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조홍법
잠깐의 방심이 큰 후회로 다가오니 매사에 신중하라
영축총림 통도사에서 주석하다 세연을 다한 운조홍법(, 1930~1978)은 청빈한 가풍과 흔들림 없는 수행 정신을 후학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비록 세속에 머문 기간이 반세기도 되지 않았지만 스님이 남긴 법향은 끝없이 전해질 것이다. 홍법스님의 수행일화와 가르침을 제자들의 회고와 문도회가 발간한 <홍법선사추모문집>을 통해 살펴보았다.
“잠깐의 방심이 큰 후회로 다가오니 매사에 신중하라”
“수행자는 의복·음식·잠 부족해야”
청빈한 삶…대중 외호도 빈틈없어
○… “수행자는 세 가지가 부족해야 합니다.” 홍법스님은 제자와 불자들에게 올바르게 수행하기 위해선 세 가지가 부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것은 의복, 음식, 잠이다. 스님은 “사치와 치장으로 남에게 자랑하는 마음을 갖고 옷을 입지 말라”면서 “음식은 많이 먹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전했다. 또한 홍법스님은 “수행하는데 ‘잠 귀신’보다 더한 장애는 없다”고 지적했다.
○… 전 총무원장 지관스님은 홍법스님과 각별한 인연이 있다. 비록 홍법스님의 세수가 두 살 많았지만 도반처럼 지냈다. 지관스님은 홍법스님에 대해 “혼자 있을 때는 태산처럼 우뚝했고, 사람을 대할 때는 마치 봄바람처럼 훈훈했다”고 회고한바 있다. 지관스님은 홍법병纛� 49세에 입적한 것에 대해 “한창 일할 시기에 입적한 것은 교단의 장래를 위해 너무 안타까운 일뿐만 아니라, 통한을 금할 수 없는 일”이라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사진>젊은 시절의 홍법스님. 1951년 범어사에서 촬영한 것이다. 출처=‘홍법선사추모집’
○… 홍법스님은 봉선사 조실 월운스님과도 돈독한 사이였다. 홍법스님과 월운스님이 처음 만난 것은 1952년 범어사에서 였다. 월운스님은 “20여 년 동안 속내를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좋은 도반이었다”면서 “번민스러운 일에 휘말려 좌왕우왕할 때엔 늘 가닥을 쳐주는 길동무였다”고 회고했다. 월운스님이 투병 중인 홍법스님을 병문안 갔을 때의 일이다.
“쾌차하시라”는 월운스님의 문안에 홍법스님은 이렇게 답했다. “본사의 노스님들은 꽁보리밥을 드시는데, 나는 하는 일도 없이 좋은 병상에 누워 호의호식하면서 귀중한 사중(寺中) 돈만 축을 내니 마음이 편치 않아 죽겠습니다. 곧 퇴원할 것입니다.”
○… 영축총림 통도사 관음전 앞에는 석등이 있다. 매일 새벽이 되면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가장 먼저 켜지는 곳이기도 하다. 원로의원을 역임한 성수스님의 회고에 따르면 홍법스님이 통도사 주지 시절에는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관음전 앞 석등을 홍법스님이 밝혔다고 한다.
또한 범어사 선원에 함께 방부를 들였을 때 홍법스님은 대중이 모두 잠든 후에 선방스님들의 고무신을 깨끗하게 씻어 놓았다고 한다. 무더위에 땀이 흠뻑 밴 장삼들을 모아 남몰래 빨래하고 풀까지 쑤어 깨끗하게 했던 이도 바로 홍법스님이었다. 성수스님은 “해인사에 (인욕보살로 유명한) 지월스님이 계셨다면, 통도사에는 홍법스님이 계셨다”면서 “행자에게도 깍듯이 합장 인사를 하던 홍법스님의 커다란 눈망울이 그립다”고 옛일을 돌아보았다.
○… 어느 해 정초. 통도사 해우소. 한 스님이 한 손에는 빗자루를 들고, 한 손에는 물통을 들고는 청소를 하고 있었다. 마침 노스님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통도사를 찾아온 광덕스님이 해우소에 들렸다 그 광경을 목격했다. 누군가 했는데, 그 스님이 바로 홍법스님이었다.
광덕스님이 홍법스님의 손을 잡으며 “아니, 시봉을 시키시지 당신께서 손수 …”라며 말문을 잇지 못했다. 이에 홍법스님은 “아니에요. 다들 바쁜데, 제가 해야죠”라며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대답했다. 언제나 하심하고 대중을 외호하기 위해 노력했던 홍법스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일화다.
○… 또 다른 어느 해 겨울. 통도사의 한 요사채 앞.절에서 일하는 처사가 아궁이에 장작을 넣어 불을 지피고 있었다. 그런데 땔감을 넣는 여간 조심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소리도 내지 않고, 주변을 살피며 장작을 잇달아 넣었다. 그리고는 살며시 자리를 떴다. 그런데 얼마 후 요사채 문이 열리더니 한 스님이 나와선 아궁이에 들어있는 장작을 빼내는 것이었다. 숨어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처사가 다시 와서 장작을 아궁이에 넣었고, 얼마 뒤 다시 스님이 나와 장작을 꺼냈다. 비록 땔감이지만 그 역시 삼보정재이기에, 이를 아끼려던 스님이 바로 홍법스님이었다.
○… 영축총림 통도사 주지 정우스님이 군 복무시절 홍법스님은 한 번도 면회를 오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정우스님은 ‘섭섭한 마음’을 갖지 않았다. 정우스님은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은사스님의 편지를 늘 가슴에 새기고 있었기 때문”이라면서 “또한 그 보다 더 큰 기쁨은 저에 대한 깊은 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은사스님을 떠올렸다.
밀양 표충사 주지 재경스님은 “은사스님의 크나큰 은혜와 사랑이 있었기에 오늘날 부처님 품안에서 숨 쉬고 있다”면서 “다시금 스님의 자애로운 모습이 그리워진다”고 했다. “<홍법선사추모문집> 발간의 실무책임을 맡았던 현근스님(통도사 부주지)은 홍법스님을 “내가 몸이 많이 아파요. 얼마를 더 살지를 모르고 인연이 이렇게 됐으니 사형들 말 잘 듣고 잘 살아 봐요”라는 은사의 당부가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 어록 ■
“모든 게 수행하기 나름으로 우리도 바로 부처님의 경지에 다다를 수가 있다는 원력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일체를 평등한 마음으로 보아 가벼이 여기지 않고 심지어 나무나 풀 한포기도 사람을 대하듯 했습니다. …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없애야 함은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제일 필요한 조건이 아닌가 합니다.”
<사진>1975년 해인사 일주문앞 뒷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홍법스님.
“마음 하나 맑혀 실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안목만 갖춘다면 불법뿐만이 아니고 제법의 실상을 훤히 꿰뚫어 알 수 가 있다고 합니다.”
“잠시 잠깐의 방심이 큰 후회로 다가오는 것처럼 신심으로 수행하는 이는 언제 어느 때고 칼날을 입에 물고 길을 가는 것처럼 매사에 신중한 마음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부처님께만 올리는 공양만이 제일이거나 또는 스님들께 공양드리는 것만이 제일일거라 생각하기도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아는 이웃은 물론 내가 모르는 어떤 이에게라도 공양을 드림에 좋은 과보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남에게 이로운 일이라면 설령 자기가 계를 파하는 경우가 생긴다 해도 남을 먼저 성불시키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희생은 뒤로한 채 다른 사람의 희생만을 강조한다면 이는 부처님 제자로서 자격이 없는 행동이 됩니다.”
■ 홍법스님의 화두 ■
1964년 동안거 해제 당시 대한불교(불교신문)가 실시한 ‘해제 설문’에 응답한 홍법스님의 글이다.
山中都無事(산중도무사) 산중에 일이 없어
寒盡坐睡眠(한진좌수면) 앉아서 잠만 잘 뿐
解制問一言(해제문일언) 해제에 한마디를 물으나
自樂不呈君(자락불정군) 나만 알뿐 보여주지 않으리
■ 행장 ■
월하스님 제자로 출가
선 · 교 · 율 두루 겸비
1930년2월9일 경북 영주군 안정면 생현리에서 태어났다. 부친 진정흠(秦定欽) 선생과 모친 정포동(鄭包洞) 여사의 4남 2녀 가운데 2남으로 출생했다. 속명은 진홍구(秦洪九). 본관은 풍기이다.
소년시절 세속에서 학문을 익히다 17세에 가장 친한 친구가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고 무상(無常)을 절감했다. 18세가 되던 이듬해 양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출가대도의 길에 들어섰다. 이때가 1948년 10월15일로 통도사에서 월하(月下)스님을 은사로 사문이 됐다. 한공(漢空)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출가이후 운수납자의 길을 걸었다. 가야산, 팔공산, 금정산, 조계산, 계룡산, 덕숭산 등 전국 주요 선원에서 화두를 참구하며 오직 수행자의 자리를 지키는데 최선을 다했다. 1957년 8월17일 통도사 강원 대교과를 졸업한 후 통도사 교무국장, 중앙종회의원, 통도사 강원 강주, 통도사 주지 등의 소임을 보았다. 개인 수행은 물론 대중을 외호하는 일에도 빈틈을 찾을 수 없었다.
<사진>왼쪽부터 홍법.월하.일타스님. 1969년 통도사.
당신을 돌보지 않은 가행정진으로 병마가 찾아왔으나, 굴하지 않고 정진 했다. 결국 세연을 다하고 원적에 들었다. 이때가 1978년6월27일 오후5시. 세수 49세, 법납 31세.
홍법스님의 상좌로는 영축총림 통도사 주지 정우스님과 밀양 표충사 주지 재경스님을 비롯해 상경.지용.양제.상운.현근.현기.재진.영구.진성.문성.도웅.혜도.혜오.혜용 스님이 있다.
이성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