후방의 어린이들이 ‘호랑이 김 석원이다! 살고 싶으면 후퇴하라‘는 소리를 지르며 놀만큼 그는 용장이었다.
1-3. 초라한 그들이 희망을 일구고 있었다.
이때 국군 전력은 채병덕의 축차 투입 작전 실패로 9만 여의 병력이 고작 2만5천명 수준이 되어 있었다. 당시 편제를 유지하고 한강을 건너온 것은 시흥지구 전투사령부 예비대로 편입된 1사단뿐이었다.
6월 30일 결국 무능한 채병덕 참모총장이 해임되었으나, 후임은 역시 32세의 새파란, 52년에 가서야 처음 야전사단을 지휘하게 되는 일본군출신 정 일권 소장에게 맡겨진다. 한강방어선이 무너진 후인 7월5일 정 일권 참모총장은 1군단을 창설하고 한강 방어선을 지켜낸 김 홍일 소장을 군단장에 임명한다.
1군단에는 수도사단(김석원 준장) 1사단(백 선엽 대령) 2사단(이 한림 대령)을 배치했다. 이때 2사단장이던 이 형근 준장은 장인인 이응준 소장이 신설된 전남관구 사령관을 맡자, 자진해서 부사령관이 되었다. 이어 7월15일에는 김 홍일 장군의 요청으로 김 백일 준장이 이끄는 2군단이 편성되고, 6사단(김 종오 대령)과 8사단(이 성가 대령)을 지휘케 했다. 3사단과 17연대는 육본 직할부대로 편성했다. 이로써 국군에서는 소리 소문 없이 5사단과 7사단이 사라졌다.
이러한 사단 해체는 이후에도 몇 차례 더 반복된다. 이런 체제 정비로 국군 1군단은 인민군 1군단, 국군 2군단은 인민군 2군단과 대적하는 구도가 만들어졌다. 개전 초기 수뇌부의 참담한 작전 실패로 지리멸렬한 상황이었지만, 노장들과 병사들의 투혼으로 국군은 그 명맥을 잃지 않고 있었다. 1950년 그 길고 긴 여름, 아무도 제대로 알아주지 않았지만 그들이 희망을 일구고 있었다.
2. 대통령 이승만, 6월말부터 7월 중순까지의 행적: 과연 국가원수?
이승만의 어처구니 없는 한국전쟁 초기의 도주 행각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냉정히 말하면 그건 이승만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한국전 발발이후 대한민국의 지배층은 거대한 부정부패의 소굴이었음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지배층의 상당수는 전쟁직전에 자식들을 유학이랍시고 미국으로 빼돌렸고 이런 행태는 전쟁 내내 계속된다. 피난길에 오르던 어떤 장성은 군수물자를 실어야 할 트럭에 자기 집 가재도구와 심지어는 개까지 실어 날랐다.
이들 대부분이 과거 일제시대 민족을 배신하고 일신의 영달만을 꾀했던 친일 반민족 경력이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이들이 이후에도 내내 득세했으니... 이들이 득세한 대한민국이야 말로 북한 정권에게 가장 정당한 전쟁의 대의명분을 대한민국 스스로 북에게 제공했다고 말해도 반박할 논리가 빈약할 지경이다.
2-1. 기록하기 조차 역겨운 보름: 이승만의 도주 행각
전쟁이 일어난 후에도 여전히 허풍과 기만적 태도를 버리지 못했던 이승만 행정부는 국군이 승리하고 있는 것처럼 국민을 속이면서 27일 저녁 대통령과 정부수뇌부는 서울을 떠난다. 28일 새벽 두시 30분경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강다리를 폭파시킨다. 이 폭파는 이 형근의 지적대로 천인공노할 만행이자 폭거였다.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거기서 죽었는지 알 수 없다. 최소 800명에서 최대 4천명이 죽었다고 추정된다.
당시 인민군이 서울 북쪽 외곽에 있었건만 무수한 서울시민과 분투하는 장병들을 사지에 내버려두고 자기들만 살겠다고 다리위에 무수한 사람들이 그대로 있는 상황에서도 다리 폭파를 지시한 채 병덕 참모총장과 이승만 대통령... --; 전술했지만 최소한 6-8시간만 더 늦게 다리를 폭파했더라면 많은 수의 국군장병과 중장비와 탄약과 군수품들이 다리를 통해서 한강 이남으로 후퇴할 수 있었을 것이고 또한 폭파작전 자체도 훨씬 더 확실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우리는 한강폭파로 모든 다리가 끊어진 것으로 생각하지만 기실 그 성급한 다리 폭파로 다리는 모두 끊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미처 끊어지지 않은 철교를 통해서 후일 적의 탱크가 내려오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여 한강에서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시흥전투사령부 예하 수도사단과 7사단의 저지선이 뚫리는 결과를 초래했으니,전술적으로도 전략적으로도 그리고 더 크게는 도덕적으로나 인도적으로나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완전한 범죄요 과오였다.
이 사건으로 여론이 들끓자, 이승만은 그 책임을 모두 당시 폭파 실무자인 공병감 최 창식 대령에게 뒤집어 씌워 처형하는 것으로 자신의 실책을 덮는다. (이후 64년 재심에 의해서 12년 만에 최 창식대령은 사후 복권 된다) 이 승만의 도주행각은 6월 27일부터 시작되어 서울에서 수원 그리고 대전, 대전에서 대구, 다시 대구에서 대전으로 이어졌고 거기서 또다시 대전에서 이리, 이리에서 목포, 목포에서 부산 그리고 다시 대구로 7월 9일까지 이어진다.
그 와중에 임시수도 대전에 머물던 각료들이 인민군이 평택까지 내려왔다는 소문만 믿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전주로 도망갔다가 사실 확인 끝에 다시 돌아와 다시 머물던 대전 성남 장에 들렀으나, 그들의 한심한 작태에 분노한 여관주인 김금덕 여사가 그들의 투숙을 거부했던 일이 벌어졌으니, 이게 바로 그 유명한 ‘대전 성남장 사건’이다.
여관주인 말대로 진정 대한민국을 망치는 자들은 김일성이 아니라 바로 이들이었다. 이승만의 피난길은 대전에서 3일을 머문 후 대구로 갔으나, ‘너무 많이(?) 내려 오셨다‘는 참모들의 건의에 다시 대전으로 올라온다. 여기서 다시 이리(현재의 익산)로 이리에서 목포로, 목포에서 부산으로 이어진다.
2-2. 국가원수라고 불러주기엔 너무도 민망한 ...
박명림은 7월1일 새벽 이승만의 대전 탈출은 그 어떤 명분으로도 설명되기 어려운 ‘도망’이었다고 규정한다. 6월 27일부터 7월 9일 사이에 벌어진 이승만의 우왕좌왕 행각은 한마디로 설명이 불가능하다. 단순한 우왕좌왕이라 부르기엔 국가원수로서 너무 갈팡질팡 하고 있었다. 그는 처음 대구로 도망갔다 다시 대전에 도착할 때까지 12시간 30분간 그리고 대전에서 호남을 거쳐 부산까지 이동에 소요된 32시간 동안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의 임무를 전혀 수행하지 않았다. 아니,모든 대한민국이 그를 찾았지만 그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 두 번의 공백 기간동안 대한민국 대통령은 사실상 유고상태였다. 아무리 신생국가의 어설픈 대통령이라 하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오직 제 한 몸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추한 노인의 모습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만약 북한의 김일성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그가 서울에서 3일씩이나 일어나지도 않을 남로당의 봉기를 기다렸을까? 아니 동부전선에서의 패배로 전열을 가다듬을 생각을 했겠는가?
이 승만은 신생 대한민국에서 절대로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될 사람 이었다는 것을 한국전쟁 발발 2주일 만에 완벽하게 증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온갖 수법으로 정권을 이어갔으니 한국 현대사 특히 대한민국 초기 역사의 질곡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한국전쟁은 이승만 행정부와 그 주축이 된 친일 반민족세력들이 얼마나 무능하고 도덕적으로 자격 없는 집단임을 여지없이 드러낸 사건이자 또 그러한 저들의 무능과 부도덕함을 무자비한 폭력으로 은폐시켜버린 악취 나는 범죄현장이 되고 만다.
모든 전쟁이 다 비참하고 끔찍한 일이지만, 유독 한국전쟁은 그 정도가 더욱 심해질 수 밖에 없는 원인을 처음부터 이렇게 내포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