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하다. 어린시절 소풍 왔던 정상의 솔밭이다. 우리들은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장기자랑, 보물찾기 등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썼다는‘세마대’친필 현판과 누각의 탱화 칠은 세월의 흐름만큼이나 짙게 탈색되어 있다. 오산시 소재 유적지로는 최초로 1964년 국가지정 사적 제140호로 지정된 곳이다. 사방이 평원인 곳에 깎아지른 듯한 해발 2백8m의 이 산은 독성산, 석대산, 향로봉, 독산, 세마산 등으로 불렸다. 북쪽 양산봉 너머로 용주사와 융릉과 건릉이 보인다. 그 앞으로는 동에서 남으로 흐르는 황구지천이 주변으로 경지정리가 잘 된 평야지대가 보인다. 서쪽으로 양산봉, 남쪽으로는 금암동의 여개산 줄기와 노적봉도 함께 따라 이어진다. 동쪽은 국도1호선이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외삼미동 입구에 닿는다.
독산성은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이 기지를 발휘하여 왜군을 물리친 군사요충지며 명승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독성산성이라 불렸으나, 요즘에는 삼국시대의 명칭인 독산성으로 부르고 있다. 일본인들에게는 치욕적인 패전지이기 때문에 한일합방 이후 일본인들에 의해 파괴되고 도굴되는 등 시련을 겪었으나 6 ․ 25 동란이 끝난 뒤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복구하기 시작하였으나 아직도 제대로 복원은 이루어졌다고 할 수는 없다. 최근 몇몇 뜻있는 사람들에 의해 성 입구에‘도원수 권율 장군 전첩비’를 세우는 등 활동이 재개되고 있다. 그 왼편에 임진왜란이 끝난 후 독산성을 석성으로 쌓는데 공을 세웠다는 경기방어사 변응성 선정비가 있다. 사후 병조판서로 추증된 분이다.
지금도 정상에 있는 보적사 요사채 아래에 물이 나오는 수도꼭지가 둘이 있다. 절대로 퍼가지는 말고 마시기만 하라는 주의 표지판도 있다. 권율 장군의 세마병법을 간단하게 설명한다.
임진왜란 당시 바다는 이순신 장군에 의해 철통처럼 지켜졌기 때문에 왜적들은 육지를 통해 한양으로 진격하게 되었다. 당시 권율 장군은 군사 2만여 명을 이끌고 행주산성으로 가는 도중 독산성에 머물게 되었다. 그때 왜장 가또 기요마사(加藤淸正)는 권율 장군을 칠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분명히 그곳에는 물이 부족할 것이니 포위만 하고 있어도 이긴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왜장은 염탐병을 통해 물 한 지게를 올려 보냈고, 의중을 꿰뚫었던 권율 장군은 백마를 왜군들이 잘 볼 수 있는 위치에 세우고 흰쌀을 말에 끼얹어 말을 씻기는 시늉을 했던 것이다.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본 왜군은 산 위에 물이 많구나 하고 퇴각하자 그들을 공격해 지금의 봉담면 근처 삼천병마골에서 왜병 3천여 명을 몰살시켰다. 그후 권율 장군은 행주산성에서 대첩을 이룬 것이다.
보적사는 삼국시대의 절이라고 하는데, 조선조 정조대왕이 용주사를 건립하면서 중건된 용주사의 말사가 되었다. 세마사, 산성절, 생선절 등의 명칭으로 부르기도 하였으나 옛 명칭인 보적사로 다시 부르고 있다.
옛날에 가난한 노부부가 쌀 한 되로 춘궁기를 넘기며 구차하게 사느니 부처님께 공양을 드리고 내생(來生)을 기원하자며 절에 올라가 열심히 기도하고 집에 돌아오니 곳간에 쌀이 가득 쌓여 있어, 부처님께 감사하며 어려운 이웃들과 나누었다고 하여 보적사(寶積寺)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보적사 대웅전의 외부 벽면에는 십육나한탱화, 산신탱화, 칠성탱화 등도 있지만 권율 장군의 세마(洗馬)탱화도 있어 눈길을 끈다.
요즘 독성산 세마대와 보적사의 산길은 오산시민들의 삼림욕장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붐비는 곳이다. 굵직한 나무들과 절벽 같은 산비탈에 걸려있는 커다란 바위들은 신비하기도 하다. 남문 밑에 여왕능(麗王陵)이라 불려지는 고구려 왕릉은 흔적이 있으나 파손이 너무 심하여 왕릉으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곳은 군사들의 식량과 무기를 보관했던 창고라고 들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산길을 내려와 도로가에서 다시 한번 권율 장군을 생각하게 되었다. 전첩비 옆에 부동산 건물이 나란히 있어 보기에도 어색했다. 외지인들이 역사탐방 등으로 다녀갈 때 기념촬영 장소가 될 법도 한데 부동산 건물은 영 아닌 것 같다. 누군가의 사유지일 터이니 필자가 관여해서 해결될 수도 없겠지만, 기왕지사 오산시에서 관광지로 내놓을 것이라면 주변 경관도 한번쯤 살펴줘야 하지 않을까? 그 아래 광성교회 옆의 라이브 레스토랑 솔뫼마을은 건물의 외관이라도 훌륭하지 않은가.
안내를 맡아주었던 한규남 씨와 아쉬운 이별을 하고 필자와 양재백 선생은 천천히 걸으면서 세교동을 거쳐 외삼미동 입구 사거리 1번 국도에서 버스를 타기로 했다. 추석을 맞아 고향으로 가는 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우리는 산에서 주운 알밤을 까먹으면서 걸었다.
큼직한 수석들과 정원수가 있는 농원을 지났다. 도로변은 전형적인 농촌의 풍경이다. 이따금 고풍스런 가든을 필자가 좋다고 홍보했는데, 양재백 선생은 건축물양식이 일본식 개량형이라며 아쉬워한다.
고구마 밭에는 이미 몇 두둑은 수확을 한 흔적이 남아있다. 어린시절 입술이 파래지도록 날고구마를 먹었던 기억도 떠오른다.‘상록수 이용원’이라는 간판의 낡은 이발소 건물이 이채롭다. 앞쪽으로 세마동사무소가 보인다.
버스정류장 앞이다. 1시간 뒤에나 버스가 올 것이라고 가겟집 아주머니는 말한다. 큰말 가운데쯤에 높이 18m, 나무둘레 4m의 3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있다. 조그마한 정자까지 나무 밑 그늘에 마련하여 동네 사람들의 쉼터로 활용되고 있다. 우산모양으로 퍼지는 커다란 잎이 푸르고 많으면 풍년이 들고, 잎이 떨어지면 흉년이 든다는 전설과 마을 사람들의 질병과 재난을 막아준다고 하여 신성시하는 마을보호수이다. 이 마을에는 낡은 집들과 커다란 나무들이 많이 보존되어 있다. 큰말 언덕 스피커 탑 옆에도 가정집을 개조한 약사보살 수덕사라는 암자가 있다. 그 너머 늘푸른오스카빌아파트 104동 맞은편 산에는 지장사가 있다. 372-3421에 전화를 했더니 없는 전화라는 음성 응답이 나온다. 댓구리길을 걸어 지장사를 찾아갔다. 정문에 대나무를 엑스 자로 걸쳐 굳게 닫아놓았다. 추석이라 그런가, 하며 아랫집 아주머니께 물어보니 주지스님 법운당(허장원)은 올봄에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입적하셨단다. 다시 뒤돌아 내려왔다. 건너편 오리골에‘경기남부식문화센터’와 안디옥교회 표지판도 보인다.
‘정옥애향회관’운동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제법 오래 묵었을 법한 플라타너스와 측백나무들이 운동장 주변에 빙 둘러있다. 게이트볼 장에 노인들 몇이서 앉아있다. 일제 강점하인 1925년에 세웠다는 사립 광성학원 자리이다. 요즘은 노익장 마라톤으로 유명한 이정옥(광성학원 12회 졸업)옹이 개인재산을 헌납한 정옥애향사업회와 세교노인회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이정옥 옹은 요즘에도 마을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등 마라톤 못지않은 사회사업에도 노익장을 발휘하고 있다고 한다.
예전에는 한우를 키워 수입이 괜찮았는데 한우파동 이후 수입은 변변치 못하다며 올해 71세이며 광성학원 마지막 18회 졸업생이라는 노인은 근간의 소식도 알려준다. 혁명이후 맞은편 앞산으로 이동하여 광성초등학교가 되었다고 한다.
세교동의 큰말이라고 부르는 홍촌말은 예전에 남양홍씨의 집성촌이었고 지금은 세교1동으로, 원씨가 많이 살던 원촌말은 세교2동은 마을에 내(川)가 흘러 월촌이라고 불렀으며, 세교3동은 최씨들이 많이 살아 최촌말, 산사태가 난 적이 있어 사태말 혹은 뒷산에 오리나무가 많아 오리골이라고 부르는 광성초등학교 부근의 마을이다.
광성초등학교 정문 앞 왼편에 약수터가 있다. 마을 사람들이 패트병에 물을 담아 가고 있다. 운동장은 오래된 초등학교다운 전형적인 모습이다. 운동장 정면 우측에 교복을 입고 책보자기를 옆에 낀 동상도 있다. 이 학교도 머지 않아 개발에 밀려 이사를 해야 한다고 한다. 학교 내에 심어진 무궁화부터 동백나무까지 35가지, 돌나물부터 호박 100가지, 과꽃부터 뒤플럭스까지 30가지의 나무와 꽃들도 없어질 것이다. 동물들의 동상이 있는 뒤편을 둘러보고 나와 다시 외삼미동 쪽으로 걸었다. 경부선 철도로 기차가 지나간다. 고가도로 아래에 세마역 신축공사가 진행 중이다.
1번 국도 세마대사거리의 모텔지중해 앞에서 오산행 20번 버스를 타고 신장동 사무소 앞에서 내렸다. 문공산, 구정산이라 불리는 대우아파트 왼편 비탈길을 타고 올라갔다. 산책로가 닦여진 산길이다. 산마루에 운동기구도 놓여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버리고 간 빈병과 비닐 등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귀화식물인 자주색 줄기에 머루송이 같은 검붉은 열매를 달고 있는 자리공들도 군락을 이루며 울창하게 자라고 있다. 요즘 이러한 귀화식물로 인한 생태계 파괴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자리공은 산성화된 토양에서도 잘 생육하는 식물이라고 한다.
남쪽 앞으로 청학산의 오산대학교가 빤히 보이고 서쪽 아파트 너머로 대호밭은 있다. 요즘 그곳으로 가는 길목들은 아파트가 들어서서 예전의 추억은 찾을 길이 없다. 비탈진 논을 메우고 평평하게 다듬어 고층 아파트를 올려놓았으니 예전의 논밭과 구불구불하던 시골길은 모두 땅속으로 묻혀버린 것이다.
필자의 친구인 도예가 김용문 씨는 대호밭 뒷동산 아래 그의 친척집을 빌려 마당 옆에 가마를 짓고 막사발을 굽기도 했다. 오산에 새로운 문화를 만들자며 작품 제작에 몰두하였고, 필자는 그 당시 서울병원에 근무하면서 상여금을 몽땅 작업장을 마련하는데 보태기도 하였지만 소득 없는 헛공사에 그치고 말았다. 굳게 잠금쇄가 채워진 대문 안은 썰렁하다. 그가 불을 때던 가마의 아궁이에도 하얗게 삭은 재만 수북하게 쌓여 있을 뿐이다. 김용문 씨의 당숙인 김호수(68세) 옹은 건너편에 새로 가마를 썼다며 위치를 가르쳐준다.
지금도 그가 운영하던 빗재가마연구소가 종착지인 마을버스가 다닌다. 마을 입구 저수답 아래에 세웠던 장승과 솟대도 퇴색된 채로 길옆 논두렁에 남아있다. 요즘 충북 괴산으로 내려가 활동하다가 중국으로 갔다는 소식도 그의 형 김용석 씨를 만나 확인하였다. 건너편에 토장생을 굽는 가마를 만들어 주었다고 말한다.
대호밭 빗재가마에서 궐리사로 오는 길에는 아파트를 건축하면서 복토한 긴 둑이 남북으로 가로지르고 있다. 그 둑을 바라보자니 궁터 부자의 이야기가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예전에 궁터에 큰 부자가 살았는데 사람의 성격이 고약하여 남을 도울 줄도 모르고 욕심만 많았다고 한다. 하루는 스님이 시주를 왔는데 뒷간에서 인분을 퍼서 주니 스님이 돌아서면서‘집안이 번창하려면 필봉산이 보이지 않아야 한다’고 혼자말로 하고 가니 욕심 많은 그 부자는 흙담을 높이 쌓기 시작했지만 산이 보이지 않을 리 없었다. 결국 집안의 가세가 기울었다고 한다.
요즘 신도시 건설을 하면서 고층 빌딩만을 고집하는 요즘 사람들이 한번쯤 음미했으면 하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전해오는 전설이다.
궐리사는 그런대로 뜻 깊은 유림들에 의해 가까스로 보존되고 있다. 공자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궐리사는 충남 논산의 노성 궐리사와 함께 우리나라 2대 궐리사 중 하나이다.
궐리사 홍살문 뒤편에 수령 약 260년의 은행나무는 시보호수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조광조 등의 개혁세력들이 활동하던 조선 중종 때에 경기도관찰사를 지낸 공서린 선생이 이곳으로 낙향하여 심었다는 나무이며, 서재를 세우고 제자들을 가르칠 때 제자들이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도록 그 나뭇가지에 북을 걸고 울려 경계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공서린 선생이 죽고 난 후, 건물도 폐허가 되고 은행나무도 죽었으나, 정조대왕의 명으로 사당을 짓고 공자의 영정과 친필 사액을 내리니 홀연 은행나무가 되살아났다고 전한다.
사당의 좌측 전통 한식 양식의 전시관 장각에는 1901년 공자의 76세손인 공재헌이 중국 산동성 성적도 108도를 얻어 가지고 돌아와 판각한 성적도가 보관되어 있다. 성적도는 공자의 행적을 새긴 피나무 목판이다. 중앙 내부에 높이 3.4m 중량 8t의 장엄한 공부자 석상과 증자, 안회, 맹자, 자상 등의 석상과 재실, 삼문 그리고 강당이 있는 궐리사는 요즘 우리 오산의 충효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남향 앞으로 신축 건물들이 가로막고 주변이 개발되고 있어 예전과 같은 운치는 없어졌다. 그러나 공자의 고향인 중국 산동(山東)성 취푸(曲阜)의 공자사당인 공묘(孔廟)보다 다소 축소되어 왜소해 보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는 유림단체라고 한다. 구강당의 오산 유도회 사무실에서 만나 뵌 임대호 도유사는 필자에게도 참여를 권유한다. 공자 탄신 2555주년을 기념해 새로 펴낸 자료집이라며 건네주는 책자를 받아들고 홍살문을 나서며 다음 기회 다시 뵙겠노라 언약했다. 올해도 궐리사에서는 공자에 대한 제사인 석전대제(釋奠大祭)가 10월15일(음력 9월 2일)거행되어 양재백 선생과 함께 참여했다. 엄격한 의례, 장엄한 분위기의 공자 제사가 인상 깊다.
子曰(자왈) 學而時習之(학이시습지)면 不亦說乎(불역열호)아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有朋自遠方來(유붕자원방래)면 不亦樂乎(불역낙호)아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人不知而不慍(인부지이불온)이면 不亦君子乎(불역군자호)아.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음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논어 / 학이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