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 현장을 찾아서>
제목: 세상에 열린 기도학교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세례를 받고,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 온 신자들조차도 자신의 신앙에 대한 확신이나 체험 없이 ‘마음의 평화’를 위해 습관처럼 교회에 ‘출석’하는 경우가 많다. 예비신자 교리교육 때 한 번 받은 교육으로 나머지 신앙생활 전체를 유지해 나가고, 본당에서 해마다 열리는 특강에도 열심히 참여해 보지만 별 감흥이 일어나지 않는다. 바쁘고 고단한 생활은 그대로이고, 여전히 사랑보다는 경쟁과 미움이 앞선다. 이렇게 살다 보면 어느새 마음 안에 깊은 공허감이 찾아온다. 하느님이 어디 계신지, 나에게 무얼 바라시는 건지 막막해 지는 때, 하느님을 찾아 길을 나서게 된다. 이러한 길에서 우리 영혼의 목마름을 채워 줄 ‘오아시스’를 만나게 된다면 얼마나 반가울까. 영적 휴식과 새로운 활력과 힘을 얻고자 수도회를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 수도회들은 또한 이러한 신자들의 영적 갈망에 부응하고자 수도회의 문을 열고 신자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이 가운데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을 찾아가 보았다.
기도하며 기도를 배우다
2009년이면 한국 진출 100주년을 맞는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은 최근 들어 공동체의 영적 자산과 생활을 신자들과 함께 나눌 목적으로 수도회의 문을 더욱 활짝 열어젖혔다. 이전에는 성직자와 수도자들만 이용할 수 있었던 수도원 내 ‘손님의 집’을 일반 신자들에게도 개방하면서 주중, 주말 가릴 것 없이 개인, 가족, 소그룹 단위로 자유롭게 피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수도원 공동체의 모든 전례와 노동에 직간접으로 참여할 수 있으며, 면담과 고해성사가 가능하다. 또한 이곳 수도자들은 스테인드글라스와 금속 공예, 출판, 농사, (목공예, 피정의 집 운영), 독일식 소시지를 만드는 등의 일(일 등을)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노동 현장을 직접 견학하거나 체험해 볼 수 있다. 수도자들이 직접 마련하여 주는 식사는 수도원 객실 식당에서 다른 피정자들과 함께 하게 되는데, 이곳의 특제품인 독일식 소시지(일명 순대)와 ‘발바닥 치즈’, 직접 짠 생우유를 맛볼 수 있어 더욱 즐겁다. 또한 ‘손님의 집’에는 기도실과 응접실, 담화실 등이 마련되어 있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일상의 번잡함에서 해방되어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는 수도 규칙을 따라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수도회의 분위기에 잠기는 것만으로도 영적인 쉼을 체험할 수 있다. 미사와 하루 다섯 차례 거행되는 시간 전례에서 신자들은 방관자로서가 아니라 같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수도 공동체와 기도와 미사를 함께 봉헌한다. 처음 수도회를 찾는 이들은 먼저 미사 시간 행렬을 지어 줄줄이 입장하는 수사들의 모습을 보며, 이렇게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하느님께 봉헌하고 함께 공동생활을 하고 있다는 데 깜짝 놀란다. 그리고 아름다운 그레고리오 성가와 수도원 담장 밖 세상을 위해 바쳐지는 기도는 함께하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기도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이론적으로 가르치지 않더라도 공동체와 함께 기도하며 자연스레 기도하는 법을 익히게 된다.
수도회에 청년들이 모이다
최근 들어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에 나타난 새로운 현상은 수도원을 찾는 청년들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매월 셋째 주 주말 1박 2일간의 ‘젊은이들을 위한 기도 모임’과 매월 마지막 주 오후 3시 거행되는 ‘젊은이들을 위한 열린 미사’ 그리고 여름 방학과 겨울 방학에 두 차례씩 열리는 ‘수도 생활 체험 학교’에 전국 각지의 청년들이 모여든다.
2002년 2월부터 시작된 ‘젊은이들을 위한 기도 모임’은 다달이 주제를 정하여 15명을 선착순으로 신청을 받아 진행하고 있다. ‘관계에 대하여’, ‘용서에 대하여’, ‘주님의 성탄과 나’ 등의 주제 아래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나 자신과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새로이 하는 시간을 갖는다. 하느님 말씀으로 기도하는 렉시오 디비나를 함께하고, 밤늦도록 계속되는 면담과 고해성사에서는 많은 청년들이 자신 안에 가두어 두었던 상처와 짐을 내려놓는 체험을 한다.
기도 모임에서 발전된 ‘수도 생활 체험 학교’에서는 2박 3일간 이곳 수도자들과 똑같이 생활을 한다. 입회식을 통해 서원장을 봉헌하고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옷을 수여받으며, 새벽 5시에 일어나서 기도와 미사를 함께 봉헌하고, 농장과 작업장에서 함께 일한다. 기도하고 일하는 단순한 삶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고, 누리며, 하느님의 사랑법을 배워 나간다. 새벽같이 일찍 일어나서 기도하고 일하는 생경한 경험에 힘들기도 하겠건만 체험 학교가 끝나고 이곳 수도원과 인연을 맺은 청년들의 모임인 ‘베네딕도의 벗들’ 인터넷 카페(회원 수 1,500명)에는 ‘수도 생활 체험 학교’에서 얻은 감동과 체험, 감사의 이야기가 넘쳐난다. 올해 21번째 수도 생활 체험 학교를 개최한 박재찬(안셀모) 신부는 “처음에 딱딱한 이미지의 수도회에 찾아오는 청년들이 있을까 걱정하였는데, 이토록 많은 청년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음에 깜짝 놀랐다.”며, “많은 젊은이들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찾아 나서는 수도생활을 몸소 체험함으로써 우리 삶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인지, 또 많이 가지고 많이 누려야만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오늘날의 가치 앞에 많이 버리고 많이 나누어야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체험으로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다.
또한 이를 통해 수도회의 성소자가 늘어나게 된 것도 덤으로 얻는 선물이다. 올해 1월에 10명의 형제들이 수도회에 입회하는 결실을 얻었다. 처음에는 성소자 감소에 대한 대책으로 청년 대상 프로그램을 시작하였지만, 지금은 교회의 청년들을 위한 사목의 일환으로 톡톡한 역할을 해내고 있다.
신자들의 영적 유익을 위한 교구와 수도회의 협력
교회에서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의 하느님 체험과 영적 성장을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본당의 많은 활동들이 신자들 영혼의 돌봄보다는 신자들을 대상화한 행사 위주로 흘러간다는 데 문제점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신자들의 영적 갈망을 본당 안에서 완벽하게 채워 주는 것 역시 불가능할지 모른다. 이럴 때 교회 영성의 원류를 간직하고 있는 수도회와의 협력이 이루어진다면 신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현재 한국 교회에는 149개의 수도회(남자 수도회 46개, 여자 수도회 103개, 2005.12.31. 기준)
141개의 수도회(남자 수도회/사도생활단 45개, 여자 수도회 96개, 2007년 1월 15일 기준)가 각자 고유의 카리스마에 따라 사도직을 수행해 나가고 있다. 최근 들어 각 수도회에서는 각 수도회의 카리스마를 살려 신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하거나 신자들이 와서 편하게 쉴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놓고 있다.
한국 남녀 수도회 장상연합회 차원에서의 노력도 진행 중에 있다. 신자들이 좀 더 편하게 수도회를 찾을 수 있도록 각 수도회 피정의 집에 관한 정보를 모두 수합하여 올해 초 책으로 발간할 계획이며, 이를 더 발전시켜 신자들이 수도회를 통해 영성적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수도회와 교구의 협력을 체계화하는 ‘기도 학교’에 대한 구상도 조심스레 내놓았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과 인근 지역의 본당들이 연계하여 수도원 방문 체험을 예비신자 교리교육 필수 과정으로 하고 있는 것도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개인과 공동체의 체험을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져 내려왔다. 신앙은 하느님 사랑을 먼저 체험한 이들이 다른 이들에게 이러한 체험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자리를 마련하고 그 자리에 하느님을 초대할 때 자연스레 전해져 갈 것이다. 교구와 수도회 사이의 담장을 낮추고, 신자들의 영적 돌봄을 위해 함께 자리를 마련하는 데 가장 큰 혜택을 얻는 사람은 바로 신자들일 것이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글·이준혜 기자
이형우 아빠스 인터뷰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수도원장·한국 남자 수도회 사도 생활단 장상 협의회 회장)
Q.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에서는 신자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왜관 수도원의 ‘피정의 집’은 1964년 한국 교회 최초로 설립되었습니다. 피정의 집이라는 말이 여기서 처음 나왔습니다. 당시에는 피정의 집이 있다 하더라도 피정을 할 형편이 안 될 때여서 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전례, 신학 강습소 역할을 하였습니다. 주교회의가 여기서 개최되기도 하였지요. 그렇지만 오늘날에는 피정의 집이 많이 늘어 전국에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피정의 집이 77개나 됩니다. 그렇지만 이들 피정의 집은 많은 어려움 겪고 있습니다. 과거에 단체 위주로 70-80명씩 피정의 집을 찾던 데서 인원도 급격히 줄었을 뿐더러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지쳐있는 현대인들은 팍팍한 프로그램 위주의 피정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주5일 근무제가 되면서 요즘에는 가족 단위로 움직이는 일이 잦아졌는데, 가족 단위로 와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쉴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피정이 좋으려면 명강사가 있든가 아니면 영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는 곳이어야 하는데, 수도회는 그런 면에서 유리합니다. 같이 모여 살고 함께 기도하는 전례 공동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수도자들의 기도하는 모습에서, 또 나를 기도하도록 안내해 주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서 많은 것을 느낍니다. 왜관 수도원이 오래되다 보니 시설 면에서 그리 훌륭하지 않은데도 성탄, 부활 때 갖는 전례 피정 때 보면 신자들이 기를 쓰고 찾아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자들이 수도회에 찾아와 쉬면서 기도하고,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영적인 충전을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체험을 통해 기도가 얼마나 기쁜 것인지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 지를 직접 느낍니다. 또한 신앙은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므로 집에 돌아가서도 스스로 기도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가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복잡할 필요도 없고 시간도 많이 안 걸리지도 않습니다. 수도회에서 훈련을 받고 돌아가서 일상생활 안에서 말씀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을 매일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Q. 어떻게 보면 수도원 공동체 생활의 많은 부분을 신자들에게 개방한 것인데, 이 때문에 생기는 불편한 점이나 어려운 점은 없나요?
“너희는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 하신 말씀대로 교회는 그 자체로 선교적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아무리 폐쇄된 관상 수도회에도 똑같이 해당됩니다. 또한 수도회의 전례는 언제든지 개방됩니다. 봉쇄 수도원이라고 해서 외부 사람들과 단절되어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수도원은 하느님의 집이고, 신자들은 하느님의 백성,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자기 집에 오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자녀들이 아버지의 집에 와서 찬미 드리는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
Q. 신자들이 이처럼 영적 충전을 하는 데는 수도회의 ‘환대’의 분위기도 중요할 것 같은데요, 어떠한 정신으로 신자들을 대하나요?
수도원을 찾아오는 손님은 그리스도처럼 대하라(성 베네딕토 수도규칙 제53장)는 것이 베네딕토 성인의 가르침입니다. 그 당시에는 대야에 물 떠서 발 씻어 주고, 땅에 엎드려 절까지 하였습니다. 지금은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지만 마음만은 그리스도를 대하듯이 손님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수도회에서 맛있는 음식을 주고, 잠자리가 좋아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대하는 마음으로 찾아오는 신자들을 대하기 때문에 여기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기도하고 일하고, 서로를 그리스도처럼 대하는 데에서 베네딕토적 평화(Pax Benedictina)를 느끼게 됩니다.
Q. 앞으로 어떠한 구상을 하고 계신지요?
현재 왜관 수도원에서는 영적 갈증을 느끼는 많은 신자들이 편하게 머물고 갈 수 있도록 새로운 구상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수도원의 복잡한 동선을 개선하여 수도자들의 공간과 신자들의 공간을 잘 정리하고, 서로 방해 받지 않고 개인, 가족, 단체 단위의 피정을 할 수 있는 복합 피정 센터와 전시, 문화 시설 등을 갖출 예정입니다.
교회 안의 수도자들은 영성적인 면에서 일하도록 불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를 위해 수도회들이 더욱 노력해야 하고, 더불어 이를 위한 교구의 협력과 지원도 절실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직접 이루시도록 우리 자신을 도구로 내어드리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