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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토요일, 소공동에 있는 캐논AS센타에 카메라렌즈 수리도 맡길 겸해서 시내나들이를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AS하는 일엔 일본 메이커들이 우리보다 앞서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날 내가 경험하기로는 이 분야에서도 우리가 앞서고 있는 게 아니냐 하는 느낌을 받았다. 오늘 당장 렌즈를 써야 하는 나에게 맡기고 가면 일주일 쯤 수리시간이 걸린다는... 얄밉게 생긴 처자의 안내에 순간 골이 났지만 어쩔 수는 없었다.
캐논카메라 서비스센타를 나와 좁은 골목을 잠깐 걸으니 덕수궁돌담이 나오고 정동길이 나왔다. 노란 은행잎이 바람에 날려야 제맛이 나는 이 길은 아직 때가 일렀다. 참새떼처럼 재잘거리며 중명전으로 들어가는 아이들 뒤를 따라갔다. 아이들 앞 가슴에는 '역사탐방'이란 표찰이 줄에 달려 있었다. 미리 예약을 해야한다는 중명전 관람을 은근슬쩍 끼어서 해설사 어른이 설명을 들으며 둘러 보았다. 중명전은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역사의 현장이다. 아이들을 인솔하는 교회의 주일학교 청년교사들이나 나같은 사람들은 이 건물이 품고 있는 아픈 역사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나, 아이들은 해설사 어르신의 이야기에 모두 지루해하며 딴짓을 하기에 바빴다. 어린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걸 눈으로 보았다.
정동길을 돌아나와 광화문 네거리를 지나 청계천으로 갔다. 청계천을 끝까지 걸어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루종일 걸어 고산자교에서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발바닥이 화끈거리고 정갱이가 시큰거렸다. 청계천이 생각보다 길게 느껴졌다. 청계천복개공사에는 고교동창인 김아무개란 친구가 고생을 좀 했다. 그는 H대 공대를 나와 서울시토목기술 공무원으로 취직했고, 자연스레 이 복개공사를 담당하였다. 공사가 마무리되고 공을 인정받았는지 청계천관리센타소장이란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가끔 매스컴에 나오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어느날 갑자기 사망했다는 부고가 있었다. 그는 공무에 바빴는지는 몰라도 동문회나 고향친구들 모임에 얼굴을 내민 적이 거의 없었다. 나와도 유달리 친한 우정은 없었으나, 발인 전날 그의 빈소를 찾았었다. 타관살이 하다 세상을 하직하면 빈소란 것이 적막하기 마련이지만, 어쩐지 그날 저녁 빈소를 떠나기가 미안할 정도였다.
청계천을 걸으니 불현듯이 그 친구가 생각났다. 아마도 몰아치는 불호령도 들어가며 공사를 밤낮으로 했을 것이다. 그 공으로 어떤 사람은 대통령도 되고, 또 어떤 이는 고관대작으로 영전을 했을 것이다. 크게 말하면 역사가 그렇고 작게 보면 개인사란 것도 바퀴에 쓰러지면 불행이 된다. 수레 위에 올라타야 하는 것이다. 좋게 말하면 수완이 있어야 하고, 속된 말로는 약은 처신을 좀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섬출신인 이 친구가 서울시라는 거대조직 속에서 어찌했는 지는 보지 않아도 같은 섬놈인 내눈엔 선한 것이다. 그에게도 출세의 욕심이 있었다면, 학연과 지연이 실하지 못한 곳에서 제 몸 하나 부지런해야 하는 걸 그라고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과로한 탓으로, 결국은 청계천복개공사에 진을 빼고 한창 나이의 귀한 제 목숨을 바쳤을 지도 모른다. '토목공화국'이라는 비아냥 소리를 들어야 하는 요즘이지만, 이런 무명토목쟁이들의 수고로움까지 비하해서는 안될 일이다. 어쨋든 날은 가을이라 화창했고, 청계천을 오가는 사람들은 행복해 보였다. 도심에 이런 공간이 생겼다는 건 참 고마운 일이다.
정동극장 작은 뜰...
예원학교 돌담너머...
한국카톨릭수도원의 첫자리인 '정동수녀원'이 있던 곳을 기념하는 부조가 세워져 있다.
가을엽서 - 안도현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 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 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 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 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 보십시요.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 지를
청계광장 입구, 거리의 젊은 퍼포먼스 예술가들...
대한민국 '아줌마들'... 그들은 고함치듯 떠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코리아의 에너지 원천!
황학동 풍물시장에 들렀다. 요즘 쇠퇴해 간다는 말이 들리던데, 그럴만 했다. 사고 싶은 물건들이 별로 없었다.
물허벅진 제주의 여인네가...
상념에 젖은 어르신...
옛 청계고가도로의 교각을 기념비처럼 남겨 두었다!
궁핍했던 시절에 청계천변에 즐비했던 판자촌을 재현했다.
이날 걷기의 종착점인 고산자교에서 한강쪽으로 바라본 풍경...
용답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어둠이 내린 이곳으로 돌아와서, 아들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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