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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성(理性)
1. 이성의 개념
그리스인에게 이성의 개념은 암시적인 것이면서도 명확한 것이었다. 로고스(Logos)라는 그리스어는 이성과 담론(dicours)을 동시에 의미한다. 그리고 이 로고스라는 용어 안에는 ‘한데 그러모으고 연결시킨다.’라는 관념이 있다. 이러한 연결의 개념이야말로 가장 기초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이란 항시 통일과 종합의 능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정신의 올바른 행로는 관념의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는데 있다. 플라톤적 의미의 이성은 근본적으로 거짓임에도 인간을 현혹시키는 허망한 감각적 인식에 대립되는 것으로서 정확한 사유능력을 의미한다.
-자클린 뤼스 「지식과 권력」예하 P.49 -
그러나 이성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은 본질적으로 데카르트에서 시작된다. 데카르트는 이성적 논리규칙을 모든 지식의 기초로 보는 이성론(理性論)의 전통을 세운 사람으로 평가된다. 이성의 본격적인 시대가 열리는 시점은 그의 「방법서설」(1637)에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방법서설」의 설명처럼 이성이란 ‘올바르게 판단하고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능력’인데 이는 ‘천성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균등하게 배분되어 있다.’ 이 명제는 현대적 ‘인식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었다. 이로써 자유롭게 이성을 발휘하면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는 이른바 ‘현대의 약속’이 그 철학적 뼈대를 드러냈다.
물론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대 그리스인들도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고 했을 때 동물과 자연적으로 구별되는 ‘속성’으로서의 이성은 일찍부터 인간실존의 특징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고대 그리스 시대를 ‘이성의 시대’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때의 이성은 지식인들이 힘써 연마해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특출한 재능’이자, ‘무술’처럼 갈고 닦아야 할 ‘덕(德)’이었으며, 결국에는 지식, 비지식, 인간ㆍ반인간을 차별 짓는 정신적인 근거였다.
데카르트가 말하는 이성은 ‘개개의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선천적으로 주어진 능력’이지만, 불행하게도 인간 모두가 그것을 정확하게 사용하는 것은 아닌 선천적 능력이다. 그에 의하면 이성이 유용하게 사용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방법(méthode)를 세워야 한다. 데카르트는 말한다. ‘우리들의 의견이 서로 다르고 갖가지인 것은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보다 이성을 더 많이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우리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생각을 해 나가거나, 우리가 동일한 것을 생각하지 않은 데에 기인한다. 무릇, 좋은 정신을 갖는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며, 오히려 보다 진보적인 것은 정신을 잘 응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방법서설」제 1 부-
즉, 이성은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성이 동일하지 않는 것은 단지 이성의 적용에 따른 문제일 뿐이다. 인간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서로 다른 차이는 방법에 따른 차이이지 결코 이성의 차이는 아닌 것이다.
2. 이성과 사회
인간의 이성(理性)과 관련한 논술은 다양한 각도에서 출제되었고, 또 출제될 수 있다. 지금까지는 주로 이성에 대한 반성적(反省的) 검토를 요구하는 논제들이 다수 출제되었다. ‘인간의 이성이 자연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 (서울대), ‘인간의 이성이 인간의 해방을 가져다주었는가?’(연세대), 그리고 ‘인간은 이성적 존재인가, 생물학적 존재인가?’ (이화여대) 등의 논제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
나아가 학생들은 ‘이성개념’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는 물론이고, 이성이 역사적으로 수행해 온 긍정적인 역할, 그리고 그 이면에 이성이 인간과 사회, 그리고 자연에 초래한 폐단 등에 대한 배경지식도 쌓아두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른바 ‘이성=진보’의 등식이 과연 옳은 것인지, 과거-현재-미래의 통시적인 관점에서 살펴 볼 필요도 있다. 다음의 기출문제를 통해서 이 문제에 대한 하나의 실제적인 사고를 해보자.
※ 다음 세 글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사고방식의 특성을 설명하고 그것이 20세기 한국사회와 한국인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쳐 왔으며 그 한계가 무엇인지 1800자 안팎으로 논술하시오. (99. 연세대 자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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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가장 어려운 증명에 도달하기 위해 기하학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아주 간단하고 쉬운 일련의 논증에 대해 성찰한 끝에, 인간이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와 유사한 논리적 방식으로 얻을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로 보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논증에 요구되는 순서를 신중히 따르기만 한다면, 감추어진 진리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어디에서부터 시작할 것인가를 찾는 데 별로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가장 간단하고 또 가장 알기 쉬운 것부터 시작해야 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전에 여러 학문에서 진리를 찾았던 사람들 가운데 수학자들만이 확실하고 분명한 추리와 논증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나도 수학자들이 출발한 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확신했다. <중략>
나는 가장 간단하고도 가장 일반적인 원리로부터 출발했으며, 내가 발견한 각각의 진리들은 다른 진리를 발견하기 위한 하나의 규칙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옛날에 내가 매우 어려운 것으로 여겼던 여러 난제를 해결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결국에 가서는 미해결의 문제가 어느 정도 풀릴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는데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 나는 주어진 문제에 하나의 해답만이 있으며, 누가 발견하든지 다른 모든 사람도 그것을 아는 인간의 정신이 발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발견했다고 확신할 것이다. 왜냐하면 올바른 절차를 따르고 또 우리가 탐구하고자 하는 것의 모든 여건을 정확하게 진술하는 방법이야말로 산술의 규칙에 최상의 확실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법이 내게 가장 만족스러웠던 것은 바로 그 방법을 통해서, 완벽하지는 않지만 내 능력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에 대해 이성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데카르트「방법서설」)
(나) 1830년대에 레옹 쉐포가 작성한 <파리 소년 감화원을 위한 규칙>은 다음과 같다.
제17조 재소자의 일과는 겨울에는 오전 6시, 여름에는 오전 5시에 시작한다. 노동시간은 계절에 관계없이 하루 9시간으로 하다. 하루 중 2시간은 교육에 충당한다. 노동과 일과는 겨울에는 오후 9시, 여름에는 오후 8시에 끝낸다.
제18조 기상. 첫 번째 북소리가 울리면, 재소자는 조용히 기상하여 옷을 입고, 간수는 독방의 문을 연다. 두 번째 북소리가 울리면, 재소자는 침상에서 내려와 침구를 정돈한다. 세 번째 북소리가 울리면 아침기도를 하는 성당에 가도록 정렬한다. 각 신호는 5분 간격으로 한다.
제19조 아침기도는 감화원 소속 신부가 주재하고, 기도 후에 도덕이나 종교에 관한 독송을 행한다. 이 일은 30분 이내에 마치도록 한다.
제20조 노동. 여름에는 5시 45분, 겨울에는 6시 45분에 재소자는 마당으로 나와 손과 얼굴을 씻고 빵 배급을 받는다. 뒤이어 즉시 작업장별로 정렬하여 일을 하러 나가야 하는데, 여름에는 6시, 겨울에는 7시에 시작해야 한다.
제21조 식사. 10시에 재소자는 노동을 중단하고 마당에서 손을 씻고 반별로 정렬하여 식당으로 간다. 점심식사 후 10시 40분까지를 휴식시간으로 한다.
제22조 학습. 10시 40분에 북소리가 울리면 정렬하여 반별로 교실로 들어간다. 일기, 쓰기, 그림그리기, 계산하기의 순서대로 한다.
제23조 12시 40분에 재소자는 반별로 교실을 나와 마당에서 휴식을 취한다. 12시 55분에 북소리가 울리면 작업장별로 다시 정렬한다.
제24조 1시에 재소자는 작업장에 도착해 있어야 한다. 노동은 4시까지 계속한다.
제25조 4시에 작업장을 나와 안마당으로 가서, 손을 씻고 식당에 가기 위해 반별로 정렬한다.
제26조 저녁식사 및 휴식은 5시까지로 하고, 재소자는 다시 작업장에 들어가야 한다.
제27조 여름에는 7시, 겨울에는 8시에 작업을 종료하고, 작업장에서 하루의 마지막 빵 배급을 받는다. 교훈적인 뜻이나 감화적인 내용을 담은 15분간의 독송을 재소자 1인 혹은 감시인 1인이 하고, 이어서 저녁기도에 들어간다.
제28조 여름에는 7시 반, 겨울에는 8시 반에 재소자는 마당에서 손을 씻고 복장 검사를 받은 뒤 독방 안에 도착해 있어야 한다. 첫 번째 북소리가 울리면 옷을 벗고, 두 번째 북소리가 울릴 때 침상에 들어가야 한다. 각 방의 문을 잠근 후 간수들은 질서와 침묵을 지키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복도를 순회한다.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다) 섬에 도착하고 10일쯤 지났을 때, 필기도구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의 경과를 알 수 없어서 노동일과 안식일의 구별조차 못하게 되지 않나 하는 걱정이 생겼다. 그래서 이런 일을 방지하려고, 커다란 나무 기둥에 주머니칼로 크게 “나는 1659년 9월 30일 이곳에 상륙했다.”라고 새기고, 그 나무기둥으로 커다란 십자가를 만들어 첫발을 디딘 해변에 세웠다. 이 나무기둥의 옆면에다 매일 V자 형의 눈금을 새기고 7일째 되는 눈금에는 나날의 눈금보다 두 배로 길게, 달의 처음 눈금은 다시 주의눈금보다 두 배로 길게 새겨 두었다. 이런 식의 달력, 즉 시간의 흐름을 요일, 달, 해에 맞추어 기록했던 것이다.
다음에 기록해 두고 싶은 것은, 배에서 옮겨 온 많은 물건들 중에 그다지 값진 것은 아니나 유용성에 있어서는 딴 물건들 못지않게 중요한 것들이 약간 있었다는 일이다. 그것은 펜ㆍ잉크ㆍ종이, 그리고 선장ㆍ항해사ㆍ포수ㆍ목수 등의 소지품이었던 약간의 작품과 자석 몇 개, 계측기, 나침반ㆍ망원경ㆍ해도ㆍ항해술에 관한 책 등이었는데, 그런 것들은 필요가 있건 없건 전부 한데 뭉쳐 싸서 따로 두었다. 또 영국에서 보낸 내 집속에서 딴 물건들과 함께 포장되어 있던 아주 고급스러운 성경책 세 권을 발견했다. 포르투갈어로 된 책도 몇 권인가 있었고, 또 그 외의 책들도 약간 있었다. 그것들은 전부 소중하게 챙겨 두었다. <중략>
전술한 대로 펜과 잉크 그리고 좆ㅇ이를 발견하자 나는 이것을 소중하게 사용했다. 지금부터 보여 주게 될 것이지만 잉크가 떨어질 때까지 나는 엄미랗게 모든 사물을 계속 기록했다. 그러나 잉크가 다 떨어지자 그것마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아무리 연구를 해 봐도 잉크를 만드는 일만은 불가능했던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그처럼 많은 물건을 끌어 모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갖추지 못한 것이 적지 않음을 알았다. 잉크의 결핍도 그 중의 한 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지만, 땅을 파거나 흙을 나르는 데 쓰는 삽ㆍ곡괭이 등과 바늘ㆍ실ㆍ속옷, 이런 것들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없어도 그럭저럭 견디어 나갈 만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연장이 부족했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해도 좀처럼 능률이 오르지 않았다. 나의 보잘 것 없는 울타리, 즉 주위를 둘러싼 오두막집을 완성하는 데만도 1년이란 세월이 걸렸으니까. 울타리에 쓴 나무는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최대의 것을 사용했는데, 이것을 숲속에서 베어 넘어뜨리고 알맞게 깎아서 집에까지 옮겨오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모른다. 어떤 때는 그 기둥감 한 개를 박는 데도 처음에는 무거운 나무를 썼으나, 나중에야 쇠지레 생각을 해내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을 사용해도 역시 기둥을 박는 일은 고되고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작업이 지겹다고 생각할 필요가 나에게 있었을까. 시간은 얼마든지 있는데, 그리고 나 자신이 예측한 범위에서도 이 작업이 끝나면 별달리 할 일도 없었던 것인데 식량을 구하러 섬 안을 찾아다니는 일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나는 이제 겨우 내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 내가 빠져 있는 이 현실에 대하여 좀 더 진지하게 생각을 해 보았다. 우선 지금 상황을 정리하여 펜으로 적어 보았다. 그것은 뒤를 따르는 자를 위한다기보다는-나의 후속자 같은 것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오히려 이것저것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로 인해서 괴롭기 짝이 없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 볼까 해서였다. 이성이 차차 우울을 눌러 주었기 때문에 될 수 있는 한 나 스스로 위안토록 노력하고, 자신의 상황을 더 나쁜 상황과 구별하는 하나의 기준을 삼고자, 나를 둘러싸고 있는 현상을 길(吉)과 흉(凶)의 두 가지로 나누어 대비해 보았다. 나는 그것을 극히 냉정하게, 그리고 회계장부에 있는 대차대조표처럼 내가 기쁘게 받아들이는 행운과 내가 당하고 있는 불행을 대조하는 식으로 써 본 것이다.<중략>
다음에는 내가 꼭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한 필수품, 특히 테이블과 의자를 만드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것은 테이블이나 의자 없이는 내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얼마 되지도 않는 즐거움조차 맛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을 쓴다든지 먹는다든지, 그 외 몇 가지 일들은 테이블 없이는 곤란하다는 걸 다 알고 있으리라.
그래서 일을 시작했던 것인데, 여기서 나는 다음과 같은 일도 말해 두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즉 이성이라는 것이 수학의 본질이요 원형이므로, 모든 일을 이성적으로 정리하고 조정하고 판단한다면 아무리 어렵고 복잡한 일이라도 끝내는 완수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지금까지 공작 기구를 손에 쥐어 본 일이 없었지만 그래도 세월이 흐르는 동안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일에 열중하며 연구에 이르렀다. 그것도 연장도 없이 때로는 손도끼만으로 오늘날까지 그 누구의 손에 의해서도 만들어진 일이 없을 것 같은 물건들을 수없이, 그리고 굉장한 노력을 기울여 만들어 냈다.
예를 들면 두터운 판자가 필요한 경우, 나무를 베어 넘어뜨려서 내 앞에 가로 눕혀 놓고 도끼로 양쪽을 필요로 하는 두께가 될 때까지 깎아 내고도 손도끼로 곱게 마무리하는 그런 방법을 썼다. 하긴 이런 방법을 쓰다 보니 나무 한 개로 판자 한 장 밖에는 만들지 못했지만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참을 도리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내 시간이나 노력은 아낄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쓰건 별로 문제될 일은 아니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우선 테이블과 의자를 만들었는데 이것에는 배에서 가져온 널빤지를 사용했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방법에 의해 널빤지를 만들어 그것을 포개서 폭 1피트 반의 선반으로 꾸민 뒤 동굴 한쪽 벽에 걸어 보았다. 나의 공자도구, 못, 쇠붙이 등 그 위에 얹고 흩어져 있던 물건들을 제각기 일정한 자리에 배치해서 필요한 때에 언제든지 손쉽게 찾아낼 수 있도록 했다. 또 벽에다가 못을 박아서 총을 걸어 놓고 그 밖에 걸 수 있는 것은 모두 걸어 놓았다.
고심한 결과 나의 동굴은, 보여 주지 못하는 것이 유감스럽기 그지없지만, 언뜻 훑어보건대 마치 필수품을 넣어 놓은 금고 같은 꼴이 되었다. 모든 물건들은 손쉽게 찾아 쓸 수 있도록 정리되어 있었고, 그리고 모든 필수품이 풍부하게 저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바라 볼 때마다 만족감과 즐거움을 느끼곤 했다.
매일의 작업에 관한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부터이다. (대니얼 디포 「로빈슨 크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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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서 데카르트는 수학에서 사용하는 추리나 논증의 방법으로 인간이 알고자 하는 모든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예컨대 기하학에서도 그러한 논증을 한다. 기하학의 증명은 이미 누구나 알 수 있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 공리(公理)로부터 아직 진리인가, 아닌가 의심스러운 어떤 정리(定理)를 추리하는 과정을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추리와 논증을 통해 주어진 문제는 단 ‘하나의 대답’만이 있을 뿐이라고 칸트는 말하고 있다.
(나)에는 파리 재소자(在所者)들의 일정(日程)이 제시되어 있다. 여기에는 아침 기상시간부터 시작하여 노동과 교육을 마치고 저녁에 취침에 들기까지의 일정이 빡빡하게 짜여 있다.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엄정한 시간의 구획과 절차라는 매커니즘일 것이다.
(다)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무인도에 혼자 남게 된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다. 제시문에는 주인공이 섬에 도착하여 달력을 만들고 집을 짓고 가재도구를 만드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주인공은 펜과 잉크, 그리고 종이에 유달리 집착을 하고 있음을 본다. 제시문에 근거해 보건대, 이 필기구는 글을 쓴다는 그 이상의 의미를 함의(含意)하고 있다. 그것은 기록을 통해서 이성적 판단을 가다듬어 간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주인공이 가재도구를 만드는 작업에서 물리적 도구나 힘의 부족을 수학적 이성을 통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대목도 눈여겨 볼만한다.
세 가지 제시문에는 이성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의 모습과 그것에 기반하고 있는 사회현상으로서의 합리주의가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다. 즉, (가)의 「방법서설」에서는 이성개념이 (나)에서는 사회제도로서의 합리주의로, 그리도 (다)에서는 인간은 결국 사회를 떠나서도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이성주의’가 한국사회와 한국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쳐왔는가 하는 문제는 그 실마리를 주어진 제시문에서 찾아 논의되어야 한다.
예컨대 (가)의 이성주의가 (나)에서와 같이 인간을 구속하는 획일적인 사회제도를 마련했다는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의 주인공이 무인도에서도 집과 가재도구 등 문화와 제도를 형성해 간다는 사실에 착안할 수 있다. 결국 인간은 이성적 존재자로서의 삶을 떠나 살 수 없음을 전제로 논의를 펼칠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초엽부터 한국은 이식문화(移植文化)라는 파행적인 방법으로 서구의 학문을 배우고 그 제도를 받아들였다. 특히 우리의 지식인들은 서구의 ‘진짜이론’을 추수하기에 급급했고 일본으로 혹은 바다 건너 ‘종주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칸트주의자가 되어 돌아왔으며, 그럴 형편이 못되는 지식인들은 ‘현해탄 컴플렉스’에 빠지거나 ‘엽전’의 처지를 자괴(自愧)해야 했다. (오늘날 한 해외 유학생의 고백, ‘오랜 외국 생활을 끝내고 오는 비행기 안에서 인식에 바쳐진 삶이 어떠한 것인지, 언어란 왜 있는지를 일깨워 준 독일어, 독일 지성인 문학의 결별이 서러워 몹시 울었다.’ <조혜정, 「글 읽기와 삶 읽기」>는 말도 이전 지식인들의 내면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어쨌든 우리의 지식인들은 서구의 이성적ㆍ합리적 학문과 사고를 받아들였고, 그것은 20C이후 한국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문학 작품에서부터 나타났다. 장편 「부정」(1917)의 대단원 ‘삼랑진 수해’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자연의 폭력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벌벌 떨고만 있는 수해민들을 보며, 이형식은 세 처녀(선형, 영채, 병욱)를 앉혀놓고 ‘지진이 날 듯’ 부르짖지 않았던가? ‘저들을 어떻게 구해야 할까요? 과학! 과학!’ 그만큼 과학 [이성]은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었고, 따라서 (가) 제시문에 나오는 논증과 추리라는 이성을 배워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효과는 1970년대 ‘한강의 기적’으로 결실을 거두었다. ‘교육입국(敎育立國)’, ‘기술입국(技術立國)’이라는 슬로건은 서구적 이성의 동곡이음(同曲異音)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서구적 이성이 한국사회와 한국인에게 긍정적인 결과만 가져 온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서구적 이성을 받아들임으로써 동양적 사고의 덕목(德目)을 희생해야 했다는 점에 있다. (가)에 나타난 것처럼 서구적 이성은 ‘주어진 문제에 대한 하나의 해답’만을 요구한다. 이성은 수학적 도식 안에 갇힌 것이며, 동양적 사고 특유의 퍼지(puzzy: '1'아니면 ‘2’ 라는 이항 대립이 아닌 유동적인)한 사고방식을 잃게 했다. 그것은 사고의 경직성과 인간관계의냉혹성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고 했을 때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제 인간 존재의 주인은 신이 아니라 바로 이성적으로 사유하는 그 자신이다. 따라서 인간은 인간을 구속하는 모든 불분명한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모든 것에 자신을 관철해야 한다. 인간은 세계의 주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성적 존재자인 인간은 다음과 같은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때가 왔다. 즉, ‘이제부터 우리는 자기의유일한 존재만을 확신하는 이성적이기만 한 자아가 아니라 통째로 위협받는 종(種)으로서 인류 전체의 생명이 자기 활동의 원천임을 자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은 더 이상 고립적이고 자아 중심적인 욕망에 포로가 된 세계의 주인이어서는 안 된다. <나는 더불어 산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발상이 필요할 때이다.’
나무칼 차고 ‘쑥대머리’를 부르던 춘향이가 갇힌 감옥에 익숙했던 한국인들에게 (나)에 나타난 파리 소년감화원의 규칙적인 하루는 어쩌면 경이롭고 흠모할 만한 대상이었는지 모른다. 사실 우리는 해방 후 파리 소년감화원에 상응하는 서구의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였다. 프랑스의 경우도 이른바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 : 구체제, 프랑스혁명 전의 절대 군주제)시절에는 춘향이가 갇힌 감옥과 그 신체형(身體刑)이상의 ‘야만적인’ 제도를 갖고 있긴 했다.
(나)제시문은 본래는 ‘감옥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다. 여기에서 푸코는 국가권력의 가장 중요한 기구이자 장치로서의 감옥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프랑스에 있어서의 범법자에 대한 처벌양식의 변화에서 글을 시작하고 있다. 그것은, 앙시앵 레짐 시대의 ‘사지를 절단’라는 형벌로부터 18세기 후반의 이른바 인간적인 개량주의자들이 고안한 합리적인 법적제재로의 변화를 말한다. 그러나, 푸코는 감옥이라는 권력의 처벌수단이 어떻게 변모해 왔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외형적으로 감옥이 현대화되고, 형벌이 완화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죄수에 대한 권력의 인간적 처벌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권력의 전략이 바뀐 현상일 뿐이다.
이 논제는 감옥의 역사나 정치권력의 유지수단으로서의 감옥에 대한 논의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논제는 이성주의적 사고방식과 여기에 기반하고 있는 제도의 문제라는 논점에 관한 것이다. (나)의 제시문에서 범법자는 하나의 사물처럼 대상화되어 있다. 격리 수용된 감옥에서 엄격한 일과시간표에 따라 움직이고 끊임없이 감시받는 죄수들은 자동인형처럼 메커니즘의 육체가 되어 길들여져 있다. 이 감옥의 일과가 계산적인 이성과 합리주의의 산물이라면, 이러한 제도가 사회전반의 집단으로 확산될 것임을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즉, 합리화라는 미명하에 사회구성원들은 공간적으로 격리될 뿐만 아니라, 개인의 신체에는 시간의 의미가 주입되어, 개인의 능력이 최대한 효과적이 되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현대사회에는 이성적 사고의 부산물인 관료제라는 조직이 있다. 관료제란 ‘모든 행위의 연속이 조직체의 목표에 기능적으로 연관되도록 명백히 규정된 활동 유형을 지닌, 공식적ㆍ합리적으로 조직된 사회구조’이다. 관료제는 현대사회에서 거대해진 각 조직의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조직 내부에 상하(上下)의 명확한 지휘계통과 그 지휘계통에 따른 조직성원 각자의 지위와 역할, 권한과 책임의 한계를 분명하게 규정한 계서적(階序的)인 피라미드(pyramid)형의 조직이다.
이러한 관료제는 근대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 왔고, 특히 개발도상국의 경우에는 관료제가 근대화의 필연적인 요소로 인식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관료제는 이른바 ‘관료주의’라는 역기능을 낳았다. 형식주의ㆍ획일주의ㆍ책임전가ㆍ독선적 권위주의ㆍ규칙만능주의ㆍ선례주의(先例主義)ㆍ분파주의ㆍ번문욕례(繁文縟禮, red-tape :번거로운 절차와 과정)등 한 마디로 비인간화된 병리현상(病理現象)을 드러내게 되었다.
관료제는 좀 더 포괄적인 현상으로서 인간소외를 초래했다고 볼 수 있다. 조직의 효율성을 위한 규칙과 절차를 중시하여 업무의분화가 세밀해지면, 성원 개인들은 자신이 하는 일과 자신이 속한 조직체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소외감을 느낀다. 즉 인간이 업무를 계획하고 이끌어가는 주체이기보다는 주어진 규칙과 절차만 지키면 되는 객체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실감할 수밖에 없는 (다)제시문을 볼 때, 사회를 살아감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합리적인 제도 자체를 거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작은 정부’라는 말이 있다. 필요 이상으로 비대해진 조직을 구조적으로 축소조정하고, 제도에 대한 운영의 묘(妙)를 살리는 것이, 제도가 인간에게 주는 폐단을 최소화하는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에 이르러 인간의 이성에 대해서만큼 찬사와 단죄가 교차한 것은 없다고 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이성(理性)’이라는 개념과 관련된 논제를 통해 조금은 알 수 있는 것처럼, 이성은 인간사회에 빛과 어둠의 양면적인 영향을 미쳐 왔다. 예컨대 장 프랑수아 료타르가 ‘이성=폭력’을 부르짖는 데 대해 위르겐 하버마스는 비합리주의와 신비주의야말로 폭력의 주범이라며 기술적ㆍ계산적 논쟁에 대해서도 논술을 통해 어느 한 쪽의 입장을 지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3. 이성과 자연
‘97 서울대 논술모의고사는 독일의 철학자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의 「인간의 소명」에서 발췌한 제시문으로 출제되었는데, 여기에는 ‘자연에 대해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방식’의 하나가 서술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인간의 이성이 자연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에 대한해석으로부터 논의를 전개할 수 있는 논제이다. 다음 그 내용을 살펴보자.
<문제>
아래의 텍스트는 독일 철학자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의 저서「인간의 소명」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이 글은 자연에 대해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방식의 하나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텍스트를 잘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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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1) 노동자가 일을 마치고 자신의 피땀 어린 노고의 결실들이 계속 영속되기를 기대하려 할 때, 적개심을 품은 듯한 날씨가 수년에 걸쳐 신중히 마련해 온 것을 한순간에 파괴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 결과 부지런하고 사려 깊은 그 사람을, 그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기아와 빈곤 속에 내맡겨 버리는 일이 여전히 가끔 일어난다.
(2)홍수와 태풍과 화산이 전 국토를 피폐화시키고, 이성적인 정신의 숱한 각인을 담고 있는 작품들을 그 제작자와 함께 죽음과 파괴의 야만적인 혼란 속으로 휘몰라 버리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아직도 질병은 인간들을 때가 되지 않았는데도 무덤으로 낚아채 가고, 한창 기운이 왕성할 나이의 젊은이들과 어린 아이들 - 어린 아이의 생명은 공포 없이, 흔적 없이 사라져 가고 있다 - 을 무덤 속으로 몰아넣는다.
(3) 여전히 전염병은 번창하는 나라들을 휩쓸고 지나가, 소수의 남은 사람들을 고아로 만들어 버리고, 친숙해진 동료들의 보좌마저 앗아가 버려 홀로 남도록 만들어 버린다. 전염병은 인간의 피땀으로 일구어 놓은 땅을 미개지로 황폐화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못된 짓거리를 다 하는 것 같다.
(4) 사태는 이렇다. 그러나 언제나 이런 상태로 남아 있을 수는 없다. 이성의 각인을 지니고 있는 어떤 작품도, 그리고 이성의 위력을 확장시키기 위해 시도된 어떤 작품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냥 그렇게 없어져 버릴 수는 없다.
(5) 예기치 않게 찾아드는 자연의 폭력이 이성에게 입히고 있는 그 희생은 적어도 자연의 폭력을 완화시키고 화해시켜 최대한도로 줄여야 한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해를 끼치고 있는 자연의 힘을 항상 피해를 주는 차원에만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힘은 그 실력 행사에서 스스로의 자제력을 원래부터 규정받고 있지 않지만, 이제부터 그것은 자신의 힘을 통해 영원히 소멸되도록 해야 한다.
(6) 인간의 능력을 무력하게 무(無) 속으로 사라져 버리게 하는 자연적 폭력들, 즉 황폐화시키는 허리케인들, 지진들 그리고 화산들은 다른 것이 아니고 물질들의 마지막 발악이다. 그것들은 자신들의 충동에 따라 멋대로 행동한다. 그것들은 다른 것이 아니고 우리의 지구가 이제 비로소 스스로를 완성시키고 있는 그 마지막 몸부림침이다. 이 저항은 점차 약해질 것이고 마침내는 기진해 버릴 것이다. 왜냐하면 법칙에 따른 진행과정에서 그 힘을 충전시켜 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7) 지구의 형성은 마침내 완료되어야 하며, 우리에게 규정된 주거도 완성되어야 한다. 자연은 점차 그 규칙적인 발걸음을 확실하게 계산해 내어 숫자로 표기할 수 있는 정도까지 이르러야 하며, 자신의 힘이 자연의 힘을 지배하도록 규정되어 있는 능력 - 즉 인간의 능력 - 과 일정한 관계 속에 견지되도록 해야 한다.
(8) 어느 정도 그러한 관계에 와 있는지, 그리고 합목적적인 자연의 형성이 이미 확고한 지반을 획득했는지 등은, 인간의 작품 자체가 그 작품의 단적인 존립과 그것의 제작자의 의도와는 무관한 그 작품의 영향력을 통해 다시 자연을 장악하여 자연 속에 생동하는 새로운 원칙을 정립해 놓는 데에 달려있다.
(9) 영원한 숲, 황야, 늪 등과 같은 땅을 개간해야 하고, 대기권을 살려야 하며 생기롭게 해줘야 한다. 정돈된 다양한 경작지는 생명력과 결실력을 온 세상에 확산시켜 주고, 태양은 자신의 가장 생동력 있는 광선을 건강하고, 근면하고, 예술감이 풍부한 민족이 숨 쉬고 있는 그 대기 안에 가득 채워 넣어 준다.
(10) 학문은 처음엔 위기에 몰리더라도 나중에는 깨어나서 좀 더 신중하게, 그리고 여유를 갖고 평온하게 요지부동의 자연법칙들로 파고들어야 하며, 이 자연의 그 모든 폭력을 개괄하고, 그 가능한 전개를 계산해 내야 한다. 즉 새로운 자연이 개념으로 형성되어 나와야 하고 생동적이고 활동적인 자연에 가깝게 자신을 밀착시켜, 그 발꿈치를 뒤좇아야 한다.
(11) 그리고 이성이 자연으로부터 어렵게 획득해 낸 모든 인식은 시간의 경과와 함께 보존되어야 하며, 우리 인류 공동의 지성을 위한 새로운 인식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 이렇듯 우리는 자연을 갈수록 더욱더 간파할 수 있어야 하며, 자연의 가장 신비스러운 내면에 이르기까지 갈수록 더욱더 투명하게 만들어야 한다.
(12) 발견을 통해 무장하고 깨우친 인간의 힘이 어려움 없이 이 자연을 지배해야 하며, 한번 이룩한 정복은 물론 계속 견지돼야 한다. 또한 점차 인간은 노동을 해야 할 필요가 갈수록 줄어들어야 하며, 그래서 인간의 육체가 자신의 발전과 형성과 건강을 위해 필요한 만큼만 노동해야 한다. 노동은 이제 더 이상 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성적인 존재는 짐꾼이 되도록 규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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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음
1) 위의 글을 600자 내외로 요약하시오.
2) 저자가 주장하는 논지의 귀결을 간략하게 추론하고, 그 주장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논술문의 형식을 갖추어 1,200자 내외로 정리하시오.
피히테는 독일 관념론의 거봉으로서, 칸트를 이어 받아 헤겔에의 길을 연 철학자이다. 특히 그는, 자신의 저서 「모든 지식학의 기초」(1794)를 중심으로 인간의 모든 인식을 기초지우려고 하는 ‘지식학’의 체계를 제시하고 있다.
지식학은 인류가 그 자유를 자각해가는 역사를 철학적으로 재구성한다. 피히테는 지식학을 “인간정신의 실용적 역사”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그의 지식학의 구성에는 명백한 난점이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자연은 늘 부정되고 극복되어야 할 장애물에 불과하고, 인간과 자연은 영원히 대립한 채 있다. 제시문으로 주어진 「인간의 소명」(1800)에는 이러한 그의 관념이 잘 나타나 있다. 자연재해와 같은 자연의 폭력이 인간을 기아와 빈곤 속으로 내몬다. 이때 인간의 이성은 ‘요지부동의 자연법칙’을 파고들어 자연의 가능한 전개를 계산해 내서 어려움 없이 이 자연을 지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이성주의와 자연관은 물론 데카르트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오는 이성의 역사라는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논제는 저자의 주장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정리하라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이 오늘날 과학의 엄청난 진보를 가져와 준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갈릴레이(1564~1642)는 이성적 추리를 통해 ‘낙하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과학의 진보는 인간에게 유례없는 삶의 자유와 복지를 가져다주었고 그것이 또한 역사의 진보로 이해되기도 했다. 그러나 20C에 들어서면서 이성과 과학은 그 폐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자연정복에 따른 생태계 파괴는 물론, 핵무기가 개발되고 전쟁이 자행되는 등 인간해방의 근거였던 이성과 과학이 이른바 ‘광기의 도구’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인간은 자기의 유일한 존재만을 확신하는 이성적인 자아로서 자연을 지배하려 했다. 이때 이성은 자연을 착취하는 기술로 바뀐다. 경제발전의 과정에서 우리나라가 생태계 파괴라는 반대급부를 받은 사실도, 이 경우에 다름 아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성과 과학 그 자체의 덕목(德目)이 열어갈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것은 독단적인 이성의 의미를, 현대라는 상황에 맞게 재정립하는 데서부터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더 이상 고립적이고 자아중심적인 욕망에 포로가 된 ‘세계의 주인’이 아니라 ‘그 이성의 씀씀이가 훨씬 성숙한 책임 있는 이웃’으로서 서로를 마주하는 도덕적 주체여야 한다.” (홍윤기)는 말을 새겨 들을만하다.
※ 참고한 책
ㆍ자클린 뤼스 (황수원 역) 「지식과 권력」예하
ㆍ조혜정 「글 읽기와 삶 일기」
ㆍ홍윤기 「이성은 계속 흔들릴 것인가?」 중앙일보
ㆍ미셀 푸고(오생근 역) 「감시와 처벌」나남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