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5가해41-1-1.zip
圭峰:三은 如來印定이라
규봉:셋째는 여래가 印定한 것이다.
佛이 告須菩提하시되 如是如是로다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렇다, 그렇다.
淸峯:그렇다 그렇다. 한 것은 수보리의 깨달은 바 견처가 부처님과 계합함으로 인정하여 인가한 것이니, 두 번을 거듭 옳다 한 도리를 또한 알아야 한다. 이것은 공안이 되므로 파설 될까 염려하여 설명하지 않겠다.
다만 격외로 한마디 한다면,
“달이 달을 삼키고, 물에 도장을 찍었으되 흔적이 없음이로다.”
六祖:佛이 印可須菩提는 所解가 善契我心이니 故로 重言如是也니라.
육조:부처님이 수보리를 인가하신 것은 그 아는 것이 자기의 마음에 바르게 계합한 것이므로 거듭 말씀하시되 ‘그렇다’고 하신 것이다.
圭峰:四는 聞時不動希有勝이라
규봉:㉣은 經을 들을 때에 動하지 않아 희유함이 뛰어난 것이다.
若復有人이 得聞是經하여 不驚不怖不畏하면 當知是人은 甚爲希有이니라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을 얻어듣고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심히 희유한 것이니라.
淸峯:어떻게 하는 것이 놀라고 겁내고 두려움이 없게 되는 것일까? 의심함이 없고 물러남이 없으며 어지럽지 않아 적적요요(寂寂寥寥)함인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가 공하여 말에나 문자에 있지 않음을 요달(의심하지 않고 믿고 깨달음)한 것이다.
說誼:空生의 希有之說이 妙契於理이니 故로 讚言如是如是이시니라 衆生이 違背覺王이 其來久矣이니 聞佛開示하고 多生驚怖하나 苟不驚怖면 甚爲希有로다 比之窮子가 立令 ?孤露하여 爲日已久다가 得見父王은 實爲天幸이로다 然이나 其父는 門庭이 高峻하고 窮子는 志意가 下劣하여 見已에 未免驚怖去在이니 見已에 不驚怖者는 甚爲希有로다
설의:수보리의 희유하다는 말이 묘하게 이치에 계합함으로 칭찬해서 말씀하시되 ‘그렇고, 그렇다’하시니라. 중생이 覺王(佛)을 어기어 온지 오래였으니 이제 부처님의 開示함을 듣고 많이 놀래고 두려움을 내게 되나, 진실로 놀래고 두렵지 않으면 심히 희유한 것이로다. 비유하면 집나간 窮한 자가 비틀거리며 외로이 거리를 헤매인지 오래다가 父王을 만나보게 된 것은 실로 천행이었도다. 그러나 그 아버지의 문과 뜰이 고준(高峻)하고 그 궁한 자는 생각하는 뜻이 하열하여 보고 나서 놀랍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나니, 보고 나서 놀래고 두려워하지 않으면 심히 희유할 것이로다.
청봉착어:풍족함을 스스로 갖추고 있어도 모르면 가난하고
갑자기 자기의 것임을 알 때 놀래기 쉬워
오묘한 이치를 능히 알면 희유할 것이나
계합해 깨달아 증오하면 놀랠 것이 없으리라.
圭峰:論에 云하되 驚者는 謂非處生懼요 怖者는 不能斷疑心故요 畏者는 一向怖故이니 其心이 畢竟墮驚怖故니라
규봉:論에 이르되 “驚(놀랜다)은(두려움을 낼 곳) 아닌 곳에서 두려움을 내는 것이요, 怖(두려움)는 능히 의심을 끊지 못한 연고요, 畏(겁냄)는 한결같이 두려워하는 연고이니 그 마음이 필경은 驚怖에 떨어진다”고 했다.
[세 가지 상(驚,怖,畏)이 서로 행하는 것이 같지 않으니 驚은 놀래서 기이하게 여기는 것이고, 怖는 나아가고 물러남에 두렵고 두려워함이고, 畏는 한결같이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 서울을 올라 갈 적에 이 길이 원래 옳지 않다고 말하거나 혹은 한계를 느껴 더 나아가지 않거나, 혹은 무서워 광기가 발작하여 골짜기에 떨어지거나 바위에 던져져 천명을 마치지 못하는 등과 같은 것으로 법에 합하는 것은 가히 알기 어려운 것이다]
청봉착어:驚怖畏가 사람의 감정이 다르니
놀랜다(驚)는 것 두려움이 생긴 때문이요
두려워한다(怖)는 건 의심스럽기 때문이며
겁낸다(畏)는 것은 한결같이 두렵기 때문이니라.
六祖:聲聞은 久着法相하여 執有爲解하고 (爲解는 一作所解라) 不了諸法本空一切文字皆是假立하나 忽聞深經하고 諸相不生하여 言下卽佛이라니 所以驚怖이니라 唯是上根菩薩은 得聞此理하고 歡喜受持하여 心無怖畏退轉이니 如此之流는 甚爲希有也니라
육조:聲聞은 오랫동안 法相에 집착하여 함이 있음을 알아 집착하고, 모든 것이 본래 공하여 일체 文字가 모두 거짓으로 세운 것임을 요달하지 못하였으나, 홀연히 깊은 경전을 듣고 모든 상이 나지 않게 되어 말 아래 곧 부처라니, 이런 까닭에 놀래고 겁내는 것이다. 오직 상근기의 보살은 이 이치를 얻어듣고 기쁘게 받아 지니게 되어 마음에 두렵고 겁내어 퇴전함이 없으니 이러한 이들은 심히 희유함이 되는 것이다.
傅大士:如能發心者는 應當了二邊하니 涅槃은 無有相이요 菩提는 離所緣이니 無乘及乘者라 人法兩俱捐하고 欲達眞如理이며 應當識本源이니라
부대사:이같이 능히 발심한 이는
마땅히 二邊(유, 무의 소견)을 여의고 중도를 깨달아야하니,
열반은 相이 없음이요, 菩提는 반연함을 여읨이니
오를 것도 올라 갈 자도 없어
사람과 모든 것 양쪽 모두를 버려야 하고,
진여의 이치를 요달하고자 하면
마땅히 본래 근원을 알아야 하니라
冶父:?是自家底니라
說誼:不生驚怖를 說爲希有하니 是則是矣나 而父子는 本自同氣이며 亦自同家이니 何曾驚怖이며 雖不驚怖를 亦何希有하리오
야부:다만 이것이 자기 집이니라.
설의:놀래고 두려워하지 않음을 희유한 것이라 하니 이는 옳기는 곧 옳으나 父子는 본래 자연 같은 氣이며, 또한 자연 같은 집이니, 어찌 일찍이 놀랍고 두려울 것이며 비록 두렵고 놀래지 않는 것을 또한 어찌 희유하다 하리오?
청봉착어:어리석어 집착이 있으므로 저열한 수행인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되 소리와 문자에 집착하나
소리나 문자는 황엽(黃葉)과 같아 방편일 뿐임을 알라
일체 상이 상 아님을 깨달으면 심히 희유함이 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