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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재집(剛齋集)
태동고전연구소 연구원, 권민균
1. 저자의 생애와 업적
송치규(宋穉圭, 1759~1838)는 조선 후기의 학자로 자는 기옥(奇玉), 호는 강재(剛齋)이며 본관은 은진(恩津)으로 송시열의 6대손이며 아버지는 송환명(宋煥明)이다. 1759년(영조 35) 4월 18일에 영가(永嘉,안동(安東)의 옛지명) 구담리(九潭里)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송치규는 6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외가에서 자랐으며 9살이 되던 해에 외삼촌 신질(申晊)에게 처음 공부를 배웠다. 그는 어려서부터 놀기를 좋아하지 않고 함부로 웃거나 말하지 않으며 행동에 법도가 있었고, 읽을 때에는 대충 섭렵한 적이 없고 전심으로 연구하여 학업을 점점 성취하고 학식이 날로 진보하였다고 한다. 13세가 되던 해에 회덕(懷德) 월포(月浦)의 본가로 돌아와서 16세에 부인 광산 김씨(光山金氏)에게 장가들었다.
송치규는 독서궁리(讀書窮理)를 근본으로 하고 반궁실천(反窮實踐)을 목표로 삼아, 평생을 이이(李珥)와 김장생(金長生) 그리고 송시열(宋時烈)의 전통을 이어받아 그것을 지키는 데 전념하였다. 이러한 그의 학문의 형성에 큰 역할을 한 사람으로 그의 재종숙(再從叔)이었던 심재(心齋) 송환기(宋煥箕, 1728~1807)와 과재(過齋) 김정묵(金正默, 1739~1799)을 들 수 있다.
송환기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송시열의 5대손이다. 학덕을 겸비하여 조야의 존경을 받아 문하에 많은 선비가 모여들었으며 당시 심성논쟁이 벌어질 때 한원진(韓元震)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송치규는 18세가 되던 해 여름 송환기에게 학문을 배웠고 그로부터 사람됨이 옥과 같다는 칭찬을 듣기도 했다.
21세가 되던 1779년(정조 3)에 김정묵의 제자가 되었다. 김정묵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 김장생의 후손이다. 조부인 김운택(金雲澤)이 신임옥사(辛壬獄事)에 연루되어 벼슬에서 물러난 것을 보고 과거시험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1780년(정조 4)에 감사의 추천으로 돈녕부 참봉(敦寧府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다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경연서연관(經筵書筵官) 등에 임명되었으나 족친인 김하재(金夏材)의 역변(逆變)으로 끝내 사퇴하였다. 이 사건은 후일 송치규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송치규는 평소에도 과거 공부를 하지 않았으나 김정묵을 스승으로 모신 이후 더욱 성현의 학문에 매진하여 김정묵의 큰 기대를 받았다.
1790년(정조 14) 31세 때, 송치규는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다. 어릴 때 아버지를 잃어 상주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평소 아파했던 그는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매우 애통해 하면서 여막을 지키는 데에 예제를 다하였고 삼년상 내내 부인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가 병이 위독할 때에 먹고 싶어 했으나 드리지 못했던 산꿩과 앵두 등의 음식을 평생동안 먹지 않았다고 한다. 평소 몸가짐이 엄격하고 수양이 깊었던 그의 평소 성품을 알 수 있게 하는 일화이다.
1798년(정조 22)에 경상도 관찰사 한용화(韓用和)가 학문에 연원이 있고 사림에 명망이 높다는 이유로 송치규를 천거하여 영릉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것을 시작으로 이듬해 원자궁강학청료(元子宮講學請僚), 1800년(정조 24) 시강원 자의(侍講院諮議)와 호조 좌랑(戶曹佐郎), 1801년(순조 1)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등에 잇따라 임명되었지만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그 뒤에도 1804년(순조 4) 군자감 정(軍資監正), 이듬해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1812년(순조 12)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ㆍ공조 참의(工曹參議), 1815년(순조 15) 시강원 찬선(侍講院贊善)ㆍ공조 참판(工曹參判), 1816년(순조 16) 대사헌(大司憲)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817년(순조 17)에 오직 성균관 좨주(成均館祭酒)만을 역임하였다.
송치규가 평생을 두고 벼슬을 사양한 이유는 앞서 언급한 김하재의 역모사건과 관련이 깊다. 그의 스승 김정묵은 역적 김하재와 7촌지간이라는 이유로 벼슬에서 사퇴를 해야만 했고, 유적(儒籍)에서도 제적당하였다. 이에 송치규는 스승의 무함(誣陷)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차례 불러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래서 1801년(순조 1) 대사간(大司諫) 유악주(兪岳柱)가 김정묵의 유일(儒逸)을 회복해 줄 것을 소청하면서 이것이 송치규가 출사하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기도 하다고 하였다. 왕은 이에 답하여 김정묵의 유일을 회복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송치규는 더욱 굳게 뜻을 지키면서 스스로 몸을 닦고 곤궁함을 견디며 학문에 힘썼다. 그리고 당대의 거유(巨儒)로서 벼슬보다는 후진 양성에 노력을 기울였다.
송치규는 말년이 되어서야 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을 수락하였다. 72세가 되던 1830년(순조 30)에 왕의 간곡한 부름을 받아 세손의 시강원찬선(侍講院贊善)을 거쳐 대사헌(大司憲)을 지냈고, 이듬해 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었다가 1838년(헌종 4) 80세의 수직(壽職)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그리고 그해 2월 10일 숙환으로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하직하였다. 그는 평소 앓던 지병으로 겨울부터 기력이 차츰 쇠약해졌으나 정신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가족에게 몸가짐을 신중히 하고 품행을 닦으며 친족과 화목하게 지내라고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신신당부했다.
그리고 집안에 전해오는 여러 대의 문장에 뜻은 있었으나 문집으로 만들지 못한 것과 스승 김정묵의 행장을 끝마치지 못한 것을 죄를 진 것으로 여겼다. 송치규의 부음이 전해지자 왕이 애도하며 조정의 정무와 시장 거래를 정지하고 별도의 부의를 전하게 하였다. 성균관의 생도들이 곡위를 마련하여 곡을 하고 또 제문을 지어서 제를 올렸다.
그리고 문인으로 질(絰)을 두른 사람이 1백여 인이었다고 한다. 그해 윤4월 옥천군(沃川郡) 영국사(寧國寺)에 부인묘와 합장되었으며 1841년(헌종 7)에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843년(헌종 9) 옥천(沃川)의 용문영당(龍門影堂)에 배향되었다.
2. 저본의 편찬 경위
본집(本集)은 1865년(고종 2) 8월에 간행되었는데, 발문(跋文)에 이 책의 편찬 경위가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송치규는 평소 저술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글을 청하는 자가 줄을 이었다. 재촉을 받고 나서 써준 원고가 많기는 하지만 회수하지 못한 원고가 절반이 넘었다. 아들 송흠성(宋欽成)은 애초에 남은 원고를 모아 12책으로 엮어 간행할 계획이었으나 집에 재력이 충분하지 못하고, 자신도 갑자기 사망하여 간행을 끝맺지 못하였다.
송흠성의 아들 송기수가 선대의 뜻을 이루기 위해 거상(居喪) 중에도 교열을 멈추지 않았고, 1865년(고종 2)에 비로소 판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권질이 많으면 나중에 분산되기 쉽고 오래 전하기도 어려운 데다, 보는 사람도 지루하기 때문에 판각하기 전에 다시 편집하기로 결정하였다.
약 7개월간, 12책 가운데 시(詩)와 소(疏) 이하 각 문체를 반 이상 삭제하고 묘문(墓文)과 행장(行狀)도 대략 산삭(刪削)한 다음 책 끝에 부록을 붙여서 다시 7책으로 만들었다. 본래 재력이 부족하여 문집 간행이 어려웠으나 집안의 여러 공이 힘을 모아 만든 계(稧)에서 이 일을 도우면서 문집 간행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송기수가 1865년에 간행한 이 판본은 규장각(古3428-667), 국립중앙도서관(일산古3648-文39-16), 장서각(4-5270),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D1-A450)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본(異本)은 없다. 송기수는 송흠성이 편집한 12책에서 빼두었던 내용 가운데 다시 중요한 부분을 베껴서 별도로 일서(逸書) 6책을 만들어 간행되기를 희망하였으나 이 6책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3. 저본의 구성과 내용
본집은 원집 13권, 부록 2권으로 모두 15권 7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은 없으며 권두에 총목이, 권말에 송치규의 손자 송기수(宋騏洙)의 발문이 실려 있다. 권1은 시(詩) 46수와 소(疏) 29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대개 가족이나 친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읊거나 이들과 주고 받은 시가 많고, 세자책봉식 등 나라의 경사 때의 감흥을 읊은 시도 몇 수 보인다.
그리고 김병연(金秉淵), 민달혁(閔達爀), 박정일(朴禎一), 송순여(宋順汝)에 대한 만사(挽詞) 4수도 포함되어 있다. 소는 1800년에서 1829년 사이에 올린 것으로 대부분 사직소(辭職疏)이다. 1801년의 〈지평을 사양하는 상소〉의 경우 스승 김평묵이 억울하게 처벌당하였으므로 자신도 관직에 나아갈 수 없는 심정을 토로하였는데, 관직에 나아갈 수 없는 송치규의 이러한 입장은 일관적이다. 또 효명세자 장례 후에 임금을 위로하는 상소와 세자 책봉 후에 받은 하사품을 사양하는 상소도 보인다.
권2는 15편의 소(疏)와 20편의 서계(書啓), 12편의 헌의(獻議)가 수록되어 있다. 상소는 1829년부터 1836년 사이에 올린 것으로 대사헌 직을 사양하고 아울러 쌀과 고기를 사양하는 상소문(1829)이나 세손의 스승자리를 사양하는 내용의 상소문(1830), 소명(召命)에 달려가지 못해 처벌을 기다리는 상소문(1830) 등 주로 사직을 청하는 내용의 상소문이 대부분이며, 1830년에 세상을 떠난 효명세자(孝明世子)의 상례(喪禮)와 제사 후 순조(純祖)를 위로하기 위한 진위소(進慰疏), 순조가 승하한 후에 올린 진위소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1810년 스승 과재 김정묵(過齋 金正默)의 작시(爵諡)를 청하기 위해 호서(湖西) 유생을 대신해 지어 올리려던 소가 있다. 스무 편의 서계는 모두 임금의 명을 받든 사관(史官)이 전유(傳諭)한 뒤에 명을 거두어 줄 것을 바라면서 올린 것이다.
헌의는 동궁(東宮)이 관례(冠禮)를 치를 때의 복색(服色) 문제나 가순궁(嘉順宮) 상복(喪服) 문제, 순조의 세실(世室)에 대한 문제 등 궁중에서 일어나는 각종 길흉례(吉凶禮)에 관한 일이나,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종사(宗嗣)를 정하는 문제 등 조정에서 현안이 되고 있는 문제 등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기술하여 올린 것이다. 그 내용을 살펴 보면 그의 이론이 송시열의 정통을 계승했음을 알 수 있다.
권3과 권4는 서신(書信)으로 모두 138편이다. 3권은 홍직필(洪直弼), 홍석주(洪奭周), 안재묵(安在黙), 윤광연(尹光演), 서충보(徐忠輔), 서기보(徐耆輔) 등 저명한 인사(人士)들과 주고받은 서신으로, 성리학에 관한 토론이나 상복제도(喪服制度)에 대해서 답변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권4는 대체로 자손(子孫)이나 친지의 안부나 질문에 대해서 답하는 내용으로, 예컨대 〈김유성에게 답하는 편지〉의 경우 《대학(大學)》의 ‘정심(正心)’, 《맹자(孟子)》의 ‘부동심(不動心)’에 대해서 상대방이 보낸 의견에 대해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글이고, 〈환경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담제(禫祭) 때의 복색(服色) 등 예제에 관해서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하고 있다.
권5에는 41편의 서(序)가 수록되어 있다. 문집의 서문이 22편, 족보의 서문이 10편으로 그 당시 그의 문망(文望)을 알 수 있다. 김흥국(金興國)의 《수북정시집(水北亭詩集)》, 이흘(李屹)의 《설정집(雪汀集)》, 김광억(金光億)의 《목촌유고(牧村遺稿)》, 박광전(朴光前)의 《죽천집(竹川集)》, 유화(柳和)의 《수졸재유고(守拙齋遺稿)》, 김영(金瑛)의 《삼당집(三塘集)》, 심수인(沈壽寅)의 《반매당시집(伴梅堂詩集)》, 채하징(蔡河徵)의 《취암유고(翠巖遺稿)》, 《서소암시집(徐素菴詩集)》, 《만묵당집(晩默堂集)》, 《환성암유고(喚醒菴遺稿)》, 《율옹유고(栗翁遺稿)》 등의 서문과 《진주정씨족보(晉州鄭氏族譜)》, 《전주최씨족보(全州崔氏族譜)》, 《남평문씨족보(南平文氏族譜)》 등의 서문이 수록되어 있다.
권6은 기(記) 10편, 발문(跋文) 32편, 잡저(雜著) 7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창주서원(滄洲書院) 중수기(重修記), 안동 김씨 정려 중건기(安東金氏㫌閭重建記), 농학당기(農學堂記) 등의 기문과, 《국당유고발(菊堂遺稿跋)》, 도통천자발(道統千字跋), 《송재집발(松齋集跋)》, 《정일당집발(靜一堂集跋)》, 《활계집발(活溪集跋)》, 서국포조공행록후(書菊圃趙公行錄後) 등의 발문이 있다.
잡저로는 한공한의 서실을 백천재로 명명한 이유를 적은 〈백천재설(百千齋說)〉, 먹 두 개를 금씨 집안의 두 아이에게 선물하는 내용을 적은 〈이묵증금가이동자설(二墨贈琴家二童子說)〉과 신상석의 자를 풀이한 내용의 〈신상석명자설(申相䄷名字說)〉 등이 있다.
권7은 33편의 축문(祝文)과 18편의 제문(祭文), 5편의 명(銘)이 수록되어 있다. 축문은 주로 추향(秋享)과 춘향(春享)에 올리는 축문이 주를 이루며, 옥천의 용문영당(龍門影堂)에 성담 송환기(性潭 宋煥箕)를 봉안하며 지은 축문, 지례(知禮)의 흥례사(興禮祠)에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을 봉안하며 지은 축문 등도 포함되어 있다.
제문은 스승인 과재 김정묵, 재종숙 송환기, 망제(亡弟) 송학규(宋學圭)와 아내 김씨 등 저자와 가까웠던 사람들을 위해 지은 것이 대부분이다. 명은 황해도 해주 석담(石潭)의 청계당(聽溪堂)의 돌우물[石井]과 집〔念修齋〕에 대해 주인의 부탁을 받고 지어준 글과 김두일(金斗一)을 위해 지어준 성암명(性菴銘), 한공한(韓公翰)을 위해 지어준 독서명(讀書銘)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8은 9편의 비(碑), 7편의 묘갈(墓碣), 4편의 묘지(墓誌)로 구성되어 있다. 비(碑)는 소현서원(紹賢書院)의 묘정비(廟庭碑), 학당(學堂) 김휴(金休)의 유허비(遺墟碑), 창충사(彰忠祠)와 봉양사(鳳陽祠)의 사적비(事蹟碑) 등이다. 묘갈은 이상달(李尙達), 이주(李柱), 최오(崔澳), 임회(林檜), 전설(全渫), 신명인(申命仁), 민종천(閔鍾天) 등에 대한 묘갈명이며, 묘지는 신탁(申晫), 맹성순(孟性淳), 금석로(琴錫老) 등에 대한 묘지명이다.
권9와 권10은 묘표(墓表)가 수록되어 있다. 권9에는 이상(李翔), 송상민(宋尙敏), 정로(鄭櫓), 유태형(柳泰亨) 등에 대해 지은 23편의 묘표가 수록되어 있으며 권10에는 이기발(李起浡), 조진명(趙鎭明), 김이상(金履相) 등에 대해 지은 22편의 묘표가 수록되어 있다.
권11은 묘표 11편과 시장(諡狀) 2편, 행장(行狀) 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묘표는 종증조(從曾祖) 송일원( 宋一源), 황상중(黃尙中), 이경항(李景恒), 김급(金汲), 구봉우(具鳳羽), 박성(朴荿), 박태원(朴泰元), 이규조(李奎祖), 정지태(鄭志泰), 송기서(宋麒瑞), 최충성(崔忠成) 등에 대해 지은 글이며, 시장은 밀천군(密川君) 박숭원(朴崇元) 및 민여검(閔汝儉)에 대한 것이다. 행장은 김덕운(金德運), 신광집(申光集), 김건(金鍵)에 대해 지은 것이다.
권12와 권13에는 행장(行狀)이 수록되어 있다. 권12에는 이명원(李命源), 기의헌(奇義獻), 김경수(金景壽), 이지효(李止孝), 이홍직(李弘稷), 정취하(鄭就河), 이종렬(李宗烈), 신재응(申在應), 제경욱(諸景彧), 이원휘(李源彙), 나각(羅珏)에 대한 행장이 11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권13에는 송주상(宋周相), 최명해(崔鳴海), 김면항(金勉恒), 송휘보(宋輝普), 송득규(宋得圭), 위백규(魏伯珪), 장제갑(張齊甲), 유인 조씨(孺人趙氏)와 그의 스승인 김정묵(金正默)에 대한 행장 9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14와 권15는 부록이다. 권14에는 1839년 지제교(知製敎) 이서(李垿)가 지은 사제문(賜祭文), 1838년 아들 송흠성(宋欽成)이 지은 가장(家狀), 1847년 홍직필(洪直弼)이 지은 묘지명(墓誌銘) 그리고 송여규(宋如圭), 김재성(金在誠), 최제묵(崔濟默), 손자 송기수(宋騏洙) 등이 쓴 유사(遺事)가 있다.
모두 송치규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 쓴 글들이다. 권15에는 1대 송대원(宋大原)부터 23대 송병선(宋秉善)까지 송치규 집안의 세계(世系)가 기록되어 있으며, 송치규의 생애를 기록한 연보(年譜)가 수록되어 있다. 권말에는 1865년 손자 송기수가 간행과 함께 지은 발문이 있다. 발문에 강재집(剛齋集)의 원고 수집과 편집과정, 간행에 대한 경위가 상세하게 적혀 있다.
2015
[출처] 강재집(剛齋集) / 송치규(宋穉圭)|작성자 새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