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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32 - 금나라를 세우게 되는 여진족과 그 조상들인 숙신과 말갈!
중국에는 기원전 91년 한(漢)나라때 사마천(司馬遷)이 지은 사기(史記) 이래 25사 라는 25권의
역사서가 있는데....“사기(史記)”에는 본기(本紀) 12권 외에도 열전(列傳) 70권이 있으니
그중 이민족에 대해서 흉노전, 서남이전, 조선전, 동월전, 남월전이 보이지만 읍루전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마천 이전인 전국시대의 진(秦)나라 진시황 이전에 “숙신” 이라고 불리는 족속이 있었고
이들이 한(漢)나라 시대에는 “읍루” 였으며, 남북조시대 후위 때는 물길, 그리고 수, 당나라
시대에는 “말갈” 이었는데 이 말갈이 발해가 멸망하고 송나라 때 부터는 “여진” 으로 불렸습니다.
고구려를 처음 기록한 25사는 후한서이니 서기 440년 경에 남조 송나라 범엽이 지었는데.... 진(西晉)나라
사람 진수의 삼국지는 역사시대로 보면 후한 보다 이후지만 편찬 시기는 오히려 후한서 보다도 빠른
서기 290년경이라 후한서 동이열전(後漢書 東夷列傳) 은 진수의 삼국지 위지동이전을 참고했지 싶습니다.
서기 290년경에 진(西晉)나라 진수(陳壽)가 쓴 삼국지(三國志) 위지 줄여서 위서
(魏書) 에 열전 30 오환선비동이전 중에 동이열전(東夷列傳) 에는 부여,
고구려, 옥저, “읍루(揖婁)”, 예(濊), 한(韓) 및 왜(倭) 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한(韓) 조에 “한(韓)은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 둘째 진한, 셋째 변진이고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54
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낙랑, 남쪽은 왜(倭)와 접하여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國이 있으며 그 북쪽
은 예맥과 접하여 있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國 이 있으며, 그 남쪽은 왜(倭)와 접해 있다.”
1. 숙신(肅愼)
숙신(肅愼)은 동아시아에 살던 퉁구스계 민족으로 읍루, 말갈족, 여진족, 만주족의 조상인데... 현대의 연구
결과 숙신 = 만주족이라고 보기 어려운건 만주가 한반도와 달리 사면이 열려있는 개방적인 지형
으로 외부와의 인적 교류가 활발했고, 시대가 지나면서 여러 유목·수렵 부족들과 혼혈화되었기 때문 입니다.
숙신(肅愼)은 만주·연해주에 사는 퉁구스족인데, 원래 퉁구스족은 시베리아 바이칼호, 예니세이강
상류 및 스타노보이 산맥과 오호츠크해 연안 일부에서 살면서 순록을 방목하는 생활을 했는데,
그후 이들은 점차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해 연해주로 이동한 시기는 3,000년 전으로 추정됩니다.
기원전 1천년경 연해주와 만주로 이주한 퉁구스인들은 순록 방목 및 가축들을 목축하거나 소규모 농업을
하는 것으로 생업을 바꾸기 시작했으니 중국 주(周)나라 시기에는 “숙신” 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신앙은 샤머니즘을 믿었고 동예나 옥저 처럼 부족국가였기 때문에 이렇다 할 중심지인 수도는 없었습니다.
숙신은 이후 남북조시대나 수, 당 시기에는 읍루·물길이라고 불렸던 것으로 보이며 시대가 지나면서
말갈로 호칭되었고, 끝까지 살아남은 흑수말갈은 여진족이 되었으며 다시 복속되지 않고 남은
생여진들은 완안부를 중심으로 금나라 및 동진국을 세웠고, 금과 동진국의 멸망 이후 여진족 중에
다른 민족에 동화되지 않은 여진족들은 훗날 건주여진을 중심으로 만주족이 되어 청나라를 세웁니다.
한국 역사에서는 고구려, 부여와 접한 외세 국가로 기록되어 있으며 고구려를 침략해 약탈했다가
나중에는 고구려에게 제압당하니 광개토대왕 시기에 숙신은 고구려에 토벌당하여 복속하게
되는데 다만 이후에도 한동안 과도기를 거치며 말갈인을 숙신이라 부르는 용례가 종종 등장합니다.
역사적 명칭은 한순간에 바뀌지 않기 때문이니 예를 들어 《일본서기》에 의하면 676년
신라에서 일본으로 사신 김청평을 보냈는데, 김청평은 “숙신인 7명” 을 일본에
데려갔다고 되어있으니, 이는 나당전쟁 와중에 고구려인들이 신라로 망명하면서
고구려에 섞여 살던 말갈인도 같이 남하했고 이들은 그 일부인 것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2. 읍루(揖婁)
읍루(揖婁)는 상루(相婁) 또는 숙신이라고 하는데 그 후손을 고구려인들은
말갈이라고 불렀고 고려 시대에는 여진이라 불렀으며 훗날 누르하치가
후금(청) 나라를 세운 후에는 자기 민족을 높여서 만주족이라고 자칭했습니다.
相婁(상루) 곧 '읍루' 는 부여 동쪽 천여리에 있으며 큰 바다에 닿는다. 남쪽은 북옥저(함경북도)에 닿고
북쪽의 끝은 알지 못한다. 산이 험하고 많으며 사람들의 형태는 '부여' 와 유사하다. 언어는 부여와는
다르고 오곡이 있으며 소, 말, 마포가 있다. 사람들은 용력이 많고 대군장은 없으며 읍락에 대인이 있다.
산림사이에 거처하면서 동굴에서 사는데 큰 집은 사다리 아홉개 정도의 깊이고 깊을수록 좋은
것이다. 땅기운이 차가운데 부여보다 심하다. 풍속에 돼지 기르기를 좋아하여 그 고기를
먹고 가죽으로 옷을 해 입고 겨울에 돼지 비계를 몸에 여러번 두껍게 칠하여 추운 바람
을 막는다. 여름에는 곧 벌거벗고 한 척 되는 천으로 앞 뒤를 가리는 것으로 형체를 가린다.
사람들이 깨끗하질 못하여 중앙에 화장실을 만들고 사람들은 그 둘레에서 거한다. 활의 길이는
사척이고 힘이 쇠뇌만큼 드는데, 화살은 싸리나무를 사용하고 길이가 한척팔촌이며 푸른
돌로 화살촉을 만들니 옛날부터 '숙신씨' 의 나라라 한다. 궁술에 능하여 사람을 쏘면
눈을 맞치고 화살에 독을 발라 맞으면 모두 죽는다. 적옥과 좋은 담비가죽이 나오니 읍루초 이다.
한(漢)의 말기에 '부여' 의 신하였다가 부여가 조세와 조역을 중하게 하는지라 황초 중에 모반하니 부여가
수차례 정벌하였으나, 무리가 비록 적으나 산이 험하고 이웃나라 사람들이 그 활과 화살을 두려워하여
병사로써 능히 복속시키지 못하였다. 그 나라는 배를 타고 노략질을 잘하는데 이웃나라들의 근심거리
였다. 동이들은 음식류에 모두 조두를 사용하는데 오직 '읍루' 는 아니며 법과 풍속이 가장 기강이 없다.
3. 말갈(靺鞨)
고대에 만주 동부 지역과 연해주 일부, 한반도 북부 일대에 거주했던, 계통상 현재 만주족
으로 계보가 이어지는 퉁구스 계통으로 추정되는 어로와 수렵채집, 유목 생활을 한
종족으로... 순수한 유목민족은 아니고 말갈이라 불렸을 때까지는 유목도 했으며,
여진이라고 불릴 때에는 삼림 수렵과 채집, 목축, 유목, 농경 등으로 삶을 영위했습니다.
말갈 조상은 숙신이니 한나라 시대는 읍루였으며, 남북조시대 물길, 수, 당나라 시대에는 말갈이었고
그후 여진으로 불리는데... 이들 종족명의 공통점은 외부의 기록자 들이 부른 것으로 그들 스스로
부른 종족명이 아니었으니 당대 발음은 '모트기트', '마트카트' 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뒤의 '기트' 혹은 '카트' 는 튀르크계 언어로 “돌”을 뜻하는 단어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말갈(靺鞨)‘ 은 자칭했던 종족명이 아니라 고구려 중앙에서 도성 중심의 시각으로 변방인
들을 멸시해 부른 비칭이었다' 고 보는 시각도 있으니 왕조시대의 국가관은 수도
중심이니 신라 주류층이 경주 외에는 전부 변방 촌놈으로 업신여기었듯 고구려도
평양 사람의 입장에서 동쪽 변방 시골 사람들을 말갈로 낮춰 불렀다는 견해 입니다.
이에 따르면 말갈은 “촌놈” 과 같은 뜻이었다고 볼수 있으니... 당이 발해를 말갈이라 하였던 것은 중국
측의 신당서에 대조영을 속말말갈이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인데, 기존에는 이 구절을 가장 직관적으로
해석해 대조영의 가문이 말갈족 출신이라는 의미로 이해했지만, 말갈비칭설에 따르면 대조영이 속말
말갈이란 것도 그가 고구려 속말부 출신 촌놈이란 뜻으로 해석할수도 있는데 확정된 학설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록에 따르면, 말갈 7부 중에 하나인 속말부는 강한 병사가 수천명이고, 날랜 무사도
많아 매번 고구려를 노략질하였다고 전하며, 궐계부의 만돌을 중심으로
한 속말말갈의 소부 8부는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패배하자 수나라로 귀순한 사례가 있습니다.
이 기록들을 보면 물길-말갈의 독자적인 외교가 기록에 남아있으니 '말갈이 촌놈이란 뜻의 비칭
이지 이민족을 구분해 부른게 아니라는 주장' 에는 오류가 있으며 또한 중국의 역사서에서
이민족 열전에는 말갈에 대한 내용을 고구려와 분리하여, 고구려전과 말갈전(혹은 물길전)
이 따로따로 등장하니.... 중국이 고구려와 말갈을 서로 다른 집단으로 인지했음을 의미합니다.
사서상의 '말갈' 용례를 종합해 보면, 전통적인 만주 지역에 거주하던 퉁구스계 부족들을 지칭
하는 족명, 초기 백제를 침공했던 집단의 명칭, 중원 국가에서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을
부정하기 위해 부른 멸칭 등이 있고 퉁구스족들이 많았지만 극소수로는 니브흐 처럼
고아시아계 또는 비 퉁구스계 민족들도 있었으니 퉁구스인 말갈에게 동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4. 말갈족의 역사
최초 사료에 등장하는 이름은 '숫신(肅愼)' 으로 식신 혹은 직신으로 적혀있기도 한데, 이후 전한시대
때는 읍루로 불리다가 수당시기에는 말갈로 불렸으니 말갈족은 7개의 유력한 부족이 있었는
데..... 남쪽인 동만주 지역 지린성(길림성) 일대에 거주한 부족은 속말말갈과 백산말갈이 있었습니다.
생활 방식은 고구려 및 부여와 비슷한데, 애초 거주하는 지역이 고구려와 부여 발상지 근처이고 반농반목
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니 당연한 귀결일 것이니 백산말갈이나 속말말갈은 환경 자체가 예맥인들과
똑같기에 말갈이라는 종족 정체성은 유지하되, 동시에 고구려인이라는 정체성도 형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발해 건국자 대조영이 소속된 속말부는 아예 주도적으로 고구려를 재건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이후 흑수말갈의 후신인 완안부가 고구려와는 전혀 상관없는 금나라라는 새로운 여진족
의 제국을 세운 것과는 매우 대조되는 사례로서, 이미 이 백산과 속말 두 부족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말갈인' 인 동시에 '고구려인' 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 사료에는 발해의 말갈 부락들은 연해주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말갈일 가능성이 높으며,
발해 건국의 주체 세력들은 대부분 서쪽의 길림성 지방 출신인 속말말갈인들과 토착
고구려인들이었으니 이들 중 일부는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하고 남쪽의 신라와 고려로
유민이 유입될 때 예맥계와 함께 유입되었다가 동화되어 자연스레 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흑수말갈을 비롯한 퉁구스계 말갈족들은 북쪽 흑룡강성(하얼빈), 혹은 연해주 일대에서 거주하던 민족으로
위의 두 말갈 부족과는 매우 이질적인 부족이었는데.... 흑룡강 일대는 환경 자체가 남쪽의 길림성과는
판이하게 다르고 척박한 지역이었므로 매우 거칠고 유목민족의 특성을 강하게 지녔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들은 고구려와 발해에게 정복되거나 복속되었을지언정 끝까지 이질적인 존재로 남았으며
고구려 때도 완전히 복속된게 아니라 반(半) 복속 상태로 있었고, 발해 때도 북쪽
흑수말갈은 발해에 속하지 않고 멀리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지원을 받으면서
끊임없이 독립하려고 했으나 발해 선왕시기에 결국 제압당하고 발해에 복속되었습니다.
여러 말갈 부족들이 발해에 소속되긴 했지만 간접적 복속에 그치고 여전히 발해라는 나라 안에서 말갈족
들은 큰 독립성을 유지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니... 일본 사서 속일본기에는 779년에 '발해' 와
'철리부 말갈족' 이 서로 다른 나라인 것처럼 별개의 행열로 따로 일본에 사신을 보내왔다고 기록합니다.
발해 사신과 철리인 사신이 일본 조정에서 윗자리에 누가 앉느냐를 두고 경쟁할 정도로 발해에 순순히 복종
하지 않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니 자리를 가지고 이런 자존심 다툼한 것을 보면 발해인 주류와 철리부
는 서로 상당한 지역감정, 경쟁심을 가지고 있었던 듯 한데 이후 발해가 거란족 요나라에 허무하게 멸망
하면서, 말갈인들은 발해 유민들을 몰아내거나 흡수해 점차 만주의 주인이 되어 여진족으로 재탄생합니다.
발해의 멸망 후에 여진족으로 명칭이 바뀌어 거란에 복속한 숙(熟)여진과 그렇지 않은 생(生)
여진으로 구분되어 지냈으니.... 거란족의 요나라는 요동과 만주 지역에 대해 완전한
지배를 이룩하지는 못했고, 11세기 후반 ~ 12세기 초 영가, 우야소 등의 추장이
등장하여 부족 단위를 국가 형태로 통합해 가면서 주변국과 긴장 구도를 이루었습니다.
1107~1108년 윤관과 척준경이 별무반을 중심으로 토벌하고 동북 9성을 확보하기도 하였으나 이들의
반격으로 도저히 지킬수 없는지라 몇년후 반환했고, 1115년 정월 북쪽 흑룡강에서 완안아골타의
완안부를 중심으로 통합되어 금나라가 된 말갈 7부는 신속하게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화북 지방
까지 차지하였으며 그뒤 고려도 이자겸의 주도하에 금나라의 신하국이 되어 조공 체계에 편입 됩니다.
5. 고구려와의 관계
말갈인은 고구려와 발해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민족이었는데 북한산성 전투의 말갈인 지휘관
생해(生偕) 처럼 삼국사기의 기록에 남은 자도 있으나 그 외에도 역사상 기록된 '고구려인'
들 중에 종족 출신이 명시되지 않은 인물들 중에서 일부는 말갈 계통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후에는 고구려의 전성기 때 남진과 더불어 함께 나타나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만주에
살던 말갈족을 고구려가 징병해서 남진에 동원했을 가능성이 높으니 비슷하게 예인
(동예)을 백제와의 독성산성 전투에 동원하기도 했고 심지어 의자왕 때도 655년
고구려- 백제- 말갈 연합군이 신라 북쪽 국경 33개의 성을 빼앗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들은 고구려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고, 고구려 멸망 후 일부는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신라
로 흘러들어갔는데 일본서기에는 나당전쟁 종료 직후인 677년 11월 신라 사신 김청평이
7명의 숙신 사람을 데리고 일본에 갔다온 기록이 나오는데, 시기와 정세상 고구려
치하에 있다가 멸망후 고구려인들을 따라서 신라로 귀순한 보덕국 소속인 것으로 추측됩니다.
또한 통일신라의 수도권을 방어하는 부대인 9서당에 대한 기록을 보면 9서당 중
흑금서당 부대는 말갈인으로 구성되었다고 기록한 사례에서, 고구려인 인구를
흡수한 통일신라의 인구 구성 중 일부는 말갈인이 차지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통일 신라와 고려왕조 영토 내부에 퉁구스계 집단이 있다는 기록이 없고 고고학적으로 숙신계
유적이 발굴된 바도 없기 때문에 오래 못가 정주 민족인 신라-고려인에 동화된 것으로 추정
되며... 한반도 중남부가 숙신의 고지와 거리가 멀어 이들이 원래의 정체성과 생활양식을
유지하기 어렵기도 했고 수렵, 유목 민족들이 농경, 정주 문명에 동화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심지어 아예 고구려화 된 말갈인들은 자신들이 고구려 복원을 내세우며 고구려를 재건
하기도 하였으니 대조영의 출신에 대해 논쟁이 많은데.... 사실 대조영이나 발해 문서
를 보면 알수 있듯 외국 학자들은 그를 말갈계 고구려인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반면에 아무르강과 연해주 일대에 살던 흑수말갈을 비롯한 상당수 다른 말갈 부족들은 복속과 이탈
을 꾸준히 반복한 것으로 보아 끝끝내 발해에 동화되지는 않은 듯하니 즉, 말갈족들은 의식적
으로 고구려인에 일부 동화된 남쪽 말갈 부족(속말부, 백산부)들과 생활방식이 많이 달라
동화되지 않은 북쪽 말갈(흑수부, 철리부, 월희부 등) 부족들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과 달리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서 압록강 북쪽 강변 졸본에서 남쪽으로 이주해 와서
한강 하류에 새로 자리를 잡은 백제를 상류에서 한강을 따라 내려와 자주 공격해온
한반도 중부 춘천과 철원 지역에 거주한 것으로 보이는 “말갈(靺鞨)”은 저 만주
지방의 말갈과는 다른...... 그러니까 진짜 말갈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가설이 있습니다.
기록에 등장하는 말갈 부족은 속말말갈, 백산말갈에 흑수말갈, 철리말갈, 월희말갈,
우루말갈, 불열말갈 그리고 백돌말갈등 모두 8개 부족인가 합니다.
6. 고구려와 수, 당나라에 동원된 말갈 기병
고구려가 말갈족 군대를 대거 동원한 첫 기록은 영양왕때 이니... 수 문제가 고구려를 공격
하기 위해 군대를 양성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영양왕은 598년 말갈 기병 1만명을
동원하여 요서 지역의 임유관을 선제공격했는데, 하지만 수군 장수 위충이 지키는
임유관을 점령하지는 못했고 수 문제는 이에 격분하여 3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략합니다.
저 사건의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영양왕의 부친은 평원왕으로 《삼국사기》에는 수나라에
581년부터 584년까지 4년동안 7차에 걸친 조공을 바치던 중에 마침내 남조의 진(陳)
이 멸망하여 수(隨) 문제가 중국 통일의 대업을 완수했다는 소식이 고구려에 전해집니다.
三十二年王聞 陳 亡大懼理兵積穀爲拒守之䇿
32년(590년)에 왕이 진(陳)이 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병기를 수선하고
곡식을 축적하는 것으로 막고 지켜낼 방책을 삼았다. 《삼국사기》권제19 <고구려본기> 제7
이처럼 수(隨)나라가 강대해지자, 일부 속말말갈의 무리가 고구려를 뒤로 하고 수나라에 합류했으니....
이때 추장인 돌지계(突地稽) 의 아들이 고구려- 당 전쟁과 나당전쟁 때 나타나는 당군 지휘관 이근행
(李謹行) 이며 또한 이때 거란의 한 부족인 출복부도 고구려를 배반하고 수나라에 내부(內附)해 버립니다.
나당전쟁에 등장하는 장수인 이근행(李謹行)의 아버지는 속말말갈 출신으로 돌지계(突地稽)인데,
부(部)의 추장으로 수나라때 그에 속한 1,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내부해 오니, 영주
(營州)에 거처하게 하고, 금자광록대부(授金紫光祿大夫), 요서태수(遼西太守)에 제수하였습니다.
그 아들 이근행(李謹行 ? ~ 682년)은 당나라의 장수로 고구려, 신라와의 전쟁 기록에 자주 등장하며, 그 외의
북방 유목 민족을 격파하는데 공을 세웠는데 당 태종 초에, 조공을 받들면서 그의 부를 영주로 삼고 총관의
직을 제수했으며 유흑달(劉黑闥)이 모반하자, 아버지 돌지계가 직접 정주에 와서 진왕(秦王)에게 상서하여
부절을 청하였고, 군공으로 기국공(耆國公)에 봉해졌으며, 그의 부는 옮겨 창평(昌平)에 거처하게 했습니다.
고개도(高開道)가 돌궐 병력으로 유주를 공격하자, 돌지계가 맞아싸워 패배시켜으며 뒤이어 우위장군
으로 승진시키고 이씨 성을 하사하였으나 돌지계는 얼마 안가 죽었는데 아들 이근행은 용모가
장대하고, 용맹은 군중을 뒤덮었으며, 여러번 승진하여 영주도독이 되었는데, 가동(家童)은
수천명에 이르러 재물로써 스스로 웅걸이 되니..... 이인(夷人) 들이 그를 두려워하였다고 합니다.
666년 고구려 연개소문의 아들 대막리지 연남생의 요청으로 당나라군이 파견될 때, 좌감문위로
임명되어 고구려로 와서 평양성 함락에 공을 세웠고... 669년 당군은 고구려인들을 포로로
잡아 대부분 다 철수하고 평양에는 설인귀의 안동도호부 2만만 남은 상황에서
티베트족 토번이 당나라 국경을 위협하자 설인귀는 황급히 군대를 이끌고 티베트로 달려갑니다.
그러자 기회를 잡은 신라 문무왕은 백제땅에 설치된 당나라 웅진도독부를 몰아내기 위해 양동작전을 결행
하니 670년 3월에 설오유(薛烏儒)의 신라군 1만과 고연무(高延武)의 고구려 망명인 부대 1만이 압록강
을 넘어 만주를 공격해 말갈군을 쳐부수는데 당군이 오자 백성(白城 황해도 또는 경기도?) 으로 철수합니다.
이후 토번과 당나라가 화친하면서 여유가 생긴 당나라는 장수 고간(高侃)과 말갈인 이근행(李謹行)을
다시 한반도로 파견했고, 따로 설인귀를 계림도행군으로 임명해 일부 말갈 군대와 함께 배로
금강에 상륙하니 웅진도독부를 공격하는 신라군을 막기 위함인데 말갈군이 671년 1월 설구성
(舌口城) 을 포위하고 있다가 퇴각하려고 하자 신라군이 격파하고 300여명의 목을 베었습니다.
당나라 고간과 말갈인 이근행은 고구려 부흥세력이 점령한 안시성을 671년 7월에 함께 함락한후 당나라
고간은 9월에 군사 40,000명을 이끌고 평양성에 당도해 해자를 파고 보루를 쌓으며 대방(황해도) 침공
을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말갈인 이근행은 요동에 남아 고구려 부흥군 토벌을 계속한 걸로 보입니다.
672년 7월 먼저 도착해 있던 고간의 군대에 이근행의 군대가 뒤늦게 합류하면서 50,000명의 당군이 남침
을 시작했으니 8월에 당군은 한시성, 마읍성을 공격해 점령하고, 말갈군과 함께 백수성(황해도 배천)
에 주둔했으니 석문(石門) 들판으로 672년 8월 의복(義福)과 춘장(春長)이 이끄는 신라 중앙군을
몰살시키니...... 신라는 장군 의복, 대아찬 효선을 포함해 상급 지휘관만 7명이 전사하는 대참패 입니다.
중앙군이 몰살당해 서라벌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자 신라 문무왕은 급찬 원천을 보내 당군포로 170명을
송환하면서 은 3만 4천푼, 구리 3만 3천푼, 바늘 400개, 우황 120푼에 금 120푼을 보내며 사죄문(표문)
을 올리니..... “신은 죽을 죄를 지어 삼가 말씀드립니다. 옛날 신이 거꾸로 매달린 것 같았을 때 상국의
은혜를 입어 겨우 찢어 죽는 것을 면했사온데, 몸을 가루로 만들고 뼈를 바순다 해도 그 크나큰 으혜를
어찌 보답하겠습니까? 머리를 깨트리고 재가 될지언정 그 자애로움을 어찌 다 갚을 수가 있겠습니까?...”
673년 5월 이근행이 호로하(瓠濾河) 전투에서 고구려 부흥군을 격파하고 수천명을 포로로 잡으니 나머지
무리는 모두 신라로 달아났다고 하는데, 신당서에 호로하 전투에서 죽거나 붙잡힌 고구려인이 10,000명
에 달한다고 하니 고구려 부흥군은 완전히 소멸되었으며 673년 겨울에 우잠성, 대양성, 동자성이 거란족
과 말갈족으로 이뤄진 당군에 함락되는데 동자성은 경기도 김포시로 한강 근처까지 당군이 내려온 것입니다.
이근행은 적석도(積石道) 경략대사가 되었고 토번의 논흠릉(論欽陵, 가르친링)이 10만을 거느리고 황중(湟中)
을 노략질할때 나후(候邏, 보초)가 알아채지 못하는데, 병사들은 땔감을 구하려 반 이상이나 흩어졌으니
이근행은 오랑캐가 들이닥쳤다는 소식에 기치를 꼽고 북을 치고 문을 열어 살펴보게 하자 논흠릉은
복병이 있는지 의심하여 감히 진격하지 못했고 674년 청해(青海) 에서 토번을 격파하니 연국공에 봉해집니다.
나당전쟁이 674년과 675년 2월까지 당군의 남진이 없어 14개월간 소강상태가 된 이유는 673년 12월 토번이
弓日(궁일)등 서투르크와 함께 천산북로를 공격하자 천산남로를 뺏긴 당군이 마지막 남은 천산북로를
사수하기 위해 당군을 투입했기 때문으로, 그후 화의가 이루어지니 당군은 675년 2월 다시 한반도로 나와
유인궤가 신라 칠중성을 깨뜨리고 귀환하니 성은 말갈인 이근행이 방어했는데 나중에 신라군이 회복합니다.
675년 9월 당군은 매소성에서 황급하게 철수했는데 천성 전투에서 당군의 보급선단이 궤멸되어 군량
이 떨어진데다가 토번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으로... 철수하는 한편으로는 말갈군이
아달성(강원도 이천군)에 침입해 노략질하였고 소나(신라)가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으며 말갈군
은 적목성(강원도 회양군) 까지 점령했고 또다른 당군은 거란병, 말갈병과 함께 칠중성을 포위
했다가 북쪽으로 철수했으며..... 이근행은 사후 유주 도독이 추증되고, 건릉(乾陵) 에 배장되었습니다.
그 외 말갈족 인물로는 생해(生偕) 라고 있으니 백제가 망하고 부흥운동이 일어나던 661년에
고구려 장수 뇌음신과 함께 신라의 술천성과 북한산성을 공격한 말갈인 장군입니다.
7. 발해를 세우게 되는 단초인 영주를 탈출한 걸사비우와 걸걸중상
또 다른 말갈인으로는 걸사비우(乞四比羽) 가 있으니 고구려 멸망후 당나라의 영주(營州, 조양)로
강제 이주되어 억류생활을 하였는데.... 당나라는 수나라때 부터 70년간 고구려와 전쟁하며
수많은 중국인들이 죽고 물자를 탕진한지라 고구려가 너무나도 드려우니 이제 두번 다시
고구려가 회복되는 것을 염려하여...... 아예 고구려인과 일부 말갈인들을 중국으로 잡아갑니다.
이는 120년간 세차례 포에니 전쟁에서 특히 한니발의 이탈리아 침공등으로 시달린 로마가 3차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멸망시켰을 때 성을 허물고 불지르며 바닷물을 끌어들여 황폐화
시킨후 살아남은 카르타고인 포로들을 모두 노예로 팔아버려 카르타고인 민족 자체를
소멸시킨 것과 유사한데.... 하지만 일부 고구려인은 신라로 탈출해 민족을 보존한 것은 다릅니다.
저들이 당나라 땅이 아닌 거란땅 영주로 잡혀간 것은 668년 고구려 평양을 함락할 때 거란군이 대거
참전했기 때문에 그 전리품으로 주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28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696년 5월
에 영주를 다스린 당나라 조문홰의 잘못된 정치로 인해 거란인들이 영주에서 봉기를 일으킵니다.
그후 거란의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폭정을 일삼던 영주도독(營州都督) 조문홰
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니 당나라 측천무후는 토벌군을 보내는데 698년 영주가
당나라군에 의해 함락당하자 그 혼란을 틈타 고구려(속말말갈?) 의 걸걸중상과 그
아들 대조영과 함께 걸사비우는 고구려 및 말갈인 유민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달아납니다.
요수를 건너 오루하에 성을 쌓고 머물러 견고하게 지켰는데, 당나라는 2명의 우두머리를 달래려고 걸걸중상
을 진국공(震國公)에,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에 봉해서 사면하려고 했지만 걸사비우는 이를 거절
했고 698년에 이진충의 양자로 항복해 당나라 장수가 된 이해고의 추격을 받아 격파된 후에 참수되었습니다.
걸걸중상은 당나라와의 싸움 직전에 병사하였고, 걸사비우 역시 전투에서 패해 이해고에게 참수
되었으니 저 무리들은 2명의 우두머리를 모두 잃게 되자 고구려(속말말갈?) 출신 걸걸중상
의 아들인 대조영이 무리를 이끌고 추격해온 당군을 천문령전투(天門嶺戰鬪) 에서 격파합니다.
당나라군 추격군을 격파한 대조영은 더 동쪽으로 가서는 길림성 돈화현 동모산(東牟山) 에 진국(震國)
을 세웠는데.... 그후 대조영이 당나라에서 발해군왕(渤海郡王)을 수여받은 것을 계기로 국호는 “진국”
에서“발해” 로 바뀌었으며 그후 문왕 때 762년에 당나라는 발해군왕을 발해국왕으로 직위를 올렸습니다.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 민족은 문자(글자)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고대에는 기록이란게
있을수가 없고.... 훗날 원수놈들인 침략자 중국인의 문자 한자(漢字)가 들어오니 고구려인
들은 서기 600년에 “신집(新集) 5권” 을 편찬했고 그 전인 소수림왕때(서기 370년경?)
“유기(留記)” 라는 역사서가 있었다지만 망한 나라라 책은 전해지지 않으며, 고려중엽인
1145년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도 고구려 시절의 대조영에 관한 기록이 별로 없습니다.
궂이 찾자면 신라가 당나라에 보낸 표문인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 라는 최치원이
쓴 글에 “… 신이 삼가 발해의 원류를 살피건대, 구려(고구려)가 아직 멸망되기 전에는 본래
사마귀만한 부락이었던 것이 말갈의 부류가 번창해지자 그 가운데 속말이라는 작은 번속
이 있어 일찍이 구려를 따라 내지로 옮겨왔는데 그 수령 걸사비우와 대조영 등이… ”정도 입니다.
《구당서》에는 대조영(大祚榮)을 고구려의 별종 출신으로 서술했고 《신당서》에는 본래 고구려
에 부속되었던 속말말갈(粟末靺鞨) 출신이라고 서술되어 있는데..... 668년 고구려멸망후
당나라와 거란군에 잡혀 영주로 끌려가 30년간 농노생활을 하다가 698년에 탈출해서는
진국(발해)을 세운후 719년에 죽었으니.... 80세로 죽었다고 보면 잡혀갈 때 나이는 29세
정도로 추측되며, 70세에 죽었으면 19세 그리고 65세에 죽었으면 14세 정도였다고 보입니다.
걸걸중상과 아들 대조영이 고구려인이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는데, 고구려인이라는 기록이 없고 중국측
기록이나 심국사기만 본다면 말갈인으로 볼수 밖에 없는데.... 발해가 고구려를 이엇으니 그를
고구려인으로 보기도 합니다만, 아자개의 아들 견훤이 전주에서 나라를 세운지라 후백제로 칭했지만
경상도 상주의 신라인이고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웠지만 역시 신라인이며, 중국에서도 선비족의
연(燕) 나라, 흉노족의 조(曹) 나라, 저족의 진(秦) 나라도 그 땅에 세워졌으니 옛 국호를 사용했습니다.
통일신라가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등 4국사기를 편찬했다면 좋았겠지만 최치원이 외교문서나 작성하다
지리산 근처 군수로 가는 대접밖에 받지 못했으니.... 신라는 진골 귀족의 나라라 모든 고위직은 뼈가
진골이라야 했으니, 유학자들이 편찬하는 역사서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고려도 초창기에 왕위
쟁탈전 싸움과 거란전쟁등에 바빠 고려 중기나 되어서야 유학자들이 역사서를 편찬했으니 그게 아쉽습니다.
김부식은 1145년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당태종의 30만 대군으로 부터 끝내 성을 지킨 위대한
안시성 성주의 이름을 알지 못해 안타깝다고 했는데.... 역시 수양제 100만 대군에 성을 지킨
요동성 성주의 이름도 알수 없는건, 우리 역사 기록이 너무 빈약한지라 중국 역사서
에 기록되지 않으면 알 수가 없으니...... 우리 조상님들은 왜 우리 문자를 만들지 못했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안시성 성주 이름을 자신있게(?) 양만춘이라고 말하니 실소를 금할 수가 없는데...
그럼 楊萬春(양만춘) 입니까, 아니면 梁萬春(양만춘) 일까요? 1145년에 김부식이 알지 못한
이름을 오늘날에 알다니? 저 이름은 “900년” 이나 지난 16세기 명나라의 소설 당서지전
통속연의(唐書志傳通俗演義) 에 나오니 중국 소설가가 적당히 지은 이름이라 그냥 웃을
수 밖에..... 임진왜란때 온 명나라 병사가 중국 소설에 저런 이름이 있다고 말해준줄 압니다?
훗날 조선시대에 세계에서도 가장 과학적인 우수한 문자인 “한글”을 창제한걸 보면 우리 민족이 능력이 없어
문자를 만들지 못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면...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라고 했으니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
신라와 백제를 세우고도 문자를 만들지 못한 것은 나라의 강역이 좁고 인구가 적으며 관료제도가 없이
국가 행정이 매우 간단한지라 문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때문으로 봅니다. 우린 문자 그딴 것 필요 없어요?
이후 고구려와 신라, 백제가 발전하면서 중국에서 문물을 수입하고 관료제도를 도입함에 따라 문자의
필요성을 느꼈지만 우리 문자를 만들지 못한 것은 중국의 한자가 뜻 글자인 표의문자(表意文字)
라 이미 문자가 다 만들어졌다고 본 것이니, 만약에 한자가 표음문자(表音文字) 였으면 달리
우리 문자를 만들었을 것으로도 보는데.... 우리 고대 기록이 너무 적으니 삼국사기도 중국
역사서를 많이 참고했으며, 해서 우리 고대 역사는 중국의 역사서를 보아야 한다는게 너무 슬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