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린 소설집 『참담한 빛』 (창비, 2022) 중 「시차」를 읽고
b0. 2023
백수린 작가는 1982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거짓말 연습」이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폴링 인 폴』이 있으며 2015년 문학동네 젊은 작가상을 받았다.
소설집 『참담한 빛』 속의 이방인 의식은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에게 해당한다. 작가는 참담한 빛이라는 매력적인 대비를 통해 빛은 어둠 속에서만 일렁일 수 있다는 것을, 마찬가지로 행복은 어떤 참담함을 배경으로 해서만 온전히 우리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차분하면서도 단단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는 설명을 들었다.
[시차]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녀는 그로부터 국제우편을 받는다.“유성처럼 쏟아지는 별빛은 청록색 창공을 사선으로 그으며 떨어져 내렸다.” (p38)
“그녀는 그를 알게 된 이후 가끔 북극에 대해 상상했다. 균일한 빛깔의 얼음과 뷰파인더에 눈을 댄 채 하늘을 바라보며 그가 느꼈을 고독 같은 것을 말이다.” (p39)
여행자로부터 도착한 엽서로부터 과거를 회상한다.
그녀는 지난여름에 그를 처음 만났다. 대학가 지하철역 근처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 앞에서 어색한 얼굴로 서로를 알아보았다. 어머니가 그를 만나서 밥도 먹고, 관광도 시켜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곤란해했다. 그는 말수가 없는 편이었다. 그녀도 그가 조금 어려웠다.
“일곱 살이나 많은 낯선 외국인 남성, 그것도 세상에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이종사촌과 갑자기 하루를 보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누구라도 아마 자신처럼 막막한 심경을 느꼈을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p42)
온 이모의 아들인 그는 네덜란드에서 왔다. 겉으로는 한국 사람이지만, 한국어를 못하고 한국도 잘 모르는 외국인이다. 그는 남산타워에서 서울의 야경을 보고 싶어 했다.
그녀는 이모를 자주 만나지는 못했기 때문에 이모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이모에게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그 모든 것을 처리해 주는 것은 언제나 어머니였다.” (p45)
그의 하얗고 고운 손에서 이모의 손을 떠올렸다. 이모는 수산업에 종사하는데 그도 수산물 시장을 좋아했다. 눈매와 콧방울이 이모와 닮은 등 이모와 그를 연결해 주는 묘사들이 주기적으로 등장해서 그가 이모의 아들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네덜란드어로 빈센트인 그는 사진 찍기를 좋아해서 북극에 오로라를 찍으러 갔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처음 도착했을 때 그를 놀라게 했던 완벽한 고요에 대해서. 발밑에서 눈이 부서지던 소리와 바닷새의 날갯짓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던 완벽한 침묵의 순간에 대해.” (p47)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인 북극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은 묘사와 문장의 표현들이 아름다워서 반짝이는 것 같았다. 왠지 숨소리도 죽여야 할 것 같은 조심스러운 자세가 되었다.
“그녀에게는 어머니를 대신하여 그에게 전해야 할 말이 있었다. 사실 어머니가 그를 만나달라고 부탁한 것은 그 말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p49)
그가 다음에 또 만날 것을 약속하자 그 말을 꼭 지금 전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생각되어 그녀는 마음이 편해졌다. 이런 표현들에서 전해야 할 말이 좋은 말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궁금증을 품고 독자를 끌고 가는 방식이라고 짐작한다.
며칠 후 다시 만난 “그에게서는 여행자의 냄새가 났다. 이곳에 속하지 않는 사람의 냄새.” 이 표현도 참 마음에 들었다. 여행자의 냄새는 어떤 냄새일지 생각해 보았다.
빈센트는 일하던 학교에 휴직계를 내고 여행 중이지만, 한국도 그냥 스쳐 지나가는 나라일 뿐이라고 말한다.
더 과거로 돌아가서 그녀의 결혼식 이야기가 나온다.
“그녀는 부모가 기뻐하는 것을 삶의 이유로 알았기 때문에 세상 어떤 신부보다도 그 순간 행복했다.”
“대부분의 하객들은 사진 촬영을 하는 그녀의 식구들을 쳐다보며 이렇게 많은 행운이 한 가족에게 몰릴 수 있는지 질투 섞인 의문을 품었다.” (p51)
소설 속에서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른 실제가 있다. 이모의 비밀과 그녀의 비밀이 시차를 두고 숨겨져 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 서사는 이어진다.
63 빌딩에서 시간을 보내던 그들은 헤어질 시간이 되어 거리로 나온다. 인파가 몰려가는 곳은 한강이다. 불꽃축제를 구경하러 가는 길이다. 그는 구경하자며 앞서갔고, 사람들이 많은 곳을 무척 싫어하는 그녀는 잊었던 17년 전을 떠올린다.
초등학교 졸업식 날, 친구들과 찾았던 놀이공원에서“그녀의 동생은 키가 너무 작아 놀이기구를 탈 수 없었다. 딱 한 번만. 하지만 그녀가 놀이기구에서 내려왔을 때, 그는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p59)
그녀가 부모의 말에 순종하며 살기로 작정했던 이유가 나온다. 동생을 잃어버린 아픔 때문에 부모를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았다는 그녀 삶의 고통이 느껴지는 것 같다.
아이를 잃어버리는 꿈만 꿔도 그 지독한 꿈이 몇 날 며칠 따라다니게 마련인데 실재하는 그 고통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냈을까를 생각하니, 어쩌면 그녀는 온 세계를 여행자로 다닐 수 있는 그가 부러울 수도 있겠다. 그도 든든한 부모의 보호 속에 살고 있는 그녀가 부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그녀가 잃어버린 동생이 '빈센트'였다면 모두의 아픔이 희석되지 않았을지 라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부모들은 그녀를 탓하지는 않았다. 한동안 미친 사람처럼 여기저기를 헤맸으나 시간이 흐르자,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일상을 살아냈다. 꿈속에서는 동생이 그녀의 기억처럼 가만히 있지 않고 울면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의 기억이 왜곡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이모는 그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 말을 전해야 하는 그녀는 난감해하며 말을 꺼낸다. 온 세계를 사진을 찍으며 떠도는 빈센트가 뿌리 없이 떠다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한국에 어머니를 보고 싶은 마음으로 세상을 떠도는 것은 아닐까. 이모는 인생의 고통이었을 순간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을까?
불꽃놀이를 보며 빈센트의 생을 애잔한 마음으로 돌아보는 그녀가 그려진다.
“그가 몸피보다 더 큰 배낭을 메고 수억 년만큼 뒤늦게 지구에 당도하는 별빛을 좇아 온 세계를 떠돌아다닐 때, 그리고 그러다가 오로지 경유하기 위해서만 이곳으로 날아왔을 때 그가 살아왔던 서른여덟 해가 천천히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반대로 흘렀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p63)
아름다운 문장들 사이에서 슬픈 서사가 흘렀다. 내용이 슬프면서도 문장들이 좋아서 감탄하는 사이 이야기가 끝이 났다.
이모와 그녀의 비밀로 인해 파생되는 그녀의 부모와 빈센트에게로 확장되는 아픔, 그것들을 극복하기 위한 각자만의 삶의 방식들도 생각해 보는 소설이었다.
첫댓글 언제 이렇게 많은 독서를 했을까?
놀랍기만 하네요.
감상 기회 주어서 고마워요.
수업에서 다루는 단편들입니다~ 감사합니다~♡