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월간 원광에서 [스승의 날] 특집 원고 청탁을 받고 쓴 글입니다.
이번 스승의 날에 다시 되세겨 보며 여러 동지들과 공유하기 위하여 용기를 내서 이곳에 올려봅니다. 재밌게종화
월간 [원광] 특집-나의 스승, 나의 제자(스승편)
스승의 날에 되새겨보는 세 가지 법문
이종화 교무(부산진교당)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출가를 해서 원불교학과에 다니던 예비교무시절이었다. 그 때까지는 선생님과 학생이라는 경험만 있었지 스승님이라는 개념을 잘 몰랐었다. 더욱이 제자라는 경험이 전혀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 무렵 ‘몹시 추운 날 솥을 걸라는 스승의 명을 받고 밤이 새도록 아홉 번이나 솥을 고쳐 걸고도 마음에 추호의 불평이 없었다.’는 구정 선사의 신성에 대한 법문말씀은 나에게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하는 충격적인 법문이었다. 그때 나는 아홉 번은 고사하고 세 번 정도라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다가 문득 구정선사는 아홉 번을 참으며 밤새도록 고생한 것이 아니고 아마 아홉 번의 법열 넘치는 춤을 췄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즉 구인(九忍)선사가 아닌 구무(九舞)선사를 떠올리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어느 해인가 스승의 날이었다. 우리 예비교무들은 아침 일찍 총부 반백년기념관 앞에 모여 멀리 신도안에 계시는 대산 종사(당시 종법사)님께 망배를 올리고 남자원로원과 여자수도원에 인사를 갔었다. 원로님들께 약소한 선물을 드리고 스승의 날 노래를 불러드렸다. 그때 남자원로원에는 상산 박장식 종사님이 제일 어른이셨고, 여자수도원에는 훈타원 양도신 종사님이 제일 어른이셨다. 여러 원로님들을 대표하여 두 어른께서 법문을 내려 주셨는데 약속이나 한 것처럼 ‘나는 여러분의 스승이 아니고 우리 스승님은 오직 대종사님 한분이시다. 우리는 다 같이 대종사님 제자이니 법형제이다. 우리 모두 영생의 스승이신 대종사님을 세세생생 잘 모시고 살자.’라는 요지의 법문을 해주셨다. 이 법문 또한 큰 충격이었다. 이 날을 계기로 그 동안에는 감히 제자라고 생각지 못하고 멀리 높이만 모시던 대종사님을 가까이 모시게 되었고, 우리 원로님들을 더욱 큰 스승님으로 우러러 모시게 되었다.
또한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스승님을 모시는 삶에 대하여 대산 종사님께 직접 받든 법문이 기억에 남아있다. 대산 종사님께서 어느 절 불상을 보시고 내려주신 법문이었다. 그 절의 불상을 자세히 보니 머리 위에 수많은 부처님을 모시고 있더라고 소개하고 ‘부처님은 많은 부처님을 머리에 모시고 사시는 분이라며 우리에게 많은 부처님을 모시고 살아야한다.’고 하셨다. 또한 대산 종사님께서는 대종사님은 물론이고 이 회상으로 이끌어 주신 인도사(引導師)를 비롯하여 초도사(初導師), 발심사(發心師), 신심사(信心師), 입지사(立志師), 불교사(佛敎師), 유학사(儒學師), 또한 숙사(宿師)로 사대성인을 비롯하여 멀리 인도의 유마거사 가까이 부설거사 심지어 내소사 더벅머리총각까지 모두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씀하시며 스승님을 많이 모시라고 거듭 강조해주셨다. 이 법문은 스승의 날 원로님들께 받들었던 ‘우리 스승님은 오직 대종사님 한분이시다.’라는 법문 말씀과 묘한 조화를 이루며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신 큰 법문으로 남아있다.
매년 스승의 날을 보내고 또 유월이 시작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평소 스승님께 보은의 도리를 못하며 지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스승님들의 가르침을 다 실천하지 못하고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세상의 모든 제자들의 공통된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스승님들은 제자들이 이렇게 무거운 마음으로 지내며 더욱 멀어지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동안 보은도리를 잘했건 못했건 또한 가르침을 잘 따랐건 못 따랐건 간에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 인사드리는 것이 여의치 못하다면 스승님을 떠올리며 심기일전해서 더욱 잘 사는 것도 스승님을 모시는 한 방법이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첫댓글 유월이 오면 뵙고 싶은 스승님! 어두운 마음 밝혀 주신 우리 스승님!..잘사는 것이 스승님의 은혜에 보은하는 길...공감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