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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학생주부백일장 "성황" | |||||||||
<초중고 장원 작품 수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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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문화원에서 주최하고 한국문협 봉화지부(지부장 김재남)가 제25회 청량문화제 행사의일환으로 주관한 학생 주부 백일장이 지난 9월 29일 오전 10시 지난번 개최되었던 범들솔밭에서 학생, 주부 등 참가자와 문협관계자, 지도교사 등 3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치뤄졌다. 여름 내내 초록 빛을 뿌리던 나무들도 점점 오색 옷으로 갈아입는 계절이 왔다. 온몸을 동여매던 뜨거운 바람은 어느덧 몸과 마음까지 시원하게 해주는 가을바람이 되어, 저 햇살따라 올라가버린 가을하늘 위를 신나게 날고있다. “저녁 해놨으니까, 저녁먹고 집에서 숙제하고 있어. 엄마, 아빠는 9시쯤에 올거야.” 집 현관에 발을 디딤과 동시에 엄마의 향수냄새가 코를 스쳐 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탁자에는 엄마가 차려놓으신 저녁반찬들이 비닐봉지 이불을 덮고 내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비닐봉지를 치우자 된장찌개, 계란말이같이 성질 급한 녀석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하얀 하품을 크게 해댔 바깥에서 구슬프게 우는 귀뚜라미 소리가 생생히 들리고, 샤프가 종이에 박치기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집 안은 조용했다. 숙제를 하다말고 벌떡 일어나 창가 옆에 있는 거실의 소파에 달려가 대문밖을 살폈다. 항상 듣고 살아온 소리는 분명히 기억하기 마련이다. 나 또한 아빠의 자동차 소리와 비슷한 소리를 듣고서 달려나간 것이었다. 그러나 아빠차는 보이지 않았고 달은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더 따스한 눈길로 나를 바라 봐 주는 것 같았다. 달에 그려진 여러 무늬들이 달을 무섭게 만든건진 몰라도, 지금 이 순간이 너무 행복했다. 혼자 있다는 사실 만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던 내 마음은, 달빛의 신비한 빛에 넋을 잃었고, 숙제라는 단단한 철조망 안에 갇혀있던 나의 두눈도 달빛의 수려한 자태에 퐁당 빠져버렸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하늘을 보았다. 달은 그 커다란 품을 열어 황홀한 빛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어느 누군가가, “달은 차가운거야”라고 한다면 나는 꼭 말하고 싶다. “아무도 없을 때 힘이 되고, 엄마가 되어주는 것은, 항상 밤하늘을 비취주고 있는 그 푸르고 따스한 달이다”라고 말이다. 아옹다옹 거리며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고 있는 나뭇잎들의 소리, 오랜만에 만난 가을 바람과 데이트를 즐기며 살랑살랑 몸을 흔드는 코스모스의 소리가 일상 생활에 지쳐있던 나의 몸과 마음의 피로를 풀어 주고있었다. 얼굴 옆으로 떨어진 솔방울 때문에 놀라 감았던 눈을 떴다. 눈은 높은 하늘을 향해 갔고, 눈동자는 하늘을 수영장 삼아 헤엄쳐가고 있는 뭉게구름들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어디선가 들리우는 소리를 따라가 보니 한쪽에서는 자그마한 새 두 마리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열심히 지저귀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흰 날개를 펄럭이며 강물에 빠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수면위를 날고 있었다. 나는 새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의 마음 또한 넓디 넓은 하늘을 향해 힘차게 날개짓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갈을 밟으며 걷던 중 돌 사이에 흰 들꽃 한 송이를 발견하고선 그 자리에 멈추어 꽃을 바라 보았다. 가족도, 친구도 가까이에 있지 않는 곳에서 홀로 예쁘고 꿋꿋하게 잘 버텨 온 들꽃이 참으로 대견스러웠다. 한편으로는 혼자서는 그 무엇 하나도 잘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강물이 천천히 흐르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자신의 주위에 있는 소중한 친구들의 소리에 귀 기울여주고, 힘찬 날개짓을 바라봐 주기 위해서, 그렇게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다. 천천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늘 바쁘게 움직이고, 늘 무언가에 쫒기는 것처럼 마음을 졸여가며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주위 사람들과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시간조차 자주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이야기를 들어 준 강, 언제나 그 넓은 품으로 지친 나를 감싸 안아 줄 것만 같은 강, 나는 그곳에서 추억을 떠올리고 앞으로를 생각하면서 내 마음을 ‘강’이라는 소중하고 귀한 내 친구에게 들어냈다. 친구들의 말을 들어주고, 친구의 노력하는 모습을 지켜봐 주는 강, 포옹력있게 아픈 마음을 치료해 주는 착한 강, 그 깊은 강 속에는 사람들의 진솔한 마음들이 담겨져 있을 것 이다. 나는 오늘도 지친 마음을 달래기 위해 강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음을 옮겨 간다. 운전 경력 20년이 넘는 아빠의 사고 소식은 가족들은 물론 같은 직종을 가진 아저씨들까지 놀라게 만들었다. 어떤 험한 길이라도 완벽하게 일을 했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아빠는 5시간이 넘는 수술 끝에 깨어 나셨지만, 한 달 이상을 병원에서 지내셔야 했다. 그 시간은 우리 가족에게 1년보다 더 길게 느껴진 시간이었다. 한참 부모님이 필요한 나이였지만 일주일에 한번 엄마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아빠가 보고 싶어 병원에 찾아 가려고 하면 아빠는 결사 반대를 하셨고, 그 덕에 병원에는 한번도 가보지 못했다. 아마 당신의 약해진 모습을 보이기 싫으셨을 것이라 생각된다. 한 가정의 가장, 아빠의 길은 언제나 고단했다. 새벽 6시에 출근, 저녁 7시에 퇴근, 하루 종일 운전을 하시고도 밤늦게 학원을 마치는 자식을 위해 한마디 불평없이 매일 데리러 오셨다. 나는 그 고단한 길을 매일 같이 달리시는 아빠를 위해 따뜻한 말 한마디 못해드리는 딸이었다. 항상 아빠에게 상처의 말과 걱정만을 안겨드렸다. 하지만 이제 봉화를 떠나 대학을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아빠에게 좀 더 잘해드릴걸’ 하는 생각 뿐이다. 요즘 대중가요 가사에 “있을때 잘해”라는 구절이 있듯이 아빠의 사고 후 나는 그 가사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만약 그 사고로 아빠가 잘못되셨더라면, 평생을 “있을때 잘해”라는 가사를 상처로 담고 살아야 했을 것이다. 이제 아빠는 18년간의 직장 생활을 끝내시고, 사장이 되셨다. 자신의 차를 운전 하시면서 좋아하시던 아빠의 밝은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동안 직장 생활을 하시면서 힘드셨던 일들이 얼마나 많았었는지, 치사한 일을 당하면서도 오로지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참고, 자신의 을 지키신 아빠에게 감사할 뿐이다. 앞으로는 나도 아빠처럼 내 길을 고집하면서 곧바로 달릴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운전을 하시며 자신 만의 길을 가시고 있을 아빠에게 따뜻한 말과 사랑을 아끼지 않는 아빠만의 휴게소가 되어 드려야 겠다 이같은 고립상태에서 지낸지 일주일쯤 지날 무렵, 그해 봄 우리집 짓는 걸 도와 주었던 강씨는 우리와 연락이 닿지않자 외부와 통하는 유일한 길이었던 철길을 45km 걸어 들어온 것이다. 우리는 곧 놀라움을 거두고 마치 이산가족이라도 된양 감격적인 상봉장면을 연출했다. “아이고, 어떻게 지냈어? 이 여름에 물도 전기도 아무것도 안되니 어떻게 살았어?” “염려 마요, 이렇게 지내 보는 것도 꽤 괜찮은 것 같아요.” “허기사, 시멘트 한삽 안넣고 흙하고 나무만 갖고 집짓는다고 덤벼든 무식한 인사들인디 뭐가 걱정이겄어!” 우리 가족이 집을 짓기 시작한 건 2003년 봄부터 였다. 나무와 흙이 주재료인 귀틀 집을 짓기로 한 것인데 단지 ‘웰빙’ 때문 만은 아니었다. 넉넉지 않은 경제사정 때문에 남편이 목수노릇, 작업반장노릇, 잡부노릇을 다 해야만 했기에 지어본 경험이 있는 귀틀집을 선택한 것이다. 우리는 귀농 안내지인 <귀농통문>이라는 계간지에 ‘귀틀집 짓기 배우며 일 도와 주실 분’을 찾는 글을 냈고 너댓분이 우리집을 방문해 주셨다. 모두 귀농을 꿈꾸는 분들이었다. 네 분이 같이 일하게 되었는데 아이들이 강돌, 길동이, 나무, 동동주 등 재미난 별명을 붙였고 어른들도 서로 그 별명으로 불렀다. ‘나무’는 50대 중반의 컴퓨터 프로그래머, ‘동동주’는 휴직중인 공무원, ‘길동이’는 건축설계사, 그리고 강돌이라는 별명을 얻은 강씨는 덤프트럭 기사였다. 강돌 외에는 육체노동을 해본 적이 없었고, 집짓기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알 수 없다며 극구 자원 봉사자임을 강조하셨다. 강씨하고만 근로계약(?)을 맺었는데 보수라고 말하기에 민망한 적은 돈을 드렸다. 그분들의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내가 함께 지내는 내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정성스레 밥을 짓는 게 고작이었다. 하루 일과가 끝난 후엔 막걸리 한사발로 피로를 풀며 농사 얘기, 사는 얘기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분들과 두어 달 지내고 나니 별체골조가 다 올라가고 지붕까지 얹게 되었다. 헤어질 시간이 다 된 것이다. 우린 서로의 앞날을 축복해 주었고 각자 자기 자리를 찾아 돌아갔다. 태풍 매미 때 강씨가 우리를 찾은 건 그러니까 3개월쯤 뒤었다. 만약 전생이 있다면 강씨와 우리는 가족이었을지도 모든다. 이때부터 강씨와 우리 가족은 1년에 두세 차례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친정 식구들도 1년에 한 번 오기도 힘들어 하는 봉화를, 그것도 인천에서 달려오는 것이다. 인연이라는 길은 여러 모습을 한다. 최악의 인연은 악연으로 표현된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끊어질 듯 가늘고 아슬아슬한 끈으로 이어질지, 밧줄처럼 튼튼한 끈으로 이어질지는 ‘나 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우리 가족이 강씨에게 진심과 고마움으로 인연의 끈을 엮어 나갔고, 그 끈이 도타와져 가족같이 소중한 관계를 만들어간 것처럼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