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우덕이 (김암덕. 金岩德)의 묘.... 우리나라 최초의 스타 연예인
바우덕이의 이름은 김암덕(金岩德)이다. 암덕(岩德)을 한글로 풀이하여 바우덕이로 불리게 된다.
바우덕이는 안성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1848년 출생하였고, 1853년 5살의 나이로 안성 청룡사 남사당에 입단하였다.
그리고 남사당의 모든 기예를 익히고..1863년 당시 꼭두쇠이었던 윤치덕이 사망하자 바우덕이가 꼭두쇠로 추대되었다. 원래 남사당은 獨身 남성들로만 구성되어있는 연희집단을 일컫는 이름인데, 女子인 바우덕이가 꼭두쇠로 추대된 사실은 最初이자 最後의 사건이었다.
그후 바우덕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스타로서 민중의 사랑을 받는다. 드디어 高宗 2년 흥선대원군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경복궁을 중건할 때에...大院君은 인부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전국의 사당패들을 초청하여 경연을 펼치는데, 대원군은 안성 남사당패의 宴戱에 감탄하여 정3품 당상관 벼슬에 상당하는 옥관자를 내린다.
그후 안성 남사당은 "바우덕이"로 통칭되며, 전국을 누비며 공연활동을 펼치게 되고, 대한민국 최초의 연예인 탄생을 보게 된다.
남사당
남사당(男사당)에 관한 기록은 남겨지는 것조차 꺼려졌던 것 같다. 그들은 종(從)이나 백정(白丁)같이 천한 계급이었기 때문이리라...남사당은 모두 獨身 男子로 이루어져 있고, 일정한 거처가 없어, 남사당과 비슷한 연희집단(宴戱集團)인 사당패, 걸립패 등과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이들은 모두 50~60名으로 되어 있고, 우두머리인 꼭두쇠를 비롯하여, 그 밑에 곰뱅이...뜬쇠...가열...삐리의 서열이 있었다.
곰뱅이는 많은 경우 셋까지 있을 수 있는데, 마을에서 놀이를 할 수 있는지 여부를 타진하거나 먹을 것을 책임졌으며, 돈을 관리하기도 하였다. 마을에서 연희하는 것을 허락받으면, 남사당은 마을의 큰 마당이나 장터에서 연희하는데, 때로 밤새워 연희하기도 하였다.
뜬쇠는 각 연희분야의 우두머리로, 14名 안팎이며 각 놀이에 따라 이름이 다른데 징수는 징수님,벅구잡이는 벅구님,꼭두각시는 덜미쇠, 땅재주꾼은 살판쇠라고 부른다.
가열은 실제 연희자(宴戱者)를 말하고, 삐리는 여장을 하고 잔심부름을 하면서 가열이 되기까지 수련을 쌓아야 한다. 그밖에 늙어서 연희를 못하고 뒷일을 돕는 저승패.. 연희도구를 운반하는 등짐꾼이 있다.
또 이들은 수동모와 암동모로 나뉘는 남색조직(男色組織)을이루고 있는데..수동모는 가열 이상이고, 암동모는 삐리들이 담당했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서는 암동모인 삐리를 서로 가지려고 노력했다. 규율은 엄격했으나, 자유롭게 들어 올 수도 있고, 자신이 싫으면 떠날 수도 있었다. 인원은 스스로 들어 오는 사람이 없을 경우, 가난한 農家의 아이나 家出한 아이 등으로 충당하였다.
연희종목은 6가지인데...1). 풍물, 벙거지에 긴 조이끈을 달아 돌리는 묘기 등 2).버나, 접시 돌리기와 연극적인 재담과 창 3). 살판(땅재주), 자반뒤지기, 외팔걸음 등 땅에서 노는 재주로 우리말의 살판,죽을 판이라는 표현은 여기서 나왔다. 4).어름, 줄타기로, 어름을 놀때에도 재담과 창이 있다. 5).덧뵈기(탈놀음), 탈 놀음으로 네 마당이 있다. 6). 덜미, 꼭두각시 놀음을 말한다.
위의 남사당과 비슷한 연희집단으로 사당패(寺黨牌)와 걸립패(乞粒牌)가 있다. 남사당이 독신 남자들로만 구성되어있는 반면에 사당패는 男女 혼성이었다. 사당패의 책임자는 모갑이라고 하였고, 그 밑에 남자 거사(居士)와 女子 사당이 있었다.
모갑이는 예술면에서 책임자이며, 거사(居士)는 자기 밑에 여자 사당 1~2명을 데리고 예술적 지도와 생계를 꾸리는 일을 맡았다. 이 때 여자 사당은 연희(宴戱) 이외에 매춘도 하여 해의채(解衣債.
몸값)을 받기도 하였다. 17~18세기에는 그들의 활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단체의 수도 많았고, 예술적 기량도 발전하였는데...19세기에 이르러 그들의 활동무대는 농촌으로 국한되었다.
그 주요 원인 중의 하나는 판소리, 잡가 등을 전문으로 하는 者들의 역량이 강화됨에 따라, 이들과 예술적으로 기량을 겨룰 수 없었던 탓이다. 사당패들의 공연 내용은 당시 유랑민의 처지를 잘 반영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 새롭게 대두하는 신흥 예술의 양상을 잘 드러내 준다.
또한 걸립패(乞粒牌)는 동네의 經費를 마련하기 위하여 집집마다 다니면서 風樂을 울려 주고 돈이나 곡식을 얻기 위하여 조직한 단체를 말한다.
우리나라 대중문화의 효시는 누구일까? 서구문화로부터 우리 대중 문화예술의 源流를 찾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의 민중예술에서 그 원류를 찾는 그 중심에는 항상 사당패가 자리 잡는다. 그리고 바우덕이라는 唯一無二한 여자 꼭두쇠가 그 사당패를 대표하고, 상징한다.
즉 바우덕이는 우리나라 대중문화를 개척한 인물로 연예의 효시가 되는 것이다. 조선 후기 신재효에 의해 재정립된 판소리는 우리 음악의 주요 부분이었으나, 민중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담당하지는 못하였는데 그것은 판소리 연희자체의 형식과 참여에 있어 제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전승된 雅樂이 있었지만, 그것은 궁중음악으로 종묘 제례에만 사용되는 것일 뿐 대중문화와는 연관이 없었다.
그러나 사당패 중에서도 안성 男寺黨패에는 바우덕이라는 특별한 영혼과 능력을 갖춘 개성있는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탁월한 능력으로 경복궁 중건에 동원되어 사기가 떨어진 많은 인부들과 백성들에게 신명의 힘을 불어 넣어주었다. 바우덕이가 공연할 때에는 인부들이 감흥과 신명에 겨워, 일은 안 하고 얼쑤얼쑤하며 분주히 뛰어 다니기만 했었다는 일화도 전해 온다, 어쨋건 대원군의 사당패 동원은 바우덕이의 공연으로 성공하였고, 덕분에 景福宮도 무사히 완공되었다.
이러한 공로에 보답하기 위하여 大院君은 바우덕이가 이끄는 천민집단인 안성 남사당패에 堂上官 정3품의 벼슬을 내려 주는데, 이것이 바로 안성 남사당패 영기(令旗)에 걸어 준 옥관자이었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힘든 사건..일개 놀이패에 벼슬을 내린 것이었다.
이렇게 정삼품 벼슬을 받은 사당패 깃발을 앞세우고 가면 전국의 모든 사당패가 기배(旗拜)하였다고 한다. 안성남사당패는 전국 어디서나 공연이 가능한 최초의 전국구 공연단체가 된 것이다. 안성남사당패는 그냥 바우덕이로 불리어졌다. 이러한 特定人 이름의 대중화는 우리나라 문화에 없었던 현상이었다. 남사당패가 왔다...가 아니라 바우덕이가 왔다..가 된 것이다.
이 시점이 우리나라 연예가 시작된 것이며, 민중에게 사랑과 동경의 대상이 형성된 일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안성남사당의 꼭두쇠 윤치덕이 죽자, 그 후임을 두고 단원들 사이에 이론이 분분하였다. 결국 남사당패에 유래가 없는 女子 꼭두쇠가 탄생한다. 바우덕이의 인기를 이용하여 그를 앞장 세움으로써 득을 볼 수 있다는 노련한 뜬쇠들이 뜻이었다. 그만큼 바우덕이의 人氣는 높았었다.
그 녀는 이름만의 꼭두쇠가 아니었다. 잠자리도 편안하게 얻어 냈으며, 놀자리(연희장소)를 곰뱅이트는데 (허가를 얻는다는 남사당 은어)도 남다른 수완을 발휘하였다.
이러한 바우덕이는 당연히 뭇 남성들이 사모의 대상이 되었다. 더구나 남자들만의 세상인 남사당패에서 여자로서의 인기는 대단할 수 밖에 없는 것... 그 중에서도 마음속 깊이 바우덕이를 사랑한 한 남자가 있었다. 그녀보다 서른살이나 많은 뜬쇠(기예가 가장 뛰어난 사람) 이경화이었다.
그러나 젊고 재주많은 젊은이들 가운데에서 드러내고 바우덕이를 좋아 할 수는 없었다. 그저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 좋았고, 행복하였다.
바우덕이가 스무살되던 해, 그 녀는 페병을 얻었고, 이는 곧 무리를 떠나야 한다는 의미이었다.
마침내 바우덕이는 무리를 떠나 병든 몸을 이끌고 청룡사 밑의 불당골을 찾아 정착하였다. 온갖 비위를 맞추며, 아양떨던 남자들은 다 떠나고, 그 곁에는 이경화만 남았다.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고 병들어 누워 있는 바우덕이를 동냥을 하며 끼니를 잇게 하였고, 갖은 병수발을 다 하였다.
하루에도 몇번씩 선지피를 쏟으며 서서히 죽어 가는 바우덕이...떠 가는 흰구름을 보며 어디론가 가고 있을 패거리들을 그리워하며 지내는 나날을 이경화는 모두 지켜 보았다.
스물셋의 나이로 바우덕이가 죽자, 이경화는 생전의 기구했던 팔자를 씻어 버리라며 그녀의 무덤을 일부러 불당골 개울가에 묻었다. 바우덕이가 죽은 후, 놀자리가 없어진 안성 남사당패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그녀의 무덤을 돌보는 사람도 없었다.
3년 뒤, 가슴에 묻은 사랑을 찾아 다시 온 이경화는 무덤 앞 개울가에서 얼굴을 씻고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후일, 안성 남사당의 후배들이 바우덕이의 묘를 찾아 이 근처를 헤메이는데 , 한 무덤이 있어 이를 바우덕이의 묘로 추정하고, 곁으로 옮겨 지금의 묘를 만들었다는 얘기도 있고...또는 바우덕이를 기리기 위하여 이 근처에 가묘(假墓)를 썻다는 얘기도 있다.
청룡사 옆에 바우덕이의 사당이 있다. 그의 묘는 약 5분 거리에 있고...
안성지방의 민요에 바우덕이와 청룡사가 살아 있다.
안성청룡 바우덕이 소고(小鼓. 작은 북)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
안성청룡 바우덕이 바람 결에 잘도 떠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