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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강해1🍚Live였던(막10 41 45 유튜브 교회 #활공교회, 설교원본-BAND: 활공교회)
말씀:
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10:4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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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467 높으신 주께서 낮아지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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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맥읽기:
주를 본받으라
1.그리스도의 섬김을 배워야 함
(요13 1 17
12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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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22 2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골3 24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 주품이 주:
주님은 우리를 보내시는 분으로 근본 우리보다 높으신 분임을 증명 하십니다. 하지만 주님은 제자들을 먹이는 섬기는 자로 오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를 지키는 자에게는 상급이 있다고 합니다. 섬김의 본을 보이심으로 우리는 세상에 아무리 높은 자가 되어도 주님의 모습과 같이 한결같이 이웃을 섬겨야 할 본을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을 섬기는 거와 같으며 우리는 주위 작은 자를 주님과 같이 섬기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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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그리스도의 겸손을 배워야 함
(마11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빌2 5 11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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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4 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주품이 주:
주님의 가르침은 온유와 겸손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받으려는데 성도에게 포학하고 희롱하고 무시하는 목회자라면 떠나야 합니다. 악령이 들었거나 무언가 자기 유익의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목회자라면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의 언어가 항상 입에 달리어야 합니다. 이러한 기운은 자기에게 기운이 돌아 오는 것입니다. 남을 주님 대하둣하면 남이 나에게 주님 대하둣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준 기운은 반드시 똑같이 돌아 오기 마련입니다.
남을 무고하게 험담을 하였으면 언젠간 남이 나에게 무고하게 험담을 하고 다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입을 조심해야 합니다. 차라리 침묵하면 더 나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 이는 저도 실제 경험한 실언이었습니다. 그래서 침묵은 금이라는 교훈이 떠도는 것입니다. 무언 중에라도 남을 축복하고 칭찬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언젠간 나에게 도움으로 감사의 일들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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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그리스도의 희생을 배워야 함
(롬5 6 8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고후5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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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9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히10 19 22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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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품이 주:
섬김과 겸손의 완성은 죽음을 통한 희생인 것을 봅니다. 죽음에는 죄 사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살과 같은 무모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실제로도 일어난 일인데 바다에 죽어가는 두 청년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한 명만이 살릴 수 있는 구명기구를 아들에게 주기를 원하였으나 아들은 소리쳤다고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으니 죽어서 천국 가니 걱정 말고 아직 하나님을 안 믿는 친구에게 주라는 것입니다. 그 친구는 받아 살았고 안 믿고 죽어 죄로 인해 죽을 그 친구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신실한 성도의 길 죄사함의 길을 갔다고 합니다.
나의 생명을 남을 위해 희생하며 죄사함의 샘이 되시는 주님을 소개하는 것 이것이 섬김과 겸손의 완성인 순교인 것입니다. 떠오르는 토마스 선교사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는 병인박해의 대학살을 알면서도 죽음을 각오하고 조선을 밟았던 것입니다. 그를 죽인 박춘권의 고백을 들어 봅시다.
‘내가 서양 사람을 여럿 죽였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점이 있다. 내가 그를 죽이려고 하자 그는 두 손을 마주 잡고 무슨 말을 한 후 붉은 천이 덮인 책을 가지고 웃으면서 내게 받으라고 권했다. 내가 그를 죽이기는 했지만, 이 책은 받지 않을 수가 없어서 받아 왔다’
살인마 망나니 박춘권은 죄사함 받고 평안안주교회의 장로가 되어 전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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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보기:
권세를 부리는:
katexousiavzw(2715, 카텍수시아조)
~에 대해 권세를 부리다, *압제하다.
1. 헬라어 용법.
동사 카텍수시아조는 카타(katav, 2596)와 엑수시아조(ejxousiavzw, 1850: 권세를 부리다)에서 유래했으며, '~에 대하여 권세를 행사하다, 직권을 남용하다, 압제하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세속헬라어 문헌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 주품이 주:
압제하다 자체가 직권을 남용한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창조주 이신데 창조주께서 죽음으로서 겸손과 섬김의 완성을 실천 하시었는데 서로 인간끼리 누가 누구를 압제 한다는 것은 바로 직권을 남용한 것입니다. 쉽게 보이는 모든 압제는 우리가 모두 사양해야 겠습니다. 하지만 해석의 차이로 생기는 압제는 우리가 겸손과 이해와 인내함으로 화를 면해야 하는 것입니다. 최근 제게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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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이 그 길을 못 찾아 운전하시는 어머님은 제게 대학생 정도 되는 딸을 남기고 자신은 집을 가셨습니다. 저는 어머님 고생하시는 것이 안타까와 따님에게 담에 오실 때 고생 마시라고 따님에게 길을 알려 드리고 중간에 종착지도 모르시기에 아직 내리시면 안된다고 친절히 설명을 드리었습니다. 저는 섬김이라 생각하고 교대 하고 쉬고 있었습니다. 근데 10분 뒤 그 따님이 호텔에 저를 신고 하였습니다. 제게 훈시를 하는 것이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었습니다.
상황이 우수운 꼴이 되었습니다. 그 어머니까지 오셔서 감히 우리 딸에게 훈시를 하다니 이런 대호텔에서 저런 운전기사가 다 있냐고 호텔 지배인에게 화를 내셨다고 합니다. 나는 길을 모르는 분에게 안내를 하고 중간에 커다란 여행가방을 들고 손님이 높은데 걸어 가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기에 내리면 안된다고 더 타고 가셔야 한다고 안내 했는데 선의를 악의로 바꾸어 온 호텔에 소문 내는 것이 매우 답답한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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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입장은 고객이라고 갑질을 당하였고 고객은 훈시를 통해 자신이 압제를 당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애매한 상황에서는 인내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서로 더 나아가서는 서로 손해만 보기 때문입니다. 사법적 차원에서는 고객의 갑질로 업무방해 죄가 되고 호텔의 입장에서는 쓸데없는 소문이나 낸다고 호텔에서 사원에게 징계를 내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저는 그냥 다 당하고 해명 차원에서만 끝내고 이해를 받았습니다.
오전에 일하다 쓰러져 심장마비로 죽을 뻔한 어떤 분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일이 아침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남의 죽을 목숨을 살리는 사람이 손님에게 악의로 대한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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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는 자:
diavkono"(1249, 디아코노스)
하인, 고용인 servant, 집사 deacon.
1. 일반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디아코노스(Hdt. 이래)는 '주인의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 종, (식사) 시중드는 사람' 후에 제의적 식사와 관련해서 그러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비종교적 세계에서 디아코노스는 사자, 청지기, 빵굽는 사람, 조타수, 그리고 심지어 정치가들 같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켜 사용된 것 같다. 그렇지만 요세푸스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디아코노스라고 부르며, 에픽테투스도 견유학파의 사람들을 하나님의 종으로 본다.
- 주품이 주:
집사의 직분이라 함은 성도보다 높은 권위자 같이 생각하는 것이 저나 여러분의 생각입니다. 하지만 집사는 섬기는 자, 하인, 고용인이라는 것이 원어의 의미입니다. 집사는 하인입니다. 일반성도는 교회를 섬길 자격이 주어지지 않지만 집사는 섬기는 자격이 주어 진다는 것입니다. 즉, 집사는 더 섬기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지 성도를 압제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결국 교회나 회사나 지휘가 올라 갈수록 더욱 이웃들의 섬기는 자리가 되어야 하지 남을 무시하는 자리가 아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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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dou'lo"(1401, 둘로스)
노예, 종 slave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둘로스는 데오(devw: 묶다)에서, 아니면 델로(delw: 올가미에 걸다, 생포하다)에서 유래했으며(참조: Vanicek p.322), '노예, 종'을 의미한다. 둘로스에는 자기 자신이 자율을 파기하고 다른 사람의 뜻에 자기의 뜻을 복종시킨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둘로스는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의 의지에 내맡긴 자로서, 자기 자신에 속해 있지 아니하고 어떤 다른 사람에 속해 있는 것이다. 대체로 노예의 삶은 집안일이나 공무에서 노동과 봉사가 강요되는 삶이었다.
- 주품이 주:
주님은 종이 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근데 이 종은 감이 잘 오지 않지만 쉽게 말해 노예라는 것입니다. 나의 일거수 일투족이 주인의 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 노예의 정신으로 일을 할때도 고객이 오해를 하여도 다 받아주고 사과하고 끝내는 것이 노예나 다름이 없이 없습니다. 하지만 고객도 노예와 같이 사는 것이 주님의 뜻일 것입니다. 창조주께서 노예같이 사셨는데 고객이라고 주인같이 사는 것은 하나님 머리 꼭대기에 오르는 사탄적인 행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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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다:
diakonevw(1247, 디아코네오)
섬기다, 봉사하다.
우리가 봉사나 섬기는 것에 관하여 말할 때 그것은 ***자발적으로 또는 의무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행한 일과 그런 도움을 받은 사람에게 생길 이익을 의미한다. 봉사라고 해서 보수(Reward)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섬기는 행위는 지배하는 것과 대조가 된다.
성실한 봉사는 교만과는 대조적으로 낮은 자가 겸손한 자세로 섬기는 것이다. 섬기는 자는 종속적 위치에 있으며, 그의 자유는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죄의 지배와 율법에서 자유한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므로서 참된 자유를 발견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봉사(섬김)하다"에 대해 사용되는 단어들의 개념은 때때로 구별하기 어렵지만 각각 그 기본 강조점이 있다. 간단히 소개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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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류오(douleuvw, 1398)는 복종, 예속을 강조하는 것으로, '노예로 섬기다'를 의미한다.
* 데라퓨오(qerapeuvw, 2323)는 기꺼이 섬기는 것을 강조하는데 그것에 의해 존경과 관심을 표현한다(특별히 신을 향하여).
* 라트류오(latreuvw, 3000)는 '삯을 위해 봉사하다'를 의미한다.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신앙적, 제의적 의무들에 대해 사용되었다.
* 레이투르레오(leitourgevw, 3008)는 '공무에 봉사하다'를 뜻하며, 70인역본에서는 성전에서 봉사를, 기독교회에서는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 휘페레테오(uJphretevw, 5256)는 '노나 키를 잡다'라는 기본 의미를 지니며, 특히 봉사가 주인과 관계된다. 그 명사 휘페레테스는 때때로 '노잡이, 조수'를 의미한다.)
이런 단어들과는 달리, ***디아코네오는 매우 인격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행하는 봉사라는 특별한 자질을 가진다. 휘페레테오와 가장 가깝지만, 디아코네오에는 사랑의 봉사라는 개념이 더욱 강하다(Beyer, TDNT).
디아코네오는 일반적으로 '섬기다, 봉사하다, 지원하다, 집사로 섬기다'를 의미하며, 개역 한글판에는 '수종들다, 섬기다, 일하다, 돕다, 맡다, 집사의 직분을 하다, 공양하다'라는 의미로 번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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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품이 주:
여러 가지 섬김의 예를 들었는데 다 기억할 필요는 없고 우리 크리스찬의 섬김이라는 것은 구별된 섬김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섬김이요 자발적이요 의무적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어디서나 우리는 상하 관계에서도 서로 섬김이 있고 고객과 직원의 관계에서도 항상 서로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상점에 물품을 제공하시는 분도 동등하게 섬김이고 그분들께 물질을 보상하는 것도 동등한 섬김입니다.
그러기에 그 직원에게도 밝게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마지막에 감사합니다 하고 서로 인사는 것입니다. 호텔도 마찬가지입니다. 호텔 직원이 자발적 서비스로 고객을 섬기고 고객도 그들의 서비스에 환대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그 서비스에 감사하고 물질로 서로 섬기는 것입니다. 누구든 상대를 구박하고 압제하는 모습은 갑질에 지나지 않고 하나님보다 높아지려는 악하고 교만한 것입니다. 우리는 더 나아가서는 대속이란 죄용서의 단계에 이르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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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속물:
luvtron(3083, 뤼트론)
석방금 price of release, 대속물 ransom, 속전 ransom price.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뤼트론은 뤼오(3089)와 접미어 - 트론(tron)으로 형성된 단어이며, 몸 값을 지불하여 해방시키는 것, 즉 '속죄 방법, 또는 속전'을 의미한다. 접미어 - 트론은 '이 동사의 행동을 성취시키는 도구나 방법, 즉 석방의 방법' means of releasing, 또는 '대가'payment 즉 '속전' price of releasing을 나타낸다(D. Hill, Greek).
뤼트론은 전쟁포로를 되찾기 위해, 노예를 석방이나 해방시키기 위해, 채무를 반제하기 위해, 또는 드물긴 하지만 신에게 진 빛을 갚기 위해 제의적으로 지불된 돈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속리, 보상'이란 의미로 나타난다(참조: W. Mundle; F. Buchsel).
-주품이 주:
예수님 섬김의 클라이막스 절정에 마지막은 용서라는 것입니다. 내가 오해를 받아 모욕을 받아도 그들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내가 오해해서 저를 나쁜 자라 착각하여도 그를 용서하고 끝내는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 모든 일에는 우리를 지켜 보시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용서의 주, 대속의 주님을 향해 우리가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할 때 우리의 오해로 얼룩져진, 죄로 얼룩져진 삶은 씻겨 빛을 발하게 됩니다. 아멘!
구절강해는 다음 주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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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만물을 죽기까지 섬기신 아들되신 하나님 앞에 누구든 세상에 서로를 섬기지 않을 자가 없어야 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죽기까지 섬기 셨는데 나는 남을 섬기지 않고 대접만 받으려는 것은 하나님 보다 높아지려는 사단의 속셈일 뿐입니다. 직원이든 고객이든 상점의 직원이든 이용하는 손님이든 모두가 하나님 안에 다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모두가 서로를 섬김으로 더욱 아름다운 지구가 되도록 주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